아이와 함께 몇 번 <요괴워치>를 봤다.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를 통해서 접한 상태였다. 뭔가 싶어서 봤는데.


'은근히 재밌다'고 말하는 건 솔직하지 않다. '상당히 재밌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작품 전후의 맥락을 모르고 봤는데도 오랜 시간 피식거리며 웃으며 봤다. 아이도 이 유머를 이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본 설정은 '우리 생활 속 일어나는 기이한 일은 모두 요괴의 장난 때문'이라는 것. 보통 사람은 그러한 일이 요괴 때문인지 모르는 채 넘어가지만, 요괴 워치를 가진 소년이 이를 알아챈다. 그리고 자신의 시계 속에 봉인된 또다른 요괴를 소환해 말썽을 부린 요괴와 대결을 시키고, 이기면 그 요괴를 상징하는 코인을 얻는다. 그러면 다음번 필요할 때 그 요괴를 소환할 수 있다. 


한국어의 '요괴'라는 어감 때문에 '요괴 장난'이라고 하면 꽤 심각한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이유 없이 갑자기 방귀가 나오는 건 뽕쟁이라는 요괴의 장난이다. 소년은 이 요괴를 벌하려다가 도리어 방귀를 참을 수 없게 되고 결국 옥상으로 뽕쟁이를 불러내 대결을 한다. 소년은 뽕쟁이에게 고구마를 먹여 대결을 이긴다. 고구마를 먹고 방귀를 끼기 시작한 뽕쟁이가 그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에피소드에는 주인공의 엄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자꾸만 음식을 집어먹는다. 아들에겐 못 먹게 하면서, 자기가 만든 이런저런 반찬들을 자꾸 하나씩 먹어버린다. 이것 역시 음식을 중간에 집어먹게 만드는 요괴의 장난. 주인공 소년은 '공복노인'이라는 요괴를 소환해 집어먹기 요괴와 대결시킨다. 공복노인은 아예 큰 공복을 느끼게 하는 요괴로서, 엄마가 도중에 조금씩 집어먹기를 멈추고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을 먹어버리게 만든다. 이것으로 공복노인의 승리. 엄마와 주인공 소년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을 먹어버리는 바람에, 퇴근한 아빠는 컵라면을 끓여먹는다는 내용. 



오늘 아이가 구입한 지바냥 프라모델. 자동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의 요괴라고 한다.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급인 것 같다.   


갖가지 속성을 가진 온갖 판타지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포켓 몬스터 같기도 하다. 사실 한국 전통에서 요괴 같은 상상 속 존재는 대체로 인간을 해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기에, 이를 이용해 현대의 대중문화 콘텐츠로 꾸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본은 기본적으로는 동물 모양에서 따온 요괴, 몬스터를 친숙하게 다룬다. <요괴 워치> 같은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이런 정서, 문화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특히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다. 갓파, 엘프, 호빗니, 토토로 같은 것들이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단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드는데 유리할 것임에는 분명하니까. 


<요괴 워치>는 근 몇 년 사이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 <모든 것은 빛난다>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 속에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대해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와 같은 태도를 찬양한다. 헬레네가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이유는 '금빛의 아프로디테'에 호응한 것 뿐이기에, 헬레네의 남편조차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수면을 관장하는 신에게 감사와 당부의 기도를 올렸다. 삶의 모든 사건에는 신의 의지가 반영돼 있기에,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매순간을 열심히 살면 된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현대인의 정신이 빠지기 쉬운 허무, 무의미는 낯선 질병이었다.  


<요괴 워치>는 <모든 것은 빛난다>가 극찬한 세계관을 조금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내 행동이 전적으로 내 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 이해하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볍게는 나쁜 습관, 사소한 일탈에서 크게는 범죄에 이르기까지 의지가 박약하거나 악의가 발현된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뻔뻔한 인간이 될까. 아니면 근대 이후의 인간에게 과도하게 부여된 자율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조금 더 겸손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