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해당되는 글 3건

  1. 단 하나의 파격, <스타 워즈: 깨어난 포스> (3)
  2. 성스러운 카타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3. 사랑은 혁명이다, <올 어바웃 러브> (5)





**스포일러 있음


J J 에이브럼스가 바톤을 넘겨받은 스타워즈 신작 <깨어난 포스>를 봤다. 줄거리의 이음새가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며, 어색하지 않은 컴퓨터 그래픽 화면이 연말 극장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상업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만이 있다. 이런 식이라면 에피소드 7, 8, 9가 아니라 70, 80, 90도 만들 수 있다. <깨어난 포스>의 구도는 에피소드 4와 거의 비슷하다.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해 앞선 영화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드로이드가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고,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한 영웅이 있고, 결국 이 영웅이 힘을 깨닫고 수련해 가는 과정을 예기하며, 악당은 대체로 한 점의 반성도 없는 순수 악 그 자체이지만, 그 중 행동대장 격인 인물은 일말의 망설임이 있다. 심지어 아버지 한 솔로가 아들 카일로 렌에게 찔리는 장면은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버지 다스 베이더에게 패배하는 장면의 패러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루크가 다스 베이더에게 당할 때만큼의 비장함은 없다) 



쓸 필요 없는 가면을 쓴 카일로 렌 


아마 원작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 것 같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팬덤, 관련 산업의 규모, 문화적 영향력 측면에서 20세기 영화산업의 최고 히트작이라 할만하다. 원작 팬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하기는 사실상 힘들었을 것 같다. 감독은 이전 시리즈를 안 본 관객도 즐겁게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고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새 관객과 옛 관객이 느끼는 감격의 크기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한 솔로와 추바카가 밀레니엄 팔콘 호에 올랐을 때, 한 솔로와 레아가 만났을 때, 레이가 루크의 라이트 세이버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레이가 은둔한 루크를 찾아 그 라이트 세이버를 건냈을 때의 감격은 전작에 익숙한 관객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다리꼴로 올라가는 자막은 물론이고. 



이 분들 처음 나왔을 떄 우는 사람 있었을듯. 해리슨 포드는 정말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퍼스트 오더의 기계같은 군인으로 훈육됐던 핀이 동료의 피를 본 뒤 각성해 스톰 트루퍼를 탈출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스타워즈에서 피가 명시적으로 나오는 건 아마 처음이고, 핏줄 혹은 운명에 의한 각성이 아닌 상황에 따른 각성을 한 인물도 핀이 처음인 것 같다. 다만 무고한 인간들을 죽이는게 싫어 군대를 벗어난 그가 옛 동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이는 모습은 이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깨어난 포스>는 앞선 시리즈의 광휘를 고스란히 물려받겠다는 선택을 했지만, 몇 가지 변화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 어쩌면 이 변화 하나가 혁명적이다. 처음 보는 영국 여배우인 데이지 리들리가 연기한 레이란 인물은 (아마 앞으로 밝혀질)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년간 수련을 쌓은 카일로 렌이 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갖고 있으며, 탁월한 비행술과 수리 능력도 갖고 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 루크 스카이워커도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레이가 보여준다. 분명한 영국식 액센트를 사용하고, 그래서인지 어딘지 젊은 시절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연상케하는 이 배우는 단선적일지라도 똑부러지게 제 역할을 해냈고, 그래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법통을 이어받는 이가 여자라는 파격을 잊게 만든다. 레이가 우마 서먼처럼 칼질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카일로 렌, 핀, 스노크보다 레이가 겪을 운명이 더 궁금하다. <스타워즈>에 여자 주인공이 나온 마당에, 007을 여자로 만들거나, 배트맨 시리즈가 망하고 캣우먼 시리즈가 득세하지 말란 법도 없다. 하긴 <헝거 게임> 시리즈의 제니퍼 로렌스가 이미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의 가능성을 보이긴 했다. 레이와 핀의 관계가 로맨스가 아니라 우정처럼 보인다는 점도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깨어난 포스>의 여성 주인공은 '신의 한 수'같고, 나는 이 점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별로 재미있게 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신의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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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은 궁금하긴 한데.... 만약 가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나로선 여기서 묘사된 걸 읽는 정도로 충분하겠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게일 루빈 지음, 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 옮김/현실문화/904쪽/4만4000원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게일 루빈 미국 미시간대 교수(66)는 문제적 인물이다. 인류학, 비교문학, 여성학을 가르치는 그는 1970년대부터 논쟁적인 글을 써왔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진영 내에서도 미움받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역자를 대표해 서문을 쓴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조차 1997년쯤 <일탈: 게일 루빈 선집>의 번역을 제안받고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임 교수는 “마음속의 금서”였던 <일탈>을 번역해 펴내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게일 루빈이 40년간 써온 주요 논문을 엮은 선집이자, 유일한 단독 저서다.


루빈이 천착한 주제는 성(性)이었다. 루빈 자신이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자 사도마조히스트다. 9장 <카타콤>은 연구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카타콤은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어들어 예배를 치른 지하 묘지다. 이 글에서 카타콤은 1975~81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교장소를 말한다.


엄격한 절차를 거쳐 카타콤에 모인 이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쾌락을 즐겼다. 각종 장치와 행위에 대한 묘사가 눈 앞에서 보듯 생생하다. 부부의 섹스 이외의 모든 성은 부도덕하게 간주하는 이들이라면 한 쪽도 넘기지 못할 만한 묘사다. “카타콤의 환경은 성인들이 거의 아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경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는 문장만 인용하자.



게일 루빈/현실문화 제공


그러나 카타콤에 대한 루빈의 시선은 들뜨기보다는 애잔하다. “대부분 우리 사회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추구를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것과 유사하게” 여기지만, “카타콤은 신체와 감각적 경험에 대한 신체의 능력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찬양하며 사랑”하는 장소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여러가지 몰이해와 비극을 이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루빈은 현대의 성을 둘러싼 갈등이 지난 세기의 종교 분쟁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를 가장 격렬히 반대하는 집단이 보수 개신교단이라는 사실과 맞물린다. 미국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보수 세력은 ‘부도덕한’ 성 행동을 미국의 국력 쇠퇴와 연괸짓기까지 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번의 ‘일탈’ 때문에 사회에서 매장되곤 했다.


루빈은 “생식기가 본질적으로 신체의 열등한 부위”라거나 “최상의 유일한 성교 방식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성 해방이 남성 특권을 확장시킬 뿐이라고 보는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비판한다. 이들은 포르노그래피, 성산업을 반대하면서 그것이 성차별적 현실을 고착화한다고 주장하지만, 루빈은 반대로 성산업은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루빈이 보기에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결국 성적 보수주의 담론과 공명할 뿐이다.


임옥희 교수는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성이 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총론을 작성하려 했다면, 루빈은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각론의 장을 전개해왔다”고 적었다. 주디스 버틀러와의 인터뷰는 루빈의 생각에 대한 길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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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이영기 옮김/책읽는수요일/304쪽/1만5000원


거리의 연인이 사랑하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 114 안내원이 고객을 사랑하고, 펄펄 나는 저 꾀꼬리도 사랑한다. 온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들은 대체 사랑을 어디서 배운 걸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사방에서 반박이 쏟아질 것 같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보듯이 사랑은 ‘타고나는 것’이며,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사랑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고, 사랑의 ‘멘토’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신과 신자 사이 관계에 관한 것이라 세속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뉴욕시립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는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저서인 <올 어바웃 러브>는 양극화, 물신주의, 인종·성 차별, 폭력 등 모든 사회 문제는 ‘사랑의 부재’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훅스가 말하는 사랑이란 타고나는 것도, 빠져드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통 속에 평생에 걸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스스로 사랑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렇다.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훅스가 “너희들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정신의학자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내린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펙과 훅스의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사랑은 “실제로 행할 때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은 사랑하려는 의도와 행동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정의에 따라 우리가 사랑으로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랑에서 배제된다. 부모가 내는 딸랑이 소리에 웃으며 기뻐하는 아기는 사랑하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affection)이다. 애정은 사랑의 한 요소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애정 외에도 상대에 대한 관심, 보살핌, 존경, 신뢰,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것처럼, 연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여성 혹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죽자사자 매달리는 남성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카섹시스(cathexis)다. 카섹시스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투사하는 현상을 뜻한다.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때리는 선생과 부모는 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혹스는 특히 아이에 대한 올바른 사랑을 강조한다. 성인은 자신을 올바르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조직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사랑중'


사랑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폭력과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이 승리하기 어렵다. 사랑은 무엇보다 정직과 진실에서 싹튼다. 타인의 얼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까지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권력의 반댓말이다. 상대방을 이기거나 권력을 얻기 위한 거짓말, 사소하게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얀 거짓말’조차 사랑에는 극약이다. 훅스의 ‘사랑론’은 그의 오랜 연구주제인 가부장제 비판에 맥이 닿아 있다. 가부장제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에게 강인한 그러나 허황된 ‘남성성’을 갖도록 부추긴다. 남성성이 없다면 남성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라고 겁박한다. 가부장제에 물든 남성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직한 것은 곧 나약한 것”이라는 말을 되새긴 채, 가지지 않은 남성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야 한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서 고요하게 가라앉은 당신 마음의 호수를 보라. 당신은 정말 가부장제가 원하는 그런 남성인가. 


초창기의 페미니스트들은 “마초는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인지, 어떤 남성들은 다른 방식의 남성상을 구현했다. 이들이 택한 길은 “아예 남자가 되지 않는 것, 즉 소년으로 그대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왜곡된 길이었다. 소년은 남자가 되지 않음으로서 어머니와의 끈을 잘라낼 필요가 없었고, 어머니같이 자신을 돌봐줄 여자를 찾아다녔다. 한때 ‘젊고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였던 훅스 역시 “가장이 될 생각이 없는 남자”와 연애했다. 그리고 그의 소년티를 벗기고 어른으로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남자는 훅스의 동등한 파트너가 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대신, 마초로 변태해 버렸다. 그리고 훅스가 자신을 “달콤한 말로 속여 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들기라도 한 양” 비난했다.  


사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작가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개념은 ‘인간 사고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의지, 선택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화된다는 신화가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굉장히 끌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판단이며, 또한 하나의 약속이다”라고 말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언제든 왔다가 언제든 사라진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이 완전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행 과정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연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연인에 쏟아부었던 큰 에너지가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직시하고 대비하면 둘의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지만, 열정과 낭만을 잃어버린 연인이 마주치는 것은 대개 거대한 환멸이다. 


훅스가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수행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바깥에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유창한 언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의 꼭둑각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에 대한 말과 행동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훅스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랑은 멀고 욕망은 가깝다. 신용카드 한 장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오직 좀처럼 바뀌지 않을 법한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겹게 노력할 뿐이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책이 영향받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프롬이 속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훅스는 사랑 개념을 통한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다. 훅스가 특히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소비 문명, 물신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적었다. 훅스는 시민의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었고,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크지 않던 1950년대 미국과 그 이후를 비교한다. 옛날의 미국은 인간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베트남 전쟁 시기까지 미국을 뒤덮은 민권 운동,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이 그들의 국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렸다. 그러나 종전 이후 기대는 무너졌다. 급진적인 사회운동이 사그러들고 미국이 보수화되면서 돈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는 가치관이 전파됐다. 광고는 공공연히 거짓말을 했고, 텔레비전과 영화는 기형적인 사랑에 낭만이라는 당의정을 뿌렸다. 사람대신 사물을 중시하는 사회, 탐욕을 권하는 사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멍청하거나 약한 짓이었다. 그래서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며, 돈이 아니라 영혼을 말하는 훅스의 ‘사랑’은 곧 ‘혁명’이다. 


단, 훅스의 사랑에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은 쉽게 섭취하기 힘든 ‘무언가’가 들어 있다. 스스로 종교인임을 숨기지 않는 훅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성’을 강조한다. “신성한 정신과 교감하며 살아가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서 사랑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 빛은 잃었던 생명력을 소생시켜 준다”와 같은 문장,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내부에 ‘신성한 정신’이 있다는 증거다” 같은 문장에서다. 물론 훅스는 ‘신성한 정신’이 “일상 너머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제도권 종교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절, 교회, 이슬람 사원은 물론 대자연에서의 휴식, 봉사활동, 독서, 내밀한 장소에서의 고독을 통해서도 ‘신성한 정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랑에 대한 원초적 갈망, 사랑이 가진 치유력, 그리고 ‘순수한 정신’은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다. 물질에 완전히 포획됐거나, 헌금을 내면 자판기처럼 ‘영성’을 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훅스가 권하는 사랑은 어렵고, 그것이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깨친 사람의 끝없는 노력으로 사랑이 번져간다면, 그래서 언젠가 사랑이 임계점을 넘어 두려움을 압도한다면, 마치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사랑의 혁명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벨 훅스(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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