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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소아응급센터에서의 하룻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일이 몇 번은 생긴다는데, 우리는 다행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이 그날이었다. 아이가 샤워를 하던 도중 갑자기 답답하다면서 코를 감싸쥐더라는 아내의 전화가 왔다. 나는 마침 야근을 하고 있었다. 당장 크게 아픈 것은 아닌 듯해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보자는 의견과 당장 가보자는 의견이 우리 부부와 처가 사이에 갈렸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아내와 아이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 역시 야근을 끝낸 뒤 택시를 타고 아산병원 소아응급센터로 갔다. 그 시간에도 1호터널은 꽤 막혔다. 싱숭생숭했다. 먼저 도착한 아내와 아이는 진료와 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응급실과 이비인후과 진료병동을 오갔다. 평소 잠드는 시간을 한참 넘긴 아이는 피로와 진료에.. 더보기
유아기의 끝 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쓰던 물건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있다. 따져보면 모빌, 기저귀, 젖병 등은 진작 처분됐지만, 사용한 기간이 적거나 크기가 작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처분한 물건들은 아이가 꽤 오랜 기간 사용한데다가 크기가 커서 물건이 사라진 공간이나 느낌이 각별하다. 먼저 부스터. (아마 아기를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모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부스터는 일종의 보조 의자다. 몸집이 작은 아이가 성인 의자에도 앉을 수 있도록 돕는 기구다.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아이를 앉힐 수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아이가 홀로 앉을만큼 허리 힘이 받쳐주지 않았을 때, 부스터를 들고가 거기에 앉혀두곤 했다. 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 같은 곳에 갈 때 .. 더보기
세헤라자데, 아빠. 어쩌다 아이를 재울 때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아이는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지웅이와 윤우 이야기, 지웅이 이야기. (윤우는 옆 동에 사는 사촌동생인데 언젠가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이야기의 조연으로 끼어들었다. 대부분 극 초반부에 등장한 뒤에 빠진다) 전자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하되, 판타지 요소를 살짝 섞는다. 마치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 플랫폼으로 가면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처럼. 이 판타지 세계는 시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겹쳐있고, 공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독립돼 있다. 예를 들어 오늘밤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웅이와 윤우가 살고 있었어요. 윤우는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고, 지웅이는 밤마실을 나가고 싶었어요. 엄마가 집을 청소하는 사이, 지.. 더보기
레고 듀플로와 레고. 아이는 자란다. 오늘 아이가 아침을 먹고 난 식탁을 보고 조금 놀랐다. 닦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식탁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침 등원을 내가 책임지기 시작한 것은 약 1년전 쯤이었다. 난 꽤나 긴장했다. 나 하나 씻고 옷입고 먹고 뛰쳐나가기 바쁜 것이 보통 직장인의 아침 아닌가. 거기에 아이까지 챙겨서 어린이집(지금은 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니. 밥 먹는 것은 그중에서도 큰 일이었다. 아이는 비교적 밥을 잘 먹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먹는 속도가 느리고 때론 투정도 한다. 처음엔 거의 떠먹여주었고, 아이가 혼자 먹는데 익숙해진 뒤에도 식탁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식탁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옷까지 엉망이 됐다. 가재 수건을 목에 하나 걸고 가슴팍에 하나 받치는 것이 필수였다. 음식은 식탁엔 물론, 부엌 바닥.. 더보기
아빠, 물리학의 법칙을 어겨주세요. '미운 네 살'이란 말이 있었나? 미운 다섯 살이었나? 아무튼 요즘 아이는 '미운' 행동을 종종 한다. 그 대부분은 바로 터무니 없는 떼다. 엄마, 아빠가 인도하는대로 고스란히 따르며 행복해하던 아이는 영원히 사라졌다. 아이의 '미운' 행동이란, 대체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데서 나오는 것일게다. 그러나 아이의 생각, 판단, 행동은 아직 깊거나 넓지 않으니, 그 바깥을 볼 수 있는 어른들과 부딪히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떼를 쓰는 건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 육아 교과서에 나올 법한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유아교육 전문가나 의사 정도나 돼야 할 수 있는 것.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본 부모로서는 순식간에 억장이 무너지고 자아가 붕괴되고 세상이 끝나는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 거다. 텔.. 더보기
무서운 아저씨 온다! 아이는 가끔 떼를 쓴다. 이유가 없어 보이고 들어주기도 힘든 떼다. 그럴 때 부모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 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요즘 우리 아이도 이 말을 가끔 듣기 시작하는데, 난 솔직히 이 방식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칠전 날씨가 좋아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한성백제문화제에 갔다. 백제 군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음식 장터가 열리고,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쇼가 벌어졌다. 딱 지자체가 주최하는 지역 주민용 행사였으나, 아이는 그것마저도 신난 모양이었다. 하긴 집에 가봐야 매일 보는 장난감과 책 뿐이었으니까. "집에 가자"고 하자 아이는 "집에 안가"하고 찡그렸다. 주차장에 갈 때까지 내 그 소리였다. 참다 못한 아내가 차 안에서 그 말을 꺼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아이는 금.. 더보기
아이의 첫 쉬 아내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아이의 오줌 사진이었다. 아이의 배변 연습을 위해 몇 달 전 마련한 펭귄 소변기가 드디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시기 전후에 들여놓는 몇 가지 육아서적이 있다. 서양 저자의 책과 한국 저자의 책이 고루 있다 '대처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배변 연습 시기에 관해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서양 책에는 1살이 되기 전 배변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아예 늦어버린다는 경고도 있다. 반면 한국 책은 3살 이전을 추천한다. 너무 일찍 배변 연습을 시키면 아이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을 염려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결국 한국 저자의 말을 따랐다.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를 고려했다기보다는, 이제 갓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대소변 가리기를 가르칠.. 더보기
살림하는 아빠, 일하는 엄마. <아빠의 이동> 아빠의 이동제러미 스미스 지음·이광일 옮김/들녘/332쪽/1만3000원 전통적인 남성 영웅의 특징은 무엇일까. 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춰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영웅이라 부르기 어렵다. 조건없는 자기희생이야말로 모든 남성 영웅이 갖춰야할 미덕이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하프 조율사 켄트 호프먼을 만나보자. 그는 이른바 ‘주부 아빠’(stay-at-home dad)다. 이는 아내가 직장에 나간 사이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육아를 담담하는 남성을 말한다. 호프먼이 처음부터 살림을 자청한 것은 아니었다. 호프먼은 잘나가는 금융자산관리사인 동갑내기 여성 미순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이가 좋았지만 “더 나아가려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프먼은 양육에 자신이 없었고, 미순 역.. 더보기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아기보기 아침 시간에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전날밤부터 부담이 되고 아침이면 긴장을 해 초조해지기도 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7시가 조금 지나면 아이가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 옆에 서서 아빠를 깨우거나 내가 먼저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간다. 내가 나가도 아이는 금세 알고 일어나니 굳이 조용히 나갈 필요가 없긴 하다. 아이는 사랑하는 인형 친구 '크크'를 데리고 거실로 나와 가장 먼저 관심을 끄는 책이나 장난감을 집어든다. 책을 읽어달라고 하거나 장난감 이름을 발음하며 자신의 어휘력을 뽐낸다. 아이와 잠시 놀아준 나는 아침을 챙기러 간다. 이때가 조금 고비다. 아이가 혼자 놀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같이 놀아달라고 올 때가 있다. 커피를 내리거나 수프를 끓일 때 아이가 다.. 더보기
말 하는 아이 아이가 말을 시작했다. 얼마전까진 내가 말을 하면 아이는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림 혹은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식이었다. 동물이 있는 그림책을 보면서 "사자 어딨지?" 하고 물으면 아이는 사자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런데 약 열흘 전부터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사자"라고 발음한다. 연령을 고려하면 빠른 편은 아니다. 여자 아이, 그리고 형제 자매가 있는 아이가 말을 빨리 배운다고 한다. 게다가 정확한 발음도 아니다. 아이가 지시하는 대상이 '사자'라는 것을 알고 들어야만 식별할 수 있는 발음이다. 그러나 열흘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대단한 속도다. 그 많은 단어들을 다 알면서도 발음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내놓는가 싶을 정도다. 사자, 기린, 코끼리, 거북이, 토끼 등 그림책에서 자주 보던 동물.. 더보기
아기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동요들 아기를 재우기 위해 어두운 방에서 이런저런 동요를 조용히 부르다 보면, 그 중에서도 가사와 멜로디가 특히 아름다운 곡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또 노래라는 것은 몸에 참으로 깊숙히 각인된다는 점을 느낀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불러본 적이 없는데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바로 입에서 나오는 그 노래들. 태교 시절, 아내의 배에다 대고 불러준 노래는 '반달'이었다. 제목 보다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되는 가사로 더 널리 알려진 곡이다. 1924년에 발표된, 한국 창작 동요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라고 방금 포털 검색 결과가 알려주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사가 좀 생경하다. '쪽배'가 뭔지, '계수나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으며, 돛대니 삿대니 하는 단어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