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에 해당되는 글 11건

  1. 소아응급센터에서의 하룻밤
  2. 유아기의 끝 (2)
  3. 세헤라자데, 아빠. (3)
  4. 레고 듀플로와 레고. 아이는 자란다. (4)
  5. 아빠, 물리학의 법칙을 어겨주세요. (7)
  6. 무서운 아저씨 온다!
  7. 아이의 첫 쉬 (2)
  8. 살림하는 아빠, 일하는 엄마. <아빠의 이동>
  9.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아기보기
  10. 말 하는 아이
  11. 아기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동요들 (6)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일이 몇 번은 생긴다는데, 우리는 다행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이 그날이었다. 아이가 샤워를 하던 도중 갑자기 답답하다면서 코를 감싸쥐더라는 아내의 전화가 왔다. 나는 마침 야근을 하고 있었다. 당장 크게 아픈 것은 아닌 듯해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보자는 의견과 당장 가보자는 의견이 우리 부부와 처가 사이에 갈렸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아내와 아이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 역시 야근을 끝낸 뒤 택시를 타고 아산병원 소아응급센터로 갔다. 그 시간에도 1호터널은 꽤 막혔다. 싱숭생숭했다. 


먼저 도착한 아내와 아이는 진료와 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응급실과 이비인후과 진료병동을 오갔다. 평소 잠드는 시간을 한참 넘긴 아이는 피로와 진료에 대한 공포로 힘들어했다. 작은 코 속으로 가느다란 내시경을 넣어 살펴볼 때 아이는 온몸에 힘을 주고 반항했다. 결국 엑스레이까지 찍었다. 다행히도 의사들은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소견을 냈다.


늦은 봄밤, 병원앞은 서늘하고 한산했다. 집에 들어와 간단히 씻고 나니 어느덧 1시. 잠들기 전엔 예쁜 그림을 그리려던 꿈에 부풀었던 핑크색 색연필이 난데없이 콧구멍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핑크색 똥이 되어 나온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아이야. 앞으로 부러진 색연필 조각 같은 건 콧구멍 속으로 넣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 와중에 사진 찍은 걸 보면 제 정신을 갖고 있었던 듯. 


다음날의 몇 가지 이야기. 

1. 진료 받는 아이가 심하게 몸부림을 쳐서 달래느라 이런저런 말들을 쏟았다. 오늘 아침 아이는 그 말들을 고스란히 되갚았다. 그래서 메가테릭스는 언제 사줄 거예요? 잘해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울고 불고 하는 와중에 그걸 다 듣고 기억할줄은 몰랐다.


2. 아이는 유치원에서 간밤의 무용담을 자랑할 기대에 부풀었다. 길고 무섭게 생긴 기계를 콧구멍에 넣은 이야기, 엑스레이로 찍은 자기 해골을 본 얘기...


3. 평소 내성적이고 지나친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오히려 조금 걱정을 안겼던 아이가 바깥에서 이런 일을 하고 다닐줄은 몰랐다.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줄 알 수 없다'는 건 모든 부모의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아이는 독립적 개체로 자라고 부모는 더 좋은 부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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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쓰던 물건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있다. 따져보면 모빌, 기저귀, 젖병 등은 진작 처분됐지만, 사용한 기간이 적거나 크기가 작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처분한 물건들은 아이가 꽤 오랜 기간 사용한데다가 크기가 커서 물건이 사라진 공간이나 느낌이 각별하다. 


먼저 부스터. (아마 아기를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모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부스터는 일종의 보조 의자다. 몸집이 작은 아이가 성인 의자에도 앉을 수 있도록 돕는 기구다.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아이를 앉힐 수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아이가 홀로 앉을만큼 허리 힘이 받쳐주지 않았을 때, 부스터를 들고가 거기에 앉혀두곤 했다. 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 같은 곳에 갈 때 그랬다.  


다행히도 아이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다. 이 부스터에 앉아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을까. 쌀밥, 죽, 시리얼, 키위, 사과, 저지방 우유,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 볶은 멸치, 두부, 김부각, 복숭아 요거트... 많이 먹고 많이 흘려댔다.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음식을 엎고, 옷을 더럽혔다. 한 번 밥을 먹고 나면 식탁 주변에 밥풀이나 반찬 부스러기가 꽤나 떨어져 있어서, 식탁을 훔치는 것은 물론 바닥까지 청소해야 했다. 


그렇던 아이가 이제 부스터 없이도 의자에 앉을 수 있다. 외식을 할 때도 어린이 의자가 마련돼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의자에 부스터를 고정시키는 끈을 풀고 나니 마치 오래 한자리에 있었던 쇼파를 들기라도 한 듯, 그 밑에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가득했다. 아마 요란했던, 하지만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이 유아기에 거쳤던 그런 식사의 흔적들이겠다. 


이제 아이는 음식을 많이 흘리지 않는다. 손가락을 끼우는 고리가 있긴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한다. 어른처럼 국그릇을 들고 후루룩 들이키는 모습을 보인지도 꽤 오래 됐다. 식탁이 아이의 앉은키에 조금 높아보이긴 하지만, 부스터에 앉으면 오히려 더 불편할 것이다. 


부스터 없이 함께 식사를 시작한 이후, 우리는 진짜 '겸상'을 하고 있다. 아이는 누군가 밥을 떠먹여 주거나 자리를 따로 마련해줘야 할 정도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란히 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다. 같은 음식을 두고 숟가락을 드는 우리의 눈높이는 같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또 하나 처분한 물건은 미끄럼틀이다. 이건 정말 컸다. 거실의 절반을 가로지를 정도였으니까. 그 크기를 미처 생각 못하고 주문한 뒤 설치했을 때는 그리 잘 꾸며지지도 않았던 거실의 정경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많은 어색한 것들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니 미끄럼틀은 마치 원래 거기에 붙박이로 있었던 것처럼 우리 집의 일부가 됐다.  


야심차게 들여놨지만 사실 아이는 미끄럼틀을 잘 타지 않았다. 차라리 미끄럼틀을 이용한 장난을 더 많이 쳤다고 할 수 있겠다. 미끄럼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거나(그래서 미끄럼을 타면 바지에 크레파스를 묻히거나), 미끄럼틀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미끄럼틀 아래의 공간을 은신처로 삼아 장난을 치거나, 미끄럼틀 위에 올라서 아빠가 절벽을 타고 올라오게 하는 인형을 막아내는 놀이를 하거나, 급기야 최근에는 미끄럼틀 위에서 선 채로 후다닥 뛰어 내려오는 놀이를 선보여 엄마를 놀라게 하거나.


미끄럼틀을 처분하기 전 아이에게 혹시나 하고 물었다. 어떤 동생에게 주려고 하는네 섭섭하지 않겠느냐고.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요"라고 했다. 아내는 육아 관련 카페에 '드림'글을 올렸고, 글을 올리자마자 1시간만에 동네 주민이 나타나 미끄럼틀을 가져갔다. 


"괜찮아요"라고 한 아이의 진짜 마음을 나는 모르겠다. 정말 괜찮은 것인지, 이제 미끄럼틀 같은 것에 집착해 떼를 쓰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거실 한 켠이 텅 비어, 마치 이사를 하다만 것 같은 내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다. 저 텅 빈 한 구석에 무언가 가구를 사서 들여놔야 할 것 같은 느낌. 아무튼 아이는 미끄럼틀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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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아이를 재울 때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아이는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지웅이와 윤우 이야기, 지웅이 이야기. (윤우는 옆 동에 사는 사촌동생인데 언젠가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이야기의 조연으로 끼어들었다. 대부분 극 초반부에 등장한 뒤에 빠진다)


전자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하되, 판타지 요소를 살짝 섞는다. 마치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 플랫폼으로 가면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처럼. 이 판타지 세계는 시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겹쳐있고, 공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독립돼 있다. 예를 들어 오늘밤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웅이와 윤우가 살고 있었어요. 윤우는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고, 지웅이는 밤마실을 나가고 싶었어요. 엄마가 집을 청소하는 사이, 지웅이는 아빠와 차를 타고 마트에 갔어요. 지웅이는 마트에서 물고기도 보고, 시식 빵도 먹고, 시식 사과도 먹고, 시식 두부도 먹고, 라바 스티커도 사고, 오레오 과자도 샀어요. 그래도 지웅이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지웅이는 아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졸랐어요. 아빠는 지웅이를 아이스크림 가게에 데려갔어요. 그런데 지웅이는 큰 고민에 빠졌어요. 바닐라맛도 먹고 싶고 초콜렛맛도 먹고 싶은데, 아빠는 하나만 골라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통 사이에서 자그마한 요정이 나타났어요. 요정은 지웅이의 고민을 듣고는 말했어요. "그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렛이 박혀있는 쿠키 앤 크림을 먹으면 돼!" 지웅이는 아빠에게 쿠키 앤 크림을 사달라고 했어요. 아빠가 계산하러 간 사이 지웅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꿈에 부풀었어요. 그때 요정이 다급하게 외첬어요. "지웅아, 그러나 한 가지만 명심해. 이걸 지켜야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어. 아이스크림은 한 번에 하나만 먹어야해. 더 먹겠다고 조르면 배가 아파서 다시는 나를 만날 수 없을지 몰라." 지웅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요정과 약속했어요. 아빠가 통밀콘 위에 받아들고 온 아이스크림은 참 맛있었습니다. 



이미지는 물론 본문과 관계없음. 



후자는 주로 우화, 교훈적 설화의 구조를 차용한다. 그런데 난 이쪽이 좀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는 이랬다. 


지웅이는 아주 빨리 달리는 아이였어요. 지웅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고 생각했어요. 어느날 지웅이는 터보라는 이름의 달팽이를 만났어요. 지웅이는 터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어요. 지웅이는 터보에게 달리기 경기를 하자고 말했어요. 터보는 자기는 느려서 지웅이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지웅이가 원한다면 경기를 하겠다고 말했어요. 출발 신호가 울리자 지웅이는 재빠르게 달려갔어요. 터보는 한참을 뒤쳐졌어요. 지웅이는 갑자기 경기가 따분해져서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어요. 아무리 오래 자도 터보가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지웅이가 그렇게 늘어지게 자는 사이, 터보는 힘을 내서 지웅이를 앞질렀어요. 잠에서 깬 지웅이는 터보가 자기보다 한참 앞서 달려가 결승선을 코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지웅이는 부리나케 달려갔어요. 지웅이, 터보, 지웅이, 터보...누가 이겼을까요. 지웅이가 가까스로 이겼습니다. 그러나 지웅이는 앞으로 자기보다 느린 이를 비웃지 않고, 스스로 잘 달린다고 자만하지도 않기로 했어요. 


앞으론 웬만하면 판타지만 해주려고 한다. 즉석에서 (비록 표절, 오마주, 패스티쉬로 범벅돼 있기는 하지만) 두 가지나 지어내기도 힘들다. 오늘밤에도 "내일부터는 '지웅이와 윤우 이야기'만 하자"고 약속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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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이가 아침을 먹고 난 식탁을 보고 조금 놀랐다. 닦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식탁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침 등원을 내가 책임지기 시작한 것은 약 1년전 쯤이었다. 난 꽤나 긴장했다. 나 하나 씻고 옷입고 먹고 뛰쳐나가기 바쁜 것이 보통 직장인의 아침 아닌가. 거기에 아이까지 챙겨서 어린이집(지금은 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니. 밥 먹는 것은 그중에서도 큰 일이었다. 아이는 비교적 밥을 잘 먹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먹는 속도가 느리고 때론 투정도 한다. 처음엔 거의 떠먹여주었고, 아이가 혼자 먹는데 익숙해진 뒤에도 식탁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식탁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옷까지 엉망이 됐다. 가재 수건을 목에 하나 걸고 가슴팍에 하나 받치는 것이 필수였다. 음식은 식탁엔 물론, 부엌 바닥에까지 튀어있기 일쑤였다. 아이가 딩동댕 유치원을 보며 얼어붙어 있는 사이, 난 씻고 옷을 입고 그릇을 치우고 행주로 식탁을 훔쳤다. 


그러던 아이가 오늘, 음식을 거의 흘리지 않고 먹었다. 1년 동안  아이는 아주 조금씩 그 작은 손가락의 근육을 움직이는 법,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벌리는 법, 음식이 숟가락을 넘치지 않도록 적당량 뜨는 법, 그릇을 함부로 만지지 않는 법을 익혀나간 것이다. 


얼마전엔 그런 일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유아가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큼직하게 나온 레고 듀플로를 사줬는데, 지난 토요일에 처음으로 보통 레고를 사줬다. 조금 걱정이 됐다. 아이는 아직 이 작은 레고를 가지고 놀만큼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고 듀플로(왼쪽)와 레고. 급찍음.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다. 아이는 큼직한 조각들은 곧잘 맞췄지만, 작은 조각을 끼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긴 그런 조각들은 나도 맞추기 힘드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제뜻대로 블록을 맞추지 못할 때마다 징징거리며 운다는 사실이었다. 레고를 붙잡고 화를 내며 징징대는 아이에게 어떻게 맞추고 싶은지 물어보고 대신 맞춰준다. 아이는 혼자 가지고 놀다 다시 징징댄다. 그러면 다시 맞춰준다. 조금 놀다가 또 징징댄다. 이하 반복. 


아이가 징징댈 때마다 말했다. 울지 말고 아빠를 부르라고. 그러면 아빠가 도와줄 거라고. 그래도 아이는 징징댔다. 난 그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는 3초 정도 징징대다 멈칫하더니 아빠를 불렀다. "아빠, 도와주세요!" 


아이는 자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자란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나날의 육아는 정말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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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네 살'이란 말이 있었나? 미운 다섯 살이었나? 아무튼 요즘 아이는 '미운' 행동을 종종 한다. 그 대부분은 바로 터무니 없는 떼다. 엄마, 아빠가 인도하는대로 고스란히 따르며 행복해하던 아이는 영원히 사라졌다. 


아이의 '미운' 행동이란, 대체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데서 나오는 것일게다. 그러나 아이의 생각, 판단, 행동은 아직 깊거나 넓지 않으니, 그 바깥을 볼 수 있는 어른들과 부딪히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떼를 쓰는 건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 육아 교과서에 나올 법한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유아교육 전문가나 의사 정도나 돼야 할 수 있는 것.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본 부모로서는 순식간에 억장이 무너지고 자아가 붕괴되고 세상이 끝나는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 거다. 


텔레비전을 더 보겠다거나, 과자를 더 달라거나, 잠을 안자겠다거나 하는 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들어줄 수도 있는 떼니까. 문제는 아이가 물리학의 엄격한 법칙을 거슬러달라고 요구할 때다. 뉴턴이든 아인슈타인이든 호킹이든, 지구인이라면 다들 지켜야 하는 법칙을 깨라고 요구할 때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 아이가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딩동댕 유치원>이 이미 끝났다. 그런데 아이는 <딩동댕 유치원>을 보고 싶다고 한다. 난 이미 끝났다고 대답한다. 아이는 그래도 보여달라고 한다. 난 네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끝났다고 한다. 아이는 그래도 보여달라고 한다. 나의 출근 시간은 다가온다. 난 얼른 밥을 먹고 씻자고 한다. 아이는 여전히 보여달라고 한다. 그리고 운다. 운다. 운다. 


또 이런 경우. 식당에 가서 만두와 칼국수를 시켰다. 먼저 나온 만두를 조그맣게 잘라 아이에게 먹어보라고 줬다. 아이는 안먹는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먹어보라고 했는데 여전히 싫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아내가 만두를 다 먹었다. 곧이어 칼국수가 나왔다. 아이는 칼국수를 조금 먹더니 만두를 달라고 한다. 네가 안먹겠다고 해서 엄마, 아빠가 다 먹었다고 했다. 아이는 만두, 만두, 만두 하면서 울어댄다.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만두, 만두, 만두하고 울어댄다. 


아이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한다. 지구에 살던 이 중에는 오직 슈퍼맨만이 시간을 되돌렸다. 그는 죽은 연인 로이스 레인을 되살리기 위해 지구를 자전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날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건지는 안해봐서 모르겠다) 슈퍼맨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순간, 아버지인 말론 브란도의 목소리가 목욕탕 안에서처럼 울린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금지된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슈퍼맨에겐 아버지의 말씀보다 애인이 더 중요하다.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 크리스토퍼 리브(1952~2004). '슈퍼맨' 리브는 <남아 있는 나날>에서 이상적이지만 무능한 미국인을 연기했다. 


아이는 슈퍼맨이 아니지만, 세상에 적용하는 자신만의 미학적 기준이 공고하다. 그 기준은 자석 블록이나 레고를 만들 때 형상화된다. 아이는 블록들을 이리 저리 더덕 더덕 붙이면서 무언가 기괴한 형상을 만든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집이라든가, 비행기라든가, 자동차라고 답한다. 내가 보기엔 전혀 집, 비행기, 자동차 같지 않지만, 아이가 그렇게 답하기 때문에 "우와 멋지다!"라고 칭찬해준다. 아마 천상 혹은 마음 깊은 곳의 이데아가 그렇게 표출되는 것 같다. 재밌는 건 그렇게 이상하게 생긴 구조물에도 어떤 완성의 지점이 있다는 거다.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다보니 조금 들어 이동하면 부서질 때가 있는데, 아이는 당연히 울고불고 난리다. 내가 얼른 비슷하게 맞춰져도 소용이 없다. 작은 블록 하나만 어긋나도, 아이는 그것이 3분 전에 만들었던 그 걸작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데 "이것도 아니야!"라고 성질을 내면서 도자기를 깨뜨리는 도공의 심정일까. 


아무튼 아이를 키우다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가 곤히 자는 한밤중에 블로그에 이런 헛소리를 쓸 소재도 얻는다.  



인터넷에서 불 펌. 아이가 이 모양으로 울면 부모는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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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가끔 떼를 쓴다. 이유가 없어 보이고 들어주기도 힘든 떼다. 그럴 때 부모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 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요즘 우리 아이도 이 말을 가끔 듣기 시작하는데, 난 솔직히 이 방식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칠전 날씨가 좋아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한성백제문화제에 갔다. 백제 군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음식 장터가 열리고,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쇼가 벌어졌다. 딱 지자체가 주최하는 지역 주민용 행사였으나, 아이는 그것마저도 신난 모양이었다. 하긴 집에 가봐야 매일 보는 장난감과 책 뿐이었으니까. "집에 가자"고 하자 아이는 "집에 안가"하고 찡그렸다. 주차장에 갈 때까지 내 그 소리였다. 


참다 못한 아내가 차 안에서 그 말을 꺼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아이는 금세 얼굴색을 바꾸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아이가 말을 잘 들어서 다른데로 갔다고 말했다. 몇 분 후 아이는 다시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같은 답을 반복했다. 아이는 5분전 자신이 집에 가기 싫어 징징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속마음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리 놀라거나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서운 아저씨'란 사람들이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해하는 표정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상상 속의 '무서운 아저씨' 덕분에 귀가길은 편했다. 


아이는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아무데서나 떼를 써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잠을 자기 싫다고 억지를 쓰면 안되고, 아파트에서 뛰어선 안되고, 아이스크림을 2개씩 먹자고 졸라도 안된다는 걸 알아간다. 솟구치는 욕구에 마냥 응답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렇게 해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초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든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초자아는 필요하다. 몇 해 전 어느 예능 토크쇼에서 유명한 가수를 본 적이 있다. 불혹이 넘은 나이였는데 초자아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거나 너무나 약한 사람 같아 보여서 깜짝 놀랐다. 1시간이 채 안되는 토크쇼에서의 말로 한 사람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측근도, 가족도, 심지어 팬도 아니기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바 아니다. 그가 아이처럼 군다고 내가 피해를 입을 일도 없다. 게다가 예술가는 저 깊숙한 곳에 도사린 이드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때가 있는 족속들이다. 피카소나 파스빈더나 피츠제럴드가 엄격한 생활 태도, 위엄있는 인격으로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초자아가 있건 없건, 좋은 작품만 만들어달라. 그것이 멀찌감치서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나의 바람이다. 그 가수의 문제는 그의 음악이 더이상 들을만하지 않다는데 있을 뿐이다. 


'무서운 아저씨'를 자주 호출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아무튼 아이가 적당한 힘을 가진 초자아를 형성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만큼은 성숙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게 있다. 너무 주눅들지 말기.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그리고 때론 초자아를 속이거나 어르거나 협상하는, 그렇게 꾀많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이 사람들은 위의 글과 조금 관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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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아이의 오줌 사진이었다. 아이의 배변 연습을 위해 몇 달 전 마련한 펭귄 소변기가 드디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시기 전후에 들여놓는 몇 가지 육아서적이 있다. 서양 저자의 책과 한국 저자의 책이 고루 있다 '대처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배변 연습 시기에 관해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서양 책에는 1살이 되기 전 배변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아예 늦어버린다는 경고도 있다. 반면 한국 책은 3살 이전을 추천한다. 너무 일찍 배변 연습을 시키면 아이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을 염려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결국 한국 저자의 말을 따랐다.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를 고려했다기보다는, 이제 갓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대소변 가리기를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아이는 너무 어리고 약해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옆에서 지켜보고 돌봐줘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자랐다. 12월이면 만 3세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다. 가장 큰 사이즈의 기저귀를 찬 지도 오래 됐다. 게다가 배변 연습은 바지를 안입고 지내도 괜찮은 여름에 하기 좋다. 게다가 아내가 방학을 해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늘었다. 그러니 요즘이 기회다. 


우리는 몇 달 전부터 아이에게 넌지시 똥이 마렵거나 눴으면 이야기하라고 말해왔다. 한 달 전쯤, 아이는 아직 침대 위에서 아침 잠에 취해있는 내게 다가와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똥 눴어". 아이의 수줍은 듯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얼마 후에는 밥을 먹으려다말고도 "똥 눴어"라고 말했다. 기저귀를 확인해보니 아니었다. 내가 "똥 없는데?" 하고 말하니 아이는 "방구하고 헷갈렸나봐"라고 답했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목욕을 시킨 뒤 한동안 기저귀를 채우지 않고 내버려두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줌이 마려우면 이야기하라고, 같이 가서 오줌을 누자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냥 참거나, 아니면 방바닥 어디에 오줌 방울을 조금 흘리기도 했다. 오늘도 오전에 엉덩이를 내놓고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아내는 아이가 고추를 잡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몇 차례에 걸쳐 펭귄 소변기 앞에 데려가니 마침내 참지 못한 듯 오줌을 누었다고 전해주었다. 아내는 내게 사진을 보내면서 전화도 했고, 난 전화기 너머의 아이에게 "잘했어요!"하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이후 두 차례쯤 그냥 마룻바닥에...)


아이는 그동안 펭귄 소변기를 목욕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삼아왔다. 오늘 거기에 처음으로 오줌을 누면서 용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거다. 아이는 앞으로 대변기에 똥도 눌 것이다. 물론 실내에 똥냄새가 나면 대단하겠지. 우리는 아이가 다른 방에서 기저귀에 똥을 눴을 때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후각(+알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씩 하나의 어엿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돕고 지켜본다는 것을 잠시 똥냄새를 맡을 때의 괴로움과 비교하는 아빠가 있기나 할까. 


바로 그 오줌. (이런거 올릴줄 나도 몰랐지만, 그래도 이것은 역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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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동

제러미 스미스 지음·이광일 옮김/들녘/332쪽/1만3000원


전통적인 남성 영웅의 특징은 무엇일까. 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춰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영웅이라 부르기 어렵다. 조건없는 자기희생이야말로 모든 남성 영웅이 갖춰야할 미덕이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하프 조율사 켄트 호프먼을 만나보자. 그는 이른바 ‘주부 아빠’(stay-at-home dad)다. 이는 아내가 직장에 나간 사이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육아를 담담하는 남성을 말한다. 호프먼이 처음부터 살림을 자청한 것은 아니었다. 호프먼은 잘나가는 금융자산관리사인 동갑내기 여성 미순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이가 좋았지만 “더 나아가려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프먼은 양육에 자신이 없었고, 미순 역시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 여부를 두고 둘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호프먼은 결단했다.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으면 내가 집에 남겠어.”


큰 아들 클린턴이 태어나면서부터 호프먼의 자기희생이 시작됐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일정 부분 자아를 내려놓지만, 호프먼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아이는 비정상적으로 턱이 작게 태어났다. 호흡 곤란, 조직 이상 등 부수적 장애가 10가지 이상 겹쳐왔다. 호프먼은 말도 움직임도 없이 작은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아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자신만의 여유 시간, 취미, 사회적 성취는 꿈꿀 수 없었다. 그 사이 미순은 일을 나갔다. 출장을 가느라 며칠씩 집을 비워야할 때도 있었다. 미순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눈물을 흘렸지만, 남편이 잘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6개월이 지나자 아기는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호프먼 가족은 도우미 간호사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혼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해 힘들지 않았으냐는 질문에 호프먼은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한 거지요”라고 말했다. 말 속에 자기연민이나 자부심은 없었다. 


호프먼은 헤비급 복서나 특전사 군인과 같은 의미에서의 ‘남성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남성의 이상인 영웅적인 자기희생을 실천했다. ‘애 키우고 살림하는 건 여자들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호프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빠의 이동>은 부쩍 늘어나고 있는 주부 아빠에 대한 보고서다. 주부 아빠로 산 적이 있는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행동양식의 아버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사회의 변화상을 그렸다. 


2007년 미국 통계청은 집에서 살림하는 아버지가 15만9000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1995년의 6만4000명보다 2.5배 가량 늘어난 수치다. 그러나 살림을 하면서 파트타임이나 재택근무로 일하는 아버지 수는 제외됐기 때문에, 실제 주부 아빠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벌어오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주부 아빠가 많다는 것은 일하는 엄마가 늘어났다는 뜻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미국 백인 여성은 남편이 직장에 나간 사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지금은 엄마의 80%가 일하고, 아내의 3분의 1은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여성이 버는 돈의 액수와 남성의 가사 및 육아 노동의 정도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사실 바깥에서 일한 뒤 돌아와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19세기 이후에나 보편화됐다.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를 살펴도 엄마는 밖에서도 일했고, 아빠는 아이들을 자상하게 대했다. 산업혁명 이전 가족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는 모든 가족이 함께 일하고 함께 가사를 분담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조건이 혹독하게 변화하면서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으로 출근해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경제 영역과 가정 영역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생긴 것이다. 


전후 호황기가 끝난 1970년대는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이동하는 분기점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재빨리 적응했다. 반면 뒤처진 채 직장을 잃는 남성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 아버지들은 힘들었다. 밥벌이만 하는 무뚝뚝한 가장, 아내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자상한 아버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주부 아빠가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 이들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아빠는 직장, 엄마는 집’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간 사이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가 다른 엄마들의 시선에 쭈뻣쭈뻣해졌다는 식의 경험담이 책에 가득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 하는 남자를 ‘루저’(패배자) 취급하는 주변 시선도 여전하다. 아버지 세대엔 주부 아빠가 드물었기에, 바람직한 역할 모델을 찾기 힘들다는 점도 딜레마다. 


엄마의 ‘두 마음’도 걸림돌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직장에서 성취감을 얻고 양성 평등을 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여전히 가정이라는 느낌을 갖곤 한다. 어머니로서의 소망과 세속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직장 생활에 시간을 들일수록 어머니 역할 수행에 투입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아버지는 그보다 많은 시간을 일해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결과를 두고 저자는 “아버지들은 돈벌이를 부모 노릇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반면 “어머니들은 대개 직장 일을 자녀들한테 쏟아야 할 시간을 잡아먹는 별개의 직업으로 여긴다”고 해석한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몇 가지 생물학적 사실이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도식은 일하는 어머니와 살림하는 아버지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비난하는 일부 보수 세력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물론 인간 여성은 친밀한 관계의 영역에서, 남성은 좀 더 큰 규모의 위계질서가 있는 사회 집단에서 잘 활동하도록 진화했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하지만 남녀의 역할 패턴이 시대와 문화마다 달라진다는 사실은 인간이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바뀌는 동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 남서부, 아프리카 중부, 미국 캔사스시티에는 아이를 키우는 남성 집단이 있고, 미국의 20대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소득이 높다.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은 상호작용한다. 


게다가 남성은 아버지가 되면서 생물학적으로도 변화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강한 공격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떨어지고, 젖분비 호르몬인 프로락틴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늘어난다. 코르티솔은 아기가 원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몸은 부모가 되면서 비슷해지는 것이다. 마치 자전거 타기를 배우듯이, 남성의 몸은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배워간다. 그러므로 저자는 ‘화성에서 온 사람도 있고 금성에서 온 사람도 있지만 많은 남자들은 지구에 살고 있다’라고 책 제목을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아빠는 일, 엄마는 양육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2006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연구팀은 실험 대상 여성들에게 “여성은 일반적으로 수학 학습 능력이 남성보다 떨어진다”고 말한 뒤 수학 시험을 치르게 했다. 이 말을 들려주는 것만으로 여성들의 수학 점수는 낮아졌다. 유전적 설명이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적 조건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나라의 국경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갇힌 죄수가 아니다. 우리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집어들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중간중간에 자신의 육아 경험을 들려준다. 아내가 전업으로 일하고 저자가 주부 아빠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아내가 출장간 사이 저자는 21개월된 아들과 집에 남겨졌다. 부자가 단둘이 밤을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뒤척뒤척하던 아기가 아빠 품에 안겨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부자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의 작은 똇목 위에 있었다. 저자는 “스위치를 켠 것처럼” 생각했다. ‘아버지’는 저자가 잠시 맡은 역할이 아니라 정체성의 고유한 일부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몇 가지 사회적, 정책적 대안이 제시된다. 독일, 스웨덴은 이 방면의 선진국이다. 성별에 관계 없이 6~12주의 유급 육아휴가 제도가 필요하다. 그 다음엔 최소 1년의 무급 휴가가 따라야 한다. 육아를 위한 탄력근무시간제나 휴가를 썼을 때 불이익이 없도록 보장돼야 한다. 


저자는 아빠의 변화를 ‘빙하의 이동’에 비유한다. 거대하고 느리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미래에는 막을 수 없는 움직임. 혁명은 아니지만 반드시 찾아올 변화. 이미 많은 아빠들이 그 변화를 깨달아 추동하고 있다. 책을 추천한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밖에서 돈만 벌어다 주는 부성이 아니라 나눔, 배려, 돌봄, 상생이라는 가치로 아이를 기르는, 제대로 된 부성의 의미”를 강조했다.



원서 이미지. 한국판도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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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간에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전날밤부터 부담이 되고 아침이면 긴장을 해 초조해지기도 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7시가 조금 지나면 아이가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 옆에 서서 아빠를 깨우거나 내가 먼저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간다. 내가 나가도 아이는 금세 알고 일어나니 굳이 조용히 나갈 필요가 없긴 하다. 아이는 사랑하는 인형 친구 '크크'를 데리고 거실로 나와 가장 먼저 관심을 끄는 책이나 장난감을 집어든다. 책을 읽어달라고 하거나 장난감 이름을 발음하며 자신의 어휘력을 뽐낸다. 


아이와 잠시 놀아준 나는 아침을 챙기러 간다. 이때가 조금 고비다. 아이가 혼자 놀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같이 놀아달라고 올 때가 있다. 커피를 내리거나 수프를 끓일 때 아이가 다가오면 낭패다. 최대한 달래 부엌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아니면 주전부리를 아무거나 챙겨줘 시간을 번다. (아이가 먹는걸 좋아해 다행이다)


아침이라 해봐야 별 건 없다. 시리얼에 과일을 섞어주거나, 아내가 미리 끓여놓은 수프를 준다. 죽이나 빵을 대령할 때도 있다. 아이는 서툰 숟가락질로 잘도 떠먹는다. 테이블과 옷에 음식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허나 옷은 빨면 되고, 테이블은 닦으면 된다. 난 그 옆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는데, 가끔 아이가 아빠 음식에 호기심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면 조금 떼어준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시각의 왜곡 현상은 생득적이라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 입증됐다.   


시간은 어느덧 8시. 아이는 세수하고 손 씻기를 귀찮아하는데, 밥 먹자 마자 잘 달래서 목욕탕으로 안내한다. 아이는 이때 텔레비전을 보여달라고 하기 때문에, 난 세수를 하면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에 물을 적시며 3분 뒤 이루어질 약속을 기대한다. 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EBS의 <딩동댕 유치원>을 보여준다. <딩동댕 유치원>에는 주황색 머리를 한 여자아이 랄라와 그의 선인장 친구 장이 나와 이런저런 코너를 소개한다. (솔직히 랄라의 머리색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엔 박경림이 어린이 인권을 홍보하겠다며 나오고, 얼마전엔 피아니스트 진보라가 나와 아이들의 동요 반주를 했다. 다들 어디 있나 했더니.)


이후 30분간 아이는 프리즈. 그러면 나는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훔친다. 출근 준비를 하고는 아이의 몸단장도 시킨다. 로션을 발라주고, 기저귀를 갈고, 외출복을 입힌다. 요즘 날씨가 급변해 옷 선택에 고민이 많다. 안에 입은 옷과의 코디가 완벽하지 않아 외투를 세 번 정도 갈아입힌 적도 있다. 이 아이의 미감을 너저분하게 만들 순 없다. 


여기서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겠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니코마코스 윤리학) 마이클 샌델은 "덕성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증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뜬금없는 패러디를 허용한다면 "부성은 실천함으로써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2달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아기를 보는 일은 전혀 손에 익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는 부실하고 시간은 쫓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제 난 아이의 리듬과 습관과 호오를 알아내고, 그걸 이용하고, 아이는 다시 내 손길에 기대는 원활한 리듬이 만들어졌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양쪽 노를 젓는 선원처럼, 아빠와 아기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생각 하면 많은 일이 괴롭다. 작은 괴로움의 가능성이 거대하게 부풀기도 한다. 막상 몸으로 부딪치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내 몸이 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해도 안될 때도 있다. 안되면 안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기 보는 일을 차츰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진은 특정 사건과 관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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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말을 시작했다. 

얼마전까진 내가 말을 하면 아이는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림 혹은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식이었다.  동물이 있는 그림책을 보면서 "사자 어딨지?" 하고 물으면 아이는 사자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런데 약 열흘 전부터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사자"라고 발음한다. 연령을 고려하면 빠른 편은 아니다. 여자 아이, 그리고 형제 자매가 있는 아이가 말을 빨리 배운다고 한다. 

게다가 정확한 발음도 아니다. 아이가 지시하는 대상이 '사자'라는 것을 알고 들어야만 식별할 수 있는 발음이다. 그러나 열흘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대단한 속도다. 그 많은 단어들을 다 알면서도 발음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내놓는가 싶을 정도다. 사자, 기린, 코끼리, 거북이, 토끼 등 그림책에서 자주 보던 동물들은 물론이고, 달팽이, 애벌레, 뱀 같은 것도 발음한다. 심지어 그 동물들의 소리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도 같이 이야기한다. '나비'하면 '나풀나풀'이라고 말하고, '동물농장' 노래를 들려주면 '닭'이 나오는 대목에 '꼬끼오'라고 말한다. 

주로 명사다. 그런데 그 범주가 꽤 넓다. 동물 이름 뿐 아니라  침대, 의자 등 가구의 이름, 택시, 소방차, 버스 등 탈 것의 이름, 뽀로로, 에디, 패티, 크롱 등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도 말한다. 심지어 마트, 택배까지 말한다. (마트나 택배를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에 대해선 나와 아내의 자아성찰이 요구된다) 

아무래도 아이는 자기가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자주 발음하게 마련인데, 요즘은 '대또퐁'과 '디도콘'이다. '핸드폰'과 '리모콘'은 가능하면 쥐어주지 말아야 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의 끊임없는 요구를 지치지 않고 소화할 자신이 없거나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싶으면 아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직 명확히 발음하는 동사는 '주세요'밖에 없다. 뭘 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뜻을 알고 발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는 '주세요'라고 말한다. 아직 형용사는 들은 적이 없다.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로버타 미치닉 골린고프. 캐시 허시-파섹/교양인)이란 책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읽게 됐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다. 아이는 세상 모든 언어를 발음할 가능성을 타고 태어난다.(당연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어린 시절에 미국에 입양되면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한다) 그리고 모국어를 익혀가는 과정에서 그 가능성을 제거해가고, 결국 모국어를 발음할 수 있는 능력만 남긴다. 결국 내 아이가 한국어를 말한다는 건 한국어 이외 그 모든 언어를 모국어로 발음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과정이 완료됐다는 뜻이다. 내 아이는 열흘 전부터 '사자'를 발음함으로써,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게 됐다. 그리고 이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네 팔자다.  

하나 더 언급할 것은 부모와 아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물론 우리 부부와 아이는 이전부터 음성 언어 이외의 방법으로 아이와 의사를 교환해왔다. 손짓, 몸짓, 표정(주로 울음과 웃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 좀 더 추상적인 수단인 언어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아이는 핸드폰이 숨겨져있는 화장대 앞까지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도, 쇼파에 앉아서 '대또퐁'이라고 발음함으로써 내 스마트폰의 '토킹 벤'이나 '토킹 피에르'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아이가 말을 시작했다. 부모와 아이 사이 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저 입으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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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재우기 위해 어두운 방에서 이런저런 동요를 조용히 부르다 보면, 그 중에서도 가사와 멜로디가 특히 아름다운 곡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또 노래라는 것은 몸에 참으로 깊숙히 각인된다는 점을 느낀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불러본 적이 없는데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바로 입에서 나오는 그 노래들.


태교 시절
, 아내의 배에다 대고 불러준 노래는 '반달'이었다. 제목 보다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되는 가사로 더 널리 알려진 곡이다. 1924년에 발표된, 한국 창작 동요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라고 방금 포털 검색 결과가 알려주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사가 좀 생경하다. '쪽배'가 뭔지, '계수나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으며, 돛대니 삿대니 하는 단어들도 도시 아이들에게는 낯설다. 그래도 멜로디가 신비스럽고 서정적이라서 음을 하나씩 천천히 음미하며 부르면 꽤 운치 있다. 여러 태교 책에는 뱃속의 아기도 귀가 있어 바깥의 소리를 다 들으며, 그래서 자주 말을 걸어주고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고 했다. 특히 자장가의 경우는 자주 불러주면 아기가 기억해 출산 이후에도 그 노래를 불러주면 편안해 하고 잠이 잘든다고 했다. 실험해 봤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노래를 부르거나 말거나 아기는 울었다.


아무튼 이 노래를
2년 이상 불러주니 아기는 심지어 지겨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에 안드는 노래를 부르면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흔들며 다른 노래를 부르라고 재촉한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노래는 '섬집아기'.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로 이어지는 가사다. (사실 가사는 지금 다시 찾아봤는데 조금 틀리게 알고 있었다)


요즘이면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얼마전 미국에서 새벽에 아이를 집에 홀로 두고 교회에 다녀온 한인 목사 부부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자는 아이를 두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온 적은 있지만, 그 이상의 범위로 나가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런데 '섬집아기 엄마'는 대담하게도 굴따러 나가 버린다. 물론 2절 가사를 보면 "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라고 수습하고 있지만, 그래도 21세기 시각으로는 상당히 쿨한 어머니시다. 1950년작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역사책에서 추상적으로 배운 시대 상황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노래다. 포털의 연관 검색어에 '섬집아기 공포'라고 뜨는데, 왜 그런지 알것도 같지만 난 그래도 이 노래가 좋다.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사람을 평화롭게 하는 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 아기는 이 노래도 지겨워한다. 내가 좋아하는 동요 중에 가장 최신곡은 '노을'이다. 1984MBC 창작동요제 대상곡이다. (그렇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창작동요제라는 것을 열던 시절도 있었다.) 일단 가사를 전부 인용하고 싶다.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때

고개숙인 논 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가는

가을바람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 놀


사실 난 이 가사가 묘사하고 있는 풍경을 알지 못한다
. 들판 같은 것이라고는 제주도에 팸투어 갔을 때 오름을 올라본 것이 전부이며, 요즘에 저녁을 짓는다고 연기를 내는 집도 없다. 허수아비라느니, 초가지붕이라느니, 민속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노래의 가사를 외워 부르고 있노라면
, 정말 내가 노을 지는 가을 들판에 올라 시골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본 적도 없는 풍경이지만 내 앞의 모니터보다 더 현실같은 풍경. 제임스 카메론이 4억 달러를 들여 존재하지 않는 판도라 행성을 꾸며내 사람들에게 진짜인 것처럼 믿게 했듯이, '노을'의 가사는 대부분의 도시 아이들이 꿈에도 못본 시골 풍경을 머리 속에서 상상해볼 수 있을 정도로 힘차고 정교한 묘사력을 보여준다. 게다가 멜로디의 기승전결이 자연스러우면서 극적이라 부르는 재미도 상당하다. 가사는 평택 대추리의 노을을 보며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대추리의 상황에 맞물려 내 고향을 잃은 듯한 향수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아기는
'노을'에는 싫증을 내지 않았는지, 불러줄 때 힘차게 고개를 젓는 정도는 아니다. 아기가 한 시간 동안 안 자면서 뒤척이고 침대를 오르내리다가 아빠의 배 위로 엉덩이로 방아찧기를 놀이를 해대도, 그런 놀이 때문에 갈비뼈가 나간 할머니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래도 아기에게 '노을' 같은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시기는 꽤 즐거운 것이다


사진은 동요 '노을'과 전혀 관계 없는 우리 동네 노을 풍경. 대부분의 도시 아이들은 바람이 머무는 가을 들판이 아니라, 아파트 사이의 노을을 보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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