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에 해당되는 글 8건

  1. '우국'과 '인사이드 아웃'
  2. 왕좌의 게임과 메르스, 새로운 중세의 시작
  3. 유체이탈 화법에 대해
  4. 어느 판사의 품격
  5. 모험은 무엇이든 좋다
  6. 도서정가제보다 중요한 것
  7. 안도와주는게 도와주는 것, 부산영화제와 광주비엔날레의 경우 (2)
  8. 함께 울어야 할 시간



이렇게 최근 접한 소설, 영화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한 차례 지나감. 



싫지만 재밌는 작품이 있다. 신경숙 작가가 표절한 것으로 추정된 작품 ‘우국’이 그렇다. ‘우국’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1961년 발표한 단편이다. 이 작품의 절반은 섹스 묘사고 나머지 절반은 죽음 묘사인데, 이렇게 자극적이면서 심오한 소재를 솜씨 있게 다룬다면 작품에 대한 호오와 상관 없이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섹스의 결과로 태어나고 또 언젠가 죽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마치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듯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살아간다. 소설가는 그런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1936년 2월26일 천황 중심의 강력한 국가 개조를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우국’의 배경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동료들의 쿠데타에 끼지 못한 다케야마 중위는 다음날이면 동료들을 진압하러 나가야 한다. 친구들을 쏠 수 없다고 생각한 다케야마는 죽음을 다짐한다. 젊은 아내 레이코 역시 남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미시마 유키오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아베하고 한 통속이었다면 작가로서의 아우라 따위는 없는 볼썽스러운 꼴이었을듯. 


부부는 죽음을 결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동침한다. 미시마는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진 남녀의 섹스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중위의 눈이 본 그대로를 입술이 충실히 다시 그렸다” 같은 문장에는 탄식이 나온다. 젊은 신혼부부의 정사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이유는 곧이어 다가올 죽음 때문이다. 중위는 군복 상의의 단추를 푼 뒤 날카로운 칼 위로 잘 단련된 상체를 엎는다. 내장이 바깥으로 쏟아지며 내는 비린내와 날카로운 칼이 피부를 가르며 유발하는 찌릿한 고통이 글자 너머로 전해진다. 부부의 건강한 쾌락과 피·고통·죽음의 축제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서로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궁극의 파멸로 향하는 이같은 대비는 매력적일지언정 건강하지 않다. 


성인 관객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전체관람가 영화인 <인사이드 아웃>을 잔인하고 에로틱한 ‘우국’과 비교하는건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 역시 정반대 속성을 가진 것들이 어울릴 때 내는 삶의 효과를 보여준다.  





<인사이드 아웃>에는 감정이 의인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등의 감정은 머릿 속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사춘기에 접어들기 직전의 소녀 라일리를 움직인다. 다섯 감정 중에서도 주인공은 기쁨이다. 라일리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기쁨은 라일리가 지나온 유년기의 많은 시간동안 본부의 움직임을 주도했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딸 라일리는 대체로 밝고 명랑하고 행복한 나날들 속에 성장한다. 


나머지 감정들도 역할이 있다. 예를 들어 소심은 라일리가 전깃줄 너머로 세차게 달려나가려는 순간 버튼을 누름으로써, 라일리가 속력을 줄이고 넘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기쁨은 의문을 품는다. “슬픔은 무슨 일을 하지?” 손대는 기억 구슬마다 우울한 푸른색으로 변하게 하는 슬픔을 나머지 감정들은 경계한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영화는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필요하다는 결말로 향한다. 슬픔은 몸과 마음을 물에 젖은 솜처럼 처지게 하지만, 그러한 영육의 상태를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은 감정의 공동체를 이룬다. “결혼식엔 안가도 장례식엔 가라”는 말이 있다. 기쁨을 나눌 때보단 슬픔을 나눌 때 더 큰 힘이 된다는 경험을 함축한 말일 것이다. 


‘우국’의 섹스와 죽음은 서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생을 찢어놓고,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과 슬픔은 서로 어울리며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같은 궤도를 반복해 돌지만, 때로 양극의 경험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마음의 탄력성을 발휘해 극단의 체험을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인간이 될 것이다. 무더위 뒤 찾아온 한줄기 서늘한 바람에 지복을 느끼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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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쓸 차례가 다가오는 칼럼의 문제점은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다는데 있다. 시의성을 중시하는 언론 속성 상, 쓰고 싶은 이슈가 있으면 내 차례가 아니고 내 차례가 오면 쓸만한 이슈가 지나간 상태일 때가 많다. 그래서 칼럼을 쓸 시기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 사건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는 일정 수준 운에 달려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다섯 번째 시즌이 종영한 <왕좌의 게임>과 메르스를 엮어보려고 며칠 전부터 준비중이었는데, 마감 직전 신경숙 표절건이 터져서 조금 고민했다. 이슈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글이 더 많은 주목을 받겠지만, 차분하게 세계관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데 좀 더 끌리는 편이라 원안을 고수했다.  


덧) 그리고 지면에서의 제목은 '중세로 돌아간 한국'으로 돼 있는데, 내 생각은 '세계는 언제나 중세'에 가깝다. 이 글에서 메르스 사태를 초래한 누군가를 비판할 의도는 없으며(그런 건 다른 분들이 다들 잘 하신다), 그저 우리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삶의 조건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시청하면 고통과 우울이 동반된다. 얼마전 종영한 다섯 번째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사이, 시청자들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비감한 첼로 선율로 편곡된 타이틀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수선한 마음은 내년 여섯 번째 시즌이 시작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선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다. 믿음직한 아버지가 죽고, 무고한 소녀가 죽는다. 불굴의 장군이 죽고, 탁월한 지도자가 죽는다. 물론 시청자들이 바라는대로 악당도 죽는다. 그러나 악당이 죽을 때조차 통쾌하기보다는 씁쓸하다. 한밤중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아들이 쏜 석궁에 맞아 죽는다면, 그런 죽음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다. 


여름 극장가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죽음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죽는다 해도 단역, 조연, 악당이다. 간혹 주인공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지만, 이때는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덧붙여 관객이 비참해지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 어느 때에도 아이들이 죽지 않는다는 건 불문율에 가깝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에서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아이들도 명분 없이 죽어나간다. 북쪽에서 온 좀비들에게 물어뜯기거나, 포악한 군인의 칼에 죽는다. 심지어 아버지의 야망을 위해 산 채로 불태워지기도 한다. 


가상의 대륙에 자리한 7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왕좌의 게임>은 용과 마법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판타지지만, 인물들의 복식, 행동양식, 세계관 등은 서양의 중세에서 따왔다. 원작자 조지 R R 마틴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내 책이 역사에 근거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왕자가 아름다운 공주와 낭만적 사랑을 나누는 ‘디즈니랜드식 중세’는 없다. 



"존 스노우, 넌 아무 것도 몰라"


중세는 극단의 시대였다. 중세인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 무척이나 집착했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저서 <중세의 가을>에서 그 풍경을 묘사한다. 당시 <귀족들의 생활 방식>이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침대에 누울 때는 늘 이것을 생각하라. 잠자리에 들듯이, 그대는 곧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덤에 들게 될 것이다.” 수도원은 창자가 벌레들에게 뜯어먹히는 여성들의 그림으로 장식됐다. 


반면 현대는 평평하다. 역병이 퍼지거나, 메뚜기떼가 창궐하거나, 마녀사냥이 벌어지거나, 귀족들의 자존심 싸움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리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다. 조금 아프더라도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춘 대형병원에 가면 노련한 의사들이 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인터넷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정보와 여론이 있는가.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의사소통 수단을 가졌다. 이러한 현대 문명의 축복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예측가능하고 안전한 궤도를 지난다고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메르스 이후’다. 정부와 의료계는 메르스가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만 위험하고, 병원 안에서만 감염된다고 했다. 그런 줄 알고 안심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를 의심케하는 일들이 자꾸 벌어졌다. 언론과의 인터뷰에 당당히 임했던 젊은 의사가 며칠 사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병원 바깥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자꾸 나왔다. 1차 감염자, 2차 감염자, 3차 감염자에 이어 4차 감염자까지 나왔다. “이번 주말이 고비”라는 말이 몇 주 째다. 정말 메르스가 병원 바깥에서도 감염된다면, 감염을 막을 길은 없다고 봐야한다. 중세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의 목숨은 운에 맡겨야 한다.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쓰여진 문구를 패러디하면 이렇다. “죽음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중세인들의 경구를 차용하면 ‘메멘토 모리’다. 이렇게 우리는 중세로 돌아왔다. 아니 우리는 언제나 극단적이고 잔혹한 중세적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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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배우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옛 출연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어.” 배우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자, 동료 출연자들은 놀리듯 웃는다. 제작진은 그 영화의 자료 화면을 보여주며 ‘전설의 영화’라고 조롱한다.


혹자는 이런 말에서 ‘예능감’을 느낀다지만, 이런 행동은 차라리 ‘무례’다. 시청자들은 이 장면에 웃음을 지었을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그 영화의 관계자들이 봤다면 인상을 펴지 못했을 듯하다.


영화는 대규모 공동작업의 결과다. 수십~수백 명의 주·조연, 단역 배우들이 출연하고 연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스태프도 그만큼 많다. 투자자, 기획자, 배급관계자, 극장주, 마케터들도 영화의 성공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한다.


그런데 딴 사람도 아니라 영화의 간판인 주연 배우가 텔레비전에 나와 해당 영화를 폄하한다. 실제 영화의 작업 과정이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애초에 출연을 원치 않았으나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주연을 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작비만 수십 억원에 이르는 상업영화의 주연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화를 내야 하는 이들은 이 배우의 이름값을 믿고 영화표를 산 관객일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출판 편집자도 거들었다. “영화를 책으로 바꿔도 100% 공감합니다.”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책 역시 공동작업이다. 글을 쓰는 건 저자지만, 책을 만드는 건 편집자다. 그러나 어떤 저자들은 책이 성공하면 공을 갖고, 실패하면 “편집이 엉망이었다”고 잘못을 떠넘긴다.


자신이 책임져야할 일에 대해 사과하거나 옹호하는 대신, 분노하거나 조롱하는 일. 언젠가부터 세간에선 이런 태도를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불렀다. 마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제3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듯, 자신이 관련됐던 일을 남의 일처럼 평가하는 태도다.



위키피디아의 유체이탈 설명 이미지. 이걸 찾은게 아닌데....


유체이탈자들을 문화계에서만 찾을 건 아니다. 이 분야의 대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국정의 난맥상이 노출될 때마다 ‘격노’했다. 대통령이 야당 당수나 정치평론가라도 된듯이 국정을 비판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하다. 지난 정권의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댓글 공작을 펼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오불관언의 자세를 유지한다.


유체이탈 화법은 일부 진보진영 사람들에게도 애용된다. 비정규직 문제, 부동산 문제 등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싹이 트거나 악화됐고 현재까지 서민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모든 경제 문제에 대해 “이게 다 이명박(혹은 박근혜) 탓이다”라는 말로 선을 긋는다.


현대사회는 워낙 복잡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일이 거의 없다. 선거든, 사업이든, 예술이든 결과를 낳기 위해선 수많은 조력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일이 잘되면 공을 나누겠지만, 잘못되면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럴 때 유체이탈 화법은 큰 유혹이 된다.


하지만 유체이탈 화법은 비겁하다. 자신이 관여했던 일에서 이름을 지운 뒤, 상대를 비판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또 유체이탈 화법은 무례하기도 하다. 자신을 믿고 함께 일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바보로 만든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거니와, 잘못이 훗날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경쟁상대에게 작은 흠결이라도 보이면 그대로 몰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한다. 이럴 때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건 사회적 인간의 본능 같기도 하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그만큼 멋있다. 자신의 흠결을 인정하는 사람과 순결을 주장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훌륭한 사람인지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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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주제를 생각하다가 마감하는 날 오전 급히 바꿨다. 원래 쓰려고 했던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더 정리해 꼭 쓰고 싶다. 


아이돌도 사람이다. 팬들도 아이돌이 연애하고, 방귀 뀌고, 잘 때 이 간다는 사실을 짐작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예전의 팬들은 아이돌의 연애 사실이 밝혀지면 ‘팬질’을 그만두기도 했다. 아이돌이 “사랑해”라고 노래할 때, 그건 노래를 듣는 모든 팬을 위한 메시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을 위한 연인이 된 순간, 아이돌에 대한 환상은 부서진다. 어떤 직업군에는 그에 기대되는 환상이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의 사진 밑에 성적 암시가 담긴 글을 남긴 예비 교사에 대해 대중은 분노했다. 대중의 사랑에 기대어 사는 연예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 연예인이라고 짜증스럽고 화나는 순간이 없겠냐마는, 만일 진짜 짜증을 내는 모습이 누군가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잡힌다면 그는 인터넷 공간에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판사는 어떨까. 따져보면 판사는 법조문의 이해와 적용에 능숙한 기능인이다. 기자가 사건의 실체를 간결한 글로 전하는 데, 택배기사가 정확한 주소지로 신속하게 물건을 나르는 데, 투수가 공을 빠르고 변화무쌍하게 던지는 데 능숙한 것과 같다. 판사라고 평균 이상으로 검소하고 선량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악플 판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수도권 법원에 근무 중인 이모 부장판사는 2000년대 중반부터 여러 포털 사이트의 기사, 댓글에 5개의 서로 다른 아이디, 닉네임을 이용해 댓글을 달았다. 댓글은 특정 지역을 상습적으로 비하하고, 과거사 사건 피해자를 조롱하고, 동료 법관을 비난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노동조합, 촛불집회 참가자 등에 대해서는 저급한 표현을 사용했다. ‘독재 정권 시대의 물고문, 전기고문이 좋았다’는 말도 있었다. 비유의 수위, 방식, 정서가 정확히 ‘일베’를 가리킨다. 


법원 로고. 안 예쁘다.


법관윤리강령은 판사에게 품위 유지, 공정성,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다. 하지만 판사는 댓글에서 신분을 감췄다. 해당 판사의 정치적 편향성, 퇴행적 역사관, 인간에 대한 무례가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도 없다. 한마디로 온라인에서 해당 판사가 벌인 활동은 철저히 사적 개인으로서 벌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대중, 특히 법정에 선 사람들은 판사에게 법 전문가로서의 기능 이상을 기대한다. 판사도 악플을 달고, 밤에 ‘야동’을 보고, 긴 줄 앞에서 새치기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판사에 대한 환상은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전제한다. 판사는 법 전문가임을 넘어, 윤리적으로도 평균 이상 도야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판사의 한마디에 재판 받는 사람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판결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런데 나보다, 아니 사회 평균보다 인격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받는 판결을 이의 없이 수긍할 수 있겠는가.

간혹 언론에 나오는 판결 기사에는 “재판부는 준엄히 꾸짖었다”는 투의 표현이 나온다. 말이 안되는 표현이다. 판사는 양형 기준에 따라 판결하면 될 뿐, 누군가를 꾸짖을 권리는 없다. 꾸짖는 것은 부모, 스승, 사제가 할 일이다. 그럼에도 기사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건, 판사에 대한 윤리적 기대치가 높음을 암시한다. 

군자는 유가가 그리는 이상적 지식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책상, 찻잔같이 한 가지 목적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을 갖춰 두루 신망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 앞에서 정적을 탄핵할 때면, 실제 행위와 함께 인격의 용렬함까지 비판하곤 했다. 글이나 그림에 사용된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선비다운 정신이 담겨 있지 않으면 높게 치지 않았다. 

법관에게 군자가 되길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이 수긍할 만한 ‘한 줌의 도덕’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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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합 8시간에 이르는 <호빗> 3부작, 9시간이 넘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모두 본 관객들은 아마 1시간 이상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 장면, 반지가 상징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 탐욕에 병든 잔인한 용 스마우그, 엘프들의 아름다운 외모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내겐 험난한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호빗들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피터 잭슨 감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듯한 이 결말부에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호빗족 빌보 배긴스는 평화로운 샤이어 마을에서 자족하며 살아간다. 푸른 초원 위 아늑한 마을에는 장난끼 있지만 온순한 종족이 모여 산다. 그러나 빌보가 마법사 간달프와 난쟁이족의 모험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진다. 


뜻밖의 여정을 떠난 빌보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난쟁이처럼 힘이 세거나 마법사처럼 마법을 쓸줄 모르는 연약한 호빗족에게 이 여정은 무척이나 힘겹다. 빌보는 그 과정에서 귀한 반지를 손에 넣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지만, 고향 마을에서의 안락한 삶, 무엇보다 목숨과 비교하면 잠시 모습을 감추게 해주는 반지 따위는 별 거 아니다. 




<호빗: 다섯 군대 전투>의 티저 포스터. <반지의 제왕> 때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는데 얼굴은 늙어버린 슬픈 엘프 레골라스(위)와 영국식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는 호빗 빌보. 




천신만고 끝에 모험을 끝낸 빌보는 1년여만에 고향 샤이어 마을로 돌아온다. 동네에선 빌보를 ‘추정사망자’로 간주해 그의 세간을 경매에 부치는 등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빌보는 자신이 빌보 배긴스임을 증명한 뒤에야 텅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을 샤이어 마을의 이웃들에게 1년의 부재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빌보는 백발의 노인이 된다. 그러나 빌보는 왠일인지 심술 궃은 늙은이가 됐다. 늦은 오후의 방문객은 호통을 쳐서 쫓아보낼 정도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모험길의 동무였던 마법사 간달프라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그를 맞이하게 위해 달려가는 빌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한 번의 모험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빌보는 더 이상 샤이어 마을의 안락함에 만족하지 못하는 호빗이 됐다. 이렇다할 친구도, 가족도 없어 보이는 빌보는 가끔 반지를 꺼내 보거나,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홀로 여생을 보낸다. 다른 호빗들이 쑥덕댈지 모르지만, 빌보는 이웃의 평가 따윈 개의치 않을 것 같다. 빌보에겐 위대한 모험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험을 되새기며 사는 것만으로도 빌보는 행복하다.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찾아 떠난 난쟁이족. 그런데 정작 왕자님을 빼고 사진 찍음. 


빌보는 오매불망 또 한번의 모험을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빌보의 염원은 소설 <호빗>의 속편이자 영화로는 앞서 나온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왕의 귀환>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험의 주인공은 빌보의 조카인 프로도 배긴스다. 빌보 못지 않게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은 프로도와 동료 호빗들은 샤이어로 돌아와 기나긴 뒤풀이를 한다. 함께 모험을 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인에게 구애한다. 결혼을 하고 책도 쓴다.


그러나 프로도의 표정에도 빌보와 마찬가지로 그늘이 서려있다. 모험은 그를 오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로도는 늙어서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는 삼촌 빌보와 함께 또다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정을 떠난다. 다른 호빗 친구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프로도는 그것만이 자신의 길임을 확신한다. 


모험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정신의 욕창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한다.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모험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호빗> 속 중간계의 신비로운 숲, <인터스텔라>의 웜홀보다 깊고 신비롭다. 자신의 마음, 타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도 대단한 모험이다.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해야 우리는 조금 더 근사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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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비극의 탄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인터넷 서점들은 하루 종일 과부하 상태더니, 저녁 무렵부턴 아예 접속조차 되지 않았다. 접속자가 갑자기 증가해 서버가 다운된 모양이었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기 전날인 20일의 풍경이었다. 매일이 이렇다면 저자, 출판사, 서점이 모두 콧노래를 부르겠지만, 이런 소동도 이날이 마지막이다. 유행 지난 옷가지를 팔아치울 때나 쓰던 ‘창고정리’ ‘폭탄세일’이란 말을 책 사면서 들을 줄이야. 이 소동 속에 살 사람도 사고 안 살 사람도 샀다. 며칠 뒤 독자에게 배송될 <순수이성비판>은 아마도 책장에 고이 모셔진 채 위풍당당함을 뽐내지 않을까. “그 책 언제 읽을 거냐”고 묻지는 말자. “읽어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정작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 고전의 오래된 정의다. 




21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위)와 이마누엘 칸트. 무덤에서 소식 듣고 놀라실듯. 


전날까지 반값 또는 그 이하로 할인 판매된 책들이 21일부터는 정가를 회복했다. 신간, 구간, 실용서, 참고서 등 예외가 없다. 가격, 쿠폰, 마일리지를 합해도 할인율은 15% 이내로 제한됐다. 이제 서점은 태풍이 쓸고간 뒤처럼 조용하다. 모두들 숨죽인 채 빼꼼히 창밖을 내다보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향후 6개월 정도는 책 판매량이 뚝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출판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할인 경쟁 속에 모두들 지쳐있었다. 작은 반칙은 큰 반칙을 불렀다. 모두 힘을 합해 자정했으면 좋았겠지만, 21세기의 혼탁한 시장에서 점잖은 선비님 말씀은 듣기 힘들었다. 이럴 때는 법, 제도 정비가 우선이다. 


도서정가제의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짚어야할 대목이 있다. 우선 도서정가제는 인터넷 서점과 할인 경쟁을 할 수 없었던 동네서점을 살릴까. 그렇지 않다. 십 수 년 전 인터넷 서점이 등장한 이래 동네서점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동네엔 동네서점이 없고, 있다 해도 학생 참고서를 판매할 뿐이다. 독자의 책 소비 패턴은 대형 오프라인 서점 혹은 인터넷 서점으로 양분됐다. 동네서점을 이용하면 골목상권을 살리고 이웃도 도울 수 있겠지만, 소비자는 윤리가 아니라 편익을 따라 움직인다. 같은 가격이라도 독자는 수만 종의 책을 세련되게 진열한 대형 오프라인 서점이나, 택배 기사가 책을 손에 쥐어주는 인터넷 서점을 이용할 것이다. 이제 동네서점엔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엔 없는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다. 손님과의 스킨십, 주인의 독특한 취향 표출, 머물기 편안한 분위기 등 무엇이든 좋다. 


다음으로, 도서정가제는 ‘제2의 단통법’일까. 과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분석 결과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책 가격은 평균 220원 상승한다. 220원 더 쓰기 싫어서 사고 싶었던 책을 안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할인율이 컸던 구간이나 실용서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겠지만, 지금까지 할인을 염두에 두고 가격을 책정했던 출판사들이 앞으로는 정가를 낮출 가능성도 있다. 


이제는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책값이 낮아지면 책을 사서 읽을 것인가. ‘싼 맛에 책 읽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장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관찰해봤다. 같은 칸에 탄 40여명 중 신문 읽는 사람이 5명 정도,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거나 멍하니 있었다. 종이책 읽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변하고 있다. 문명과 기술의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옛 습관을 회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흘러간 강물을 되돌리려는 시도와 같다. 책은 인류 지식문화의 보고다. 책에는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잔재주를 넘어, 문명의 전환에 대한 근본적 성찰, 구태를 일거에 무너뜨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출판인들은 그 길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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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서병수 부산시장이 개막인사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너는 안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일처리가 서툰 사람을 놀릴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문화의 영역에서 이 농담은 종종 진리가 된다. 특히 관이 후원하는 문화행사의 경우가 그렇다. 정확히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이 유지될 때 문화행사가 성공하고 관도 체면을 살린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 초기에 빠르게 자리잡은 배경에도 이런 원칙이 있었다. 문화 관료로 잔뼈가 굵었던 김동호 초대 집행위원장은 관의 간섭을 막기 위해 온갖 수를 다썼다. 당시엔 영화제 출품작도 규정상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영화제에는 온갖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 방식의 영화가 출품된다. 만일 심의가 이뤄진다면 이런 영화들은 상영될 수 없었다. 


김 위원장은 “영화 프린트가 늦게 들어온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심의위원들을 부산의 여관방으로 불러모아 ‘느슨하게’ 심의하도록 유도했다. 심의 규정을 위반한 영화도 더러 있었으나, 김 위원장은 “내가 책임지겠다”며 상영을 강행했다. 다행히도 2회 영화제까지 공연윤리위원회는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3회부터 영화제 출품작은 심의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이 생겼다. 바다 건너 풍문으로 제목만 들었거나 수입됐다 해도 이리저리 잘려나간 영화들에 상심했던 영화팬들은 부산영화제에 열광했다. 관객의 호응은 영화제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 


올해 이런 원칙이 훼손된 사례가 두 건 있었다. 광주비엔날레는 홍성담 화백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의 전시를 불허했다. 광주비엔날레 재단은 작품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 김기춘 비서실장의 허수아비로 묘사한 부분을 문제삼았다. 관계자의 사퇴, 작가들의 작품 철수 소동이 이어졌다.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재단 대표는 “홍 화백의 작품은 광주시의 돌출적인 대응이 없었다면 걸렸을 것”이라고 말해, 작품 철회에 시가 개입했다는 점을 시사했다. 출범 20주년을 맞은 비엔날레는 인권·문화 도시인 광주의 위상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실추시켰다. 


그로부터 1달 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비슷한 문제가 생겼다. 세월호 구조 과정의 난맥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 상영중단 압력을 받은 것이다. 영화제 조직위원장이자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서병수 부산시장이 “상영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중앙정부에서도 국고 지원 중단 등을 거론하며 상영을 막으려 한다는 소문이 불거졌다. 부산이 광주와 달랐던 점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외압에 의해 상영을 취소한 사례가 없다”며 <다이빙벨>을 예정대로 상영했다는 사실이다.


지역 문화행사에 정치적 이유를 들어 개입하려 한 지자체와 중앙정부는 멍청했다. 그 이유는 이번 사태로 인해 작품의 위상이 오히려 강화됐기 때문이다. <다이빙벨>은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312편 중 1편이었고, 상영작 발표 기자회견 당시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세월오월’ 역시 광주비엔날레 본전시를 앞두고 열린 특별전 출품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 작품들은 어쩌면 일부 관객의 관심만을 산 채 조용히 묻히거나, 아예 작품성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의 평가가 이뤄지기도 전에 관이 개입했고, 그 결과 작품의 창작자들은 ‘권력에 대항한 예술가’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다.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 나온 어느 여당 의원은 <다이빙벨>이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해당 의원이야말로 마케팅의 일등공신이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에도 예술은 권력, 자본과 갈등하고 타협, 즉 ‘밀당’했다. 그리고 이 긴장감이 작품을 살아있게 만들았다. 그러나 올해 광주와 부산에 ‘밀당’은 없었다. 돈줄 쥔 자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려 했다. 이 권력, 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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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머금고 글을 쓴다. 뉴스의 최전선에 있는 처지라 뉴스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처지가 원망스럽다. 이렇게 심약해서 무슨 기자냐고 자책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간간히 눈물을 훔치는 동료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 


사고 당일 아침까지도 기자들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침몰중’이라는 속보가 전해졌지만 곧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에 접어들어 정부가 구조자의 수를 정정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전원 구조, 368명 구조, 164명 구조…. 이날 서울에 가득했던 미세먼지같은 우울, 슬픔, 탄식이 기자들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사회부로 전입온 뒤 여러 건의 죽음을 접했다. 경주 마우나오션 리조트 붕괴사고의 대학생들, 송파의 세 모녀에 이어, 여객선 세월호의 고교생들까지. 이런 죽음들을 접하면 할 말도, 써야할 글도 생각나지 않는다. 굳고 커다란 벽 앞에 선 기분이다. 말이나 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감기 몸살에라도 걸린 듯 몸이 떨렸다. 소화가 되지 않아 죽을 먹었다. 하루종일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다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힘껏 껴안았다. 아이가 뒤척였지만 잠시 그렇게 있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곁에 뜨겁게 숨쉬는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 그러다가 갑자기 진도 앞 차고 검은 밤바다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모르는 또다른 생명들에 죄책감이 들었다. 

 

인과의 고리를 찾는건 현대인의 본성이다. 특히 어처구니 없고 황망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은 앞장서 그 원인을 파헤친다. 이 과정에는 흔히 분노가 동반된다. 누가, 무엇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분노는 때론 정확한 방향으로, 때론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다. 아이들의 죽음 같은 큰 일이 터졌을 때, 이 분노를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은 화낼 기운보다는 울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상가에서는 일단 울어야 한다. 충분히 울지 않으면 화낼 기운도, 앞으로 살아갈 힘도 낼 수 없다. 마음의 응어리는 절로 풀리지 않는다. 깊고 깊은 애도만이 응어리를 풀 수 있다. 


공동체의 역량은 재난과 그에 대한 애도 과정에서 드러난다. 지난 15일은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스타디움에 모인 축구팬 96명이 불의의 사고로 압사한 지 25주기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모든 경기는 평소보다 7분 늦게 시작했다. 참사 당시 경기가 사고로 6분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참사를 기억하며, 프리미어 리그 중계를 시청하는 전세계의 축구팬도 그들의 경건한 순간을 목도했다. 


또 이날은 미국의 보스턴 마라톤 테러 1주기이기도 했다. 추모식에서 드발 패트릭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여기 일어난 일들은 우리를 하나로 엮었습니다. (…) 우리는 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사건들에, 공통의 운명에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포, 같은 희망, 같은 공동체를 공유합니다”라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의 공동체가 아직 건강하다면, 바로 이런 애도와 추모의 문화를 하나의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망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산 자를 살게할 수는 있다. 인간은 그것을 해야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추모하기. 떠난 생명을 안타깝게 여기고, 살아남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남은 사람의 곁에 서주기. 우리의 공동체가 유지되거나 혹 강해지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쓴다.



18일 저녁, 실종된 학생들이 돌아오길 기원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 /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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