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에 해당되는 글 3건

  1. '주토피아'의 성, 인종, 정치
  2. 감옥에 가려는 아이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3)
  3. 한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 <내 이름은 욤비> (2)



아이하고 <주토피아> 더빙판 뒤늦게 봤다가 신기해서 써봤다. 아래와 같은 요소도 재미있었지만, '나무늘보 개그' 역시 대단했다. 



지난주 개봉한 <주토피아>는 디즈니사가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신임 경찰인 토끼 주디가 사기꾼 여우 닉과 함께 동물들의 대도시 주토피아에서 일어난 연쇄 실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눈이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귀여운 토끼 캐릭터, 각 동물의 특성에 맞춰 아기자기하게 설계된 주토피아의 모습, 예상 가능한 결말 등이 전형적인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주토피아>에는 현실 세계를 경험한 성인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설정이 깔려 있다. 폭넓은 세대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할리우드 각본의 힘이다. 



각 종의 특성에 맞게 디자인된 주토피아의 교통수단

▲성차별

시골 출신 토끼 주디는 경찰이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주디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토피아> 속 세상에서 경찰은 주로 육식동물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은 주디는 경찰학교에 입학해 갖은 노력을 다한 뒤 수석 졸업의 영예를 얻는다. 주토피아 시장은 ‘최초의 토끼 경찰’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주디를 주토피아 경찰서에 발령낸다. 

하지만 주디의 경찰 생활은 첫날부터 녹록하지 않다. 경찰서 방문객을 맞이하는 치타 경찰관은 주디에게 “귀엽다”고 말한다. 주디는 “‘귀엽다’는 표현은 토끼끼리는 괜찮지만, 다른 종족이 토끼에게 하면 차별적인 표현”이라고 가볍게 항의한다. 경찰들이 모인 사무실의 구조도 호랑이, 곰 등 육식동물의 체형에 맞게 큼직해 주디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의 임무를 배치하는 자리에서 서장은 모든 경찰에게 관내에 발생한 의문의 실종사건을 맡기지만, 마지막 남은 주디에겐 주차단속을 시킨다. 주디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동물들의 가짜 낙원, 주토피아



주디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는 여성, 육식동물은 대체로 남성이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 중심의 경찰 조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은 남성중심 조직에서 동료로 인정받기는커녕 잔심부름을 하기 일쑤인 여성의 상황을 보여준다. 



▲인종차별

주디의 조력자가 되는 여우 닉은 소소한 사기꾼이다. 하지만 닉은 잘못에 비해 과도한 냉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닉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지만, 퉁명스러운 표정의 거대한 코끼리 점원은 “어떤 손님에게든 서비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아이스크림을 팔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에게서 큰 도움을 받는 주디마저 ‘여우 퇴치기’를 들고 다닌다. 주토피아에서 여우는 ‘간사하고 교활한 동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이는 닉과 같은 모든 개별 여우들에게 적용된다. 

<주토피아>에는 닉의 어린 시절이 짧게 회상된다. 어린 시절의 닉은 들뜬 마음으로 또래 친구들이 있는 스카우트단에 가입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닉에게 입마개를 씌운채 쫓아낸다. “우리가 육식동물을 믿을줄 알고?”라는 비웃음과 함께다. 어린 시절부터 종차별을 당해온 여우는 사회의 편견을 내면화해 그에 맞는 모습으로 활동한다.

주토피아 경찰서에서 고군분투하는 신임 경찰 주디 홉스

성차별 겪는 주디(왼쪽)와 인종차별 겪는 닉

<주토피아> 속 닉의 처지는 미국 사회의 흑인이나 히스패닉, 한국 사회의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겪을 법한 편견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상과 실천

주토피아의 사자 시장 라이언하트는 ‘모든 동물 함께 살아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어울려 살아가자는 내용이다. 시장의 보좌관 역시 육식동물이 아닌 순한 표정의 양 벨웨더다. 

하지만 시장이 자신의 이상을 생활 속에서 속속들이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시장은 보좌관을 무시하고 냉대하기 일쑤다. 사실 양을 보좌관으로 채용한 이유도 양 종족의 표를 얻기 위함이었다. 시장은 토끼 주디를 주토피아 경찰서에 발령내는 ‘진보적’ 결정을 내리지만, 주디가 경찰서에서 겪을 실제 어려움은 헤아리지 않는다. 

겉과 속이 다른 시장, 라이언하트

아무리 근사하고 거창한 정치적 이상이라도 그에 맞는 구체적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점을 <주토피아>는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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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책인지 모르고 집었는데, 잘 읽히고 감동도 있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시위 문화에 대해 느끼는 바도 생기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신시아 Y 레빈슨 지음·박영록 옮김/낮은산/248쪽/1만5000원


한 사회가 오랜 시간 다져온 생각이나 제도 따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바깥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이권을 지키기 위한 주류의 저항 때문이든, 낡은 습속을 벗기 싫어하는 보수적 사람들 때문이든, 세상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민초들 때문이든.


그래서 낡은 틀이 바뀌는데는 새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땀, 심지어 피가 필요하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대체로 법적인 성인을 가리킨다. 허나 이렇게 다가올 새 세상에는 어른 뿐 아니라 곧 어른이 될 청소년도 살아갈터이니, ‘법적인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타당할까. 


우리는 10대의 ‘본능적인 정의감’이 역사의 동력이 된 사례를 알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4·19 혁명에서 청소년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 청소년들은 서툴고 사려 깊지 못할지언정, 옳은 것을 믿고 그른 것을 물리치려는 열정만은 어느 세대에도 뒤지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원제 We‘ve got a job: The 1963 Birmingham children’s march)는 바로 그런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청소년용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은 쉬운 문체로 간결하게 서술됐다는 뜻이지 내용이 빈약하거나 깊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흑인 민권 운동이 폭발했던 196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시가 배경이다. 이곳은 미국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남부다. 이때로부터 100여년전 벌어진 남북 전쟁의 여파로 미국내 노예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는 아니되, 백인과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 남부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실질적인 흑백 분리 제도가 시행중이었다. 유색인종은 백인의 식당에 가지 못했고, 백인과 같은 좌석에서 영화를 볼 수 없었고, 백인의 음수대를 이용하지 못했다. 백인만 교육받는 학교, 백인만 치료하는 병원이 있었다. 흑인에겐 일자리도 드물었다. 민간기업은 물론 정부도 흑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흑인 여성은 가사도우미, 흑인 남성은 저임금 일용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영장, 골프장에도 흑인을 출입시켜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백인들은 수영장, 골프장을 아예 폐쇄시켰다. 흑인이 선거인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선 시험에 통과해야 했는데, 문제란 것이 가관이었다. 앨라배마주의 67개 군의 이름을 모두 외워 쓰라는 것은 약과였다. “비누 한 개에는 얼마나 많은 거품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받는다면 출제자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텐데, 그때 실제로 그런 문제가 나왔다. 


같은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시에 살던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서 일어나길 거부한 뒤 대대적인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난 것이 1955년이었다. 몽고메리시는 이듬해 버스내 인종 분리 정책을 폐지했다. 그러나 버밍햄시는 몽고메리시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버밍햄시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경찰의 3분의 1이 인종주의 집단 KKK 소속이었고, 민권의 민자만 꺼내도 폭탄 테러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인종 분리 법률을 어긴 흑인을 잡는데는 그토록 민첩하던 경찰은 흑인의 가정집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백주에 흑인을 집단구타한 백인 패거리들을 색출하는데는 무척 무능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는 한 그것은 세상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고 했다. 당시 버밍햄시가 바로 ‘불의’가 있는 곳이었다. 킹 목사, 프레드 셔틀스워스 목사 등 명망 있는 ‘외부세력’이 이곳 버밍햄시로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저항세력이 응집하는만큼 탄압의 강도도 더해갔다. 하도 폭탄이 많이 터져서 ‘바밍햄’(Bombingham·Bomb은 폭탄이라는 뜻)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검둥이들이 제멋대로 굴고, 통제되지 않으며, 거만해지고, 법을 어기며, 난폭해지고, 무례해져 가고 있다”고 주장한 불 코너란 이가 경찰서, 소방서, 공립학교, 도서관, 보건당국을 감독하는 공공안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태였다. 흑인 혹은 백인 민권운동가에 대한 테러가 저지되기는커녕 조장되는 분위기였다. 


운동 지도부는 기발한 시위 방식을 개발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비폭력 노선을 지킬 것을 천명한 지도부는 백인 식당에서 밥 먹기, 백인 상점에서 물건 사기, 승인받지 않은 거리 행진하기 등을 계획했다. 경찰이 제지하면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체포되도록 권했다. 그렇게 약 1000명이 체포되면 버밍햄시의 교도소가 가득차고 행정은 마비된다. 그렇다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의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이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물론 용감한 흑인 성인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를 들으며 “아멘!”, “옳소!”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생각할게 많다. 눈앞의 폭력이 두려웠고, 훗날의 생계가 걱정됐다. 이빨을 드러낸 채 시위대를 노려보는 경찰견 셰퍼드나 사람을 몇 미터나 뒤로 나뒹굴게 하는 물대포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당할 수 있을까. 체포된 뒤 직장에서 해고되기라도 한다면, 누가 우리 가족을 먹여살릴 것인가. 예배에 모이는 사람은 많았지만,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는 사람은 하루에 10명 안팎이었다. 이래서는 교도소를 채울 수 없다. 운동은 흐지부지되기 직전이었다.  




1963년 버밍햄시의 시위 사진. 경찰견, 물대포가 상시대기중. 


그때 청소년들이 나섰다. 아이들은 앞뒤를 재지 않았다. 물론 알 것은 알만한 나이였다. 여행가는 날이면 엄마가 새벽 3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이유, 근사한 백화점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없는 이유는 백인들이 자신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흑백 분리 제도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았다. 아이들은 “나는 감옥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논란이 있었다. 자식이 스스로 감옥에 가겠다는데 흔쾌히 허락할 부모가 얼마나 될까. 운동 지도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아무리 목표가 숭고하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아이를 동원해도 되는가. 킹 목사가 반대하자 셔틀스워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선의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데이는 1963년 5월 2일이었다. 아이들이 즐겨듣는 아침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는 이날 아침 “얘들아, 공원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점심은 거기서 나눠 줄 테니까 칫솔만 챙겨와”라고 말했다. 백인 아이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흑인 아이들은 이것이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임을 눈치챘다. 흑인 청소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16번가 침례교회에 모였다. 1시가 되자 디제이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찬송을 틀었다. 아이들이 교회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막아선 경찰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들을 호송차에 구기듯 넣었으나, 청소년 시위대는 끝이 없었다. 결국 스쿨 버스가 동원됐다. 아이들은 소풍이라도 가듯 웃고 손 흔들며 체포됐다. 이날 하루만 500~800명의 청소년이 수감됐다. 4월 한 달간 체포된 성인 수의 2~3배였다. 이튿날, 그 다음날에도 아이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구치소가 넘쳐 헛간을 임시 수용소처럼 써야 했다. 


버밍햄시의 여론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KKK단과 흑인 민권 운동가들 사이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인종 통합에 찬성하는 온건한 백인들도 아이들이 시위에 나선다거나, 킹 목사 같은 ‘외부세력’이 개입하는 건 못마땅해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편견이라는 공기를 마시고 자란 백인 아이들은 백인과 흑인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몰랐다. 이들은 어른이 돼 다른 지역에 가보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흑인 공동체 안에서도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었다. 안정된 중산층 흑인들은 킹, 셔틀스워스의 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여겼다. 마침 온건한 성향의 시장이 취임하는 시기였기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킹은 그런 사람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올바른 시기”라고 쏘아붙였다. 


시위가 이어지자 5월 7일부터 흑인과 백인 지도자들은 협상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비폭력을 대원칙으로 세웠지만, 시위가 길어지자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자칫 폭동으로라도 이어진다면 운동의 대의는 훼손된다. 백인들로서도 생애 처음 겪은 혼란을 빨리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인종 분리 시설 완화와 흑인의 고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문이 10일 발표됐다.


물론 세상은 하루 아침에 뒤집히지 않았다. 인종적 편견은 습관 같았다.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고치기는 쉽지 않다. 흑인이 손님으로 들어오자 그냥 자리를 피해버리는 백인 종업원이 여전히 목격됐다. 9월 15일에는 16번가 침례교회에 폭탄이 터져 여학생 4명이 죽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범인들 좀처럼 잡히지 않다가 1977년, 2001년, 2002년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폭탄 테러 당한 16번가 침례교회


그래도 작지만 큰 발전이 있었다. 합의문 발표 이후 흑인 아이들은 시험 삼아 극장, 식당, 상점에 들어가봤다. 놀라는 종업원이나 손님도 있었지만, 이들을 쫓아내거나 경찰에 신고하진 않았다. 물대포를 맞고 개에 물리고 경찰에 뒤통수를 맞고 구치소에 갇히면서 얻어낸 권리였다.  


지금 미국의 최고 지도자는 흑인이다. “흑인에게 물건 안판다”고 말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권리는 오래전 많은 이들이 힘겹게 싸워 조금씩 얻어낸 것이었다. 자유, 존엄, 인권 같은 가치들은 누구에게도 유예되어서는 안된다. 청소년들도 누려야할 이러한 가치를 위해 청소년들이 나서는 과정을 이 책은 차분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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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이후/340쪽/1만6500원


국가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러나 간혹 나라가 보호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난민이다. 주로 정치, 종교, 성정체성과 관련해 자유를 제약받거나 생명을 위협받아 난민이 된다. 2011년말 현재 전 세계 난민의 수는 3000만명을 넘는다. 나라의 체제가 불안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중동 지역 나라와 소말리아, 수단, 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난민이 대거 발생한다. 


중동이든 아프리카든 한국과는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1992년 국제연합의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01년부터 난민 인정자가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모두 294명이다. 신청자 4516명중에 대기중인 사람이 포함됐다고 치더라도 인정률이 10%대에 불과하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때 ‘난민’이었음을 기억한다면 한국의 난민 심사는 지나치게 까다롭고 야박하다고 할만하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욤비 토나는 한국의 좁은 난민 심사 관문을 통과한 ‘행운아’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 기각, 이의 신청 기각에 이어 법무부를 상대로 한 행정 소송까지 치른 끝에 겨우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하는데 6년이 걸렸다. <내 이름은 욤비>는 욤비 토나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국인 박진숙이 인터뷰해 정리한 책이다. 대학에서 아동가족학과 박사 과정을 이수중인 박진숙은 이주 여성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 에코 팜므의 대표이기도 하다.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국토를 가진 나라다. 욤비는 그곳에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욤비의 집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집안일을 도와준 노예들이 있었는데 욤비는 누군가를 ‘인간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신분 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에 있는 킨샤사 국립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욤비는 나라의 민주화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당시 콩고는 독재자가 독재자의 뒤를 잇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장학금을 대주겠다는 한 교수의 조교가 되면서 욤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한동안 욤비와 친분을 쌓은 교수는 어느날부터 욤비에게 낯선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법, 외모로 사람의 직업이나 나이를 짐작하는 법, 모르는 언어로 된 문서를 암기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교수는 비밀정보국의 지령으로 학생을 정보원으로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후 욤비는 정보국 요원이 됐다. 그 사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가는 듯 했다. 


정권이 교체되는 혼란한 와중에 욤비는 정부군과 반군이 이권을 주고받으며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입수한다. 야당에 관련 문서를 건냈다 들킨 욤비는 곧 국가반역죄로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한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 욤비는 가짜 여권을 가지고 여장을 한 채 중국으로 떠난다. 당시 지인이 영향력을 행사해 비자를 구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욤비는 중국이 ‘마오의 나라’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제3국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 대사관을 들락거리다 얻은 비자가 한국행이었다. 욤비는 어느 보따리 장수의 옷꾸러미를 전해주는 대가로 인천행 배에 몸을 싣는다. 욤비는 콩고의 가족에게 “평양에 가서 연락하겠다”는 편지를 썼다. 남한과 북한도 구분하지 못하는 콩고의 전직 정보요원이 말 한 마디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땅에 도착한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이후로는 6년에 걸친 고생담이 펼쳐진다. 대사관은 곤경에 빠진 해외의 자국민들에게 마지막이자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러나 욤비는 자국 대사관을 찾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오히려 정부와 관련 있어 보이는 사람은 일단 피하고 봐야했다. 


한국이 난민협약 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아 난민신청서류를 낼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일사천리로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욤비의 기대와 달리 한국은 ‘열린 사회’가 아니었다. 관청의 문은 높았고,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난민신청 기간에는 원칙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욤비에겐 돈이 없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담당자는 “심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 장담 못한다. 일을 구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불법이란 걸 잊지는 말라”며 애매한 말을 남겼다. 욤비는 살아남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돕기는커녕 착취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불법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빌미로 임금을 적게 주거나 더 가혹한 노동을 시키는 ‘사장님’들이 있었다. 이 ‘악덕 사장’들은 불법 체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능이 떨어지는 기계 부속품으로 봤다. 


일보다 모진건 편견이었다. 한국의 공장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 한국인이 왕, 조선족이 신하였고 필리핀이나 베트남 출신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카스트 제도의 밑바닥에는 아프리카계 흑인이 있었다. 욤비는 종종 이름 대신 “새끼야”라고 불렸다. 길거리에 나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사람들, 버스 옆 자리가 비어도 앉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인종차별이야 여느 이주노동자도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욤비에겐 난민신청이라는 더욱 강고한 벽이 있었다. 사장 눈치를 보며 휴가를 내 경기도 구석에서 서울까지 수차례 인터뷰를 하러 와야했다. 물은 걸 또 묻고, 다음 번에 다시 묻는 기나긴 절차가 이어졌다. 조사관들의 기본 태도는 ‘불신’이었다. 욤비는 정치적 이유로 가족을 남겨둔 채 조국을 떠나온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익명의 지인들로부터 비공식적인 도움을 받아야했다. 콩고에 남은 이들의 안전을 위해 숨겨야할 정보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진술의 앞뒤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욤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통역의 어려움도 있었고, 콩고의 제도, 문화에 대한 정보 부족과 그에 따른 오해도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활동가가 콩고까지 가서 가져온 서류들도 무시했다. 한 정보요원이 나라를 배신하고 해외로 탈출했다는 현지 신문 기사는 “콩고 신문은 조작이 쉽다”는 이유로, 어렵게 빼낸 욤비에 대한 심문 기록은 “손으로 쓰여저 신빙성이 적다”는 이유를 댔다. 게다가 조사관들이 콩고에 대해 얻는 정보의 원천은 대부분 주한 콩고 대사관에서 나왔다. ‘배신자’ 욤비를 잡아들이려는 대사관이 그에 대해 호의적인 정보를 줄 리 없었다. 


그래도 <내 이름은 욤비>에서 감동적인 대목은 필요할 때마다 ‘기적’같이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이다. 콩고 대사관 직원들로부터 도망쳐 서울역 앞을 헤맬 때 다가와 이주노동자를 돕는 신부를 소개해준 학생, 굶주린 욤비에게 음식을 내준 여관 아주머니, 생판 모르는 욤비에게 거처를 제공한 어느 출판사 사장, 수임료 한 푼 없이 법률 조언을 해준 변호사들…. 욤비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으나, 그들은 순전한 선의에서 욤비를 도왔다. 


물론 ‘선의’가 언제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갓난 아기를 스다듬는 것은 호감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만지는 사람의 손이 지저분하다면 그 호감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난민 같은 약자에 대한 도움도 마찬가지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정부에 관계된 인물을 소개시켜준다면 받는 사람은 그것을 선의라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욤비의 지난한 이국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면 ‘연대의 중요성’ 혹은 ‘친구의 필요성’ 정도가 될 것 같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힘든 노동과 기나긴 법적 절차에 지쳐가던 욤비가 힘을 얻은 것은 난민지원단체 ‘피난처’에서의 활동이었다. 욤비는 피난처에서 몇 차례 자신의 경험을 강의했고, 나중에는 아에 그곳에서 일을 했다. 월급은 공장에 다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적었지만, 피난처에서의 경험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난민을 돕는다는 보람과 자기 자신에 대한 치유를 모두 안겨줬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욤비는 한국에 난민신청을 한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해피 엔딩’을 경험한 소수에 속한다. 그러나 욤비의 해피 엔딩은 외견상 그럴 뿐이다. 욤비는 콩고에 남아 은둔 생활을 하던 아내와 세 아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한국에 온 가족들이 욤비처럼 고된 노동을 하거나 막막한 고독감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한국에 적응한 뒤로는 문화적 충돌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한국어, 한국문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한 사실은 알아도,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한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콩고 음식은 맛없다며 한국 음식을 못하는 엄마에게 투정을 했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홀로 남겨진 아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슈퍼에 가서 물건 하나 사기 힘들었던 그에게 한국은 또다른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내는 심리상담사와의 상담 이후 상태가 좋아졌고,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발을 디뎠다. 


<내 이름은 욤비>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자처하기 전에 생각해봐야할 몇 가지 문제점을 함께 제시한다. 외국과의 사이에 사람, 돈, 상품이 많이 오간다고 해서 국제사회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기준을 충족하고 타문화의 가치를 이해해야 국제사회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2011년 기준으로 13%인데 이는 세계 평균인 30%에 크게 못미친다. 이른바 ‘다문화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다문화 교육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문화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삶의 뿌리가 뽑힌 채 한국에 이식된 사람을 스스로 서게할 수 없다. 다문화 교육의 목표는 개인의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의 핵심 가치에 적응하게 하는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난민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뤄지는 이의 삶이 극적이고 서술이 평이해 청소년도 읽을만하다. 책 중간중간에 콩고의 역사나 난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팁들을 넣어 교육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배려했다. 책 전체의 주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이름은 욤비>를 읽고 나면 한국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수출할 수 있는 건 핸드폰, 자동차 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경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욤비는 성공회대 대학원에 진학해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한국이 민주주의적 제도를 선취할 수 있었던 배경, 경제성장의 이면 등에 대해 토론했다. 이 무형의, 그러나 소중한 ‘상품’을 계속 수출할 수 있는지는 많은 시민들의 마음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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