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준이치로'에 해당되는 글 3건

  1. 백인 여성에 대한 매혹, <미친 사랑> (2)
  2. 에로티시즘과 장애물, <열쇠>
  3. 80년전의 매저키스트,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내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또다른 소설 <미친 사랑>(시공사)도 읽었다. 이 소설은 다니자키의 초기 문학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고 하며, 서구에 일본 문학이 알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문학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다니자키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니라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하지만, 


솔직히 <미친 사랑>은 꽤 통속적이라서 <열쇠>의 정밀한 심리적 속임수나,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엔 미치지 못한다. 절반쯤 읽다가 "연구자도 아닌 내가 왜 1920년대 일본 풍속 소설을 읽어야 하나"는 생각이 들어 덮으려던 중 힘을 내 마저 읽었는데, 


막상 읽고나니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신문 연재 도중 "신문사의 형편에 따라"(아마도 검열 당국의 개입에 따라) 연재를 중단했다가 더 마이너한 잡지로 옮겨 연재를 재개해 여전히 뜨거운 반응을 얻은 사정이 짐작된다. (당시 일본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나오미즘'이란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주인공 가와이 조지는 시골 부농의 아들로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며 겉보기엔 성실한, 마음은 불성실한 삶을 사는 인간인데 어느날 15세의 카페 여급 나오미를 만나 그를 자신의 취향대로 멋진 여자로 키워 같이 살겠다는 꿈을 꾼다. 처음엔 남자의 뜻대로 잘 커나가던 나오미는 그러나 금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사치하고 방탕하며 문란하며 기만적인 생활로 남편을 곤궁에 빠트린다. 남편은 달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급기야 나오미를 쫓아내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에 대한 매혹을 이기지 못해 나오미의 뜻대로 완전히 굴복해 버린다는 이야기다. 





나오미는 그 이름의 느낌대로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여자다. <미친 사랑>에는 서양, 근대, 백인에 대한 주인공(혹은 작가 혹은 일본인)의 매혹이 드러난다. 가와이 조지는 나오미의 곧은 다리, 하얀 살결에 매혹됐다가, 그녀의 댄스 교사라는 몰락한 러시아 귀족 여성을 만나서는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 이런 식이다. 


내가 서양 여자와 악수하는 '영광'을 누린 것은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슈렘스카야 부인이 그 '하얀 손'을 나에게 내밀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그 손을 잡아도 되는지 어떤지 잠시 망설였을 정도였습니다. (...) 악수하는 것조차 미안하게 생각되었는데, 그 부드럽고 얇은 옷자락을 한 겹 사이에 두고 그녀의 가슴에 안겨버렸으니, 나는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 같았고, 내 입김에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땀이 나서 끈적거리는 이 손이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까, 그런 것만 마음에 걸렸고, (...)



그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어린 아내 나오미에 대해 가와이 조지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흔히 배가 고프다거나 할 때는 맛없는 음식을 정신없이 우적우적 먹어대는 경우가 있습니다. 차츰 배가 불러오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 배 속에 채워 넣은 음식이 얼마나 맛이 없는지를 갑자기 깨닫자마자 단번에 속이 메슥거리고 토할 것처럼 되는-말하자면 그것과 비슷한 심정이겠지만, 오늘 밤에도 여전히 이(나오미의) 코를 상대로 얼굴을 맞대고 자야 할 것을 상상하면, '이제 이 음식은 질렸다'고 말하고 싶은, 뭔가 체한 것처럼 속이 거북하고 나른하게 맥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남자는 곧 나오미의 매력에 다시 빠져들지만, 서양 여성의 아름다움에 한때 압도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의 태도는 자신이 매혹된 상태를 숨김 없이 드러내는 동시, 이를 비웃을 사람은 노골적으로 비웃어달라는 자기 풍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스스로 당당하면서 또 조롱감이 되는 그 이중적 태도를 보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역시 범상한 정신 상태의 소유자는 아닐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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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다룬 의학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의 차이는 무얼까. 아마도 섹스를 하기 위해 포르노는 다큐보다 조금 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섹스가 벌어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몇 겹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혹은 섹스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만 남겨두고), 카메라나 조명은 관객의 목적은 충족시키되 너무 직설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영상의 각도, 움직임, 명암에 변화를 줘야 한다. 처음부터 나체로 나온 파트너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섹스를 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미동도 없이 정면으로 비춘다면? 그건 의학 다큐다. 


에로티시즘은 방해받을 때 자극받는다. 지난 세기의 정신분석가들은 에로티시즘을 금기와 연계시키기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창비식 표기로는 타니자끼 준이찌로오!)의 <열쇠>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것도 매우 일본적인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을 고취시키기 위해 정말 세심한 방해 장치들을 몇 겹이나 꾸며두었다. 


50대의 남편과 40대의 아내. 남편은 대학 교수고, 아내는 옛스겁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이다. 남편은 아내가 엄청난 성욕을 가졌지만 이를 개발하지 않은 채 수동적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그 성욕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을 미안하게 여긴다. 남편은 남편대로 불만이 있는데, 아내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욕구마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은 남편과 아내의 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일기를 훔쳐본다고 짐작하면서도, 이를 방관한다. 오히려 아내에게 자신의 내밀한 욕구를 전하는 매체로 일기를 이용하려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일기를 쓴다. 아내는 남편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열어본 적도 있지만 결코 읽은 적은 없다고 적는다. 이것이 일기 본연의 목적대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한 것인지, 남편에게 이렇게 알리고 싶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둘에게 일기는 자신의 마음, 상대방, 독자를 모두 속이는 도구다. 둘은 일기라는 비밀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미디어를 통해서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알린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변태남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29세에 9살 연하 아내 치요와 결혼했으나 그다지 애정을 느끼지 못하던 차, 함께 살게된 14살의 처제에게 빠져들어 버림. 정작 동료 평론가 사토 하루오가 치요에게 연정을 느끼자, 그에게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세상에 알림. 


그러나 일기만으로는 안된다. 남편은 부부 관계에 제3자를 개입시킨다. 딸의 정혼 상대로 눈여겨 보던, 즉 사위 후보자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투의 대상이 있을 때 에로티시즘은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남편, 아내, 사위 후보자는 몇 차례 함께 브랜디를 마시는데, 아내가 술에 취해 사라져 욕실에서 쓰러지면 두 남자는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의학적인 처치를 한다. 의학적인 처치라고 하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게 사실 그다지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라는데서 문제가 달라진다. 아내는 자신이 술을 마신 뒤 혼수상태에 빠지리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고, 두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속고 속이며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임이 벌어진다. 나중엔 부부의 딸까지 이 게임에 뛰어든다.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겹의 속임수와 장애물로 섬세하게 구축한 에로티시즘의 탑을 투박한 살의와 욕망의 덩어리로 변환시켜버린다고 할까. 작가는 70세에 이 소설을 썼고, 그로부터 9년 뒤 세상을 떴다. 지난해 이맘 때쯤 읽었던 , 역시 변태적인 성애의 세계를 다뤘던 <만>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각각 42세, 63세에 썼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참 꾸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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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소설 중에 '막장스러운' 내용이 많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만>의 줄거리는 그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에세이 <그늘에 대하여>는 내가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한 적도 있는 책인데, 혹시라도 내 추천에 <그늘에 대하여>를 읽은 뒤 <만>이나 그외 다른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볼까 하는 마음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타임스는 1965년 8월 6일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부음 기사에서 그를 '동양의 D H. 로렌스'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에서 드러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성관념은 로렌스식의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만>의 네 남녀를 한 마디로 '변태'라 불러도 무방하다. 차라리 다지나키 준이치로를 매저키즘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동양의 자허마조흐'라고 부르면 그런대로 수긍하겠다. 



멀쩡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설을 써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소설 속에는 네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는 돈, 남자는 번듯한 직업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어 결혼했지만 그다지 사랑이 넘치지는 않는 가키우치 부부, 비너스 같기도 하고 관음보살 같기도 한 절세의 미녀 미쓰코, 그의 숨겨진 애인이자 어딘가 음흉해보이면서 잘생긴 얼굴을 가졌지만 성적으로는 무능한 와타누키의 4인이다. 일단 어딘지 건강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구도는 확실히 갖춰졌다. 


처음엔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가 통정한다. 이 소설은 1928~1930년 사이 연재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광수, 카프, 김동인 등이 계몽하거나 계급의식을 고취하거나 바람난 남녀 이야기를 그릴 때, 일본에선 본격 레즈비언 소설이 나왔던 셈이다. 둘은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갈수록 대담해져 이곳저곳으로 데이트를 다니고 남편이 직장에 나간 틈을 타 가키우치 부부의 침실도 이용한다. 다음으론 미쓰코의 숨겨진 애인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됨됨이나 신분이나 어느 것 하나 훌륭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미쓰코는 왠지 그의 잘생긴 얼굴만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미쓰코는 양성애자다. 와타누키는 미쓰코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가키우치 부인을 찾아와 서약서를 쓰자고 제안한다. 서약서의 내용이란 자기가 미쓰코와 결혼하게 가키우치 부인이 도와주면, 결혼 후에도 미쓰코와 가키우치 부인의 관계를 용인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가장 결속력이 강한 사랑은 역시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 사이에 맺어진다. 둘은 일종의 자살소동을 벌여 자신들의 의지를 각자의 남편, 연인에게 알리고자 한다. 동성결혼이 허용된 것도 아니니 이혼을 하거나 파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둘의 관계를 인정해달라는 시위 같은 것이다. 이 소동 와중에 이번엔 미쓰코와 가키우치씨의 인연이 맺어진다. 미쓰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지 않으면 못견디는 타입의 여자다. 결국 어느덧 와타누키의 존재는 흐지부지 사라지고, 미쓰코가 가키우치 부부로부터 동시에 애정 혹은 숭배를 받는다. 미쓰코는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이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방법까지 고안한다. 


매저키즘은 통념과 달리 그저 "날 떄려달라"며 육체적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 숭고한 것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구도에서 가키우치 부부는 일종의 매저키스트라 할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을 마스무라 야스조가 영화화한 <만지>(1964) 


문학동네판 작품집에 <만>과 함께 실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1949~1950년에 연재된 작품이다. 일본 고전문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작품에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기묘한 것은 그 사랑을 잊기 위해 쓰는 방법들이다. 호색한 헤이쥬는 "흠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아름다운 여인" 지쥬노기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그녀로부터 정을 떼기 위한 수를 쓴다. 헤이쥬는 하녀가 내다버리려는 그녀의 변기를 다짜고짜 탈취한 뒤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살펴본다. "여자의 변기를 훔쳐내서 그 내용물을 본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더러운 것을 싸는가 하고, 자기도 대변에 징그러워지며 정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기를 가져가는데는 성공한 헤이쥬도 정을 떼는데는 실패한다. 그 안에는 "반쯤 담긴 향나무 색깔 액체 속에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에 두서너치 길이의 검정색이 섞인 누런 덩어리가 세 조각 정도 둥그스름하게 뭉쳐져" 있었는데 헤이쥬는 이것을 보자 정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지어 냄새를 맡고 나무 막대기로 찔러 맛을 보기도 한다. 그는 생각한다. "배설물까지도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 사내를 뇌쇄하려고 손을 쓰다니, 얼마나 얼마나 철저한 여자냐"


책에는 아예 사람의 정을 떼기 위한 수행법까지 등장한다. 이 수행법은 부정관(不淨觀)이라 불린다. 관능적인 쾌락이 한때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위해 내장이 튀어나오고 구더기가 슨 시체 같은 것을 매일 찾아 그 앞에서 묵상을 하는 방법이다. 즉 "내 몸은 부모님의 음탕한 즐거움의 산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부정관을 수련한 남자는 수행에 성공하지 못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대신 역시 성을 다루지만 상대적으로는 온건하고 서정적인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만일 다지나키 준이치로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일본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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