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에 해당되는 글 3건

  1. 삶은 고된가, 김훈의 '공터에서'
  2. <화장>에 대한 몇 가지 생각
  3.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휴먼 스테인>과 <화장>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해냄)를 읽다. 작가는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의 인상과 파편들을 엮은 글"이라며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뒤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후기에 썼다. 소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차세의 삶은 실제 작가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동수 일가 4인의 삶이 각 장마다 시점을 달리하며 제시돼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마동수는 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해방후 귀국했다. 피난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마장세, 마차세 2남을 두었으나, 집에 발붙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았다. 간혹 집에 들어올 때 고등어나 쌀을 가져와 며칠 쉰 뒤 다시 사라지는 식이었다.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은 함흥 철수 때 남편, 그가 안고 있던 젖먹이 딸과 헤어졌다.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마동수와 살림을 차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도순의 삶은 여전히 신산했다. 이도순의 말년은 요양원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 싸우면서 사그러졌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현지에서 전역한 뒤 귀국하지 않고 미크로네시아 일대에서 고철 사업체를 차렸다. 서울에 며칠 돌아온다 해도 가족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마차세는 형이나 아버지에 비해선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전역후 복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했으며, 미대를 나온 여성과 결혼했고, 병이 깊어가는 노부모를 돌봤다. 밥벌이가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아내가 학원 강사일을 해 돈을 벌었다. 마차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한국의 가장으로 살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마차세의 처 박상희의 이야기가 살짝 끼어든다. 


'공터에서'를 "소설판 '국제시장'" 혹은 "거꾸로선 '국제시장'"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지근거리에서 보며 자랐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세대), 그래도 마침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세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시장'에서 코믹한 기운을 모조리 뺀 뒤, 김훈 특유의 비장미가 섞였다고 하겠다. 거기에 '국제시장'에 비해서는 아버지 세대와 조금 더 거리를 두려는 의식이 강하다고 하겠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연고지 없는 열대의 섬을 떠도는 마장세처럼. 그러나 마장세조차 기이한 우연과 그 자신의 과오로 인해, 결국 한국땅으로 소환되고 만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 우리가 발 딛고 선 문화적 터전, 과거로부터 온전히 놓여날 수는 없다고 결국 작가는 수긍하고 있다. 마차세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평생 치러보지 않은 부모 제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그의 아내 박상희다. 소설에서 박상희는 이상적인 아내, 좀 더 과감히 말해 구원의 여신처럼 그려진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는 문장은 책 뒤 표지, 그리고 신문의 책 광고에도 나온다. 세상살이의 엄혹함, 밥벌이의 고단함은 김훈 소설의 주된 정조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을 봐도, '공터에서'를 읽어도 아버지 세대에게 그런 정조는 뿌리 깊은 것 같다. 광복 이전부터 전쟁 이후까지 마동수의 삶, 베트남전에 참전한 마장세의 삶이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성장기의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간 마차세의 삶도 무척이나 고되다. 입사 3개월만에 문 닫은 경제잡지에서 나온 마차세는 수차례의 면접에서 떨어진 뒤 오토바이 수송일을 하는데, 육중한 트럭 사이, 여름철 녹아내려 달라붙는 아스팔트 자국을 끌며 배달을 하는 묘사가 그럴싸하다. 단지 나의 성장배경이나 현재의 생활환경은, 이렇게 고단한 삶의 묘사에 대해, 적자생존의 잔혹함을 다룬 잘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이상의 이입을 허락하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고단함을 강조하는 작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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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시사회를 다녀왔다. 지금 이 영화에 대해 총체적인 감상을 적기는 어렵다. 그저 짤막한 단상 정도. 스포일러 포함. 





1. 오상무(안성기)가 똥을 싸는 아내(김호정)를 욕실에서 씻어주는 장면은 정확하다. 빼고 더할 것이 없다. 알려진 바로는 임권택 감독은 김호정에게 하반신을 노출하고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일에서야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배우와 미리 상의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는 노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다른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똥오줌을 가리면서 사람이 된다. 아이는 똥오줌을 가릴 때쯤 서서히 자아를 갖춘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어른이 똥오줌을 못가린다는 것은 그의 신체적 능력이 아이 수준으로 퇴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처지를 알만한 어른으로선 감내하기 힘든 일이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에서 병을 앓던 아내도 침대에서 똥을 싸는 순간 그렇게 절규했다. 평생 우아하고 지적인 삶을 살았던 서유럽 여인이었기에 더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화장>으로. 오상무와 딸은 병실에서 막 사온 떡볶이와 순대를 뜯는다. 그때 병상의 아내는 저도 모르게 똥을 지린다. 딸은 어쩔줄 몰라하더니 곧 화장실로 가 오열한다. 오상무는 묵묵히 아내의 성인용 기저귀를 간다. 바지를 내리고 기저귀를 빼고 휴지로 닦고 새 기저귀를 채우고 바지를 올린 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향제를 뿌리기까지 조금의 주저함, 망설임도 없다. 아마 안성기와 김호정은 이 장면을 매우 여러번 연습했을 것이다. 아내는 이때쯤부터 확연히 쇠약해진다. 욕실에서 하반신을 드러낸 채 남편에게 뒤를 맡기는 장면은 그 절정이다. 아내는 스스로 씻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도 씻기는커녕 스스로 몸도 못가눌 사정임을 노출한다. 다 씻었다 싶을 때 아내는 다시 똥을 지린다. 그리고 어눌한 발음으로 미안하다며 오열한다. 중한 병, 다가운 죽음 앞에 몸과 마음이 모두 허물어진 인간을 이 장면은 정확하게 드러낸다. 비참하고 사실적이다. 병구완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메멘토 모리'라고 속삭이는 장면. 죽음은 그렇게 티를 내며 찾아온다. 부끄러움도 지저분함도 모른 척 하고.  



간결하고 정확한 장면. 




2. 원작인 김훈의 소설 <화장>을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의 마음이나 작가의 시선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었다. 영화 <화장>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원작의 줄거리를 따른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에 비해 훨씬 쉽게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임권택이 가진 시선의 깊이, 안성기의 연기에 힘입은 바 컸을 듯하다. 사실 안성기는 최근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적이 없다. 그것은 한국의 주류, 젊은 감독들이 이 배우를 다소 기능적으로 기용해왔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다. 하지만 <화장>에서 안성기는 자신이 가진 배우로서의 역량을 숨김 없이 발휘한다.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지만,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가만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오상무는 따뜻한 척하면서도 실은 차가운 인물이다. 한국에 마냥 뜨거운 배우는 많지만(그리고 이런 배우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식되지만), 안성기는 차가움을 잘 표현하는 배우다. 한국 배우들은 차가움을 표현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하는 편인데, 안성기는 임권택이 준 기회를 제대로 살렸다. 사실 안성기 말고 이 나이대의 배우 중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 안성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1%의 후회가 깃든 표정. 


3. 오상무가 추은주를 무용수의 얼굴에 대입하거나, 죽어가는 아내와의 정사 장면에서 떠올리는 장면은 요즘 감각으론 좀 구식으로 보인다. 페데리코 펠리니라면 망설임 없이 찍었겠지만, 지금은 2015년이므로 다른 표현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떠오르진 않는다. 임권택도 그렇게 직접적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오상무의 욕망이 그렇게 직접적이었으므로. 


4. 영화 중반부까지 유일하게 적응하기 힘들었던 요소는 김수철의 전자 음악이었다. 그러나 바삐 전화를 걸면서 걸어 내려오는 오상무를 보여주는 엔딩에선 그마저 어울렸다.


5. 오프닝의 으리으리한 장례 행렬은 종결부에 대단한 반전으로 작동한다. 난 이 장면에 어떤 혐의를 두고 의심했다. 서구의 평론가들이 장이머우, 첸카이거에게 두는 혐의와 비슷한 종류다. 그러나 임권택은 내 뒤통수를 쳤다.  



임권택이 놓은 함정같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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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어렵게 읽은 김에 현대 미국 작가의 소설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책꽂이를 살피니 필립 로스의 두 권짜리 책이 있었다. <휴먼 스테인>. 난 보지 못했지만, 앤서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로 알려진 작품이다. 


읽어보니 <휴먼 스테인>은 영화 제작자들이 탐낼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인습을 넘는 사랑, 그에 대한 질투, 살인, 오해 받는 남자, 인종 갈등, 가족간 불화 등. 이 소설의 통속적인 고갱이만 뽑아내니 이렇다. 허나 영화가 소설을 얼마나 담아냈는지는 좀 궁금하다. (솔직히 회의적이다) 앤서니 홉킨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배우다. 70대에 접어들어서도 젊은이같은 활력을 보이며, 자신의 주장에 굽힘이 없고, 오만한데다 독선적인 동시 지적이며, 세상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히 오해하기 시작하자 그냥 자신의 평생 성과를 뒤로 한 채 은둔해 딸뻘의 여자와 나누는 육체의 쾌락에 탐닉해 살면서도, 명예회복의 기회를 은근히 노리는 이 노인을 연기할 배우로 홉킨스 말고 떠오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콜먼 실크라는 남자의 복잡함은 2시간 남짓한 퍼포먼스로 육화해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빌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 직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모두가 모두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미국 사회의 가짜 도덕주의를 비아냥댄다. 70대의 콜먼 실크와 30대의 문맹인 백인 여성 포니아 팔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쑥덕댄다. 이 쑥덕댐의 선두주자는 사소한 오해를 빌미삼아 콜먼 실크를 대학 강단에서 몰아내는데 앞장선 프랑스 출신 젊은 여교수 델핀 루다. 루에 대한 묘사는 정말 신랄하다. 미국 소도시의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서 20대에 학과장을 맡을 정도의 실력이 있고, 외모도 꽤 괜찮은 것으로 묘사되는 루는, 뼈대 있는 구대륙의 가문을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신대륙으로 건너왔다고 자부하지만 그 자부심의 뼈대가 허약하며, 그래서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조차 솔직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그녀의 지적인 성취란 것도 대개 속물들의 스탠딩 파티에서나 유용히 쓰일법한 허영에 불과하다. 독자에 따라서는 필립 로스의 '꼰대성'을 의심할 수도 있겠다. 


글의 제목을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라고 쓰긴 했지만, 실크와 팔리의 사랑은 나이로 규정되지 않는다. 고전 그리스 문학의 대가와 청소 노동자라는 차이도 그들의 사랑을 규정하진 않는다. 실크는 팔리가 얼마나 섹스에 능한지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살에도 눈이 있어." 이렇게 그들은 더없이 좋은 섹스 파트너다. 하지만 그것이 남녀 관계의 모든 면모를 말하지는 않는다. 실크와 팔리의 관계에는 섹스로 해소되지 않는 잉여가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실크는 그것만 충족되면 좋지만, 가진 것이 없는 팔리는 그것을 충족해도 여전히 허전하다. 팔리가 갖고 싶은 것? 모른다. 독자는 그저 팔리가 실크로부터 받은 비싼 반지를 까마귀의 장난감으로 던져주는 대목에서 팔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필립 로스(1933~)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성의 육체에 끌리는 이야기를 읽으니 김훈의 단편 <화장>도 그러한 주제를 다룬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서울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놓은 끝에 <2004 제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담긴 <화장>을 읽을 수 있었다. 김훈은 물론 필립 로스 같이 지적으로 화려한 논변을 구사하진 않는다. 남자는 화장품 회사의 임원이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병수발을 드는 남자는 회사에 갓 입사한 절은 여직원에게 끌린다. 머리가 빠지고 똥을 지리고 '구린내가 난다'며 먹지도 못하는 아내와,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찬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신입 사원 추은주가 대비된다. 


허나 이 남자는 콜먼 실크와 달리 추은주에게 일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임원인 남자와 신입사원인 추은주 사이의 거리 때문이라 하기엔, 노교수 콜먼 실크와 그 대학의 청소 노동자 포니아 팔리의 거리가 더 멀다. 물론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 다른 젊은 여성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부도덕하게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추은주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콜먼 실크에 비해 어딘가 찌질해 보인다. 생전 아내가 아끼던 개를 안락사시키는 마지막 대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노년 남자의 괜한 히스테리를 목격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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