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4건

  1. 자살 혹은 순교, <신과 인간>
  2.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당신들의 기독교> (1)
  3. 과학과 종교는 싸울 필요가 없다, <다윈의 경건한 생각> (3)
  4. 신이 많은 미국, 신이 없는 덴마크. <신 없는 사회> (5)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애 수록된 글


빛을 저렇게 찍어보고 싶다.  


1996317일 새벽, 알제리 산골 티브히린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슬람무장단체 괴한들이 들이닥쳐 7명의 수사를 납치했다. 괴한들은 체포된 동료와 수사를 교환할 것을 요구했다. 523, 이슬람무장단체는 공식성명을 통해 이틀전 수사들을 죽였다고 발표했다. 알제리 정부는 31일 메데아의 한 길가에서 수사들의 수급을 발견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배우, 감독인 자비에 보부아가 연출한 <신과 인간>은 이 사건을 다룬다. 허나 보부아는 사건의 전말이나 책임 소재 규명,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만행 고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 분석, 복잡한 국제 관계의 해설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신과 인간>이 묘사한 전후 상황을 믿는다면, 수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시간이 충분했다. 이슬람무장단체가 갑자기 발흥한 것도 아니며, 알제리의 치안은 차츰 불안해지고 있었다. 수사들의 안전을 우려한 알제리 정부는 군인이 수도원을 경호하겠다고 제안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아예 프랑스로의 귀국을 권했다. 그러나 수사들은 이런 제안을 모두 뿌리치고 수도원에 남아 납치된 뒤 목숨을 잃었다. 어찌 보면 소극적 자살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왜 그랬을까. 보부아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부분이다.

 

수도원이 있는 마을은 가난하고 평화롭다. 수사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 공동체에 헌신해왔다. 환자에게 의술을 제공하고, 문맹자를 대신해 편지를 부쳐준다. 심지어 마을 처녀의 연애상담까지 해준다. 물론 수사의 본령은 신앙생활이다. 이들의 일과는 신을 섬기는데 종속돼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사 8명은 함께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는다. 카메라는 끝간데 없이 조용하게 펼쳐진 산맥과 대지를 유유히 패닝하곤 한다. 마치 수백 년 전에도, 수백 년 후에도 이곳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장소라는 듯이.



마을 사람들과의 즐거웠던 한때.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쯤이 지나면 이 평화가 곧 깨질 것임을 알리는 두려운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발흥해 테러를 일삼는다.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외국인 노동자의 목을 벤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젊은 여성을 칼로 찔러 죽인다. 자유롭게 사랑해도 좋다고 가르친 여교사를 살해한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대다수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슬람교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코란이 가르친 것을 행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주민들은 불만과 두려움을 보인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근본주의자가 그러하듯, 이들에게도 주민의 공감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실천하면 그뿐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르듯, 종교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악행은 쉽고 끔찍하다.


먼 옛날 서유럽의 제국주의가 뻗쳐나갔을 때 그 선두에 선 것 역시 종교인이었다. 십자가를 앞세운 그들은 미개한 이교도들을 구원의 빛으로 안내하겠다는 신념에 불탔다. 십자가 뒤로는 상인과 군인, 정치인이 따랐다. 이들은 식민지의 물자를 수탈하고 신민을 억압했다. 종교적 열정과 정치경제적 이해가 맞물려 거대한 악을 행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수사들은 다르다. 자신의 온 생애를 기독교의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수사들이지만, 정작 이들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이들은 알제리의 시골 마을에 그저 산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일하고 봉사하고 어울리고 먹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구교도나 현대 한국의 신교도처럼 선교하려는 의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사들의 리더인 크리스티앙은 심지어 코란을 공부한다. 현지 주민과의 대화 끝엔 인샬라를 붙이기도 한다. 목사가 성불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셈이니, 파격이다. 그러나 인샬라신의 뜻대로란 의미 아니었나. 이 유연한 카톨릭 수사에게 신이란 궁극의 선인 모양이다. 종파, 의식, 경전의 문자 같은 것은 그 선에 종속되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 선을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모양이다.


수사는 신의 뜻을 따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죽음이란 그 어떤 인간에게도 풀기 어려운 문제다. 외부가 강제한 죽음의 기미가 보일 때 동요하지 않는 인간은 드물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임박한 죽음 앞에 번민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선 깊은 기도와 결단이 필요했다.


수사들은 고민하고 토의한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산다면 그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길인가. 죽는다면 그것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떠나자고 한 수사들은 말한다. “난 살려고 수사가 됐지 죽으려고 된 것이 아니다.” “난 집단 자살에 가담할 생각이 없다.”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살아야 할 근거들을 깨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수사들의 식사 도중 낭독되는 글을 인용해보자.

 

우리의 무력함과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권력에 기대지 않고 남과 교류하라는 권유이며 절박한 요구이다. 나의 약함을 알아야 남의 약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따라 남과 나를 견뎌낼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우리의 임무를 개선한다. 나약함 자체는 미덕이 아니지만 그것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세공되어야 할 우리 존재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도의 나약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신비와 영혼의 빛 속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무기력도 체념도 아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며 힘과 권력의 유혹을 고발함으로써 정의와 진실에 헌신토록 우리를 부추겨준다.”

 

군대의 보호를 거부한 채, 아무런 자구책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테러리스트의 침입을 순순히 기다리는 듯한 수사들의 행동을 세속의 시점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었다. 그리스도는 패했다. 로마 병사의 포승줄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빌라도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물론 칼을 들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오랜 기도 끝에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걷기로 했다.


나약함은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은 권력이나 무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크리스토프에게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견딘다네.” 수사들은 아픈 사람이라면 그가 테러리스트라 할지라도 치료했다. 폭력을 폭력으로, 권력을 권력으로 제압하는 세속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수사들은 알제리 시골 마을에 발붙이되 천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고 있기 때문에, 알제리 정부군과 테러리스트의 이해 범위 바깥에서 행동한다. 수도원 부근을 배회하는 헬리콥터 소리에 대항해 수사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모습은 종교인이 세상의 악과 싸우는 한 가지 방식을 잘 보여준다.



성가는 무기를 이긴다


수사들이 떠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자신들이 마을 주민들의 보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수사들이 무기도, 권력도 갖고 있지 않음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청한다. 수사들 역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들과 똑같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있어야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비판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신념에 매몰돼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지 않는 이, 악을 악으로 되갚는 이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붙잡은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저잣거리에서 끌고 다니며 모욕하는 알제리 정부군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신과 인간>은 시편 82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인간은 필멸한다. 신의 속성의 한 조각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사들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피할 수 있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맞이한 수사들은 어쩌면 어리석었다. 그러나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한 이는 노자였다. 수사들은 잘 알지 못했던 동양 현인의 가르침을 무심코 따랐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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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

김영민 지음/글항아리/144쪽/9000원


여기 10명의 기독교인, 정확하게 말하면 개신교인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으며 한때 교회에서 침식을 해결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대학부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철학자 김영민은 이 10명의 신도들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읽어낸다. 짐작이 가다시피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10명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얼부 허구가 가미됐다고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돈이다. 에수가 가난뱅이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 혹은 모르는 듯,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돈이 넘친다. 으리으리하게 지어올린 대형 교회가 다 돈 아닌가. 수십 년간 교회에 다닌 저자의 어머니는 잊을 만하면 말했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아!” 이건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허나 교회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서있다. 


A는 지난 10년간 한 차례도 주일 대예배에 빠진 적이 없다. 수요 저녁 예배에도 나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금요 철야기도회에도 나간다. 한국 교회의 관점에서 무엇보다 어여쁜 일은 A가 수입의 10분의 1을 헌금하는 십일조가 성에 차지 않아 십이조를 낸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약사로 제법 치부한 그는 교회 재무부장으로 성실히 봉사해왔다. 얼마 전에는 나날이 늘어가는 노인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 대에 수백만 원 하는 자동안마기 3대를 구입해 교회에 헌납했다. 교회는 수요예배 시간에 ‘자동안마기 봉헌식’을 거행하고 잠시 시연도 했다. 목사는 하나님이 A를 어여삐 여기신다는 축원을 전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성경 구절은 한때의 우화로 소모됐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치부와 개신교 교리 사이의 친연성을 일찌감치 밝힌 바 있다. 근면히 일해 돈을 많이 버는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다! 


그러나 인간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다. “끝끝내 상징적 존재인 인간은 매사에 의미와 권리 원천을 추구하며, 따라서 부자들은 부의 현실을 넘어 ‘부의 권리’까지 원하기 마련이다.” 돈만 많다고 재벌이 아니다. 이병철, 정주영에게는 창업에 얽힌 신화가 필요하다. 


현대의 교회는 부자들의 돈과 노역을 정당화하고 축원했다. 빠른 시간에 부를 축적한 한국에서 번성한 교회는 그 정도가 더했다. G의 사례를 보자. 목사, 변호사, 의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어른들이 윗대에 자리한 가문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공부한 끝에 국내 유수 재벌기업 계열의 종합병원 내과과장이 됐다. “봉급만 1000만원”에 이런저런 부수입,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월급까지 합하면 그 벌이가 만만치 않다. 지금은 “안전한 제도 속에서 상식적인 삶에 쉽게 만족하는 타입”이 됐지만, G도 젊은 시절 한때는 종교적·사회적으로 제법 진보적인 티를 냈다. 틸리히의 영문판 설교집을 끼고 다녔고, 슈바이처, 본 회퍼 등에 감화돼, 의사가 되면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 의료선교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지금 G는 자신의 ‘신앙신심’을 지키기 위해 접대를 받아 노래주점에 갈지언정 현금만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긍지를 섞어 이야기한다. 매달 수백만 원의 헌금을 바치고, 골프를 치지 않으며, 외제차를 타지도 않는다. 성실한 가장이자 독실한 신도인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김영민은 말한다. “개인과 체계가 그 뿌리에서부터 사통할 수밖에 없는 세속에서, 개인의 상처와 패착이 개인의 것만이 아니듯이 개인의 사회적 성취와 물질적 풍요가 과연 그 개인만의 것으로 가뿐히 할당될 수 없다면…” 우리의 스승 예수를 보라. 그는 자신이 몸담은 체제와 늘 ‘창의적으로 불화’했다. 스승의 삶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 벌이와 벌이의 체계를 성찰해야”하며 “그래서 그 체제 속의 남다른 수확을 마치 신의 은총인 듯 희떱게 구는 일”을 피해야 한다. 


융통성을 발휘해, G의 신분과 부에 대해 고까운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G의 부가 교회 내에서도 인정과 존경의 잣대, 신의 축복에 대한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은 분명 문제다. ‘보편적 포용성’을 말하는 기독교 내부조차 세속의 신분, 재력을 바탕으로 재편돼서는 안된다. 그것이 사실상 ‘노숙자’였던 예수의 뜻일게다. 


신도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례를 들여다보자. 세속적으로 행운의 삶을 누리는 남성 A, G와 달리, B는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여성이었다. 일제시대에 무지렁이 아버지, 폭군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전쟁 직전 떠밀리듯 혼인한 남자는 알고보니 빨치산이었고, 남편은 하룻밤의 정을 남긴 채 입산해 소식이 끊겼다. 눈에 띄는 외모를 갖고 있던 B는 도시로 나와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다 엘리트 남성의 구애를 받았다. 남성 집안의 반대에도 둘은 결혼했으나 이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어린 남매와 얼마간의 위자료를 든 채 60년대의 도시 빈민가로 들어선 여인 B는 부모에게서건 두 남편에게서건 평생 사랑이라곤 받아보지 못한 처지였다. 


한국 개신교는 이 빈민 여성들을 전도의 목표로 삼았다. B는 다정다감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백인 남성 예수에게 매료됐다. “외롭고 괴로운 이들은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B는 부모와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애정을 원없이 받았다. 예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씻어주었던 팔레스타인 여인들이라고 다를까. 


문제는 세속의 관계에서 ‘소외된 애정’이 신이나 그 매개자이자 대리자인 목사에게 고착되는 과정에서, 주체가 초월성을 체험하기는커녕 자기동일화에 머문다는 것. B는 예수로부터 사랑받았으나 그 사랑을 세상에 나눠주지는 못했다. 기실 사랑받지 못한 이가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는 어렵다. B에게 종교란 “자폐나 나르시시즘”일 뿐이었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보상적 환상”일 뿐이었다.


D와 그를 위시한 일곱 명의 여성 신도들은 교회에선 어울리지 않을 법한 별칭인 ‘팔선녀’로 불렸다. 본인들의 뜻과 관계없이 붙여진 이 별칭에서부터 교회 주류 세력과의 긴장 관계가 보인다. 서른 남짓한 미혼여성이었던 D와 ‘선녀들’은 매일 교회의 으슥한 골방에 모여 밤을 새며 기도와 찬송을 했다. 


D는 목사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지 않았다. 팔선녀들이 ‘신비체험’을 했다는 소문도 성령운동에 열중했던 당시 교회 분위기에선 별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D를 두고 교회 내 주류세력이 비난의 시선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엉뚱하게도 D가 “음탕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부 회장이었던 김영민은 D를 “워낙 얼굴의 윤곽이 짙어 흐지부지한 인상이 아닌 데다 유달리 화장이 거칠었고, 표정이나 동작도 자유분방하거나 심지어 도발적이었으며, 보기에 따라서 매우 육감적, 심지어 관능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하였다”고 돌이킨다. 70년대말~80년대초의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에게 D의 육신은 그 존재만으로 위험천만했다. 


고래의 기독교 신비가들이 남긴 문헌에는 “영성과 관능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시사하는 글”이 적지 않다. “종교와 몸의 자리가 얼핏 대극적이기는 하지만, 실은 그 상극의 외피가 거대한 원환을 이루면서 내밀한 상생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라고 김영민은 묻는다. 그러나 한국의 소심한 개신교인들은 자신의 몸과 욕망을 편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영혼을 떠받드는 대신 육체를 경멸하는 서양 중세의 사고에 지나치게 익숙했다. 몸의 조화로움이 아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에 무지했다. 시간이 흘러 팔선녀는 해체됐다. 김영민은 이후 D를 단 한 번 만났다. D는 자신이 차린 음식점을 찾아준 김영민에게 녹두전을 부쳐오며 환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3년 뒤 김영민은 D에 얽힌 비극적인 소식을 듣는다.


신도만 문제가 아니다. 성직자들에게도 그만큼의 문제가 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성서학자이며 틈틈이 주일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목사 C는 금요일 저녁이면 꼬리곰탕 같은 기름진 음식을 섭취한 뒤 강남 유흥가로 향한다. 그는 “제도권력적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선택적·특권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남성이다. 늦깎이로 신학교에 들어가 고향이 아닌 곳에 아담한 교회를 일으킨 목사 F는 ‘말’이 문제다. 많은 목사들이 그러하듯 달변에 언탐(言貪)이 심한 그는 말이 말을 이끄는 단계로 올라 종종 자기 말에 도취되는 듯 보인다. 가장 지성적인 감각의 자리에 오른 시각이 그 대가로 실재와의 조응력이 떨어진 반면,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주장처럼 청각은 실재에 직접적으로 가닿는다. 사람 좋고 목소리 좋은 목사 F는 스스로의 말과 음성에 빠져 카리스마적 권위를 부리는 듯 보이지만,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얻지 못한 카리스마는 나르시시즘의 함정으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책에 소개된 10명의 개신교인 중 2명은 한국 개신교의 미래에 한 가닥 희망을 걸게 한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혼인 E는 산골 교회 부목사다. E는 김영민의 강의를 청강하던 학생이었는데, 여느 목사들의 표정, 언변을 갖추지 않은 영락없는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시끄럽고 어두침침한 버스 안에서도 독서하고 사색하며 매사에 “무상의 노동을 곡진하게 쏟아붓는” 생활 태도를 가진 그는, 김영민이 보기에 한국 교회에 부재한 ‘장소감’의 기미를 나타낸다. “한 장소를 안다는 것은 그 땅의 영기에 대한 두려움과 공경심,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기에 이웃, 장소, 교회를 그렇게 대하는 E야말로 ‘지는 싸움’을 통해 역설적인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J는 스스로 개신교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를 개신교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지표는 희미하다. 특히 그는 지역에서 유명한 지관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교리와 양립하기 힘든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 J가 지관 행세를 할 때마다 소문을 들은 마을 교회에서는 그를 징벌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는데, J는 무시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일관해 충돌을 무마시킨다. J는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이며 거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지역의 현실과 전통에 착근한 신앙생활, J의 문제의식이다. 


‘믿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돼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신자’가 아니라 되는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 떼처럼 번성”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에 도전한 이였다. 


프로이트의 사유틀이 자주 언급되고,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 푸코까지 경유하는 10편의 글들이다. 지적으로 자극하고, 종교적으로 문제의식을 깨운다. 아니 여기 언급된 한국 개신교의 문제들은 이미 너무 잘 알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문제는 ‘행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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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경건한 생각

코너 커닝햄 지음·배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830쪽/3만6000원


리처드 도킨스가 2006년 <만들어진 신>을 출간하면서 일이 시끄러워졌다. 기세등등한 무신론자들은 먼지 쌓인 전통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던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격했다. 도킨스와 함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선봉에 섰다. 이 강경한 두 명의 무신론 전사들을 묶어 ‘히치킨스’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공격했고, 미국은 ‘십자군’ 운운하며 이슬람에 반격했다. 종교가 이 세상에 화마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히치킨스’가 작심하고 종교 비판에 나선 까닭이다.  


종교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반박에 나섰다. 수녀로 살다가 환속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신은 어디있나”는 물음에 “신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암스트롱은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종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종교는 교리, 믿음이 아니라 수행이라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보듬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설명한다. 


암스트롱이 부드러웠다면, 영국의 신학자 코너 커닝햄은 거칠다. 무신론자들의 ‘헛소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논박한다. 암스트롱이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조곤조곤 말했다면, 커닝햄은 중세의 교부부터 프리드리히 니체, G K 체스터튼, 모리스 메를로 퐁티, 자크 라캉, 알랭 바디우 등을 현란하게 인용한다. 주와 색인만 150여쪽에 이른다. 역시 현란하기 이를데없는 슬라보예 지젝은 커닝햄의 <다윈의 경건한 생각>(원제 Darwin‘s Pious Idea)이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평했다.


커닝햄은 다윈을 다윈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를 기독교도들로부터 구해낸다. 다윈주의와 기독교 교리는 애초에 싸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윈 근본주의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엉뚱한 곳에 자신들의 신앙탑을 세운 뒤, 그곳에 숨어 상대방에게 화살을 쏘고 있다. 어쩌면 이 두 집단은 ‘적대적 공생 관계’일지도 모른다. 


커닝햄은 다윈 근본주의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지적한다. 다윈 근본주의는 신의 근거를 파괴하다 못해 인간이 선 땅의 토대까지 허문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다윈주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생물학을 넘어 사회학, 심리학, 윤리의식에까지 다윈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 조지 게이로드 심슨은 심지어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 이전에 나온 해답은 모두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인간과 유인원이 존재론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면, 유인원과 개, 개와 물고기, 물고기와 물풀, 물풀과 플랑크톤의 관계도 그러하다. 인간의 지위는 미끄럼틀 위에 오른 듯 미끄러진다. 다윈 근본주의는 무엇이든 녹일 수 있는 ‘만능 산’이다. 산화력이 너무 뛰어나다보니 그것을 담으려는 어떤 용기든 녹이고, 결국 지구에 구멍을 뚫어버린다. 

 

 

"도킨스 네 이놈!" 사자후를 토하기 직전의 코너 커닝햄.

기독교 안에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듯이 다윈주의 안에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그중 ‘적응주의’는 유기체가 표현한 세밀한 부분이 모두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깃, 사슴의 거대한 뿔 모두 자연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 있는데 이를 ‘효용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이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본다. 창조론자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외칠 때, 적응주의자는 “자연선택이 했다”고 받아친다. 


이것은 사실 같은 논리로 다른 단어를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 관점이 옳다면 맹장은 왜 있는가. 전나무는 왜 꽃가루를 낭비하는가. 인간은 왜 이타주의적 행동을 하는가. 다윈 역시 난관에 빠졌다. “모든 것이 적응이라면, 상황은 더 좋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자연선택의 전능함에 기대던 다윈은 차츰 자연선택 이외의 작용에 대해서도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다중 원인론자’라는 것이다. 


다윈주의가 ‘진보’ 개념을 전제하는지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사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진보’라는 단어를 입에도 올리기 싫어한다. 자칫하면 다윈 이전의 세계관인 (신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론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면 다윈 이후의 역사가 오용한 진보 개념의 끔찍함 때문일 수도 있다. ‘진보’라는 깃발로 ‘미개’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운 뒤 닦달한 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 아니던가. 진보를 믿지 않는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출현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자크 모노는 “우주는 생명을 임신하지도 않았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계도 임신하지 않았다.…이 우주에서 인간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그저 ‘낭만적’인 결론이라는 주장이 즉각 나왔다. 크리스티안 드 뷔브는 “같은 조건만 주어진다면,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게 생겨날 것”이라고, 조지 월드는 “우주는 불가피하게 생명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커닝햄은 타협책을 제시한다. “진화에 진보패턴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화가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진보는 아니다. 진화하는 것은 구조, 법칙, 형태다.”


사실 과학과 종교는 요란하게 싸울 일이 없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직후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와 진화론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벌인 논쟁은 ‘기념비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마케팅적으로 과장됐다는 것이 커닝햄의 지적이다. 윌버포스 주교의 편에도 과학자가 많았고, 헉슬리 역시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자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일부러 논쟁을 벌였다. 즉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가짜’였다. 



알고보면 경건한 남자, 찰스 다윈


대중은 그렇게 믿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은 종교에 의해 탄압받은 과학자라고. 그러나 커닝햄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도 지구가 구형임을 전제했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종교 지도자에 의해 박해받기는커녕 자신의 책이 출판된 해에 자연사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역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안도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알려진 것과 달리 유연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 덕분에 종교는 잘못과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교 덕분에 과학은 우상숭배와 거짓 절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성직자 오브리 무어는 “다윈주의는 특별 창조론보다 훨씬 기독교다웠다. 다윈주의는 하나님이 자연에 내재하며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리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과학이,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종교가 각각 나누어 맡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인 것처럼 보인다. 


커닝햄은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전개한다. 아니 커닝햄은 자신의 해석이 이치에 맞는 것이어서, 오히려 현대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해석이 나쁜 의미에서 ‘중세스럽다’고 여긴다. 에덴 동산이 과거 어딘가에 있었다는 믿음, 하나님이 6일만에 천지를 만들었다는 해석, 인간의 원죄 의식, 내세에 대한 약속을 모두 부정한다. 대신 물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초월주의를 간직하는 길을 내려고 애쓴다. 


성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약속이 이뤄지는 미래로 나간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창조는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고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성서는 홀로 떨어진 과거사가 아니라, 펼쳐진 미래에 대한 책이다. 


핵심은 그리스도다. 기독교가 물질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리스도는 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스도는 몸을 창조하고, 몸을 취하고, 몸을 구원하고, 끝으로 몸을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이 부활보다 더 육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해 자연/은총, 성스러움/세속,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은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최악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죽음의 손아귀에 넘기고 저 세상을 꿈꾸라고” 유혹하는 격이다. 세상은 ‘우주적 공동묘지’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르듯이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다.”(21:2)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두고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이며 “비정한 세계의 마음”이며 “삭막한 환경의 영혼”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커닝햄은 허무주의야말로 그렇다고 되받는다. 가차 없는 물질주의로 아름다움, 진리, 선, 인격의 근거를 허문데 따른 이득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랜 유산인 종교를 파괴하고 광막한 허무주의의 사막에 도착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과학과 종교는 함께 할 수 있다고 커닝햄은 믿는다. 다만, 둘의 싸움을 붙여 이득을 보려는 사람만 멀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생전 종교인의 거센 비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 찰스 다윈은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낯설 것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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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없는 사회

 필 주커먼 지음·김승욱 옮김/마음산책/368쪽/1만6000원


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고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의 동네 은행에서 목격한 광경이다. 한 손님이 은행 간부 직원의 책상 앞에서 갚기 힘든 빚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 직원은 손님에게 조언했다. “채무 자료를 모두 모으세요. 신용카드 청구서, 대출금 청구서, 대출 서류, 연체 통지서…. 그것들을 봉투에 넣은 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세요. 그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시고, 빚을 없애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계세요.” 직원은 매달 50달러씩 헌금을 내면 1년도 안돼 빚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게 해서 효과를 본 사람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은행 안의 누구도 이 ‘조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놀란 것은 주커먼 뿐이었다. 


주커먼의 전언을 들으면 지금 미국은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나라다. 예수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가 세 대에 한 대꼴이며, 예배와 기도를 권고하는 광고판이 도심 곳곳에 서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속 목사들은 죄악에 물든 세상을 개탄하고 이교도를 저주한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어느 경찰서장은 범죄율의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말했고,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했다. 이런 분위기니 조지 W. 부시가 기도로 하나님께 조언을 구한 끝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것도 무리가 아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부도덕, 사악함, 타락이 판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주커먼은 그들 주장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덴마크로 이주해 14개월을 살았다. 덴마크와 그 옆나라 스웨덴은 세상에서 종교의 힘이 가장 약한 나라에 속한다. 성경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교회 출석률 또한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렇다고 덴마크와 스웨덴에 악이 들끓고 있을까. 모두들 알다시피 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세계 최고의 복지 수준을 자랑한다. 기대 수명, 아동 복지, 국내총생산, 경제적 평등, 양성 평등,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범죄율 등 유엔이 내놓은 인간 개발 보고서의 여러 항목에서 최상위권이다. “믿음이 없어도 사람들은 건실한 법을 만들어 지킬 수 있고, 도덕과 윤리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제도를 잘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주커먼의 주장이다.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 150여명에게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일단 미국과 달리 스칸디나비아 국가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그래서 인터뷰 대상을 찾기가 어려웠고,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대상자를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무신론자인 이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한다. 


많은 종교학자들은 종교가 모든 인간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최종 문제, 즉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말한다. 신에 무심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까. 77세의 라르스는 말했다. “옛날에 우리 생물 선생님은 항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들의 가치가 덴마크 돈으로 4크로네 정도라면서 최대한 빨리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라고 묻자 “나는 피할 수 없는 일은 걱정을 안하는 편이거든요”(55세의 킴),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90퍼센트 정도는 죽은 다음의 일 같은 걸 걱정하진 않을걸요. 먹고 살 돈을 버는 일,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걱정하죠”(25세의 요나스) 등의 답이 나왔다. 죽음을 눈 앞에 둔 75세의 레이프는 거의 영적인 느낌으로 말했다. “원래 그런 거니까.”


호스피스 간호사인 안네는 죽음을 마주한 수많은 사람을 경험했다. 안네가 일하는 병원에는 종교 없이 숨을 거두는 환자가 많지만, 기독교 신앙이 강한 노인도 몇 명 있다. 안네는 신앙인이 오히려 죽음을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천국에 받아들여주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자기 인생을 생각하면서 혹시 잘못한 일이 없는지”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인생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어 종교를 찾는다는 이론도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으며, 종교가 바로 그 욕구를 다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달랐다. “사람들한테 정말로 의미가 필요한 것 같지 않아요.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39세의 티나) “삶의 의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일어날 어떤 일을 기다리며 살면 안돼요.”(33세의 비베케) 주커먼은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삶에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삶을 마구 낭비해도 된다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무신론자’라고 내세우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게 하고, 성인의 80% 이상은 교회세를 낸다. 마을 어귀 석조 교회의 건축미를 자랑스러워하고, 주일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이들조차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은 책이라든지,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뒤 부활했다든지, 내세가 있다든지 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믿지 않았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스칸디나비아 기독교인이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인 것이다. 가족과 함께 쉴 수 있어서 부활절을 기다리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품위 있는 도덕, 가치관이 담겨 있어 성경을 긍정하고, 친구와 친척을 만날 수 있어서 세례식을 연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다. 


어쩌다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주커먼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먼저 ‘게으른 독점’ 이론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어떤 종교도 국가의 특별한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즉 종교의 ‘자유 시장’이 있다면 각 종교는 살아남기 위한 마케팅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덴마크, 스웨덴에서는 수세기 동안 루터파 교회가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곳의 교회들은 힘겹게 신도를 불러모을 필요가 없었다. 


몇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안전한 사회’ 이론은 “특정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에 확신이 없으면 종교에 더 가까워지는 경향”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살기 힘든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다고 말했는데 덴마크, 스웨덴은 살기 좋은 나라다. ‘일하는 여자들’ 이론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종교적이며, 남편과 아이들을 교회로 이끈 것은 대체로 여성이었다는 관찰에 근거한다. 그러나 다른 서구 사회에 비해서도 일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높은 덴마크, 스웨덴에서는 ‘여성성의 탈경건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세속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도 마음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신자들처럼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열렬한 신앙인이라도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40세의 도르테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건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남자와 여자는 결합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르테는 “내 종교적 신념으로는 그게(동성애)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그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커먼은 신이 없이도 행복한 스칸디나비아 사회를 통해 신이 넘치지만 불행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약자를 돕고, 자비와 자선을 행하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가장 성공적으로 제도화해 실천하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라는 아이러니를 전한다. <신 없는 사회>를 추천한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비교종교학)는 “어느 사회나 건실한 사회로 자라나려면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현재 표층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이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도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무리들이 자족적 고성방가를 일삼더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던 이가 대통령이 돼 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세상이 됐다. 특정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민망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37세의 회사원 모르텐은 “종교를 믿는 거야 상관없지만, 나라를 다스리면서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아주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어”라고, 39세의 검사 크리스티안은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냥 혼자 해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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