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은빛난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요괴워치가 가르쳐준 것
  2. 내 행동은 내 의지가 아니다, <요괴워치>를 보고
  3. 삶을 바꾸는 글, <모든 것은 빛난다> (2)







몇 달 전 블로그에 썼던 글을 뻥튀기해 칼럼으로 재활용.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인기 있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다. 그걸 운이나 마케팅이나 알 수 없는 유행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나태하다.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해 완구업계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이날을 위해 대량 생산체제를 가동시켰다가 악성재고로 남는 장난감이 있는가 하면, 부모들이 마트 개장 시간에 맞춰 쟁탈전을 벌여야 하는 장난감도 있다. 어린이들은 또래 집단의 취향에 민감하고 싫증을 잘 내기에, 장난감도 유행이 빠르다.

몇 년 전에는 덴마크 블록회사 레고의 ‘닌자고’ 시리즈가 파천황의 인기를 누리더니, 국산 애니메이션인 자동차 변신 로봇 ‘또봇’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겨울왕국>의 엘사와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의 공룡 로봇들이 여아와 남아의 시선을 각각 사로잡았다. 

올해는 ‘요괴워치’가 독주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애니메이션이 방영돼 인기를 끌었고, 장난감 역시 불티나게 팔렸다. 현지에선 다마고치 이후 최고의 히트 장난감이라는 평까지 나왔다고 한다. 

<요괴워치>의 내용은 이렇다. 평범한 초등학생 민호는 어느 여름날 수다스러운 요괴 ‘위스퍼’를 만난다. 위스퍼는 민호에게 요괴워치를 건네고, 민호는 이 요괴워치를 통해 세상 속의 요괴를 본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은 모두 요괴의 장난이었으니, 민호는 요괴를 설득하거나 다른 요괴와 대결시켜 사태를 바로잡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민호와 친구가 된 요괴는 자신을 상징하는 메달을 주고 사라진다. 이 메달을 요괴워치에 넣으면 언제라도 그 요괴를 소환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의 범주는 장난스러운 것에서부터 다소 심각한 것까지 다양하다.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는 자꾸만 음식을 집어먹는데, 이는 요괴 ‘자꾸손’이 꾸민 일이다. 민호는 자기 바로 앞에서 먹고 싶던 멜론빵이 다 팔리거나 막 먹으려던 아이스크림이 난데없이 땅에 떨어지는 불운을 잇달아 겪는다. 이는 무엇이든 실패하게 만드는 ‘슬피우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틀어박쥐’는 현대인이 특히 경계해야 하는 요괴다. 틀어박쥐에 빙의되면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서워 방에 틀어박힌다. 





위로부터 집사를 자처하는 수다스러운 위스퍼, 불운을 부르는 슬피우새(물론 자신도 불운해 침울한 표정이다), 버블경제기의 욕망이 탄생시킨 막써조개. 




계획대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으며, 인간의 의지란 것도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생각. 고대 그리스인들 역시 그렇게 여겼다. 미국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리는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이런 고대 그리스인들의 태도를 칭송한다. <오디세이아>의 페넬로페는 전쟁에 나가 생사조차 불분명한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운다. 그때 아테네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달콤한 잠을 내려준다. 신이 인간에게 잠을 허락한다고 믿는 현대인은 많지 않겠지만, 호메로스의 인간관에는 주목할 만하다. 호메로스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핵심을 통제하기에 불충분한 존재”라고 여겼다. 

니체의 선언처럼, 근대 세계는 신을 죽였다. 세상의 이면을 가정하지 않았고, 인간을 자기 행동의 온전한 주인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근대 이후의 인간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짐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선택의 자유는 현대의 삶이 선사한 기쁨이겠으나, 문제는 선택에 확실한 동기가 없다는 점이다. 아메리카노인지 카페라테인지,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얼 해도 상관없고 어떤 일도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현대인은 너무나 자유롭기에 불행하다. 저자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의미의 생산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던져주는 의미의 발견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하루를 돌아보며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들은 얼마나 됐을지 생각한다. 늦은 밤 라면을 끓인 건 ‘공복영감’ 때문일까, 여름 티셔츠를 서둘러 장만한 건 ‘막써조개’ 때문일까. 하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인간은 약하고 늘 흔들린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작은 의지가 생기고, 타인을 이해하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요괴워치>의 의뭉스러운 세계관을 슬쩍 껴안아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아이와 함께 몇 번 <요괴워치>를 봤다.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를 통해서 접한 상태였다. 뭔가 싶어서 봤는데.


'은근히 재밌다'고 말하는 건 솔직하지 않다. '상당히 재밌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작품 전후의 맥락을 모르고 봤는데도 오랜 시간 피식거리며 웃으며 봤다. 아이도 이 유머를 이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본 설정은 '우리 생활 속 일어나는 기이한 일은 모두 요괴의 장난 때문'이라는 것. 보통 사람은 그러한 일이 요괴 때문인지 모르는 채 넘어가지만, 요괴 워치를 가진 소년이 이를 알아챈다. 그리고 자신의 시계 속에 봉인된 또다른 요괴를 소환해 말썽을 부린 요괴와 대결을 시키고, 이기면 그 요괴를 상징하는 코인을 얻는다. 그러면 다음번 필요할 때 그 요괴를 소환할 수 있다. 


한국어의 '요괴'라는 어감 때문에 '요괴 장난'이라고 하면 꽤 심각한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이유 없이 갑자기 방귀가 나오는 건 뽕쟁이라는 요괴의 장난이다. 소년은 이 요괴를 벌하려다가 도리어 방귀를 참을 수 없게 되고 결국 옥상으로 뽕쟁이를 불러내 대결을 한다. 소년은 뽕쟁이에게 고구마를 먹여 대결을 이긴다. 고구마를 먹고 방귀를 끼기 시작한 뽕쟁이가 그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에피소드에는 주인공의 엄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자꾸만 음식을 집어먹는다. 아들에겐 못 먹게 하면서, 자기가 만든 이런저런 반찬들을 자꾸 하나씩 먹어버린다. 이것 역시 음식을 중간에 집어먹게 만드는 요괴의 장난. 주인공 소년은 '공복노인'이라는 요괴를 소환해 집어먹기 요괴와 대결시킨다. 공복노인은 아예 큰 공복을 느끼게 하는 요괴로서, 엄마가 도중에 조금씩 집어먹기를 멈추고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을 먹어버리게 만든다. 이것으로 공복노인의 승리. 엄마와 주인공 소년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을 먹어버리는 바람에, 퇴근한 아빠는 컵라면을 끓여먹는다는 내용. 



오늘 아이가 구입한 지바냥 프라모델. 자동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의 요괴라고 한다.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급인 것 같다.   


갖가지 속성을 가진 온갖 판타지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포켓 몬스터 같기도 하다. 사실 한국 전통에서 요괴 같은 상상 속 존재는 대체로 인간을 해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기에, 이를 이용해 현대의 대중문화 콘텐츠로 꾸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본은 기본적으로는 동물 모양에서 따온 요괴, 몬스터를 친숙하게 다룬다. <요괴 워치> 같은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이런 정서, 문화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특히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다. 갓파, 엘프, 호빗니, 토토로 같은 것들이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단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드는데 유리할 것임에는 분명하니까. 


<요괴 워치>는 근 몇 년 사이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 <모든 것은 빛난다>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 속에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대해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와 같은 태도를 찬양한다. 헬레네가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이유는 '금빛의 아프로디테'에 호응한 것 뿐이기에, 헬레네의 남편조차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수면을 관장하는 신에게 감사와 당부의 기도를 올렸다. 삶의 모든 사건에는 신의 의지가 반영돼 있기에,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매순간을 열심히 살면 된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현대인의 정신이 빠지기 쉬운 허무, 무의미는 낯선 질병이었다.  


<요괴 워치>는 <모든 것은 빛난다>가 극찬한 세계관을 조금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내 행동이 전적으로 내 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 이해하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볍게는 나쁜 습관, 사소한 일탈에서 크게는 범죄에 이르기까지 의지가 박약하거나 악의가 발현된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뻔뻔한 인간이 될까. 아니면 근대 이후의 인간에게 과도하게 부여된 자율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조금 더 겸손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정보를 주는 글은 많겠지만, 삶을 바꾸는 글은 많지 않다. 일 때문에 한 주에도 많은 책을 훑어보고 또 그 중 한 두 권을 자세히 읽는 처지이지만, 사실 책을 덮고 그에 대한 글을 쓴 뒤에도 오래 기억할만한 책은 드물다. 미국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함께 지은 <모든 것은 빛난다>(원제 All Thins Shining)은 일 때문에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일 때문에 읽은 어떤 책보다 훌륭했다.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을 넘어, 삶의 지향에 영향을 미친다. 나 자신이 대단한 독서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주중에는 일을 위한 책을 읽고 나머지 시간엔 개인의 취향에 따른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그 '나머지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이 책은 증명한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난 서슴 없이 이 책의 제목을 댔다. 사실 추천이라는 것이 그의 취향을 제대로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난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번역본은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원저의 부제를 조금 상세히 서술했는데, 나쁘지 않아 보인다. '서양 고전'이라든가 '삶의 의미'라는 말이 좀 흔하게 들리긴 하지만, 이 책을 설명하는 더 나은 부제를 찾기는 어렵다. 만에 하나, 너무나 흔하게 들려 역으로 찾기 힘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독서가 어디있겠나. 


책은 '자유롭기에 불행한' 현대인의 조건을 말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떄문인지 아닌지, 현대인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합당하게 이끌어주는 의심할 바 없는 단일한 덕목 체계"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자들은 이것이 인간 영혼에 과중한 책임을 지우는 일이라고 본다. 


풍문으로 들었던 고대 그리스의 미녀 헬레네의 이야기는 쇼킹하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트로이의 미남 왕자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고, 이로 인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헬레네를 사이에 둔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트로이를 이겼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이후 헬레네가 원래의 남편 곁으로 돌아오고 남편 역시 헬레네를 받아들였다는 점은 의아하다. 더 의아한 점은 헬레네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한때 버림받았던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조차 그녀를 이해한다. 말하자면 이웃집 미남 청년과 바람난 아내 때문에 남편과 청년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졌고, 남편이 청년을 개패듯 팬 뒤 아내를 데리고 왔는데, 아내는 청년과의 로맨스가 행복했다고 추억하고, 남편 역시 아내를 이해하는 상황이다. 


저자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고 설명한다. 현대인들은 내적인 자기응시에만 익숙해 있지만, 그리스인들은 정조(moods)의 무거움을 이해했다. "호메로스 시대의 탁월성이란 결정적으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바람난 헬레네는 파리스를 본 순간 '금빛의 아프로디테'에게 호응한 것 뿐이다. 삶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한 경외감. 그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대단하지만 사실 별 것 아니다. 이 책은 그 점을 계속 이야기한다. 저자들은 루터, 데카르트, 칸트를 경유해 멜빌의 <모비딕> 분석으로 인간의 자율성이 갖는 매력과 위험을 함께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칸트의 입장을 해석하면서는 "우리 행동을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짐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들이 오로지 우리의 손에만 맡겨진다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인간이 의미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의미는 제작자를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나 자신이 내 행동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앞으로의 삶은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으리라. 책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신형철의 지적대로 마지막 장이 전반부처럼 가슴을 치며 와닿지는 않는다. 아마 저자들이 마지막 장에서 제시한 상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약'이 필요하리라. 끝내 이성의 동앗줄을 붙잡고 있는 이는, 거기서 도약하지 못하겠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