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도 체력과 같이 평생을 두고 갈고 닦아야 한다. 끝없이 새로운 감수성을 계발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구려'진다. 본인은 자신의 감수성이 여전히 쿨한 줄 알겠지만,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한 감수성은 그저 구닥다리다. 


그러나 새 자극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은 채 한때의 수준으로 고착화하는 감수성이 있다. 음악이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새 음악을 찾아듣고 좋아하지만, 한창 음악을 들을 나이인 10대 때 듣던 음악은 그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한다. 난 근 몇 년 사이 주로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지만, 지금도 여드름 난 소년 시절의 음악들(건스 앤 로지즈, 메탈리카, 레드 제플린, 그리고 이건 부끄럽지만 스키드 로 등등등)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음악을 들은 세대들은 신해철에게 추억 한 자락의 빚을 졌다. 오늘밤 들른 엘피바에서는 한 곡 건너 한 곡씩 신해철의 음악이 나왔다. 동행한 동료 한 명이 스마트폰 뉴스 알림 기능으로 신해철의 죽음 속보를 전한 뒤였다. 


신해철의 노래를 듣지 않은 지 10년도 넘었지만, 난 여전히 오늘의 술집에서 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외울 수 있었다. 무한궤도 시절, 솔로 시절, 넥스트 시절을 거치며 나의 몸과 마음도 조금씩 자랐다. 비교적 짧게 활동한 뒤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는 음악적으로 더욱 강렬하고 세련됐지만, 난 그와 함께 성장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한 가수만이 나와 한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무한궤도의 멤버로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1988년의 신해철 



지금 다시 들으면 신해철의 가사는 자의식 과잉이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는 가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재밌는건 내가 이 대목을 포함한 노래 후반부의 랩을 전부 외우고 있다는 사실. 


요즘 이런 가사를 쓰면 그냥 '허세'란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말하던 시대였다.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고 믿는 시대였다. 실제론 '돈 큰집 빠른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를 따지면서도, 그렇게 대놓고 밝히는 걸 조금 부끄러워하던 시대였다. 


오늘 술자리에 동석한 또다른 동료는 항상 노래방 마지막 곡으로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합창했다고 증언했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그대여'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지막엔 서로 어깨를 겯고 이런 무시무시한 다짐을 하던 시대였다.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좋다. 그게 20년 전의 우리였다. 난 <응답하라 1994>를 한 회도 시청한 적이 없다. 그때는 나의 시기였고, 그곳은 내 장소였다. 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내 도덕성이 가장 엄격하고, 내 욕망이 가장 강렬했던 1994. 그때, 그곳이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는 걸 볼 필요가 없었다. 낯간지럽기도 했다. 그저 요즘 드라마를 거의 안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난 지난 자리는 돌아보지 않지만, 신해철의 부음을 접한 오늘만큼은 1994년을 떠올려보고 싶다. 신해철이 명민했고, 시대는 꿈틀거렸고, 나도 더 젊었던 그때. 때이른 죽음을 맞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덧. 난 생전 신해철을 한 번 인터뷰했다. 그는 여느 한국의 가수들과 달리 이런저런 사회 현안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내놓는 이였다. 2005년 6월 8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아래 인터뷰는 인터넷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한 것이었다. 벌써 10여년 전 일인데, 신해철의 말을 들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수 신해철(37)이 인터넷 매체의 선정성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최근 자신이 진행하는 MBC 표준FM‘고스트 스테이션’의 1시간 방송 시간 중 26분을 할애해 인터넷 매체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다. 손호영, 이병헌, 양희은, 이문열씨 관련 보도 내용을 예로 들며 “요즘 매스미디어를 보면 미쳤거나 덜 떨어졌거나 아니면 뇌를 다쳤거나 그런 상황인 것 같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네티즌들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달거나, 기초적인 취재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기사를 내보내는 작금의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후 공교롭게도 신해철 자신도 왜곡 보도의 피해자가 됐다. 부산 부경대에서 한 문화강연 중 ‘지난 대선 당시 정치 참여를 후회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할 줄 알고도 정치적 소신에 따라 참여했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이 답변이 지역 일간지에 의해 ‘신해철, 정치참여 후회한다’는 식으로 요약 보도됐고, 다시 보수성향 인터넷 매체에 의해 ‘신해철, 노무현 후보 지지 후회한다’고 왜곡 보도됐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신해철을 만났다. 그는 저녁부터 이어질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의 촬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왜 인터넷 언론 비판 발언을 했나? 

“각 포털이 신생 인터넷 언론에 자리를 내주면서 광태에 가까운 폭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의 조폭적 행태다. 우리나라의 ‘떼거리문화’ 경향과 이들 언론이 결합하니까 상황이 심각해졌다. 무책임하게 긁는(기사를 쓰는) 놈, 거기 몰려가는 놈이 모여 가관이다. 이들에게 제일 재미있는 타깃이 연예인이다.” 

-며칠후 당신도 피해자가 됐다. 
“인터넷 언론들은 한마디로 게으르다. 취재는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놀고 있다는 게 티난다. 예를 들어 양희은씨의 ‘간호조무사 비하 발언’ 사건이 있다. 당사자는 하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게시판의 잘못된 글을 보고 기사화했다.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 관계자에게 전화 한통 안했다. 내게도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역시 원인은 인터넷의 연예 매체 난립인가? 
“대중들이 네트의 폭도가 되고 있다. 여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 매스미디어에서 활약해야 하는데, 오히려 폭도들에게 가서 붙는다. 반대 쪽에 서면 따돌림당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초딩’(초등학생의 속어.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을 일컬음)들은 인간이 가진 쾌감 중에 가장 비열한 부분에서 날뛰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휘두른 칼날은 결국 자신의 배를 찌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예인이 쉽게 조롱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물론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도 타블로이드지의 행태는 가관이다. 결국 다이애나를 죽인 것은 타블로이드지였다. 문제는 그렇게 단죄함으로써 사람을 매장하려고 하는가이다. 지금 영국 대중이 가장 ‘씹기’ 좋아하는 사람은 데이비드 베컴이다. 하지만 베컴을 놀리면서도 그를 국가대표에서 제외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비웃으면 비웃음으로 끝나야 하는데, ‘이 인간을 TV에 못나오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정색하고 얘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연예인이 자주 수난받는 이유는? 
“근대화 이전부터 연예인은 가장 낮은 계급이었다. 뿌리 깊은 인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느 나라 대중보다 큰 분노, 소외감, 박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불특정다수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연예인에게 흘러간다.” 

-대책은 있나? 
“연예인들의 권리가 매스미디어 앞에서 함몰되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도 함몰된다. 총체적인 난국이니까 총체적인 싸움이 돼야 한다. 정부 규제가 강화되고, 시민의식이 늘어나면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들이 싸우지 않고서 무슨 상황이 바뀔 것인가. 이번 내 경우도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연예인 생활 그만하려고 그러느냐’며 말리지만, 싸우지 않으면 지나가는 누구나 한대씩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