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5건

  1.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
  2. 혁명은 없다. 봉기 하라,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3. 대종상과 오늘의 민주주의 (4)
  4. SF민주주의, 무의식민주주의, DB민주주의,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
  5.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




아이가 'DOC와 춤을' 노래하는 것 듣고 쓴 칼럼. 그나저나 김대중 후보의 'DJ와 춤을' 뮤직비디오 찾아보다가 김종필, 박태준도 나와서 깜놀. 김대중이 집권하기 위해선 그 정도로 상상치 못할 '대연정'이 필요했던 것. 


언젠가부터 초등학생인 아이가 ‘DOC와 춤을’이란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이가 태어나기 십수년 전의 노래다. 어쩐 일인가 살펴보니 학교에서 이 노래에 맞춰 체조를 한 모양이다. 1990년대 그룹인 DJ DOC의 경쾌하고 흥겨운 멜로디가 요즘 초등학생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런데 무심코 노래를 듣다 가사를 깨닫고 멍해졌다. 몇 구절 인용해보자.

“옆집 아저씨와 밥을 먹었지. 그 아저씨 내 젓가락질 보고 뭐라 그래. 하지만 난 이게 좋아 편해 밥만 잘 먹지.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 요요요.”


DOC와 춤을’이 나온 건 1997년 4월, 외환위기 이전이었다. 그때 한국은 번영의 약속을 믿는 나라였다. 경제만이 아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는 물러나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었다. 많은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표현의 자유가 조금 더 확보됐다.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이 데뷔했고,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꿨다. 이 시대에 20대를 보낸 1970년대생, 이른바 ‘엑스세대’는 풍요로운 물질과 문화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남았다. 지난해 12월 통계청이 내놓은 ‘한국의 사회동향’을 보면, 1970년대생은 앞선 세대는 물론 1980년대 이후 세대보다도 진보적이었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강했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기성세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젓가락질 이상하다고 나무라는 옆집 아저씨에게 반박하는 세대다.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라고 상상하는 세대다.

“옆집 아저씨 반짝 대머리 옆 머리로 속알머리 감추려고 애써요. 억지로 빗어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빡빡 밀어 요요요.”

모든 권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의 획일적 기준 같은 것, 서울 지하철 압구정역 성형광고판의 똑같은 얼굴 같은 것.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취재한 1994년도 방송 뉴스가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별안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촌, 강남 등지를 오가는 젊은이들은 미니스커트에 군화를 신거나, 모자를 거꾸로 쓰거나, 자동차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다. 어딘지 이상해 보이지만, 정작 이런 차림을 한 사람들은 즐거운 것 같다.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이는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입고 싶은 대로 입어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답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인터뷰이의 말을 따서 ‘#이렇게입으면기분이조크든요’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사회 속 주눅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1990년대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충격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는 대머리를 감추려고 애쓸 바에는 아예 삭발을 하는 것이 어떤가. “뒤통수가 안 예뻐도 빡빡 밀어요”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의 시선, 사회의 기준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DJ DOC의 노래에 녹아 있었다.

물론 DJ DOC가 노래한 세상은 1990년대에도 실현되지 않은 꿈이었지만 곧 다가올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어떤가. 올해 경향신문 ‘민주주의는 목소리다’ 기획팀은 다양한 세대·지역의 시민 1000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평소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지 물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할 때 눈치를 본다”, “윗사람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다른 말을 할 경우 일단 내가 틀렸는지부터 살펴본다”는 답변이 60%를 상회했다. 지금 한국은 교수가 강의시간에 질문한 학생에게 “독해능력이 떨어진다”고, 디자인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 신입사원에게 “어려서 뭘 모른다”고 면박주는 사회다. 회식을 앞두고 ‘삼겹살 아니라 돈가스 먹고 싶다’고 속으로만 삼켜야 하는 사회다.

한 달 뒤면 새 대통령이 뽑힌다. 새 대통령은 새 세상을 열 수 있을까. 캐서린 문 미국 웰즐리대 교수는 “한국인들은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공적 시위에는 능하지만 여전히 직장, 학교, 가정 등에서의 극단적인 위계를 통한 가혹 행위나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누구인가는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진 않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사회의 다양성이 주는 긴장을 즐기고,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마음의 습관’이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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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예전 프론트 리뷰로 쓴 적이 있는 <사상으로서의 3.11>에 한 꼭지의 글을 실은 히로세 준의 저작을 골랐다. 그의 단행본이 완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인데, 일본의 젊은 사상가들의 글은 재미있지만 어딘지 허공으로 한 발짝 떠있다는 감이 든다. 그 한 발짝의 감각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히로세 준 지음·김경원 옮김/바다출판사/288쪽/1만3800원


당신의 삶은 안정적인가. 조금 더 은유적으로 말해, 당신의 인생에는 해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큰 행운아다. 나고 자라 낳고 죽을 때까지 삶의 범위와 행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년에 금융 위기가 닥쳐 다니던 회사가 도산할지, 내일 자연 재해에 고장난 원자력 발전소가 방사능을 유출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듯, 개인과 사회가 모두 불안하다. 


그래서 이 불안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견뎌나가야 하나. 일본의 젊은 사상가 히로세 준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그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이라 할만하다. 그는 세계가 ‘형편 없는 영화’ 같다거나, ‘더럽다’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히로세의 인식에 동의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그만 보고 극장을 나서라’라고 촉구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세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형편 없는 영화든, 더러운 세상이든, 인간은 그것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혼란한 세상의 삶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좋다. 히로세는 1970년대 이탈리아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를 다시 불러낸다. “불안정한 것은 아름답다”. 일본 잡지에 연재된 시평을 묶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프리케리아트의 철학’, 혹은 ‘프리타족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할만하다.  


히로세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과 같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글의 연재가 시작된 후에 일어났지만, 사고 여부와 무관하게 원전은 우리 삶의 속성을 이미 드러내주고 있었다. 수력발전소의 물, 화력발전소의 불은 일단 전기를 내면 낮은 곳으로 흘러가거나 타서 재가 됨으로써 소멸한다. 즉 해결된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낡은 원자로, 다 사용한 핵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인류가 지구상에 남아있는 동안 영원히 함께 한다. 원자력에 있어서 ‘최종처분’은 없다. 원자력 발전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방사성 폐기물은 늘 ‘준안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원자력 폐기물의 ‘처리’와 ‘사고’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진과 쓰나미는 ‘일어 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원전 사고는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답이 없다’는 점은 ‘테러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죽였지만 테러는 종식되지 않았다. 후세인이 죽었지만 이라크는 안정되지 않았다. 오직 혼란과 갈등과 불안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물론 에전에는 답을 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혁명’이다. 시민과 학생에 의한 것이든, 무장한 군인에 의한 것이든, 혁명은 사회와 개인이 당면한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는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한 표를 던진 유권자, 그 반대 지점에서 <레미제라블>의 좌절한 혁명을 보며 눈물 흘린 관객은 모두 ‘최종해결책’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품고 있고 있는 셈이다. 


히로세는 “아직 혁명을 꿈꾸는가”라고 되묻는다. 혁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짱 끼고 앉아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히로세는 혁명 대신 ‘봉기’를 이야기한다. 봉기는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끝없이 흐르는 운동이며,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제어를 위한 것이며, 지도자나 전위당을 알지 못한다. 


2011년 일본에선 변혁 운동의 불길이 사그러진 후 근 40년만에 대규모 군중이 반원전 시위를 위해 모였다. 이때 일부 시위대를 체포해 취조한 경찰관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이는 같은해 뉴욕의 ‘점령하라’ 시위대에 대한 일부 언론의 시각과도 상통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코티 공원에 죽치고 앉아 먹고 마시며 노래하는 시위대를 향해 주류 언론들은 ‘지도부도 없고 목적도 없다’는 식으로 냉소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사라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히로세는 바로 이같은 무규율, 무목적이야말로 봉기의 특성이라고 본다. 히로세가 주장하는 봉기는 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성이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봉기는 “답을 향해 가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나아가는 데모”다. 봉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불안정 상태를 긍정하는 것처럼, 이 책에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제시돼 있다. 먼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의 문제. 히로세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동한 고용의 비정규화가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역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을 촉진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활의 불안정화라는 ‘악’을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이라는 ‘선’으로 전화시키는 시도”다. 에전이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들어가 조금씩 오르는 월급에 만족하며 평생 같은 일상을 반복했을 사람들이, 이제는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프리타’족으로 살아간다. 평생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히로세는 이런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소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계와의 유기적 연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할까. 히로세는 프랑스 영화 <플레이타임>을 예로 든다. 영화 속 근미래의 파리는 온통 철과 유리로 만든 건물이 들어찬 도시다. 등장인물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만, 손을 맞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만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세계에서 소외되어 타향살이를 하게 된 ‘산책자’에게도 그만의 고유한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은 그 자체로 긍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불안정한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 일본의 원전 시위대에 원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를 법한 펑크 밴드가 등장해 시끄럽게 노래한 것처럼, ‘점령하라’ 시위대의 구성원이 다양했던 것처럼, 새 시대에는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조직은 이익 단체, 압력 단체와 다르다. 자크 랑시에르는 두 가지 ‘힘’을 이야기한다. “지위를 배분하고 그 위치를 고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힘”과 “각자의 정신과 신체가 지닌 가소성(可塑性)을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힘”이다. 전자가 ‘폴리스’라면 후자는 ‘정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일본의 영화팬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다. 요약하면 “모두가 이야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 ‘무자격의 자격’으로 모든 문제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고 정치다. 


물론 히로세는 희망찬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68혁명 이후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탈출했지만, 그들이 들어선 곳은 ‘공장이 된 세계’였다. 노동은 취직부터 퇴직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특정 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 전부가 노동의 시간이 됐다. 취업자와 실업자의 구분은 ‘일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임금을 받는가, 아닌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세계를 기업화했다. 푸코는 일찌감치 신자유주의는 “사회체 또는 사회 조직 안에서 ‘기업’의 형식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가 하나의 기업이 된다. 그래서 노동자는 스스로를 경영하라고 강요당한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개발하도록 유도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식인이 되도록 이끈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생산된 지식을 남김없이 빼먹는다. 


세계가 공장이고, 모든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에 이용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답이 너무 간단하다. 한국 번역본에 추가된 2011년 10월 런던대 버크백 대학 심포지엄 발표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반란의 역동성 자체까지 자기 것으로 훔치는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은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외부’가 된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선 ‘외부의 외부’를 발견해야 한다. 지적 능력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히로세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히로세조차 모를 수 있다.


그렇게 이 책은 혼란스럽다. 혼란의 시대에 혼란한 사유의 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일까. 히로세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가정한 뒤, 세계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긍정의 맹아를 찾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인가, 반대로 급진적인 태도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와 같은 책은 현재 한국의 지적 풍토에선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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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가 제4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15개 트로피를 가져간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다. 해묵은 '공정성' 시비도 나온다. 그러나 대종상 영화제측이 밝힌 말을 믿는다면, 올해 대종상은 그 어느 때보다 '공정'했다! 심사위원들은 함께 영화를 본 뒤 각자 투표를 했고, 점수는 시상식 직전에야 합산돼 수상자가 정해졌다고 한다. 즉 심사위원들조차 <광해>가 그토록 많은 상을 가져갈지 몰랐다는 이야기다. 


<광해>를 배급한 대기업이 심사위원 개개인에게 로비를 했다거나, <광해>가 <피에타>보다 못한 영화인데 상은 더 많이 받았다거나 하는 소리는 하지 말자. 그건 증명할 수도 없고 모두를 수긍시키기도 힘든 이야기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이번 대종상 시상식이 누구보다 '공정'하려 했음에도 왜 '불공정'하게 보였는지에 대해서다.


사실 영화 시상식은 그 어느 시상식보다 '정치적'이다. 프로야구의 MVP나 축구의 최우수 선수를 선발하는데는 적어도 몇 가지 확연히 참조할 수 있는 숫자가 있다. 타율, 홈런, 승수, 골, 어시스트 등이다. 축구의 성적은 야구보다 계량화가 힘들다곤 하지만, 그래도 팬과 전문가 사이에는 선수의 기량에 대해 일정 수준의 암묵적 동의가 형성된다. 


그러나 영화의 수준에 대한 동의는 그보다 훨씬 어렵다. 극단적으로 말해 <밀양>이 <디워>보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증하는가. 모두가 영화를 사랑한다고 자처하고, 모두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전파하는 시기다. 영화에 대한 목소리는 어지럽다. 작품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선 신의 권위라도 빌려와야할 판이다. 


그럼에도 <디워>와 <밀양>이 동시에 출품된 영화제가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밀양>에 상을 줄 수 있는 건, 영화가 현재 품은 가치, 영화와 세상과의 접점,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소수의 전문가들이 일정 수준에서 합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오늘 보여준 성과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영화가 가진 씨앗에 물을 뿌려 싹트게 하는 편이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 영화의 판도가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영화제 심사위원들 사이에는 일종의 '숙의'가 이뤄진다. 각 분야에서 오랜 시간 경력과 식견을 쌓아온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해당 작품의 성과를 놓고 격렬하게 투쟁한다. 물론 이 투쟁이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날 수도 있다. 훗날 돌아보면 어처구니 없는 작품에 상을 준 영화제가 하나 둘이었나. 그럼에도 영화상은 영화의 오늘을 축하하고 내일을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트위터에서였나. 안철수의 '정치개혁안'에 대한 비아냥이 있었다. 국회의원 수와 정당 보조금을 줄여 청년실업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안철수의 제안에 대해, "그렇다면 아예 국회나 법원을 없애고 전 국민에게 여론조사 기계를 줘라"는 반응이었다. 감세안 통과. 아동성범죄자 거세, 유영철 사형, 북한에 선전포고, 일본에도 선전포고, 외국인 노동자 추방....'여론조사 정치'가 불러올 결과는 이런 것일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숙의를 필요로 한다. 까다로운 말의 성찬이 있어야 한다. 격렬한 말싸움이 있어야 한다.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심사위원의 토론과 '배려'가 없다면, 그건 상이 아니라 여론조사다. 그것도 다수가 아닌 심사위원 14명의 여론조사. 


영화에 상을 준다는 건 그렇게 미묘하고 절묘한 일이다. 심사위원들의 명예와 경력이 걸린 일이다. 기억나는 정성일의 말을 비튼다면, 훗날 후진 영화로 밝혀진 영화에 상을 주었다면 그 심사위원의 취향도 후진 것이다. 자신의 명예를 여론조사에 맡기다니. 심사위원들도 참 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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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

 아즈마 히로키 지음·안천 옮김/현실문화/320쪽/1만5000원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는 틀렸을까. 아렌트는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대화함으로써 정치적인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 인간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있는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한다고 했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영국, 프랑스의 신문, 카페를 살폈다. 여기서 저널리즘이 생기고 토론하는 공중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두 사상가는 의사소통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당연하면서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국가의 거시적 정책부터 시민 사회의 미시적 실천까지, 전쟁을 방불케하는 피아의 구분이 이뤄지고, 논의는 끝없이 제자리를 맴돈다. 공청회는 요식 행위고, 토론은 파행이다. 누군가는 정치인의 역량 부족을 탓하겠지만, 4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대거 바뀌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투표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정치적 공론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제한돼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좌절,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이야기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과 공론장의 형성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민의 역량을 고양시키는 동시,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는 다르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요약하면 아즈마의 민주주의는 ‘소통 없는 민주주의’다. 그는 논의와 타협을 거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폐기처분해야 하는 헛된 이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즈마가 주목한 이는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야생인’의 행복을 노래한 개인주의자(에밀)인 동시, 각 구성원의 권리를 공동체에 양도할 것을 주장하는 전체주의자(사회계약론)이기도 한 모순에 찬 인물로 비친다. 아즈마는 바로 이 루소의 모순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돌파구를 찾아낸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은 자유롭고 고독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어느새 집단 생활을 하면서 사회계약을 맺는다. 사회계약이란 인민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자기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 완전히 양도하는 것인데, 그 결과 탄생하는 것이 개인 의지의 집합체인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를 따르지 않는 정부는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다. 정부 역시 일반의지의 손발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루소의 일반의지는 흔히 생각하는 ‘여론’과도 다르다. 루소는 “일반의지는 항상 옳고 항상 공공의 이익을 향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는 루소가 인민의 선의와 이성을 믿어서가 아니라 일반의지 자체가 공공성의 기준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의지는 ‘수학적인 존재’다. 


이러한 일반의지를 추출하는 과정은 급진적이다. 루소는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인민에게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숙고할 때, 시민들이 서로 어떠한 의사소통도 하지 않는다면, 작은 차이가 많이 모여 그 결과 항상 일반의지가 생성되어 숙고는 항상 바른 것이 될 것이다.…각 시민이 자기 자신에게만 따르며 의견을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회계약론>은 전한다. 즉 일반의지의 성립 과정에는 시민 간의 토의, 의견 조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아즈마는 이를 “일반의지는 집단 구성원이 하나의 의지에 동의해가는, 즉 의견 차이가 사라지고 합의가 형성되는 것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양한 의지가 서로 간의 차이를 내포한 채 공공의 장에 나타남으로써 순식간에 성립한다”고 해석했다. 그런 면에서 일반의지는 언어보다는 물질, 인간의 질서가 아닌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 


이것은 말이 되는 소리일까. 사실 루소 시대엔 말이 안됐다. 일단 이러한 일반의지를 추출할 방법이 없었다. 일반의지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선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즈마는 정보기술혁명이 진행중인 21세기엔 일반의지를 드러낼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검색엔진 구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위터, 포스퀘어, 페이스북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수천만, 수억명의 데이터에서 ‘개개인의 의도를 뛰어넘은 무의식적인 욕망 패턴’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현대사회를 ‘총기록사회’라고 정의한다. 검색 엔진,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정보가 낱낱이 기록된다. 총기록사회는 이전 세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있다.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데이터베이스는 알고 있다. 여기서 아즈마는 “일반의지란 데이터베이스를 의미한다”고 선언한다. 일반의지 1.0은 실재하지 않았지만, 일반의지 2.0은 실재한다. 일반의지 2.0은 “이념도 이야기도 아니며,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로 어딘가의 서버에 들어있다.” 일반의지 2.0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누군가가 우리의 의지를 대의할 필요가 없다. 


정부 2.0은 일반의지 2.0의 하인이다. 미래의 정부는 시민들의 명시적인 의견을 듣는 대신, 광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새겨진 욕망의 집적, 집합적 무의식에 충실하면 된다. 국민을 억압하거나 감시하지 않으며, 오직 시민 생활과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정부 2.0. 인터넷 서점이 개인의 구매 이력을 축적했다가 관련 서적을 자동으로 추천하는 것처럼, 정부 2.0은 개인 정보를 파악해 교육·의료·구직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마트폰의 위치 정보, 고속도로 이용료 징수 정보, 개인의 트위터 등이 모두 일반의지를 이룬다. 정부 2.0이 그리는 미래에서 공적인 토론은 무용하다.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응답은 사회사상의 개념 조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기술적인 도전을 통해 시도되어야 한다”고 아즈마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근대의 사고 방식이다.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인간 이성이 이성 외부의 그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대표적이다.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의식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에 주목한다. 데이터베이스는 거대한 무의식의 총합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비사교적인데다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지만, 수많은 개인이 참여해 만들어낸 구글의 검색어 자동 완성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아즈마는 일본의 검색 엔진에서 ‘남편’을 치면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 ‘남편 용돈’, ‘남편 싫다’ 등이 함께 검색된다고 전하는데, 한국에서는 ‘남편이 바람피는 꿈’,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 ‘남편의 외도’ 등이 나왔다. 아무튼 이것은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어떤 문자 배열에 이어서 수없이 입력해온 배열의 흔적”이다. 


‘큰 공공’ 혹은 ‘거대 담론’은 사라졌다.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내용이란 있을 수 없다.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하다. 대중은 선거 때마다 플라톤의 철인과 같은 위대한 정치인을 기다리지만, 그것이 헛된 기대임은 투표 용지에 기표하는 순간부터 명백하다. “인류 정치학자가 평범한 베스트셀러나 대중서에 눈물을 흘리고, 일류 경제학자가 인터넷 우익과 다름없는 편견을 갖고, 일류 수학자가 뻔한 국가관이나 가정관을 늘어놓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선량의 뛰어난 의지와 대중의 우매한 의지가 충돌한다는 생각은 낡았다. 인간은 때로는 선량으로, 때로는 대중으로 존재한다.  


미래의 국가는 국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한다. 아즈마는 정부 2.0이 수도 사업국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비유한다. 우리는 수도 없이 살 수 없지만, 수도의 체제나 운영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물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으면 시민이 먼저 나서 그 문제점을 따지고 관련자를 문책하라고 요구하겠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다. 


몇 가지 거센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혹시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대중의 무의식 혹은 동물적인 욕망만을 따르는 극단적인 포퓰리즘의 시대가 아닐까. 아즈마는 선량이 대중의 뜻에 그대로 따르거나 선량이 대중의 폭주를 억누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대중의 재잘거림으로 선량의 폭주를 억제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국회에서 법안을 논의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생중계되면, 그 중계를 보는 대중의 재잘거림이 국회에 떠오른다. 정치인은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혹시 ‘동물적인 삶의 안전은 국가가 보장하고, 인간적인 삶의 자유는 시장이 제공’하는 것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습 아닐까. 아울러 모든 생활정보를 기록하는 ‘총기록사회’는 감시국가의 또다른 면모 아닐까. 아즈마는 미래의지 2.0의 시대가 시장 원리주의와 연계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민주주의와도 연계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사회라고 말한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식의 뻔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 정치나 통치의 이미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의지 2.0이 만들어가는 ‘무의식 민주주의’ 시대에는 대중의 무의식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된 대중의 무의식에 숙의(熟議)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의 무의식이 국회의사당에 침투하는 시대,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쿨’한 나머지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가 제창 같은 것은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시대, 대중의 의지가 물질적으로 드러나는 시대다. 어쩐지 1990년대 일본의 SF애니메이션에서 본 듯한, 기발하면서도 위험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의 상상력은 우리의 미래를 덜컹거리며 선취해왔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어 2000년대 일본 사상계의 ‘스타’ 대접을 받는 아즈마 히로키는 대중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 하위문화 비평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래도 여전히 아즈마의 논의가 “말도 안된다”거나 “위험천만하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즈마는 <일반의지 2.0>의 1장을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제부터 필자는 꿈을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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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섹션 프론트 페이지에 쓰기 위해 10권 가량의 책을 읽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사상으로서의 3.11>과 함께 가장 좋은 편에 속했다. 배운 것과 느낀 것이 고루 많아, 내 '마음'에도 영향을 줬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지음·김찬호 옮김/글항아리/328쪽/1만5000원

택시 기사는 민심의 풍향계다. 서민들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누면 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원제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을 보면 미국에서도 비슷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회운동가인 저자 파커 J 파머는 뉴욕에서 난폭한 택시에 올라타 기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또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파머가 “이 직업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고 묻자 기사는 답했다. “글쎄요, 어떤 손님이 탈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조금 위험하기는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요. 대중을 알아야 해요. 거기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운답니다.”

택시 기사는 ‘공적인 삶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위험한 취객이 탈 수도 있고, 범죄가 빈번한 지역을 지나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낯선 사람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기지만, 사실 미국에서 폭력 범죄의 대부분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 지인에 의해 저질러진다. 우리는 자신 안의 어둠을 낯선 사람에게 투사할 뿐이다. 

오히려 기사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으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환대하면서 다양성이 안겨주는 긴장에 친숙해지고,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배움과 삶의 한 가지 통로로 받아들였다. 파머가 보기에 기사는 민주주의적인 ‘마음의 습관’을 계발, 연습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야만을 극복하기 위해 걸어온 오랜 여정 끝에 이뤄낸 성취다. 대개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로 파악되지만,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마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성숙시킬 시민 개개인의 마음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달걀을 쌓은 듯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음(heart)은 라틴어 ‘cor’에서 왔는데, 이는 감정만이 아니라 자아의 핵심을 가리킨다. 파머는 지식, 정서, 감각, 직관, 상상, 경험, 관계, 신체가 통합되는 중심부로서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수도, 전기, 철도가 국가의 인프라이듯이, 마음은 민주주의의 핵심 인프라다.  

그러므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말하는 정치서이자, 분노에 기반해 세몰이하는 정치꾼을 비판하는 사회비판서이며, 민주주의와 근원적 의미를 묻는 철학서인 동시, 저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신학서가 되고, 또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한 수양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기계발서 역할도 한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 가지 이유로 환호한다. 하나는 그것이 다양성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세 가지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반한다.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은 ‘죽음이 없는 삶’과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갈등이 보이지 않지만,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지하로 쫓겨나 복귀를 노리는 중이다.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에게 건국 초기의 미국 민주주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왕의 칙령, 귀족의 결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전통에 익숙한 프랑스인이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 정부는 갈등을 해결하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이견이 빚어내는 긴장을 오랫동안 그리고 창조적으로 풀어냈다. 여기에 파머는 “긴장은 삶의 징표이고, 긴장의 종식은 죽음의 징표”라는 교훈을 잊지 말자고 제안한다. 나치의 ‘최종 해결’이 홀로코스트를 뜻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민주주의는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토론의 장을 제공한다. 그래서 시끄럽고 늦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비효율은 국가를 강하게 하는 인간적 다양성으로 상쇄되고도 남는다. “민주주의는 가장 능력 있는 정부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능력 있는 정부도 종종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민주주의는 해낸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자아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사회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해 민주주의적인 ‘마음의 습관’을 길려야 한다. ‘마음의 습관’이란 토크빌이 프랑스로 돌아가 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언급한 말이다. 토크빌은 세대를 이어 전승되는 ‘마음의 습관’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시 라틴어 어원을 따지면 ‘공적인’(public)이란 단어는 ‘사람들에 관련된’, ‘어른’, ‘사춘기’ 등의 단어에 연결된다. 반면 ‘사적인’(private)은 ‘박탈당한’이란 단어에서 파생됐다. 고대의 성인들은 ‘사적인’ 것을 무언가 박탈당한 상태로 여겼던 것이다. 공적인 삶을 통해 타인의 견해를 듣고, 자신의 견해와 긴장을 느끼고, 이를 창조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민주 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의 모습, 그리고 ‘마음의 습관’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생활’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도 그렇게 되는 중이다. 여럿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광장은 쇼핑센터가 됐고, 떠들석한 예술적 교감의 장이었던 극장은 개인용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대치됐다. 물론 인터넷 공간이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힘입어 아랍권에선 자스민 혁명이, 유럽과 미국에선 ‘점령하라’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터넷이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기른다’고 단정해 말하는 것은 기술결정론이다. 디지털 미디어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생산자가 됐지만, 이렇게 생산된 정보가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받아들인 정보에서 쭉정이를 추려내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파머는 공적인 삶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두 가지 제도로 교육과 종교를 꼽는다. 한국의 제도로 따지면 총 12년을 보내는 초·중·고등학교 교실은 “우리가 시민으로 형성되거나 기형이 되는 결정적인 장소”다. 교사들은 각 과목의 ‘큰 이야기’를 학생이 자신의 ‘작은 이야기’와 연결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파머는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대해 배웠지만 자신의 삶과 연결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 모든 사악함을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교실은 민주주의의 강령을 칠판에 적고 외우는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를 몸으로 체득하는 곳이다. 

매우 자주 사회적 지탄을 받는 한국의 일부 대형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 공동체에서 민주적 마음의 습관을 배울 수 있다는 파머의 제안은 뜬금없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파머 역시 종교적 열광이 각종 테러, 적대의 태반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태도를 간직하고 퍼뜨린 종교적 선각자가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의 퀘이커 교도였던 존 울만은 링컨보다도 앞서 노예를 해방시킨 주인공이다. 노예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울만은 그것이 인간의 평등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한 퀘이커 공동체 교우들을 20년간 성심으로 설득했다. 울만의 노력은 보답받았다. 퀘이커교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80년 전에 노예를 해방시켰다. 

종교는 ‘연민’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연민의 원리는 모든 종교적·윤리적·영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들을 대접하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 종교 등 외부의 제도를 넘어 더욱 내밀한 공간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책은 영적인 깨달음 혹은 매우 깊숙한 자아성찰을 요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아침 신문에 실린 소식들이 닿지 않는 방, 또는 그런 시간이나 그런 날이 당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방, 시간에서 세계의 흐름을 감지한 사례가 있다. 수도사이자 작가였던 토머스 머튼은 1944년 세상과 절연된 생활을 하기 위해 켄터키 주 숲속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1960년대 후반의 인종 갈등과 폭력을 예견했다. 그는 성서, 사회 비평, 흑인이 쓴 시를 읽고, 흑인 음악을 들었다. 수도원 주변의 완전한 침묵 속에서는 억압된 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특권 있는 백인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해 성찰했다. 머튼은 예언자가 됐다.   

민주주의는 예전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뒤 저절로 작동중인 기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의 헌신을 요구한다. 물론 어떤 말, 교육, 예술로도 설득이 되지 않는 부류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주적 ‘마음의 습관’을 가진 60~70% 시민의 힘으로도 굴러간다. 파머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길게 인용하면서 책을 끝낸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제도와 신념, 정치학과 신학의 결합이 여기서 시도된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쓰여졌으면서도 강하고 무거운 책이다.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우연히’ 태어났지만, 그 우연은 개인이 선택한 기자, 목수, 교사 등의 직업보다 훨씬 막중한 책무로 부여됐음을 깨닫게 한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온갖 잡음이 나오고 있다. 물론 눈앞에 다가온 권력을 잡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민주공화국’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우리는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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