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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아남기 위해선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돌로레스 클레이븐'
  2.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이전의 카프카



아직 읽지 않은 스티븐 킹의 소설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꽤 읽었는데도 아직 남아있다. 언젠가 영화로도 제작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추석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가정폭력 문제를 이보다 더 잘 쓰기가 쉬울까. 이른바 '순수문학'에선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여성이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에선 복수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현실에선 전자의 경우가 많겠지만, 우린 장르소설 속에서라도 복수를 꿈꾼다. 


영화화된 <돌로레스 클레이본>. 캐시 베이츠가 <미저리>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 원작 영화에 출연했다. 



소설은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안주인 베라를 죽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온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1인칭 진술 형식이다. 돌로레스는 자신은 베라를 죽이지 않았지만, 사실 수십년 전 남편을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은 개차반이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돌로레스가 참지 못해 대항하자, 이번엔 어린 딸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돌로레스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죽이기로 한다. 남편 살해의 모티브는 베라가 제공했다. 베라는 심술 궃고 까탈스러운 마나님인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서로를 싫어하는 듯 보인다. 침대에 누워 거동을 못하는 말년의 베라는 일부러 똥을 싸 돌로레스를 골탕먹인다. 돌로레스 역시 베라를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친다. 그러면서도 둘은 은근하고 묘한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제 너무 흔히 사용되는 말 '애증'이다. 소설의 핵심은 베라가 돌로레스에게 건네는 아래와 같은 충고다.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사건이 한 판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이 소설의 묘미가 있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모두 범행 후의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 죄책감은 스티븐 킹 식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로 표현됐다. 끔찍하게 썩은 시체가 살아나 산 자에게 돌아오는 설정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에서 종종 나온다.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됐지만, 이 역시 일정 수준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티븐 킹의 전언이다. 영원히 발 뻗고 편히 자는 죄인은 없다. 






창비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세계문학전집 시장에 뛰어들면서 특이하게도 단편선집을 내고 있다. 이런저런 연유로 미국 문학사의 유명 단편들을 엮은 <필경사 바틀비>를 구입했다. <필경사 바틀비>는 <모비 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작품이고, 그외 너새니얼 호손, 에드거 엘런 포우,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등의 작품이 있다. 샬롯 퍼킨스 길먼, 찰스 W. 체스넛, 스티븐 크레인, 셔우드 앤더슨은 이 작품집을 통해 처음 알게된 이름들이다. (옮긴이는 헤밍웨이를 넣지 못해 "우울"하다고 썼다)엮고 옮긴이의 해설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는데, 선정 기준은 딱 영문과 교수의 그것이다. 현대 한국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들이라기보다는, 미국문학사에서 의미를 가질만한 작품을 골라 묶었다.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다.

<필경사 바틀비>를 표제작으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 진가가 묻혀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는 것이 역자의 평. 세계문학의 단편을 모두 읽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내가 읽어본 단편 중에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하는 건 확실하다. 이 책에는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구절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나중엔 바틀비가 이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할 정도였다.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바틀비는 좀 특이한 인물인데, 성실하고 맡은 바 일을 깔끔히 처리하지만 일의 범위를 벗어난 잡무를 지시받으면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변호사는 어이없어하지만 그 단호함에 질려 그를 내버려두는데, 이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가 종국에는 초현실적인, 때로 카프카적인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바틀비를 자본주의와 불화하는 예술가, 소외된 근대인의 전형으로 읽어내거나, 부조리극과의 유사성,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적 거부 등을 파악하는 해석도 있다고 하는데, 난 역시 '카프카보다 50년 이상 앞선 카프카' 정도로 읽어내고 싶다. 어떤 인간, 시스템, 법률로도 바틀비의 의지를 꺾을 수 없는데, 재밌는건 바틀비가 왜 그런 의지를 갖게 됐는지 작품 속에서는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봐야 내줄건 목숨밖에 더 있는가. 바틀비는 마음 한 구석에 선지자, 성인처럼 모셔둘만한 인물이다.

허먼 멜빌. <모비 딕>을 찾아 읽어야겠다.

두번째로 눈에 띤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진품>. 예술과 현실의 관계, 예술의 세계에선 진짜가 가짜처럼 보이고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필경사 바틀비>가 선원 출신 멜빌의 의지와 영감에 의존한 작품이라면 <진품>은 당대 최고 지식인 제임스의 계산과 이상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아마 많은 철학자, 미학자들이 이 작품을 두고 이야기했을 것 같다.

헨리 제임스. 당대의 명문가 출신으로 최고 지식인이었다. 말년에 영국으로 귀화했다.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은 슬프면서도 무시무시한 작품이다. <달걀>의 야망에 가득찬, 그러나 그 야망을 실현할 능력과 터전이 없는 인물의 상황이 슬프고, 이런 이야기는 20세기 초반 미국이 아니라 현대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등장 인물의 이름만 바꿔서 현대물로 각색할 수 있는 건 피츠제럴드의 <겨울꿈>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는 얼마나 덧없이 스쳐가는지. 희대의 '어장관리녀' 주디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알려주며, 그런 화양연화의 삶을 살지 않은 독자도 마치 그랬던 것처럼 착각하면서 주인공과 함께 탄식을 내뱉게 만드는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