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해당되는 글 8건

  1. 호모 사피엔스의 3가지 혁명, <사피엔스>
  2. 서울에 풍기문란을 허하라, <음란과 혁명> (3)
  3. 혁명은 없다. 봉기 하라,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4. 혁명의 열망과 뒤끝, <적군파>
  5. 사랑은 혁명이다, <올 어바웃 러브> (5)
  6. 순백의 혁명에 헌신한 사나이, <자백의 대가> (4)
  7. 문학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8. 사회주의 슈퍼히어로 <강철군화> (2)



얼마전 읽은 책. 장구한 역사를 잘 요약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봐도 손색이 없는지는 봐야겠지만.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조현욱 옮김/김영사/636쪽/2만2000원


셰퍼드, 요크셔 테리어, 시추 등 다양한 종류의 개가 있듯이, 200만~1만년 전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인간 종들은 모두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고,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 각기 다른 장소로 퍼져나가 환경에 맞게 적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기자나 읽는 독자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루돌펜시스 등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멸종했다. 7만년전쯤 동아프리카를 벗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유라시아, 아메리카로 뻗어나가면서 부터다.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미 해당 지역에 살던 네안데르탈인 등을 멸종시켰다는 ‘교체이론’,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서로 교배해 한 집단이 됐다는 ‘교배이론’이다. 지난 몇 십 년간 교체이론이 상식이었지만, 2010년 현대인의 DNA 중 1~4%가 네안데르탈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교체이론이 대체로는 옳지만, 일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는 말과 당나귀처럼 다른 종, 블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경계에 있었다. 교배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못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젊은 역사학자가 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에는 다른 인간 종을 물리쳤고, 이후엔 동물, 식물을 지배했다. 저자가 그리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은 좀 으스스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자신을 멸종시킬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는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인지혁명

7만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를 지어 아프리카를 벗어나 선주민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했다. 7만~3만년전 사이에 배, 기름 등잔, 활과 화살, 장신구, 종교, 상업, 사회 계층화가 나타났다. 저자는 이 시기의 호모 사피엔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지 혁명’이 일어났다고 본다.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호모 사피엔스 뇌의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인지혁명의 핵심은 언어다. 특히 “저기 사자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라는 허구를 전하는 언어 능력이 중요하다.


허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의 침팬지 무리는 20~50마리 정도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결속할 수 있는 규모는 150명 선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하지만 공통의 신화는 수억 명의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카톨릭 신자가 이교도를 처단하기 위해 뭉치고, 서로 본 적도 없는 두 변호사가 한 사람의 인권 수호를 위해 함께 변론한다. 종교나 인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이것들을 믿음으로써 집단을 이뤄 힘을 키웠다.


▲농업혁명

1만2000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는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몇몇 동물과 식물의 삶을 조작하는데 바치기 시작했다. 수렵채집인으로 떠돌며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밀, 완두콩, 올리브나무, 포도를 재배했고, 염소, 말을 기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류가 먹고 사는 칼로리의 90%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등 우리 선조가 기원전 9500~기원전 3500년 사이 작물화한 식물이다.


농부는 수렵채집인에 비해 행복해진 걸까.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수렵채집인은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도 적었다. 하지만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도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식량생산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남은 식량은 폭증한 인구와 소수의 엘리트를 부양하는데 바쳐졌다. ‘번성’이라는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다 수천년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간 밀이야말로 승자다. 호모 사피엔스가 밀을 재배한게 아니라, 밀이 호모 사피엔스를 이용했다.


▲과학혁명

지난 500년간 호모 사피엔스의 힘은 유례없이 커졌다. 인구는 5억명에서 70억명으로, 하루에 소비하는 에너지는 13조 칼로리에서 1500조 칼로리로 늘었다. 현대의 전함 한 대만 있으면 500년 전 열강의 모든 군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 현대의 대형 은행 한 곳이 보유한 돈은 중세의 모든 왕국이 가진 돈을 합친 돈보다 많을 것이다.


과학혁명의 핵심은 ‘무지의 인정’이었다. 500년전까지의 호모 사피엔스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황금시대는 과거에 있었고, 세상은 퇴화 혹은 정체한다고 생각했다. 자연 현상은 모두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기에, 인간은 더 많이 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문제를 풀어나갔고, 문제를 풀면 진보가 가능하다고 짐작했다. 물론 무지를 인정한 과학자 홀로 과학혁명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제국의 군대, 자본주의의 교리 없이 과학은 스스로 번성할 수 없었다.


변화의 속도는 아찔하다. 오늘날은 모든 해에 혁명이 벌어진다고 해도 좋다. 오늘날의 30대가 10대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1990년대 초반 등장한 인터넷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종말의 전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적, 기계적 방법으로 스스로의 모습에 변형을 가하고 있다. 기계를 몸에 이식하고, 유전자를 조작해 생물을 만든다. ‘지적설계’란 진화론에 대응하기 위한 기독교도들의 조어지만, 사실 지금 호모 사피엔스가 하고 있는 일이 지적설계다.


<사피엔스>는 지적으로 짜릿한 책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발부터 언젠가 닥칠 종말까지의 모습을 쉽고 재치있게 그려낸다.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생물학, 고고학, 경제학의 성과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 하지만 ‘쉽다’는 것은 ‘단순화했다’는 말과도 통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본다면,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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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흥미가 돋운다. 전자를 분석하고 후자의 희미한 가능성을 찾는데 집중한다. 


음란과 혁명

권명아 지음/책세상/412쪽/2만3000원


‘예술인가 외설인가’라는 홍보 문안을 붙인 영화, 소설은 대체로 외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오랜 짐작이었는데, 국문학자 권명아는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과 외설의 구분은 음란물에 대한 일제 시대의 탄압에서 시작해 정비석, 유현목, 마광수, 장정일 등을 옭아맸다. 최근에는 김기덕 감독의 신작 <뫼비우스>가 “주제와 폭력성, 공포, 모방위험 부분에서 청소년에게는 유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계간 성관계를 묘사하는 등 비윤리적·반사회적인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이 등급을 받은 영화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에는 제한상영관이 없기에 <뫼비우스>는 현재 상태로는 한국에서 볼 수 없다. 


권명아는 특히 장정일을 둘러싼 음란물 논쟁, 재판 과정에 관심을 가진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성 논쟁을 일으킨 장정일은 1997년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애초 법률적 지원을 거부한 채 혼자 재판을 받은 장정일은 작품의 음란성 여부를 캐묻는 검사에게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으며, “만일 청소년이 저의 작품을 읽는다면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훗날 장정일을 설득해 그의 변호를 맡은 강금실은 “외설(음란)이지만 예술 작품으로서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요지로 변론을 전개했는데, 이 변론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재판 3년이 지난 시점에야 깨달았다고 돌이킨다. 왜냐하면 장정일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과 섞임에 대하여 투명하고 냉정하게” 제시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장정일의 손에는 음란성이 없다. “음란성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설을 처벌한다.”


이제 권명아의 논점은 예술·외설 논쟁을 넘어선다. 풍기문란에 대한 판단이란 “해당 사회의 정동 구조를 규율화하고 정동 생산 기제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외설인가라는 질문은 곧바로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확대된다. 한때 남자가 머리를 기르거나,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극장에 가는 학생, 카페에 앉아있는 주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시대도 있었다. 언제, 왜, 누가 그런 관점을 유포시켰는가. 권명아의 논점은 여기에 있다. 


풍기문란에 대한 법적 통제는 일제의 풍속통제에 연원한다. 그 당시의 풍속통제는 음란물 단속 이상이었다. 한 가지 사례가 조선, 중국의 ‘옛것’에 대한 거부였다. <홍길동전>이나 <삼국지> 같은 고전 소설이 일제의 단속 대상이었다. 이러한 소설들은 사람들의 심성에 오래도록 주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풍속경찰들은 성, 음주, 도박, 영화, 연극, 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단속 대상을 찾아냈다. 


일제 풍속경찰이 단속한 것은 엘리트층이 아니라 서민의 문화, 기호였다. 부랑자, 실업자, 무연고자 등 ‘사회불안세력’과 여성, 미성년 등 ‘보호받아야할 사람들’의 풍습을 감시했다. 감시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말해 ‘적절하고 좋은 것’이면 허용됐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적절하고 좋은 것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할 일 없이 경성 시내를 방황하는 ‘유한 여성’, “옆 사람의 움직임을 엿보며 그에 끌려가는 칠칠치 못한 태도를 가진 사람”(춘원 이광수의 말)까지 ‘비국민’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다. 이는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글을 인용하며 설명하듯, “생명과 정치, 사실 문제와 법률 문제의 구별이 말 그대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영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이었다. 풍속경찰이 “적절치 않다”고 보면, 대통령이 “남자가 머리 길면 보기 싫다”고 생각하면, 영상물심의위원이 “비윤리적이다”라고 판단하면, 그것은 곧바로 국가의 법이 된다. 이곳에서 도덕적 비난과 법적 처벌의 경계는 사라진다. 


과거나 현재나 풍속경찰들의 눈에 인간은 그 자체로 보호받을 권리를 갖지 않는다. 오직 선량한 시민의 속성을 가질 때에만, 무가치한 것을 버릴 때에만 보호받을 수 있다. 심지어 풍속경찰들의 판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판단으로까지 나아갔다. 풍속경찰들은 정혼한 남녀 이외의 성관계를 단속하면서 “성도덕은 종족 보존의 본능”과 관련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혼외 성관계, 동성애 등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논리다. 


패전 이후 일본은 풍속통제를 대표적인 파시즘 법제로 보고 폐지한 뒤 음주, 도박, 매매춘 관련 단속에만 집중했다. 반면 한국의 풍속통제는 해방 이전과 마찬가지로 온갖 일상 생활 분야에서 행해졌다. ‘퇴폐풍조 박멸’을 내걸고 엘리트의 윤리 감각에 어긋나는 것들에 끊임없는 시비를 걸었다. 권명아는 4·19 혁명을 문제적으로 분석한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민초들이 최고 권력자를 몰아낸 혁명인 4·19의 이상은 이듬해 5·16 쿠데타 이후 실패 혹은 미완으로 남았다. 이 시기를 정면으로 겪어낸 세대들에게 4·19는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일 뿐 아니라, 좌절과 배신의 추억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4·19와 5·16의 ‘이인삼각’이라고 표현했다. 


‘준비된 혁명’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4·19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의 엘리트들은 설령 4·19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혁명 이후의 혼란과 ‘구두닦이’로 상징되는 비엘리트들의 열정을 두려워했다. 엘리트들에게 4·19는 오직 학생, 지식인, 남성의 몫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4·19 이후 학생들은 “공명심을 버리고 애국심으로 수습하라”는 의제를 내걸었다. 이런 의제를 통해 학생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동시, 혁명 참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해 나갔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과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열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또는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다루어진다.”


여성들의 모임은 정치적 의제, 사회적 구성체로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계, 동창회, 친목회, 부인회 등은 ‘유한부인’들의 허영심으로 뭉친 모임이라고 여겨졌다. 혁명 직후의 한 여성지에는 “요사이 유행인 계나 한답시고 또는 동창회의 친목회나 또는 기타 직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인회를 한답시고 얼마나 건설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반성해보십시다”(‘여원’ 1960년 7월호)라는 발언이 게재됐다. 



 5.16 쿠데타 이후 어느 시점. 댄스홀에서 춤을 추다 잡혀와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남녀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시기 풍기문란에 대한 제재는 여성, 미성년을 혁명 주체에서 규율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이들이 있어야할 자리를 광장에서 가정 또는 학교로 돌려놓은 것이다. 1962년부터 소년범죄 발생률과 청소년 풍기 단속률이 급증한 이유를 청소년의 일탈이 갑자기 늘어난 데서 찾는 것만큼 순진한 태도도 없겠다. 


다시 장정일 이야기다. 1960년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에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죽은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는 4·19의 시발점이었다. 장정일은 그로부터 2년이 안된 1962년 1월 경북 달성에서 태어났다. 때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인들이 한 해 전 일어난 시민 혁명의 주동자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처벌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정일이 그러했듯 학교에서 쫓겨나고 소년원에 가고, 삼중당 문고를 독파한 끝에 시인·소설가가 되었으나 결국 ‘음란범’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그러므로 장정일의 출생, 성장, 고난의 배경에는 체제가 덮어씌운 일종의 ‘원죄’가 있다. 풍기문란 단속은 음란물 제작, 유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헤집어 규정하는 더 큰 힘과 관련이 있다.


풍기문란이라는 규정은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기준에 근거한다. 여기에는 정동·정념·감각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이성은 인간을 올바로 서게 만들지만, 열정과 정념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고 오랫동안 간주돼왔다. 엘리트층이라고 정념을 가지지 않을 리 없기에, 이때 문제가 되는 정념은 권력자의 법이나 윤리로 번역되지 않는, 흘러넘치는 정념이다. 이렇게 흘러넘치는 정념을 부정하는데는 좌와 우가 따로 없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문학권의 논쟁작인 이기영의 <서화>는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게 읽어볼 작품이다. 비평가 임화는 <서화>의 주인공 돌쇠가 선과 악, 혹은 이성과 정념이라는 ‘두 개의 혼’을 갖고 있다고 본 뒤, 전자가 후자를 지양하는 과정을 높게 평가한다. 농민이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선, 이성으로 정념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책의 제목을 돌아보자. <음란과 혁명>이다. 이는 저자가 직접 붙인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음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혁명’의 가능성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4·19를 주요하게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은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될 뿐이다. 풍기문란한 이들에게, 음란죄로 법정에 선 작가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가. 권명아는 광장에 선 ‘촛불소녀’들을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량에 깔려 세상을 뜬 두 소녀는 애도의 대상이었지만, 2008년 촛불집회의 소녀들은 집회의 주도자였다. 10대 소녀는 ‘빨간 마후라’를 찍은 ‘문란녀’이거나 ‘오빠 부대’라 불리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포로들이었지만, 어느새 광장에 선 ‘정치적 존재’가 된 것이다. 모든 여성은 한때 소녀였지만, 소녀는 단지 여성이 되기 위한 과도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녀는 여성의 과거이자,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이성을 담지한 존재의 어떤 순간이다.” 정말 소녀를, 정념을, 떠돌이를 믿어도 될까. 아마 권명아는 반대로 되물을 것이다. 성인 남성을, 이성을, 직장인을 믿어도 되겠느냐고. 


책 말미에는 대한문, 울산, 제주 등으로 이어지는 전국의 농성촌 지도가 수록돼 있다. 이 캠프에서 하나씩 불을 밝히고, 이 불을 외롭게 놓아주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이제 게토는 아지트로, 전국의 농성촌은 배제된 자들의 연대 장소가 된다. 풍기문란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농성촌 지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것을 불가능한 혁명에 대한 ‘의지적 낙관’으로 봐야할지, 책의 통일성을 떨어뜨리는 과잉으로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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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예전 프론트 리뷰로 쓴 적이 있는 <사상으로서의 3.11>에 한 꼭지의 글을 실은 히로세 준의 저작을 골랐다. 그의 단행본이 완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인데, 일본의 젊은 사상가들의 글은 재미있지만 어딘지 허공으로 한 발짝 떠있다는 감이 든다. 그 한 발짝의 감각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히로세 준 지음·김경원 옮김/바다출판사/288쪽/1만3800원


당신의 삶은 안정적인가. 조금 더 은유적으로 말해, 당신의 인생에는 해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큰 행운아다. 나고 자라 낳고 죽을 때까지 삶의 범위와 행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년에 금융 위기가 닥쳐 다니던 회사가 도산할지, 내일 자연 재해에 고장난 원자력 발전소가 방사능을 유출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듯, 개인과 사회가 모두 불안하다. 


그래서 이 불안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견뎌나가야 하나. 일본의 젊은 사상가 히로세 준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그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이라 할만하다. 그는 세계가 ‘형편 없는 영화’ 같다거나, ‘더럽다’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히로세의 인식에 동의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그만 보고 극장을 나서라’라고 촉구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세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형편 없는 영화든, 더러운 세상이든, 인간은 그것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혼란한 세상의 삶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좋다. 히로세는 1970년대 이탈리아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를 다시 불러낸다. “불안정한 것은 아름답다”. 일본 잡지에 연재된 시평을 묶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프리케리아트의 철학’, 혹은 ‘프리타족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할만하다.  


히로세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과 같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글의 연재가 시작된 후에 일어났지만, 사고 여부와 무관하게 원전은 우리 삶의 속성을 이미 드러내주고 있었다. 수력발전소의 물, 화력발전소의 불은 일단 전기를 내면 낮은 곳으로 흘러가거나 타서 재가 됨으로써 소멸한다. 즉 해결된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낡은 원자로, 다 사용한 핵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인류가 지구상에 남아있는 동안 영원히 함께 한다. 원자력에 있어서 ‘최종처분’은 없다. 원자력 발전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방사성 폐기물은 늘 ‘준안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원자력 폐기물의 ‘처리’와 ‘사고’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진과 쓰나미는 ‘일어 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원전 사고는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답이 없다’는 점은 ‘테러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죽였지만 테러는 종식되지 않았다. 후세인이 죽었지만 이라크는 안정되지 않았다. 오직 혼란과 갈등과 불안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물론 에전에는 답을 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혁명’이다. 시민과 학생에 의한 것이든, 무장한 군인에 의한 것이든, 혁명은 사회와 개인이 당면한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는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한 표를 던진 유권자, 그 반대 지점에서 <레미제라블>의 좌절한 혁명을 보며 눈물 흘린 관객은 모두 ‘최종해결책’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품고 있고 있는 셈이다. 


히로세는 “아직 혁명을 꿈꾸는가”라고 되묻는다. 혁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짱 끼고 앉아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히로세는 혁명 대신 ‘봉기’를 이야기한다. 봉기는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끝없이 흐르는 운동이며,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제어를 위한 것이며, 지도자나 전위당을 알지 못한다. 


2011년 일본에선 변혁 운동의 불길이 사그러진 후 근 40년만에 대규모 군중이 반원전 시위를 위해 모였다. 이때 일부 시위대를 체포해 취조한 경찰관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이는 같은해 뉴욕의 ‘점령하라’ 시위대에 대한 일부 언론의 시각과도 상통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코티 공원에 죽치고 앉아 먹고 마시며 노래하는 시위대를 향해 주류 언론들은 ‘지도부도 없고 목적도 없다’는 식으로 냉소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사라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히로세는 바로 이같은 무규율, 무목적이야말로 봉기의 특성이라고 본다. 히로세가 주장하는 봉기는 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성이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봉기는 “답을 향해 가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나아가는 데모”다. 봉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불안정 상태를 긍정하는 것처럼, 이 책에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제시돼 있다. 먼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의 문제. 히로세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동한 고용의 비정규화가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역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을 촉진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활의 불안정화라는 ‘악’을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이라는 ‘선’으로 전화시키는 시도”다. 에전이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들어가 조금씩 오르는 월급에 만족하며 평생 같은 일상을 반복했을 사람들이, 이제는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프리타’족으로 살아간다. 평생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히로세는 이런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소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계와의 유기적 연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할까. 히로세는 프랑스 영화 <플레이타임>을 예로 든다. 영화 속 근미래의 파리는 온통 철과 유리로 만든 건물이 들어찬 도시다. 등장인물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만, 손을 맞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만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세계에서 소외되어 타향살이를 하게 된 ‘산책자’에게도 그만의 고유한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은 그 자체로 긍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불안정한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 일본의 원전 시위대에 원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를 법한 펑크 밴드가 등장해 시끄럽게 노래한 것처럼, ‘점령하라’ 시위대의 구성원이 다양했던 것처럼, 새 시대에는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조직은 이익 단체, 압력 단체와 다르다. 자크 랑시에르는 두 가지 ‘힘’을 이야기한다. “지위를 배분하고 그 위치를 고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힘”과 “각자의 정신과 신체가 지닌 가소성(可塑性)을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힘”이다. 전자가 ‘폴리스’라면 후자는 ‘정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일본의 영화팬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다. 요약하면 “모두가 이야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 ‘무자격의 자격’으로 모든 문제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고 정치다. 


물론 히로세는 희망찬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68혁명 이후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탈출했지만, 그들이 들어선 곳은 ‘공장이 된 세계’였다. 노동은 취직부터 퇴직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특정 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 전부가 노동의 시간이 됐다. 취업자와 실업자의 구분은 ‘일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임금을 받는가, 아닌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세계를 기업화했다. 푸코는 일찌감치 신자유주의는 “사회체 또는 사회 조직 안에서 ‘기업’의 형식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가 하나의 기업이 된다. 그래서 노동자는 스스로를 경영하라고 강요당한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개발하도록 유도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식인이 되도록 이끈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생산된 지식을 남김없이 빼먹는다. 


세계가 공장이고, 모든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에 이용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답이 너무 간단하다. 한국 번역본에 추가된 2011년 10월 런던대 버크백 대학 심포지엄 발표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반란의 역동성 자체까지 자기 것으로 훔치는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은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외부’가 된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선 ‘외부의 외부’를 발견해야 한다. 지적 능력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히로세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히로세조차 모를 수 있다.


그렇게 이 책은 혼란스럽다. 혼란의 시대에 혼란한 사유의 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일까. 히로세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가정한 뒤, 세계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긍정의 맹아를 찾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인가, 반대로 급진적인 태도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와 같은 책은 현재 한국의 지적 풍토에선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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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임정은 옮김/교양인/388쪽/1만6000원


언젠가 일본 여행 중 우연히 경찰서 앞을 지나던 중 빛바랜 지명수배자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은 수십 년 전 유행했을 법한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미 체포된 듯 스티커로 얼굴이 가려졌다. 지명수배자들은 모두 일본적군 소속이었다. 한때 이 포스터는 일본의 국제 공항 내 모든 출입국 관리소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적군파는 이제 역사 혹은 좌파 운동에 관심있는 이들이나 기억하는 이름이 됐다. 지명수배자들은 체포돼 형을 살고 있거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거나, 죽었다.  


<적군파>는 일본 급진 좌파 운동을 오랜 기간 연구한 미국의 사회학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가 쓴 책이다. 1972년 이스라엘의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의 주역 오카모토 고조를 면회한데서 시작해 20여년에 걸쳐 인터뷰, 현지 조사 등을 병행했다. 


저자는 적군파가 관련된 사건 중 굵직한 세 가지를 다룬다. 첫번째는 1972년 5월 31일 벌어진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이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소속의 일본 청년 세 명이 공항에서 찾은 짐에서 소총과 수류탄을 꺼내 승객들에게 난사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6명이 죽고 80명이 다쳤다. 두번째 사건과 세 번째 시건은 시간적·인과적으로 연결돼 있다.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71년 12월~72년 2월 군마현 하루나산에 만든 비밀 기지에서 군사 훈련을 하던 연합적군(적군파와 혁명좌파의 연합조직) 조직원 사이에 벌어진 폭행, 고문을 말한다. 당시 평균 나이 23세의 조직원들 31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 12명이 동료에게 맞거나 칼에 찔려 죽었다. 살아남은 조직원들 중 5명은 경찰에 쫓기다가 인근 아사마 산장에서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붙잡고 수천 명의 경찰과 10일간 대치했다. 이 기간 중 민간인 1명, 경찰 2명이 사망했고, 농성하던 조직원들은 전원 체포됐다. 


스테인호프는 6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움직임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당시 청년들이 들썩인 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서유럽, 남미, 중국, 일본의 젊은이들이 구체제를 뒤엎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났다. 베트남전쟁, 관료제, 식민주의, 인종차별, 여성해방, 언론자유 등 온갖 것들이 이슈였다. 스테인호프는 열정적인 참여자는 아니었지만 호의적인 관찰자로서 그 시기를 보냈다. 


연구자의 길을 걸은 스테인호프는 미국 바깥의 상황이 궁금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진보 운동은 비슷한 듯 하지만 달랐다. 미국에선 아무리 뜨거운 운동이었다해도 국가 체제 자체에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규모 가두 시위는 드물었고, 대개 비폭력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이들은 달랐다. 일본의 일부 좌파 진영에선 국가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선 무장 투쟁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들은 국내 상황만 보지 않았다. ‘세계동시혁명’으로 낡은 자본주의 체제, 국가주의를 타파할 꿈도 꾸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오카모토 고조는 화목한 가정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중산층 청년이었다. 미국에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있으면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거나 나쁜 성장 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오카모도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무고한 승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을 때도 그의 정신은 멀쩡했다. 이는 어제의 동지를 오늘 고문해 죽인 연합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굳건한 신념으로 벌인 범죄들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는 오카모토 고조


오카모토는 범행 당시 24세였다. 그는 면회온 스테인호프에게 적군파 이론의 개요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견고한 부르주아 권력을 분쇄하길 원하며, 이를 위해선 무장 투쟁을 통한 전세계 동시혁명이 필수적이다. 난민 구제나 평화 행진 같은 것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오카모도는 표현했다. 혁명은 역사의 필연이며, 그 와중에 폭력은 불가피하다. 적군파는 혁명에 대비해 병사를 훈련시켜왔고, 자신은 그 병사 중 하나라는 논지였다. 


그러나 공항에서 죽은 것은 이스라엘 관료도, 미국의 무기상도 아니다. 성지 순례 여행을 온 외국인 참배객이 대다수였다. 오카모토는 이스라엘이 ‘교전 지대’이기 때문에, 그곳에 온 사람은 자신의 목숨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혁명은 ‘전체적인 것’이다. 적, 죄없는 자, 방관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 혁명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오카모토에게 사람은 저마다의 삶, 감정, 생각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거대한 목적에 필요한 희생자였다.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부르주아 국가의 법정은 판단할 수 없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카스트로는 말한 적이 있다.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은 당시 전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알려졌다. 테러의 목적이 폭력 자체보다는 폭력을 널리 알리는데 있다고 한다면, 오카모토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피면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적군파는 세계혁명을 위해 일본과는 아무 상관 없는 팔레스타인의 편에 섰지만, 정작 PFLP는 세계혁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가망 없는 목적을 위해 충격적인 행동으로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점에서 오카모토는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카모토는 13년간의 독방 수감생활 끝에 PFLP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군인과 교환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함께 해방된 팔레스타인 포로들에 의해 무등 태워진 오카모토는 멍한 표정으로 리비아에 도착했다. 일본 정부는 오카모토가 귀국하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했고, 그는 남아있는 일본적군과 함께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그 사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오카모토가 속한 일본적군 리더 시게노부 후사코는 귀국한 뒤 체포됐다. 시게노부는 옥중에서 일본적군 해산을 공식 선언한 뒤, 무장투쟁 노선이 오류였음을 인정했다. 


(참조 : 한겨레21 시게노부 후사코 인터뷰)

'테러의 여왕' 시게노부 후사코와 그의 딸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이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사의 이채로운 에피소드였다면,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일본의 학생운동, 급진좌파운동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계기가 됐다. 사실 아사마 산장 농성은 텔레비전을 통해 시시각각 알려졌고, 마지막날 공방전은 95%에 달하는 시청률을 보였다. 그리고 화면을 지켜보던 청년들은 오랜 도피로 지친 5명의 청년들이 수천 명의 경찰에 맞서는 모습을 내심 응원했다. 도쿄대, 교토대 등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들을 응원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아무런 사적 이득도 없이, 오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 게바라 같은 반체제적 영웅상과 겹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일주일 후, 경찰이 비밀 기지 근처에 묻힌 연합적군 멤버들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여론은 급반전했다. 동상이 걸리고 심하게 맞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린 시신이 하나 둘씩 나오자, 내심 적군파를 지지하던 청년들은 ‘이해불능’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후 일본에서 좌파 운동을 지지하는 분위기는 완연히 수그러들었다.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의 연합조직이었다. 적군파는 세계동시혁명을 주창했고, 혁명좌파는 일본 국내 정치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적군파는 몇 차례의 은행 습격으로 얻은 돈이 있었고, 혁명좌파는 총포 가게 습격으로 총기와 탄약을 보유했다. 두 조직의 공통점은 혁명적 변혁을 위해선 무장 투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와카마스 코지의 <실록연합적군>(2007)의 스틸들. 아래는 아마 '총괄'하는 모습인 듯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하게 잡힌 동양 사회에서 두 조직이 통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좌 무장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군파와 혁명좌파는 무장투쟁이라는 대의를 위해 통합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우기 앞서 내부의 사상 투쟁에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두 조직의 수장들은 자신의 휘하 조직원들이 사상적으로 더욱 강하게 무장된 것처럼 비춰지기를 원했다. 혁명좌파의 리더인 나가타 히로코는 적군파의 도야마 미에코의 태도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회합을 하면서 머리를 빗었다거나, 산에 들어오면서 이름도 머리 모양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혁명가가 아닌 여자로 비춰지기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적군파 리더 모리 쓰네오는 나가타의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론가였던 그는 혁명을 위한 ‘내면적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를 ‘공산주의화’ 혹은 ‘총괄’이라는 말로 불렀다. 자신이 보기에 문제가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총괄하라”거나 “공산주의화가 덜 됐다”는 식으로 지적을 했는데, 문제는 ‘공산주의화’와 ‘총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했다는 점이다. 


고행, 신체 단련을 정신적 성숙과 동일시하는 문화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널리 퍼져있다. 모리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예전에 경찰에 체포됐을 때 신문 도중 잡담을 한 조직원, 이 사실을 바로 지도부에 보고하지 않은 조직원 등이 ‘총괄’을 명령받았다. 둘은 처음엔 책상에 마주앉아 죄과를 기록해야 했고, 이후엔 구타당했다. 모리는 구타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과 대결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구타 당해 실신한 조직원들은 기둥에 묶인 채 방치됐고, 이후엔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내쫓겼다. 구타에 가담한 조직원들은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만약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총괄’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범행에 가담했다. 지도부의 눈에 사소한 흠결을 보였다는 이유로 조직원들은 하나 둘씩 ‘총괄’ 대상이 됐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은 ‘패배사’(敗北死)로 규정됐다. 동료들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 공산주의화를 이룩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었다고 합리화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산 속으로 쫓긴 연합적군 조직원들은 두려움과 독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혁명은 이룰 수 없다. 총을 잘 쏘는 것 만큼 정신적으로 단련돼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저기 묶인 녀석은 왜 내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되도록 올바른 태도를 갖추지 않는가. 소규모 조직원 개개인의 이데올로기와 외부 현실이 불일치할 때, 조직원은 외부 현실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막는다. 


적군파 탄생에는 시대적 맥락이 있다. 60년대의 일본 청년들은 뭉쳐서 항의했으나, 현실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헬멧과 죽창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혁명‘당’이 아니라 혁명‘군’이 됨으로써 무장봉기를 꿈꾸었다. 군사 훈련, 총기 탈취, 부르주아 은행 습격을 통한 혁명 자금 모금 등에는 어딘가 낭만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시민들은 이들에게 차츰 부정적 인상을 갖기 시작했으나, 적군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 관념 속의 혁명은 장삼이사의 삶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힘겹게 투쟁한 약자의 패배는 대체로 고결한 인상을 준다. 이상과 몽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을 사회는 격려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연합적군 숙청사건을 본 뒤에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꿈많고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 했는데, 왜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는가.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이라는 상상이다. 연합적군을 ‘나’와 다른 일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안일한 해석이다. 쉬운 길을 거부할 때에만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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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이영기 옮김/책읽는수요일/304쪽/1만5000원


거리의 연인이 사랑하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 114 안내원이 고객을 사랑하고, 펄펄 나는 저 꾀꼬리도 사랑한다. 온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들은 대체 사랑을 어디서 배운 걸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사방에서 반박이 쏟아질 것 같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보듯이 사랑은 ‘타고나는 것’이며,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사랑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고, 사랑의 ‘멘토’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신과 신자 사이 관계에 관한 것이라 세속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뉴욕시립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는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저서인 <올 어바웃 러브>는 양극화, 물신주의, 인종·성 차별, 폭력 등 모든 사회 문제는 ‘사랑의 부재’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훅스가 말하는 사랑이란 타고나는 것도, 빠져드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통 속에 평생에 걸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스스로 사랑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렇다.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훅스가 “너희들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정신의학자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내린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펙과 훅스의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사랑은 “실제로 행할 때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은 사랑하려는 의도와 행동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정의에 따라 우리가 사랑으로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랑에서 배제된다. 부모가 내는 딸랑이 소리에 웃으며 기뻐하는 아기는 사랑하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affection)이다. 애정은 사랑의 한 요소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애정 외에도 상대에 대한 관심, 보살핌, 존경, 신뢰,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것처럼, 연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여성 혹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죽자사자 매달리는 남성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카섹시스(cathexis)다. 카섹시스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투사하는 현상을 뜻한다.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때리는 선생과 부모는 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혹스는 특히 아이에 대한 올바른 사랑을 강조한다. 성인은 자신을 올바르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조직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사랑중'


사랑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폭력과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이 승리하기 어렵다. 사랑은 무엇보다 정직과 진실에서 싹튼다. 타인의 얼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까지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권력의 반댓말이다. 상대방을 이기거나 권력을 얻기 위한 거짓말, 사소하게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얀 거짓말’조차 사랑에는 극약이다. 훅스의 ‘사랑론’은 그의 오랜 연구주제인 가부장제 비판에 맥이 닿아 있다. 가부장제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에게 강인한 그러나 허황된 ‘남성성’을 갖도록 부추긴다. 남성성이 없다면 남성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라고 겁박한다. 가부장제에 물든 남성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직한 것은 곧 나약한 것”이라는 말을 되새긴 채, 가지지 않은 남성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야 한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서 고요하게 가라앉은 당신 마음의 호수를 보라. 당신은 정말 가부장제가 원하는 그런 남성인가. 


초창기의 페미니스트들은 “마초는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인지, 어떤 남성들은 다른 방식의 남성상을 구현했다. 이들이 택한 길은 “아예 남자가 되지 않는 것, 즉 소년으로 그대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왜곡된 길이었다. 소년은 남자가 되지 않음으로서 어머니와의 끈을 잘라낼 필요가 없었고, 어머니같이 자신을 돌봐줄 여자를 찾아다녔다. 한때 ‘젊고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였던 훅스 역시 “가장이 될 생각이 없는 남자”와 연애했다. 그리고 그의 소년티를 벗기고 어른으로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남자는 훅스의 동등한 파트너가 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대신, 마초로 변태해 버렸다. 그리고 훅스가 자신을 “달콤한 말로 속여 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들기라도 한 양” 비난했다.  


사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작가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개념은 ‘인간 사고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의지, 선택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화된다는 신화가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굉장히 끌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판단이며, 또한 하나의 약속이다”라고 말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언제든 왔다가 언제든 사라진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이 완전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행 과정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연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연인에 쏟아부었던 큰 에너지가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직시하고 대비하면 둘의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지만, 열정과 낭만을 잃어버린 연인이 마주치는 것은 대개 거대한 환멸이다. 


훅스가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수행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바깥에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유창한 언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의 꼭둑각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에 대한 말과 행동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훅스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랑은 멀고 욕망은 가깝다. 신용카드 한 장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오직 좀처럼 바뀌지 않을 법한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겹게 노력할 뿐이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책이 영향받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프롬이 속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훅스는 사랑 개념을 통한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다. 훅스가 특히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소비 문명, 물신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적었다. 훅스는 시민의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었고,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크지 않던 1950년대 미국과 그 이후를 비교한다. 옛날의 미국은 인간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베트남 전쟁 시기까지 미국을 뒤덮은 민권 운동,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이 그들의 국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렸다. 그러나 종전 이후 기대는 무너졌다. 급진적인 사회운동이 사그러들고 미국이 보수화되면서 돈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는 가치관이 전파됐다. 광고는 공공연히 거짓말을 했고, 텔레비전과 영화는 기형적인 사랑에 낭만이라는 당의정을 뿌렸다. 사람대신 사물을 중시하는 사회, 탐욕을 권하는 사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멍청하거나 약한 짓이었다. 그래서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며, 돈이 아니라 영혼을 말하는 훅스의 ‘사랑’은 곧 ‘혁명’이다. 


단, 훅스의 사랑에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은 쉽게 섭취하기 힘든 ‘무언가’가 들어 있다. 스스로 종교인임을 숨기지 않는 훅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성’을 강조한다. “신성한 정신과 교감하며 살아가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서 사랑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 빛은 잃었던 생명력을 소생시켜 준다”와 같은 문장,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내부에 ‘신성한 정신’이 있다는 증거다” 같은 문장에서다. 물론 훅스는 ‘신성한 정신’이 “일상 너머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제도권 종교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절, 교회, 이슬람 사원은 물론 대자연에서의 휴식, 봉사활동, 독서, 내밀한 장소에서의 고독을 통해서도 ‘신성한 정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랑에 대한 원초적 갈망, 사랑이 가진 치유력, 그리고 ‘순수한 정신’은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다. 물질에 완전히 포획됐거나, 헌금을 내면 자판기처럼 ‘영성’을 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훅스가 권하는 사랑은 어렵고, 그것이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깨친 사람의 끝없는 노력으로 사랑이 번져간다면, 그래서 언젠가 사랑이 임계점을 넘어 두려움을 압도한다면, 마치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사랑의 혁명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벨 훅스(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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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의 대가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전혜영 옮김/글항아리/532쪽/2만2000원


“똑똑하고 교양 있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는 사람,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 모든 방면에 프로 정신을 보이며 상부를 만족시키는 성과를 보여주고자 애쓰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에 대체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이 진술은 깡 켁 이우, 일명 ‘두크’라 불린 어느 관료에 대한 자타의 평가다. 조직에 속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칭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크가 크메르 루즈의 교도소장이었고, 그 교도소에서 1만2000명이 고문당한 뒤 살해됐다면 이 평가는 달라져야 할까. 


<자백의 대가>는 2009년 3월부터 1년 4개월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국제 재판소에서 열린 두크의 재판 방청기다. 저자는 르완다,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등에서 벌어진 반인륜 범죄 재판을 보도하는 등 국제 재판을 전문적으로 취재해온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다.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1975년~79년 S-21 교도소에서 일했던 두크는 능수능란한 취조자였다. 그는 수인을 어르거나 달래서 결국 원하는 자백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이 때문에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의 행위를 일정 부분 자백하고 참회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언변을 보였다. 그는 남의 자백을 받는 대가이면서 교묘한 자백을 하는 대가다. 


두크는 1942년 11월 생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과 해방 이후의 혼돈기에 빠져있던 캄보디아에서 자란 그는 수학, 물리학, 화학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같은 스터디 그룹에 속했던 여학생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었지만, ‘동지애’를 넘어선 연애는 금기시됐다. 그때는 “우기 때 벼가 자라는 논처럼 풍성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그런 세계”였다. 


20대가 된 두크는 프랑스 유학파 교사를 만나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독재 정권의 탄압에 학교가 흔들리자 두크는 ‘혁명’에 사로잡혔다. 교사 중 한 명이 “혁명 조직에 가담하는 것은 마치 원 궤도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마오쩌둥주의에 심취한 두크는 혁명의 길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두크는 밤에는 혁명 조직에서, 낮에는 수학 교사로 일했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에게는 방과 후 공짜 과외도 해주는 훌륭한 교사였다. 수업 중 정치적인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월급의 7분의 6을 혁명 운동에 기부했다. 1967년 북서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우파 정권이 ‘빨갱이 사냥’에 나서자, 두크는 지인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이듬해 경찰에 체포된 두크는 20년의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두크는 고문을 받진 않았지만, “혁명을 위해 싸우는 한 사람으로 혁명을 위해 고문을 감당을 준비가 되었다”고 훗날 법정에서 말했다. 


혁명의 대의는 숭고했다. 론 놀 장군의 친미 정권을 축출한 뒤 75년 4월 세워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의 헌법 서문에는 이렇게 써있다. “민주 캄푸치아는 독립적이고 화합과 평화, 중립을 지향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다른 국가를 추종하지 않고 우리의 국토 내에서 오롯이 주권을 행사하리라. 행복과 평등, 정의,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득한 속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없는 세상, 또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의 구별 없이 조화롭게 살며 국민의 단결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회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숭고에 이르는 과정은 지난했다. 순백의 혁명가들은 혁명의 장도 위에 놓인 한 점의 티끌도 참아내지 못했다. “적을 제거하라. 마지막 한 명이 나올 때까지 거듭, 계속해서 적을 찾아 제거하라. 그래야 당의 권력이 완벽한 순수성을 띨 수 있고, 모든 부서에 속한 상하 지도자들이 청렴결백하게 존재할 수 있다.” 완전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S-21은 혁명의 완성을 위한 기관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이 교도소는 5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정치범들을 가두고 정보를 얻어낼 목적으로 세워진 이곳에 두크는 부책임자로 부임했다. 옛 정부의 지도자, 장교, 관료, 귀족을 가두었던 S-21은 곧 도시의 신흥 부자들, 혁명 정부에 도움이 안되는 정신질환자들, 나병환자들, 지식인들까지 수감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적의 피를 원했다. 그래서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었다. 웬만한 사람들이 옥에 갇히자 이번에는 당내의 ‘불순한 인물’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S-21의 책임자도 그 대상이었다. 어제의 간수가 오늘의 수인이 되는 일도 많았다. 직속 상관이 제거되자 두크가 그 자리에 올랐다. 성실하고 철두철미한 두크는 곧 혁명 정부가 원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두크는 “결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 일은 없다”고 했지만, 교도소 내 고문과 처형은 모두 그의 펜을 거쳐 이뤄졌다.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CIA나 KGB의 첩자라는 누명을 썼고, 연루된 사람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CIA, KGB가 무슨 조직인지 모르는 사람도 자신이 그들을 위해 일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두크와 크메르 루즈가 듣고싶어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고문당한 사람이 다른 이의 이름을 대고, 그렇게 붙잡혀온 이들이 또다른 이의 이름을 대자 ‘적’의 명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법정에 선 깡 켁 이우, 일명 두크.


고문 기술은 정교했다. 우선 ‘차가운 고문’과 ‘뜨거운 고문’이 있었다. ‘차가운’ 팀이 말로 죄수를 다그친 뒤, ‘뜨거운’ 팀이 육체에 고문을 가했다. 두크는 “일단 말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지만, 두크의 ‘원칙’이 실현되는 일은 드물었다. 죄수가 죽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문하는 기술이 전수됐다. 전기 고문, 채찍질, 비닐봉지 고문, 손톱 아래 핀 찔러 넣기, 발톱 뽑기, 물고문, 독충으로 겁주기, 배설물 먹이기 등이 동원됐다. 고문을 당한 뒤 자백한 사람은 얼마 후 처형됐다. 하나씩 불러내 목덜미를 내리쳐 즉석에서 죽이는 방식이 많이 사용됐다. 굶주린 채 수감되고 고문당한 수인들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정말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맞을까. 혹시 고문을 당해도 쌀만큼 나쁜 짓을 한 건 아닐까. 


법정에서 두크는 교도소를 관리한 책임과 공산당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1만2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데 함께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러나 판사와 방청객의 판단 능력을 모호하게 흐리는 논리를 구사해 법정을 시험에 빠지게도 했다. 두크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상관들에게 충성하고 복종했기 때문이며, 자신은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생존에 대한 필요 때문에 일했다는 논지를 폈다. 판사가 다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만 일을 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묻자 두크는 “필요인지 열정인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어디 있나”고 되물었다. 


캄보디아 정부와 함께 자신을 법정에 세운 유엔에 대해선 “정의란 늘 권력에 딸린 일”이라며 크메르 루즈와 유엔의 깃발 아래 행하는 정의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60대 노인으로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그는 객관적인 사실과 정확한 날짜를 언급했지만, 핵심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해서는 엉뚱하고 지루한 답을 해 질문자를 지치게 하는 방식을 썼다. 


베트남이 침략해 정권이 몰락하자 두크는 다시 크메르 루즈 지하운동가로 돌아갔다. 크메르 루즈가 장악한 지역에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2년간 중국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엔 기독교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로 거듭났다. 공산주의가 자백을 원했다면 기독교는 고해성사를 원했다. 두크는 “인간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공산당이 내 조국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하느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압니다”라고 말했다. 두크와 함께 활동한 교육자, 성직자들은 두크가 과거에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1999년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아일랜드 출신 사진작가가 두크의 얼굴을 알아봤고, 두크는 체포돼 군사 형무소로 이송됐다. 


법정은 두크에 대한 단죄의 장이자 희생자와 유족들의 신원의 장이었다. 완전한 우연으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증언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기도 했기에, 범죄의 명확한 구성 요건을 증명해야 하는 법정에서는 소용이 없는 증언도 있었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감정만은 또렷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증언해야 했다. 그렇게 말로 쏟아내야 다시 숨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리된 희생자 사진. 크메르 루즈 당시의 캄보디아인들은 모두 똑같은 머리모양을 만들어야 했다. 


두크는 최후 변론에 나섰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시를 읊었다. “탄식하고 울고 기도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운명이 너를 부르고자 한 길에서/너의 길고도 무거운 임무를 열정적으로 행하라/그 후에는 나처럼, 고통을 느끼면서 아무 말 없이 죽어라” 그때 91세가 된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 투사가 위성 통신을 통해 소송의 마지막 증인으로 나타났다. 엄격하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단호히 결정하지만 결정하기 전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포괄하는 이 지혜로운 노인은 이 시를 다르게 해석했다. “시인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명예를 잃지 않는 인간이 되길, 살면서 가장 끔찍한 사건을 겪어도 소신을 굽지지 않길 바라는 열망만을 담았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이 시에 동감한다면 형 선고를 받을 경우 그 역시 이 시에 나오는 늑대처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용기를 발휘해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피고인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면제해달라고 마음대로 의사를 표명할 권리는 없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분노하라>로 다시 유명해진 스테판 에셀이다. 


결국 두크는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두크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012년 2월 2심제로 진행된 재판에선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직 살아남은 크메르 루즈 지도자에 대해서도 재판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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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다. 일본의 사상가로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저서로 보인다. 책의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했다고 사사키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인데, 인류 역사의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사사키는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서구의 여섯 가지 혁명을 언급하는데, 이는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하는 것은 통상 '혁명'이라고 언급되지 않는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다. 


먼저 대혁명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었으므로 '혁명'이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고 잇는다. 대혁명이란 곧 '성서를 읽는 운동'을 말하는데, 루터가 당시의 타락한 기독교를 구원하기 위해 성서를 읽고 또 읽고,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세울 수 있었다.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40종이었는데 루터와 그의 적대자들의 저술에 힘입어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른다. 루터는 성서에 근거해 당시 세속 사회까지 지배하던 교회법까지 완전히 부정했다. 그래서 대혁명은 '법의 혁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혁명이 이어진다. 40세의 평범한 남자 무함마드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 뒤 메카 인근 히라 산의 동굴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다가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난다. 매우 현실적이게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쳤다고 의심해 동굴에서 도망치는데,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을 찾는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말이다. 


루터의 '혁명'보다 생소한 것이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는 '모든 유럽 혁명의 어머니'인 12세기의 법혁명을 뜻한다. 11세기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6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전 50권)이 발견된다. 이후 유럽은 그때까지 몰랐던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입수한다. 사사키는 자신이 매우 크게 영향받은 피에르 르장드르를 인용해 국가의 본질은 폭력 기구 같은 것이 아닌,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방대한 법전을 해석한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구빈, 혼인, 성범죄, 고아 과부 병자 노인의 보호 등을 통괄하는 '삶의 규칙'을 세웠다.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때의 문학이란 소설, 시 등의 좁은 의미가 아닌 글로 쓰여진 포괄적인 텍스트를 일컫는다. 그리고 '고작' 5000년 된 문학의 '종언'을 말하거나,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3만년~7만년 된 회화, 무용, 음악 등에 대해 할 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멸망하리라고 믿는 종말론 역시 매우 유아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고 일축한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문맹률은 90%였는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등은 나머지 10%를 상대로 승부해 이겼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쓰고 또 쓰는 것 뿐, 쓰지 않는다면 다른 할 일이라도 있느냐고 사사키는 쏘아붙인다. 



사사키 아타루('사상가'라는 직함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러나 글을 읽으면 짐작이 가는 스타일)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에게 읽는다는 것은 엄중한 행위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글자를 훑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도 '읽다'는 것은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지독한 열광의 독서가이자 과도한 '문학'지상주의자인 사사키는, 아감벤에게는 "제발 부탁이니 사전 정도 찾아보는게 어떨까"라는 조롱을 던지고, 그 이름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가라타니 고진을 비판한다.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 모두를 거부한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는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정보에 대해 무지하지만 텍스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데는 자신감이 있음을 내비친다. 이 책은, 사사키 스스로의 표현을 원용하면 '벌거벗은 광기의 독서'를 권장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나쳐 보이는 비장미가 부담스러울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독서의 자세, 나아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는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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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강철군화>를 두고 '소설 자본론'이라는 평가도 있는 모양인데, 저승의 마르크스가 통곡할 소리다. 물론 이 소설이 그리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뒤이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실현은 마르크스가 꿈꾼 역사의 발전이기는 했을테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이 그리 단순하게 요약될리 없지 않은가. 

소설은 사회주의 혁명가 에이비스 에버하드가 죽은 후 700년 뒤, 그녀의 원고가 발견돼 공개한다는 액자식 설정을 갖고 있다. 앤서니 메러디스가 인류형제애 시대 419년에 쓴 서문이 액자의 틀이다. 에이비스가 남편 어니스트에 대해 남긴 기록이 소설의 골자다. 메러디스는 어니스트를 두고 "수많은 영웅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다소 깎아내렸는데, 에이비스는 당연히도 남편을 유일한 영웅처럼 소개한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모든 것을 알고,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기도 하는 사회주의 슈퍼히어로다. 그에겐 인간으로서의 어떤 결점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 줄거리를 따라가기엔 현대의 독자가 영악하다. 

잭 런던의 단편은 괜찮았다. 보르헤스가 묶은 <마이더스의 노예들>에 실린 몇 편은 강렬했다. 19세기 말엽 알래스카의 골드 러쉬 기간에 한탕을 꿈꾸며 길을 떠났던 그는 당시의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적이고 힘이 넘치는 단편들을 써냈다. 자비 없는 자연, 생존만을 생각하는 인간들이 엮어낸 이야기들에선 뜨거운 맥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투박한 마초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을 기원하는 장편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혁명은 그 무엇보다 섬세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상의 실패한 (대부분의) 혁명들이 잘 알려준다. 

물론 <강철군화>에도 재미있게 읽어줄만한 대목이 꽤 있다. 메러디스가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시침 뚝 뗀 각주들, '분할통치'의 일환으로 과두제 계급이 조장한 노동귀족의 탄생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요즘 대기업 노조들을 비난하기 위한 수식어로 자주 쓰이는 '노동귀족'이란 말이 이 책에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하다. 누가 노동귀족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센스있다. 

<강철군화>가 읽히고 필요한 시절이 있었을 거다. 한국에서는 80년대 중반쯤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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