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게임'에 해당되는 글 3건

  1.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2. 고결한 남자의 죽음, '왕좌의 게임'
  3. 왕좌의 게임과 메르스, 새로운 중세의 시작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몇 가지 이벤트들이 담겨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피의 결혼식', 뜬금 없었던 조프리의 죽음, 역시 예상치 못했던 타이윈 라니스터의 죽음 등이 '검의 폭풍'에 담겼다. 이 이벤트들은 지금까지 7번에 걸친 '왕좌의 게임' 시즌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강렬했으니, 서사의 급격한 굴곡만으로도 '검의 폭풍'은 재미있다.  

하지만 '검의 폭풍'의 독서가 즐거웠던 건 충격적 사건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본 영화, 드라마의 원작을 읽는 재미란, 영상으로는 간략하게 다뤄진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을 매우 천천히 되새기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챕터 별로 특정한 인물이 중심이 돼 서술된다. 예를 들어 제이미 라니스터는 때로 주인공이 되지만, 그의 쌍둥이 남매이자 제이미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인 세르세이는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르세이의 행동이나 생각 등은 제이미나 그외 주변 사람들의 서술로만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인물을 택해 서술했는지에 따라 그 인물 주변의 관계도가 그려진다. 감정과 사건의 허브가 되는 인물을 배치한 후, 그 주변 은하계가 형성된다. 유장한 서사를 이끌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데 유용한 방식이라고,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한다.  

'검의 폭풍'의 특징 중 하나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나긴 여정과 그 사이 싹트는 기묘한 우정, 사랑 등을 그린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제이미와 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는 브리엔느의 관계. 브리엔느는 여러번 그 외모가 묘사될 정도로 인상적으로 추한 외형의 키 큰 여성이다. 브리엔느는 '아가씨'로 남아야 하는 그 시대의 관습을 벗어나 기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아무도 이 거대한 추녀를 '기사'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브리엔느는 고집스럽게 기사의 행동수칙을 지킨다. 브리엔느는 주군인 캐틀린으로부터 포로 제이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고 그 대신 캐틀린의 딸인 산사와 아리아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는다. 캐틀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명이지만, 브리엔느는 주군이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그 명을 따르려 한다. 이죽대던 제이미는 차츰 브리엔느의 고집스러운 기사도에 감화된다. '얼음와 불의 노래'의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사같은 인물은 기사도, 남성도 아닌 브리엔느다. 어쩌면 제이미는 브리엔느에게서 한때 자신이 가졌을지 모르는, 그러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왕가의 역학 관계에 휘말려 잊어버렸던 충성, 정직, 희생 등의 가치를 다시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또 아리아와 '사냥개' 산도르 클리게인의 관계. 킹스가드의 일원이었던 사냥개는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탈영한다. 아리아는 밤마다 외는 살생부에 산도르의 이름을 넣어두었다. 산도르가 아리아의 친구를 죽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리아를 붙잡은 사냥개는 그를 엄마 캐틀린 혹은 이모 라이사에게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려 한다. 살인을 일삼는데다가 술고래이며 돈만 아는 남자와 그를 죽이려는 귀족 소녀가 예기치 않게 동행한다. 아리아는 처음엔 몇 차례 탈출 기회를 노리지만, 후엔 포기한다. 어찌된 일인지 아리아는 동행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도르를 이해하는듯 보인다. 산도르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도, 그를 죽이려는 생각도 사라진다.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아니라, 아리아는 어느덧 산도르를 그냥 하나의 가여운 인간으로서 보게 된다. 산도르가 큰 부상을 입고 죽음에 근접했을 때, 아리아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 상황에서의 살인은 아리아에겐 복수가, 산도르에겐 자비가 될 것이었지만, 아리아는 그냥 말 없이 짐을 챙긴다.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못하는, 혹은 사랑하면서 증오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혹은 드라마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티리온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티리온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때 모친은 죽었고 티리온은 난쟁이로 자랄 운명이 되었다. 아버지 타이윈은 아내를 '죽인',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도 말썽만 피우는 티리온을 인정하지 않는다. 티리온이 지독한 외모 컴플렉스와 그에 따른 방탕한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티리온은 라니스터 형제 중 누구보다 영리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도 결과적으론 로맨틱하다. 티리온이 냉철한 아버지, 사악한 누나, 그래도 인간적인 형, 정의와 돈을 저울질하는 용병,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는 아내, 헌신적으로 보이는 잠자리 파트너와 맺는 관계들은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인간 관계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4부 언제 나옵니까.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누구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그래서 많은 시청자들이 정을 주었던 인물을 사정 없이 죽여버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 시초는 시즌 1  종반부 에다드 스타크의 참수 장면이다. 사전에 정치적으로 정지된 바에 따르면, 스타크가 죄를 고백하면 조프리 왕은 자비를 베풀어 스타크를 풀어준 뒤 스타크가 영주로 있는 윈터펠로 쫓아내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제멋대로인데다가 갓 물려받은 권력의 크기에 도취된 소년왕 제프리는 이후의 정치적 후폭풍 따위엔 아랑곳 없이 스타크의 목을 베도록 명한다. 실질적으로 수렴청정을 하는 어머니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시즌 6의 종영에 즈음해 조지 R R 마틴의 원작 소설 1부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이전엔 번역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번 번역은 깔끔해 보인다. 드라마를 통해 대략의 줄거리를 알고 있기에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에다드 스타크가 죽는 장면을 빨리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도 훌륭했지만, 소설은 드라마에서 간략히 소개된 인물의 내면과 행동 배경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 에다드 스타크는 누가 뭐래도 왕좌에 오를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고결하고 정직하고 덕망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육체와 의지가 모두 강인하다. 가족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낀다. 피를 보는 걸 즐기진 않지만, 필요할 땐 주저없이 직접 수행한다. 그가 왕좌를 차지하기에 부족한 점은 왕좌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없다는 것 뿐이다. 


마틴은 그런 에다드를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1부에서 에다드의 정치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세르세이는 "왕좌의 게임이 시작되면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리였다. 오늘의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옛 이상을 숭배하던 에다드는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고결한 이상주의자 에다드의 죽음으로 1부를 마친다는 점에서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이후 잔혹하지만 현실적인 권력 투쟁의 실상으로 접근해간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개성이 우리 삶에서 마주칠만한 유형의 인간으로 수렴된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장점이다. 로버트 바라테온은 현재 왕좌에 앉아있긴 하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진군하는 장군이었던 그는 왕이 가져야할 현명함, 인내심, 인자함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왕좌에 앉아서도 전장을 그리워하는 술주정뱅이 임금이 돼있다. 에다드의 부인 캐틀린은 현명하고 신중하면서도 필요할 땐 과감한 여인이다. 부창부수로, 남편 에다드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라니스터가의 '꼬마 악마' 티리온은 타고난 장애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냉소적인 인물인데, 그런 면모 덕분에 잔혹하기 그지없는 '왕좌의 게임' 속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애초 누구의 선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악의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에다드의 장녀 산사는 꿈꾸는 소녀다. 냉혹한 현실 대신, 동화 속 낭만을 믿는다. 물론 그 믿음은 산사를 배신한다. 드라마 팬들 사이에 '용엄마'로 불리는 대너리스는 조금씩 성장하는 인물이다. 대너리스는 처음엔 산사와 다를 바 없이 순진한, 사실은 어리석은 소녀였으나 기마족의 왕 칼 드로고와 정략결혼을 하고 '칼리시'의 자리에 오르면서 차츰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다. 대너리스는 명색이 판타지지만 사실은 정치드라마인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가장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드래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고,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존 스노우. 그는 1부에선 아직 어린애다. 의무와 욕망,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통해 줄거리를 다 알지만 2부 <왕들의 전쟁>이 나오면 다시 구해 읽을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드라마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정기적으로 쓸 차례가 다가오는 칼럼의 문제점은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다는데 있다. 시의성을 중시하는 언론 속성 상, 쓰고 싶은 이슈가 있으면 내 차례가 아니고 내 차례가 오면 쓸만한 이슈가 지나간 상태일 때가 많다. 그래서 칼럼을 쓸 시기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 사건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는 일정 수준 운에 달려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다섯 번째 시즌이 종영한 <왕좌의 게임>과 메르스를 엮어보려고 며칠 전부터 준비중이었는데, 마감 직전 신경숙 표절건이 터져서 조금 고민했다. 이슈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글이 더 많은 주목을 받겠지만, 차분하게 세계관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데 좀 더 끌리는 편이라 원안을 고수했다.  


덧) 그리고 지면에서의 제목은 '중세로 돌아간 한국'으로 돼 있는데, 내 생각은 '세계는 언제나 중세'에 가깝다. 이 글에서 메르스 사태를 초래한 누군가를 비판할 의도는 없으며(그런 건 다른 분들이 다들 잘 하신다), 그저 우리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삶의 조건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시청하면 고통과 우울이 동반된다. 얼마전 종영한 다섯 번째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사이, 시청자들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비감한 첼로 선율로 편곡된 타이틀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수선한 마음은 내년 여섯 번째 시즌이 시작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선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다. 믿음직한 아버지가 죽고, 무고한 소녀가 죽는다. 불굴의 장군이 죽고, 탁월한 지도자가 죽는다. 물론 시청자들이 바라는대로 악당도 죽는다. 그러나 악당이 죽을 때조차 통쾌하기보다는 씁쓸하다. 한밤중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아들이 쏜 석궁에 맞아 죽는다면, 그런 죽음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다. 


여름 극장가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죽음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죽는다 해도 단역, 조연, 악당이다. 간혹 주인공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지만, 이때는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덧붙여 관객이 비참해지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 어느 때에도 아이들이 죽지 않는다는 건 불문율에 가깝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에서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아이들도 명분 없이 죽어나간다. 북쪽에서 온 좀비들에게 물어뜯기거나, 포악한 군인의 칼에 죽는다. 심지어 아버지의 야망을 위해 산 채로 불태워지기도 한다. 


가상의 대륙에 자리한 7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왕좌의 게임>은 용과 마법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판타지지만, 인물들의 복식, 행동양식, 세계관 등은 서양의 중세에서 따왔다. 원작자 조지 R R 마틴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내 책이 역사에 근거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왕자가 아름다운 공주와 낭만적 사랑을 나누는 ‘디즈니랜드식 중세’는 없다. 



"존 스노우, 넌 아무 것도 몰라"


중세는 극단의 시대였다. 중세인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 무척이나 집착했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저서 <중세의 가을>에서 그 풍경을 묘사한다. 당시 <귀족들의 생활 방식>이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침대에 누울 때는 늘 이것을 생각하라. 잠자리에 들듯이, 그대는 곧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덤에 들게 될 것이다.” 수도원은 창자가 벌레들에게 뜯어먹히는 여성들의 그림으로 장식됐다. 


반면 현대는 평평하다. 역병이 퍼지거나, 메뚜기떼가 창궐하거나, 마녀사냥이 벌어지거나, 귀족들의 자존심 싸움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리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다. 조금 아프더라도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춘 대형병원에 가면 노련한 의사들이 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인터넷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정보와 여론이 있는가.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의사소통 수단을 가졌다. 이러한 현대 문명의 축복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예측가능하고 안전한 궤도를 지난다고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메르스 이후’다. 정부와 의료계는 메르스가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만 위험하고, 병원 안에서만 감염된다고 했다. 그런 줄 알고 안심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를 의심케하는 일들이 자꾸 벌어졌다. 언론과의 인터뷰에 당당히 임했던 젊은 의사가 며칠 사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병원 바깥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자꾸 나왔다. 1차 감염자, 2차 감염자, 3차 감염자에 이어 4차 감염자까지 나왔다. “이번 주말이 고비”라는 말이 몇 주 째다. 정말 메르스가 병원 바깥에서도 감염된다면, 감염을 막을 길은 없다고 봐야한다. 중세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의 목숨은 운에 맡겨야 한다.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쓰여진 문구를 패러디하면 이렇다. “죽음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중세인들의 경구를 차용하면 ‘메멘토 모리’다. 이렇게 우리는 중세로 돌아왔다. 아니 우리는 언제나 극단적이고 잔혹한 중세적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