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바르가스요사'에 해당되는 글 3건

  1. 군대가 직접 매춘부를 고용한다면?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2. 독창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베낀다, <작가란 무엇인가2>
  3.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실제 집필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송병선 역/문학동네)는 태초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후에는 술술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상황 설정이 기발하고, 인물들의 대립 구조가 명확하고, 주인공의 운명이 비교적 예측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 독자는 이렇게 쓰여진 소설을 재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 


페루 육군의 행정장교인 팔탈레온 판토하 대위는 아마존 밀림에서 근무하는 군인을 위한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오지에 근무하느라 욕구불만에 시달린 병사들이 인근의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사태가 잦아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군에서 은밀하게 순회 집창촌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위안부'다. 근면성실하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판토하는 이 기괴한 명령에 당황하지만, 곧 명령을 지나치게 훌륭하게 수행해 나간다.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위장한 채 포주 노릇을 한다. 소설의 다른 한 축은 아마존 민간에 퍼진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 '형제회' 이야기다. 이들은 작은 동물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로 신앙고백을 하는 단체인데, 국가와 기성 종교가 위무하지 못한 민중의 영혼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936~)


특별봉사대는 군인의 육체를, 형제회는 민간인의 정신을 위로한다. 특별봉사대와 형제회의 이야기는 작은 교집합만 가진 채 진행되는데, 결국 파국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은 같다. 이는 예상된 결말이기도 하다. 벽지 근무 병사들의 욕구불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작금의 군대에 현실적인 고민이겠으나, 그 해결책이 군부가 직접 운영하는 '봉사대'일 수는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작가는 서문에서 '특별봉사대'가 페루에 실제로 있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허리 아래와 위가 따로 노는 세간의 이중적 인식은 항구적이며 공식적인 성매매를 허용하기 어렵다. 판토하는 임무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군 상층부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고 공식과 비공식 영역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병사의 수와 욕구, 매춘부의 수, 업무시간, 이동거리 등을 정확히 계산해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판토하는 마치 20세기 초반의 테일러주의 경영인처럼 행동한다.


소설은 형제회의 교리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황을 고려하면 민중 토착신앙에 근거한 유사종교로 보인다. 청빈을 강조하고, 교단의 위계를 거부하며, 그래서 결국 국가의 지배 질서와도 상충하고, 일정 수준의 샤머니즘, 애니미즘적 의식을 강조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제도화된 나머지 토착성, 원시성을 삭제한 기성 종교의 빈틈을 파고든다. 판토하가 대낮에 인정할 수 있는 공식, 밤에 추구해야할 비공식의 경계를 흐려 파국을 맞았듯이, 형제회도 기성의 질서에 저도 모르게 도전했다가 탄압을 피하지 못한다. 


작가는 마치 정신없이 교차 편집되는 영화처럼 여러 상황의 대화 장면을 구분 없이 서술한다. 독서의 혼란은 초반 50페이지도 안돼 해소된다. 오히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이를 설명하는 뜸을 들일 필요가 없어서 속도가 빠르다. 군 기밀문서, 편지, 라디오 뉴스 대본, 신문 기사 등의 형식을 차용해 서사를 전개시키는 것도 1973년 출간 당시로서는 꽤나 신선했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사고실험은 예기치 않은 유머와 예상된 파국으로 끝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영화화도 함께 추진했는데, "영화계의 황당한 술책"에 휘말려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고 전한다. 책이 출판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된 후, 작가는 자신이 판탈레온 판토하 대위라고 자처하는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그와의 만남을 거부했는데 이유는 "소설 속의 인물은 현실의 삶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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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작가란 무엇인가1>에 이어 <작가란 무엇인가2>도 출간됐다. 정확한 판매량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시리즈가 책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선 꽤 인기를 끈 것 같다. 이 책의 포맷을 거의 그대로 따서 한국 작가들을 다룬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1편에서 그랬던 것처럼 2편에서도 인상적인 몇 구절을 옮겨 적어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독창적이지 않은 작가들은 과거나 현재의 다른 많은 이들을 모방하기 때문에 다재다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적으로 독창적이려면, 자기 자신을 베끼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지요. 



나보코프(1899~1977)



조이스 캐럴 오츠

각각의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독립적인 것입니다. 어떤 책이 그 작가의 첫 번째든, 열 번째든, 오십 번째든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비평에 대해) 저처럼 많은 책을 펴낸 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코뿔소처럼 두꺼운 가죽이 생깁니다. 두꺼운 가죽 안쪽에는 연약하고 희망에 찬 나비 가은 영혼이 깃들지만요. 


(여성 작가로서의 이점에 대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요.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비평가들이 언론에서 작가들을 일류, 이류, 삼류로 나누는 목록에 진지하게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경쟁에 대한 의식도 별로 없고 관심도 없거든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보르헤스는 결코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무엇인가를 먹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성 경험이 없다고 말할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먹고 마시거나 성적인 일들은 전부 부차적일 것 같아요. 만일 그가 이런 일들을 했다면, 그저 예의상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할 것 같은 사람이지요. 생각하고 책을 읽고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글을 쓰는 것만이 보르헤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른 인물보다 두드러지게 해달라는 어떤 등장인물들의 요청을 깨달았을 때, 이야기가 자신만의 법칙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입니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등장인물을 빚을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어떤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집니다. 


한 권의 책 쓰기를 마쳤을 때 저는 텅 빈 기분, 불안함을 느낍니다. 소설이 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루하루 지나면서 저는 소설을 빼앗겼다고 느낍니다. 




귄터 그라스

진실은 대체로 매우 지루합니다. 거짓말이 그걸 덜 지루하게 해주지요. 그런 데는 해가 없습니다. 


(독일 통일에 대해) 어런 상황은 어떤 누구도 통일이 동독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도 심하게 망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요. 저는 조정할 수도 없고 위험 신호에 반응하지도 않는 열차에 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플랫폼에서 서서 기다렸습니다. 




토니 모리슨

(동트기 전 글을 쓰는 습관에 대해) 커피를 마시고 나서 동이 터오는 걸 바라보지요. 그랬더니 그 분(어느 작가)이 "아, 그것이 의식이네요"라고 말하더군요. 이 의식이 제가 비세속적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작가들은 모두 그들이 접촉하려는 공간, 전달하려는 공간, 이 신비한 과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공간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편집자에 대해)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지도, 당신 작품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가치는 칭찬이 아니라 그런 점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글을 쓸 당시에는 고칠 수 없던 부분을 정확히 집어내는 편집자를 보면 때로는 신비한 느낌이 들어요. 


첫번 째 책을 쓴 이유는 단지 그런 책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완성해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꽤 훌륭한 독자거든요. 


원고가 완성되기 전에는 절대로 계약하지 않았는데, 숙제처럼 느껴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등장인물을 창작할 때 주변 사람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다가 자신을 위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아주 큰 문제입니다. 


저는 등장인물을 모두 통제합니다. 그들을 아주 주의 깊게 만들어내지요. (...) 등장인물이 작가 대신 책을 쓰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역사가 구속복이 되어서 압도하고 제한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잊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역사를 비판하고, 시험하고, 도전하고, 또 이해해야 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가 아니라 문학의 위대한 대변인이 되고 싶지 않는지에 대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 작품이 다른 집단이나 더 커다란 집단으로 동화될 수 있다면 더욱 좋지요. 하지만 말씀하신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이스는 그런 요청을 받지 않았지요. 톨스토이도 그렇고요. 



토니 모리슨(1931~)



주제 사라마구

따지고 보면 저는 상당히 평범하지요. 이상한 습관도 없습니다. 극적인 사건도 만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글 쓰는 행위를 낭만화하지도 않습니다. 글을 쓰면서 겪는 고뇌를 토로하지도 않지요. 우리가 작가에 대하여 들어온 것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 공책이라거나 작가의 슬럼프와 같은 모든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이 정말로 우주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전 우주를 감염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이 지상에서만 존재하는 바이러스의 일종이겠지요. 




살만 루슈디

(<샬리마르>에 대해) 부니의 아버지인 현자 피야레랄이 과수원에서 죽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견디기 힘들어서 책상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이 사람은 내가 만들어낸 인물일 뿐인데.'라면서도. 카슈미르 마을이 파괴되는 순간도 비슷했어요. 그 구상 자체를 견디기 힘들었어요. 


우리 시대에는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 사이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던 제인 오스틴을 보세요. 오스틴의 소설에서 영국 군대의 역할은 파티에서 멋지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피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삶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등장인물의 삶을 온전하고 심오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스티븐 킹

(인터뷰어의 말) 그(스티븐 킹)는 여전히 환자였지만, 매일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로 원고를 가져가서 회가 바뀌거나 투수를 교체하는 사이에 편집하곤 하였다. 


쓰는 동안 모름지기 책이란 유리창을 뚫고 날아오는 벽돌처럼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났지요. 다시 말하자면 제가 쓰는 책이 개인적인 공격의 일종이길 바랐습니다. (...) 책은, 어떤 누군가가 탁자를 가로질러 돌진해서는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요. 


(읽기 고통스러운 소설로 일부 독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저는 어느 정도의 팬을 잃어도 괜찮을 만큼 아직 많은 팬이 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화한 <샤이닝>에 대해) 그 영화는 훌륭한 세트와 스테디캠 촬영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졌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을 엔진이 없는 캐딜락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조각품처럼 쳐다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오에 겐자부로

원칙적으로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무정부주의자입니다. 


핵무기라는 문제는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까지도 저한테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반핵 행동주의는 모든 현존하는 핵무기에 대해 반대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 운동의 창시자로서의 저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희망이 없는 운동입니다. 


(스웨덴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가서 앉은 가족들에게 노벨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해주었지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 그래요?" (...)그리고 다른 두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걔들은 그냥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에 겐자부로(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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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2000)를 읽다. 옮긴이 송병선의 해설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는 '독재자 소설'의 전통이 있다고 한다. 독재자 소설은 1844년 작품인 <아말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대체 그 동네엔 독재자가 얼마나 많았기에 독재자 소설이란 장르까지 탄생했을까 황당하다. 그러므로 나도 <염소의 축제>를 읽고 한국에 독재자 소설이 왜 많지 않은지 궁금해졌다. 한국의 현대사는 줄곧 독재자의 집권기였는데도 말이다. 독재자가 집권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았지만, 독재자 개인을 다룬 소설은 본 적이 없다. 박정희에 대한 이런저런 책이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 논픽션이었다. 독재자는 소설 따위로 다루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였을까. 그러나 그 어떤 논픽션이 <염소의 축제> 같은 픽션보다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염소의 축제>가 다루는 독재자는 1931년~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했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다. 소설은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된다. 35년만에 고국 도미니카로 돌아온 트루히요 집권기 고위 관료의 딸 우라니아, 트루히요와 그 주변인, 트루히요를 암살하려는 사람들. 우라니아는 현재고, 나머지는 과거 시점이다. 우라니아가 35년동안 아버지나 고국과 연락을 끊은 건 단지 독재로 인한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니아와 그의 아버지와 트루히요 사이에 있었던 일이 소설의 결말부에 제시된다. 그러나 난 이 대목엔 그리 움직이지 않았다. 

더 흥미진진한건 트루히요의 내면이었다. 소설 제목의 '염소'란 트루히요를 지칭한다. 서양에서 염소는 악마의 상징이자 성욕이 왕성한 남자를 가리키는데, 트루히요는 둘 다다. 70을 바라보는 노인인데, 정력이 왕성하다. 그에게 섹스할 수 있는 힘은 곧 삶의 에너지다. 그러므로 몸에 이상 기운이 나타나 더 이상 왕성한 정력을 발휘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미칠듯이 불안해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트루히요의 모습. 표정만 보면 착한 할아버지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여자만 밝히는 색정광이 아니다. 책의 묘사에 따르면 트루히요 집권기 동안 도미니카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사회기반시설은 확충됐고, 굶어죽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인민들은 가난했지만, 이는 트루히요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트루히요의 독재를 문제삼은 서방의 경제제제에 기인한 바 컸다. 트루히요 사망 이후, 도미니카는 더 한 혼란에 빠진다.  

소설에는 재미있는 인물이 좀 더 나온다. 하나는 쿠데타의 수장으로, 트루히요가 죽은 뒤 그의 권력을 물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어영부영하다가 모든 걸 날려버린 로만 장군이다. 평소의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으나, 결단이 필요한 순간 결단을 조금씩 뒤로 미룸으로써 트루히요의 가신들에게 붙잡히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그의 고문 장면은 책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다. 제목의 '축제'란 이 묘사하기조차 힘든 고문의 축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발라게르 대통령은 트루히요의 허수아비였다. 수십년간 트루히요주의자로 살았고, 트루히요조차 '서기' 정도로 여긴 왜소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급변 상황에 냉철한 정세 판단과 기민한 언변으로 결국 이후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난 <그때 그 사람들>을 재밌게 봤다. 영화 개봉 당시엔 박정희를 놀려먹였다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그 영화가 상영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난 이제 임상수보다 조금 더 전진한 관점을 보고 싶다. 이죽거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독재자는 부패하고 무능한 사회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난 후자쪽인 것 같다. 그 XX먹을 놈의 인간의 마음 속을 샅샅히 해짚어 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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