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눈 먼 현인의 말들, '보르헤스의 말' (2)
  2. 왜 책을 읽는가, <책읽는 사람들>
  3.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죽음의 친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 즈음에 한 인터뷰들을 엮은 '보르헤스의 말'(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마음산책)을 읽다. 책 속에 주요 인터뷰어로 등장하며 책을 편집하기도 한 인디애나대 비교문학 교수 윌리스 반스톤은 부처, 예수,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등 "오로지 말로만 가르침을 전하는 현자의 오래된 전통"을 언급하며 그 끝자락에 보르헤스를 위치시킨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보르헤스는 중년을 즈음해 시력을 잃었고 이후 구술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다수의 청중 앞에서 행해진 이 인터뷰들은 그래서인지 매우 훌륭하다. 심오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알쏭달쏭하면서도 명쾌하고, 무엇보다 우아하고 박식하다. 인상적인 대목을 옮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난 지옥이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늘 진행되는 것이지요.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의 구원은 글을 쓰는데 있다고, 꽤나 가망 없는 방식이지만 글쓰기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나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필요한 환상이지요. 


시를 읽을 때, 이 점은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도 해당되는데, 만약 소리 내어 읽는 게 더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면 그 글에는 뭔가 잘못된 게 있는 거예요.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쓸 거야. 그리고 나서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너무 시시해. 좀 치장을 해야겠어. 그래서 바로크적으로 치장을 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의 한 형태인 거죠. 공격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할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작가는 같은 책을 되풀이하여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 모든 세대는 다른 세대들이 이미 썼던 것을 아주 약간 변형하여 다시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누구든 혼자 힘으로 많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언어는 전통이기 때문이에요. 


단편소설의 경우, 플롯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나 장편소설의 경우 플롯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말 중요한 건 인물이죠. 


나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나 자신에 관해 글을 쓴답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인물을 한 사람도 창조하지 않았어요. 내 소설에서는 나 자신이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아주 적은 수의 비유만 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비유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우리에겐 시간과 강, 삶과 꿈, 잠과 죽음, 눈과 별이 있어요. 그거면 충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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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사람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강주헌 옮김/교보문고/464쪽/1만7800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는 처지긴 하지만, 대체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확실한 답이 있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읽으라고 하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 분야의 확실한 ‘어른’이다. 그래서 책읽기의 즐거움과 위안에 대한 39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읽는 사람들>(원제 A Reader on Reading)을 통해 그 답을 구해봐도 좋겠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20살에 독재 정권 치하의 조국을 떠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살아왔다.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망구엘이지만, 그를 부르는 가장 좋은 호칭은 ‘독서가’가 될 것이다. 물론 ‘독서가’라는 직업은 없지만, 망구엘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책 읽는 일이니 달리 부를 말도 없다. 2~3세에 침대 위 벽에 걸린 선반에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망구엘은 60년간 3만권의 책을 모으고 읽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성경 연구, 파우스트 전설에 대한 해석, 르네상스 문학 등 여러 주제들의 책이 망구스의 개인 도서관에 꽂혀 있다. 



망구엘과 그의 서재.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겠네. 


그는 ‘나쁜 책’의 사례에 대해 언급할 때를 대비해 수십여 권의 나쁜 책을 버리지 않고 보관중인데, 지금까지 단 한 권의 책만 도서관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것은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다. 망구엘은 “가학적인 고통에 대한 외설적인 묘사가 책꽂이 전부에 전염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편집자, 작가, 독서가인 망구엘의 경력에 가장 그럴싸한 에피소드는 10대 시절에 겪었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우연히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당시 실명했던 호르헤스를 위해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4년간 했다. 보르헤스가 20세기 후반의 문학에 미친 영향이야 말할 나위도 없으니, 망구엘은 ‘은수저 물고 태어나’ 출판계와 문단에 들어섰다고 해도 좋겠다.


망구엘은 조금 근엄하게 시작한다.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뭔가를 읽는 동물이며, 독서를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독서하는 능력이 우리 인간이란 종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는 물건을 사고팔 때 거래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발명됐으나, 사람이든 물건이든 애초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을 때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문자는 거래를 넘어 거래에 관련된 사람 이야기까지 담기 시작했고, 신의 무용담을 적었고, 심지어 세계를 창조하는 수단이 됐다. <성서> ‘창세기’ 속의 신은 “빛이 있으라!”라는 말로 천지를 창조했는데,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빛’이란 단어 자체에 창조력이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들은 올바른 단어와 정확한 발음을 알면 창조주 같은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언어가 진실만을 전달하는 건 아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라는 것은 말이고, “인혁당에는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것도 말이다. 언어는 과거를 왜곡해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에는 ‘치유하는 힘’과 ‘창조하는 힘’도 있다. 가톨릭교도가 미사 시간에 “내 탓이오”를 암송하는 것도, 유대교도가 속죄 단식일에 친구와 이웃에게 용서를 비는 것도, 회교도가 하루 다섯 번씩 알라에게 기도하는 것도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증거한다. 


특히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살아남은 책은 절망에 빠진 인간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세상의 광기가 우리 안방까지 침입해서 식당과 거실, 온 집안을 점령하더라도 우리를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위안은 독자의 입장에서 무척 중요하다.” 시인 네이날도 아레나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성서>에서 수감 생활을 견딜 힘을 얻었다. 


망구엘은 “독서를 통해 배운 바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불의가 지배한 긴 밤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 우울한 역사 속에서 작가는 ‘신의 스파이’였다. 정의를 관장하는 신이 작가를 세상에 밀파한 것이다. 위대한 책들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구원의 시와 소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위대한 책을 위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책을 사랑하되 배신할 수 있어야 한다. 줄거리를 좇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세상이 더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독자가 돼야 한다. 망구엘은 감각을 짜릿하게 만드는 비유를 쓴다.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절개해서 껍질을 들어내고 골수까지 파들어가, 동맥과 정맥을 일일이 추적해서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번역가다.” ‘정전’은 없다. <논어>나 <신곡>이라도 와닿지 않으면 ‘종이 더미’에 불과하다. 


‘책 읽기=글 읽기’는 아니다. 지하철의 광고문구, 정치인의 선전선동, 자극적인 언론기사를 수억 건 읽어도 인간은 나아지지 않는다. 글 읽기에는 양질전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망구엘은 이 주장을 위해 <피노키오의 모험>을 들려준다. 제페토가 만든 나무인형 피노키오는 말썽꾸러기였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불 옆에서 잠들어 발을 태운 뒤에도 제페토가 새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에 먹을 것과 건강한 삶을 요구하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안 피노키오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기로 한다. 근대 사회의 시민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피노키오가 처음 배운 것은 ‘읽기’였다. 


그러나 피노키오의 학교는 글 읽기는 가르치되 책 읽기는 가르치지 않는 곳이었다. 독서는 문자 체계를 기계적으로 익히는 걸 넘어서, 그런 체계들이 ‘나’와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다. 노예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는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부당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 그런 처지를 만든 것이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기 때문이다. 진시황, 히틀러가 책을 불태운 것은 그들 입장에선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육제도의 패러독스는 여기에 있다. 교육은 시민들이 사회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쳐야 하지만, 또 그 지식은 교과서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다”. 느리고 어렵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비판받는 품성이지만, 그렇게 읽어나가야 멀리 깊게 갈 수 있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식으로 책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피노키오는 결국 원하는 인간의 몸을 얻었지만, 사회와 교육제도가 강요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사고는 여전히 꼭둑각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 독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사실 책의 모양이나 읽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돌판이나 점토판에 새긴 글은 두루마리에 옮겨졌고, 동양에서는 목판이나 천 위에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서양의 중세인들은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페이지에 쓰인 글, 즉 스크립타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선 입말, 즉 베르바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영상, 음성 등 멀티미디어가 첨부된 컴퓨터 속의 텍스트를 읽는 현대의 독서법은 중세의 그것으로 돌아간 것일까.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독자의 것이 아니기에, 컴퓨터를 통한 독서는 ‘베르바에 날개를 단 것이 아니라 죽은 스크립타가 걷는’ 모양새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컴퓨터의 방대한 기억 용량은 도움이 될만하지 않은가. 특정 부분을 찾기 위해 과거에는 수십 권의 책을 일일이 뒤져야 했지만, 요즘엔 검색어를 쳐 넣으면 된다. 하지만 망구엘은 컴퓨터의 기억이 ‘탐욕’스러울지언정 ‘능동적’이진 않다고 말한다. 책 읽기로 단련된 학습 능력과 직관을 통해 선별·조합·해석·연상하는 인간 두뇌의 작용을 컴퓨터는 흉내도 낼 수 없다. 


전자 텍스트는 접근성이 좋다. 학습의 어려움 없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루이스 캐럴을 치면 그의 생애, 사진, 저작 등은 물론 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교육은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정말 독서인가. 그저 정보의 수집은 아닌가. 종이 위의 ‘미로 찾기’ 게임을 할 때, 누군가 이미 풀어놓은 길을 다시 훑는 느낌은 아닌가. 


컴퓨터를 몰아내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자는 사람은 없다. 단지 전자책이 인쇄매체를 몰아내야 한다는 ‘십자군’적인 생각은 접어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쇄물은 인쇄물대로,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장점이 있다. 각자의 테크놀로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 머리 속에 세운 방대한 도서관의 관장은 나, 사서도 나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최고 권력자다. 그 막강한 권력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모두들 어딘가에 책이 있을 것이다. 책을 들고 책을 읽자. 독자의 권리를 최대한 이용하자. 책을 갈기갈기 찢었다가 다시 이어붙이자. 그것도 온힘을 다해서. 두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저자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 이 사랑은 쉬운 사랑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끈끈하다. 저자의 지와 기를 짧은 시간에 흡수하기에, 독자는 인신 공양을 원하는 전설의 괴물같기도 하다. 


조만간 망구엘이 추방한 유일한 책 <아메리칸 사이코>를 찾아봐야겠다. 책꽂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책이 주변을 오염시켰는지는 망구엘이 아니라 내가 판단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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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의 <죽음의 친구>
를 읽다. '1833년 안달루시아에서 몰락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문명을 떨치다가, 결혼을 계기로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돌변해 순식간에 영향력을 잃었다' 정도로 책 날개는 저자의 약력을 소개하는데, 난 아무튼 이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까지 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중편 <죽음의 친구>와 단편 <키 큰 여자>가 실려 있다. 특히 <죽음의 친구>에서 매우매우 놀랐다. 기구한 운명을 비관해 스스로 거의 목숨을 끊을 뻔 했으나 '죽음'의 방문을 받고 그의 친구가 된 주인공 힐 힐. 힐은 죽음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해(사람이 죽는 때를 미리 알려주는 것) 권력을 누리지만.

종반부에 경천동지할 반전이 있다. 필립 K. 딕이 한 세기쯤 후에 이런 류의 반전을 즐겨 사용했는지도 모르지만, 딕의 반전이 종종 기능적으로 느껴져 싫증이 나는데 반해, 알라르콘의 반전은 종교적, 철학적이다. 쉽게 표현해 결말이 '안드로메다로 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알라르콘의 배포는 안드로메다 따위는 뛰어넘는다. 이런저런 기사로 추측컨데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테렌스 맬릭의 <생명의 나무>가 이 정도로 이야기의 결말을 우주 끝까지 밀쳐내는 배포를 보여줬다고 한다. 그래서 욕을 한 이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왠지 맬릭의 영화를 보지 않고도 3분의 1 정도 이해할 것 같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황당한 결말을 내기. 그래서 독자의 규격화된 감성을 파괴하기. 한 사람의 인생은 물론, 전 지구 나아가 우주의 운명을 썩은 시체가 꾸는 5분간의 꿈 속으로 밀어넣기. 그리고 보르헤스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상식을 뛰어넘는 배포를 지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죽음의 친구>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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