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에 해당되는 글 5건

  1. 어떻게 '양놈'들을 이길 것인가, <제국의 폐허에서>
  2.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후라는 이데올로기>의 고영란 인터뷰
  3.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왜 그랬을까, <미완의 파시즘> (1)
  4. 애프터눈 티와 아편, <음식의 제국>
  5.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제국의 폐허에서

판카지 미슈라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488쪽/2만5000원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지금도 그 여파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1905년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의 소규모 함대가 러시아 주력 함대를 이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최종 승리를 거뒀을 때 많은 아시아인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당시 무명의 변호사였던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고, 학생 네루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고 돌이켰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쑨원은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로부터 축하를 받기도 했다. 러일전쟁은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랍, 터키, 중국, 페르시아,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은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었음에도, 근대 이후 ‘벼락출세’를 한 서구인들에게 모욕당하고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서구 열강 러시아를 무찔렀다는 사실은 그간의 굴욕을 씻고 밝은 미래를 꿈꿀 계기가 됐다. 


극동에서 중동까지 아시아 옛 제국의 지식인들은 압도적인 기술력, 과학, 국가 조직력으로 아시아를 침략해온 서구에 어떻게 맞서야할지 궁리했다. 누군가는 옛 전통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누군가는 옛 전통 따윈 버리고 서구의 이념, 제도, 기술을 통째로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두 생각의 중간쯤에서 절충해보자는 입장도 있었다.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1838~1897)가 없었다면 호메이니도, 빈 라덴도 없었다. 알아프가니가 촉발시킨 ‘이슬람 혁명’에 대해 미셸 푸코는 서구의 세계체제에 맞선 최초의 대반란이라고 평가했다. 이후의 이슬람 세계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면 알아프가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는 페르시아 출신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프가니스탄 출신 수니파라고 여러 차례 주장했고, 무슬림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행동과 말 역시 텍스트로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작가들은 마치 쪽물처럼 이슬람 세계 곳곳에 스며든 알아프가니의 영향력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알아프가니는 페르시아, 인도 등에서 이슬람 전통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인도,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등 무슬림 세계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거나 뒤늦게 서구 열강을 따라잡느라 허둥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후자였으나 그들이 추구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스만의 개혁이란 지배층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젊은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서구화가 “극장 짓기, 무도장 드나들기, 아내의 외도를 너그럽게 이해하기, 유럽식 화장실 사용하기”로 구성됐다고 빈정댔다. 


그러나 알아프가니는 무슬림이 영광스러운 제국의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서구를 따라잡아야 했는데 그것은 군인에게 서양식 제복을 입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재부흥을 위해선 훨씬 더 철저한 변혁, 즉 정신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알아프가니는 이집트,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1879년 발표한 글에서 알아프가니는 영국이 인도에 운송, 통신을 개설한 이유는 인도의 부를 영국으로 빼가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학교의 목표 역시 인도인을 영국 행정에 쓰이는 도구로 훈육하기 위함이라고 지적했다. 근대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배운 현대인들에게는 상식 같은 얘기지만, 알아프가니 이전에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런 통찰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알아프가니는 추상적 이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서구에 맞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됐다.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 러시아를 돌며 무슬림의 단결과 행동을 촉구했다. 말년의 알아프가니는 오스만 술탄의 초청을 받아들여 이스탄불로 향했다. 술탄은 알아프가니를 자신을 위한 선동가로 활용하려 했으나, 계획이 여의치 않자 그를 사실상 연금했다. 체계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행동가였던 알아프가니는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량치차오


량치차오(1873~1929)는 중국에서 서구의 침략에 가장 많이 노출된 광둥성 광저우 인근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서구의 제도, 사상, 경제에 휘둘리고 있었지만, 중국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가 곧 세계”, 즉 중화주의를 뼛속까지 간직했던 중국인들은 세계의 변화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량치차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1897년까지도 그는 “중국을 인도나 터키와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신과 자신의 스승인 캉유웨이가 주도한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듬해에야 그는 중국이 서구의 눈에는 인도, 터키처럼 허약한 나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량치차오는 유생이었다. 기존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유교, 중국 사회의 전통 구조 역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무술변법의 실패는 중국이 위로부터의 개혁 기회를 놓쳤음을 의미했다. 량치차오는 변법파 지식인을 체포하라는 서태후의 명을 피해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길 원치 않던 일본은 황제 폐위를 바라지 않은 개혁파 량치차오를 환대했다. 


그러나 량치차오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결정적이었다. 의화단과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출동한 서구 열강의 등쌀에 기겁한 서태후는 급히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황실의 위엄은 완전히 무너졌다. 캉유웨이는 유가 사상을 받드는 현명하고 가부장적인 군주가 중국의 근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여전히 믿었지만, 량치차오는 공자나 황제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량치차오가 급진적인 공화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쑨원이 선동하는 공화주의 혁명이 결국은 무정부 상태, 혼돈, 참주정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애로운 전제정’에 대한 마지막 희망 때문에 량치차오는 신해혁명 이후 쑨원에게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은 위안스카이의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법무부 차관, 재정 고문을 맡았지만,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가 기대했던 계몽군주가 아니었다. 량치차오의 정치 참여는 부패하고 난폭한 군벌들과의 타협으로 끝났다. 



타고르


타고르(1861~1941)의 중국 방문을 주선한 이가 량치차오였다. 타고르는 영국령 인도에서 큰 부를 일군 사업가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19세기 후반 인도인들을 사로잡은 과격한 반서구주의에도,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합류하자는 ‘인도의 유럽화’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타고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되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곤경을 이해했고, 서구식 산업문명의 광휘를 목격하고서도 산업화 이전 문명이 그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다고 믿었다. 타고르는 “아시아인의 세계주의”를 지향했지만, 유럽의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913년 노벨상 수상은 전기였다. 전세계에서 목소리를 낼만한 아시아인이 극소수였던 당시 상황에서 타고르의 명성은 확고했다. 허옇고 긴 수염, 강렬한 눈빛, 커다란 키에 전통 의상을 입은 타고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회상대로 “고대 동양의 마법사”같은 풍모를 풍겼다. 세계 각지에서 열린 초청 강연에서 타고르는 서구의 근대 문명을 기계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기계의 유일한 임무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것이기에, 성공을 추구할 때면 도덕적 죄책감을 어리석고 부적당한 감정으로 경멸한다.” 


타고르는 러일전쟁의 승전국 일본을 좋아했다. 타고르는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인 간의 협력을 증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타고르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신일본은 서구의 모조품일 뿐이며, 일본의 범아시아주의란 아시아 이웃에 대한 야욕을 감춘 말에 불과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타고르는 일본 강연에서 일본의 ‘진보’에 대해 우려했지만, 총리 등의 고관을 포함한 청중들은 유럽 식민지의 지식인이 발흥하는 제국 청중에게 건네는 쓴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국 방문은 더욱 큰 수난이었다. 군벌들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1924년의 중국인들은 딴 세상에서 온 듯한 시인이 근대 서구문명을 비판하고 아시아의 오랜 덕목을 찬양하는 말을 무시했다. 한때 타고르의 시를 번역했던 마오둔은 “국내의 군국주의자들과 국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우리에게는 꿈꿀 시간이 없다”고 말했고, 타고르의 연설장에서는 “우리는 철학이 아니라 유물론을 원한다”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타고르는 남은 강연을 취소하고 중국을 떠났다.  


그러나 타고르는 정치에 무관심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프랑스 군인들이 중국의 유산 원명원을 잿더미로 만든데 대해 분노했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방해하는 잉글랜드를 “독립해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생명체를 토해내지 않으려는 이무기”라고 비유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실험에도 관심을 보였다. 오랜 일본인 친구인 시인 노구치 요네지로가 일본의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자, 타고르는 “내가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뉘우치기를 바라네”라고 답장했다. 


근대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오락가락했다. 전통을 거부했다가 다시 받아들였고, 시대를 오판해 자신의 말을 뒤집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 출신의 저자는 근대 아시아 1세대 지식인의 좌충우돌, 고군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량 학살을 계기로 나날이 진보하는 합리적 세계라는 19세기의 신념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 사상가들의 동요를 예견”했다고 평가한다. 서구의 근대성은 승리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인종청소, 무력분쟁,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한 이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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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라는 이데올로기>(현실문화)는 혼란스럽다. 여러 분야에서 분명했던 사고의 경계선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누가 억압했고 누가 억압당했는지, 누가 전쟁하자 했고 누가 평화를 주장했는지, 누가 친일파이고 누가 반일파였는지, 알 수가 없다. 


저자인 고영란 니혼대 국문학과 교수(45)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e메일로 만난 그는 “역사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 간단 명료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전후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집단기억의 프레임을 검토한다.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이웃 나라들을 침범했던 일본은 미국의 점령기 동안 ‘평화로운 일본’, ‘약한 일본’, ‘피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이를 위해 20세기 초반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 문학자들의 글을 소환한 뒤 ‘세계 평화’의 표상으로 유통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수상하다. 침략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의식하던 이들은 미국, 냉전이란 단어만 만나면 갑자기 식민지 지배자, 침략자로서의 문제의식을 망각했다. 원폭, 대공습의 기억과 현실 속의 ‘강한 미국’ 이미지 역시 스스로를 ‘무참히 당한 일본’, ‘식민지 일본’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것이 고영란이 지적하는 ‘전후 프레임’이다. 고영란은 “전후 프레임은 당시의 냉전 구조와 연동관계에 있었다”며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기억방식도 일본의 전후 프레임과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과거 수많은 이야기들 중 일부를 드러내고 대부분을 감추는 작업이다. 고영란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포착한다. 역사 속에서 신화화된 것을 해체하면서도, 새로운 신화를 쓰려는 욕망은 거부한다. 고영란은 이를 위해 개개의 논문, 문장을 쓰고 수업을 할 때 ‘전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천황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 


기실, 일본에서의 전후 프레임은 이미 해체되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물론 2011년 3월 11일의 대지진이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새롭게 떠오르는 3·11 프레임에 의해 작동되는 수사, 즉 ‘강한 일본’이다. 그는 “방사능, 쓰나미 등의 재해가 인종 구분을 하면서 덮치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눈앞의 선거 공약을 보면 ‘일본인’을 염두에 둔 정책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은 충분히 걱정스럽다.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등 유력 보수정치인들이 ‘오타쿠 문화’의 수용자를 자처하면서 친근한 이미지 만들기에 성공했고, 일본 아이돌 AKB48의 팬과 현 보수 정권의 지지자가 겹치는 상황이다. 여세를 몬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은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헌법 개정, 국방군 창설 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다. 


고영란은 “선거가 끝나면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면서도 “일본 사회를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은 ‘데모를 하는 사회’, ‘저항운동을 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으며, 방사능 피해는 오히려 인종, 민족의 경계를 흔들었다. 그는 “저항운동의 내부는 조직화가 돼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늘 대립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며 “이런 마찰을 표출시키면서도 운동 자체를 멈추지 않는 점에 관심과 기대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전남대, 경희대에서 수학한 고영란은 20년전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 학계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화자가 일본에서 일본 학생에게 일본어로 문학을 가르치는 셈이다. 문학에서는 언어의 뉘앙스, 문화적 배경이 중요할테지만, 고영란은 “주변의 일본 연구자들이 오히려 나를 부러워한다”고 답했다. 초·중·고·대학 교육을 일본에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문학’, ‘국민작가’에 겁없이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뉘앙스의 이면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지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문제는 한국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 탄생한 아베 정권과 박근혜 정권의 양태가 이 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일본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도 비슷하게 분석했다. 그는 “워킹 푸어, 88만원 세대, 자살, 취업 문제 등 한국과 일본의 신문, 잡지를 읽으면 때때로 어느 나라 상황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며 “한국과 일본 소설의 독자가 소설 속 상황, 일본어 또는 한국어로 표기된 고유명을 읽으면서 그것을 단순히 ‘외국’문학이라 거리를 두고 받아들이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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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파시즘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김석근 옮김/가람기획/400쪽/2만5000원


일본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가 그린 세로 193.5㎝, 가로 259.5㎝의 대작 ‘아쓰시마 옥쇄’는 1943년 ‘결전미술전’에 출품됐다. 그림은 누가 일본군인지 미군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의 전장을 묘사한다. 작품이 그려진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한 일본군의 용맹을 칭송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듯 하다. 반면 전장의 모습이 끔찍하게 묘사된 것을 보면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후지타 쓰구하루의 '아쓰시마 옥쇄'


그림의 배경은 1943년 5월 29일 밤에서 30일 새벽 사이, 알류산 열도 서쪽 끝의 애투 섬(일본에게는 아쓰시마)에서 벌어진 전투다. 일본군은 1942년 6월 미국령이던 이 섬을 점령했다. 알래스카 반도 바로 앞의 이 섬을 차지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의 연락로를 차단하고, 미군이 북방 해역의 섬에 일본 공습용 비행장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바로 앞에 적군이 진치고 있는 모습을 방관할 미국이 아니었다. 1943년 5월 12일, 해군 기동부대의 엄호를 받는 미 육군 제7사단 소속 1만1000명이 애투 섬 탈환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애투 섬을 지키기 위해 남긴 병력은 불과 2600여명. 병사의 수나 장비의 질 면에서 중과부적이었다. 


용기 있게 싸우되, 패전이 확실해지면 항복하는 것이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사상자를 줄이고 훗날을 도모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달랐다. 1941년 1월 일본 육군 수뇌부가 장병들에게 배포한 훈시집 <전진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않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 육체는 죽어도 혼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니,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불교식 세계관을 전시의 마음가짐에 접목한 셈이다.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5월 29일 밤 남은 병력은 150명 정도였다. 그러나 <전진훈>을 따른 일본 수비대 사령관은 미군을 야간 기습하기로 했다. 사령관은 “총탄이 떨어지면 총검으로, 총검이 부러지면 철권으로, 철권이 깨지면 이빨로 물어뜯어라”고 훈시했다. 죽을 것이 뻔한 ‘최후의 돌격’이었다. 결국 살아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한 일본군은 의식을 잃은 부상병 등 30명 정도였다. 애투 섬 수비대의 99%가 죽었다. 


대체 왜 이랬던 걸까. <미완의 파시즘>은 일본을 패전으로 몰아간 군국주의자들의 오판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일본의 군 수뇌부가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고, 걷잡을 수 없는 시대 분위기에 정신을 놓고 편승한 결과는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으나, 전쟁은 그만큼의 인명과 국가 재정 손실을 안겼다. 어딘지 찝찝한 승리의 기쁨을 즐기고 있던 일본에 뜻밖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1차 대전의 발발이다. 유럽은 부족한 총기, 탄환, 선박, 군복, 철강, 두류(콩) 등을 줄기차게 주문했고, 전쟁특수를 맞은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1차대전에 참가한 일본은 중국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독일군의 수는 많지 않았기에 일본군의 승리가 유력해보였다. 하지만 일본군 수뇌부는 공격에 뜸을 들였다. 러일전쟁 때처럼 보병이 돌격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기는 대신, 비행기와 이동식 대포 등 최신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투는 ‘아시아에서의 근대전의 전시회’였다. 독일군은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한 지 8일만에 항복했다. 유명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는 “근대 병기 앞에서 살아 있는 몸은 너무나도 공허하다”며 “국가의 생산력이 곧 군대의 전투력”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은 물량전, 과학전, 총력전, 보급전이라는 근대전의 성격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물적 토대는 근대전을 지탱할 정도로 탄탄하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의 열강으로 거듭났지만, 미국, 소련, 영국 등 서구의 열강과 대적하기엔 기술력, 생산력, 자원이 모두 모자랐다. 일본군 수뇌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가진 나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근대전에서 ‘갖지 못한 나라’ 일본이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전략가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엇갈린 계획을 내놨다.  


‘작전의 귀신’이라 불린 오바타 도시로는 ‘황도파’를 대표하는 군인이었다. 황도파란 천황에게 절대적 충성을 서약하고 국가에 목숨을 바치는 군인을 말한다. 현재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황도파란 명칭은 비현실적, 비합리적이겠지만, 오바타는 당대 일본이란 나라가 처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세월이 흘러도 일본이 구미 열강과 같이 ‘가진 나라’가 되기는 힘들다고 파악했다.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장기전, 보급전으로 가면 필패다. 이러한 인식의 끝에 도달한 계획은 놀랍게도 ‘단기섬멸전’이다. 인원, 물자의 보급을 뜻하는 ‘병참’ 개념을 무시한, 초단기전만 계획했던 것이다. 


아군이 많고 적군이 적어야 포위섬멸이 가능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힘들다. 허나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황도파 군인들이 전투의 유불리를 따지긴 어렵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물질, 인원의 열세를 뒤집을 무형의 전력, 즉 정신력이다. 오바타는 잠을 자지 않고 이동해 적을 치는 야간 기습을 좋아했다. 그것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다수의 적군을 단기간에 섬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국력에 대한 오바타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승의 신념’이라는 허황된 정신주의로 도약해버렸다. 


이시와라 간지는 ‘통제파’를 대표한다. 황도파가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인 ‘신들린 정신주의’에 관심이 있었다면, 통제파는 ‘갖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이끌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려 했다. 통제파의 시야는 군 내부의 문제 뿐 아니라 국가 운영 전반으로까지 나아갔다. 즉, 이들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계획 경제를 선호했다. 


이시와라 간지가 일본을 ‘가진 나라’로 바꾸기 위해 세운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만주에 주목했다. 일본의 자원만으로는 서구 열강에 대적하기 힘들다. 하지만 만주를 끌어들인다면 다르다. 만주를 영유하면 일본을 세계에서 으뜸가는 산업국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가진 나라’가 된다. 그것이 이시와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시와라의 생각에도 역시 황당한 부분이 있었다. 이시와라는 니치렌슈(日蓮宗) 승려 다나카 지가쿠의 추종자였다. 다나카는 일본이 독창성은 없지만 바로 그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비평하고 모방하고 소화할 수 있는 무(無)의 나라이며, 언젠가 벌어질 큰 전쟁 이후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사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시와라는 다나카의 생각을 이었다. 일본은 동양의 대표, 미국은 서양의 대표이므로, 언젠가 두 나라는 세계의 최종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일본은 ‘가진 나라’가 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시와라는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인 이세 신궁을 참배하다가 “금색의 빛이 일본에서 만주를 향하여” 비추는 장면을 봤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나카시바 스에즈미는 전시 일본 내각, 군대를 총지휘한 도조 히데키의 브레인이었다. 그가 바로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전진훈>을 지은이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나카시바는 무형의 전력인 ‘정신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황도파와 맥을 같이 했다. 그래도 황도파는 상대의 전력을 고려해 싸울 상대와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를 구분하려 했다. 그러나 나카시바는 교전 상대를 정하는 것은 군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싸우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싸워야 한다는 것이 나카시바의 신념이었다. 결국 그는 정신력의 가능성을 거의 무한대로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아쓰시마처럼 옥쇄(명예를 위해 죽음)에 옥쇄를 거듭하면 적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언젠가는 승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대의 절멸이란 지휘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지만, 여기에 ‘옥쇄’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죽음은 미화되고 오히려 이것이 궁극의 전략으로 승화된다. 


패전이 가까워지자 일본에서는 별 생각들이 다 나왔다. 남성이 전장에 동원돼 모자라자, 여성이 ‘정신적으로’ 단련해 남성 못지 않은 몫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신주의의 무용함이 드러나자 국민 개개인의 지혜, 창의를 모으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한번 잘못 잡은 나라의 방향을 되돌리기에는 턱 없는, 패전 직전의 애처로운 몸부림일 뿐이었다. 


오바타 도시로, 이시와라 간지, 나카시바 스에즈미의 생각들은 때로 받아들여졌고, 때로 거부됐다. 이들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은 패전 이후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에 의해 사라졌지만, 요즘의 우익 정치인이나 시민들에 의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감지되기도 한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인 저자의 목적은 군국주의, 확장주의로 치달은 일본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아니라 현실적 질책인 것으로 보인다. 근대의 일본은 여러 가지 준비와 행운으로 인해 아시아의 맹주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때 일본은 소국은 아니었을지언정 확실한 대국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웅크리고만 있으면 자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발돋움’을 했지만, 그 발돋움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발돋움이 잘 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도, 굴러떨어졌을 때의 고통이나 슬픔을 상상해보자”고 그는 제안한다. 


일제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한국의 독자로서는 읽기 불편한 대목도 있다. 저자의 태도는 “제국주의로 이웃 국가를 괴롭혔기에 반성한다”가 아니라, “제국주의엔 불가피한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에 맞는 정책이 아니었다”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아이디어와 그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어 유익하다. 특히 그들의 생각을 당대의 문학자, 종교인 등과 연관해 서술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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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제국

에번 D G 프레이저·앤드루 리마스 지음, 유영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488쪽/2만원


지난 끼니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보자. 고슬고슬한 쌀밥과 구수한 된장찌개, 보기 좋게 담긴 초밥, 상큼한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대체로 그 음식의 맛, 향, 모양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음식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까지 기억해본다면 어떨까. 음식의 재료로 쓰인 쌀, 두부, 참치, 올리브는 누가 어떻게 수확했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른 걸까.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거나 바다에 나가 직접 물고기를 잡아오지 않은 이상, 그 재료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에는 세계인의 손이 탄다. 나라 사이의 운송 수단이 발달하고 무역 장벽이 낮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르웨이 어부가 잡아올린 고등어, 케냐 소년이 딴 커피콩, 미국 캘리포니아 농부가 기른 오렌지가 한국에 있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에는 전지구적인 정치·경제·문화의 과정이 개입된다. 


농경학자 에번 D G 프레이저와 저널리스트 앤드루 리마스는 음식이라는 키워드로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를 재구성한다. 사회가 급변하고 인간의 삶이 영향받은 큰 사건의 배경에는 음식이 직·간접적으로 엮여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다. 


수렵·채집을 위해 이동하며 살아가던 인류는 곡식을 기르면서 정주하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농부가 심을 종자를 고른 기준은 자연 재해에 대한 방어력이 아니라 알곡의 크기였다. 가능하며 많은 낟알을 맺어 많은 사람에게 먹일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곡을 많이, 크게 여는 곡식에는 그만큼 많은 물이 필요했다. 곡식에 물을 대기 위해선 관개수로가, 관개수로를 파기 위해선 혹독한 노동을 견디는 수많은 일꾼이 있어야 했다. 전제 정치, 그리고 국가의 탄생이다. 


그러나 농업 혁명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 대신 미적지근한 곡물 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건강은 오히려 나빠졌다. 곡물에는 필수아미노산, 철분, 단백질 등이 부족해졌고, 아이들의 발육도 저해됐다. 노동 시간도 길어졌다. 수렵·채집인이 한 주 평균 20시간 일했던 반면, 농경인은 40~60시간 일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전쟁이었다. 들소를 잡으러 다니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지만, 잉여 곡물은 군량이 됐다. 수렵·채집인들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이 붙을라치면 그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농경인들은 애써 일군 논밭을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 전제국가의 조직화된 농부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농업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지구가 인간의 농업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곡물을 기르기 위해 숲을 베고 동물을 몰아냈다. 논밭이 된 땅의 성질도 달라졌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선 17가지 원소가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질소다. 문제는 흙 속의 질소 양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곡물을 기를수록 질소의 양은 줄어들었고, 해가 거듭될수록 같은 농지에서 나는 수확량도 감소했다. 지력이 떨어진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부족해진 질소를 보충하는 대신 다른 농지를 찾아나섰다. 로마 제국의 확장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도 식량난과 함께 찾아왔다. 로마 문명의 번성기는 기상학에서 부르는 ‘로마 온난기’와 일치한다. 기원전 250년~기원후 400년을 일컫는 이 시기는 지구가 몹시 따뜻하고 적당한 비가 내린 기간이었다. 작물은 죽죽 자랐다. 그러나 로마 온난기가 끝나자 제국 영토에서 올라오는 세금이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군대, 도로, 교역이 모두 망가졌다. 410년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 시민에게 돌아간 밀 배급량은 예년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로마는 이민족의 무력이 아니라 부족한 빵 때문에 무너졌다. 


스페인, 포루투갈이 시작해 영국, 프랑스가 패권을 이어받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 융성기의 주요 교역품도 식품이었다. 영국인의 오후 시간을 즐겁게 해주는 차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이 19세기에만 4000만명이었다. 1662년 영국의 왕 찰스 2세에게 시집온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는 영국 왕실에 차문화를 전파했다. 당시 영국에 물 이외에 마실 것이라고는 맥주, 브랜디, 커피밖에 없었다. 캐서린은 남편이 애인들과 놀아나는 동안 홍차를 우리며 시간을 보냈고, 차문화는 즉시 영국 귀족 사이에 전파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차문화는 서민들에게까지 퍼졌다. 18세기엔 잉글랜드 전역에서 차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 차는 전량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 민중에게 팔아넘겼다. 중국이 영국의 아편 밀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자, 영국은 전함으로 맞섰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국인들이 애프터눈 티를 마실 때, 중국인들은 아편을 피웠다. 


제국주의 식민지에 세워진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는 본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한 가지 작물만이 집중적으로 재배됐다. 지금은 스리랑카가 된 실론섬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원시림을 깎아내고 커피 나무를 심었다. 커피 가격이 하락하자 이번에는 커피 나무를 베어내고 차 나무를 심었다. 영국은 찻잎 채취를 위해 인도에서 떠도는 타밀인을 데려와 투입했다. 그런데 영국 시장에 원활히 홍차를 공급하던 실론에 1876년부터 3년간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때마침 경기 침체 때문에 차값까지 폭락했다. 타밀 사람들은 남아도는 차잎을 먹을수도,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만 명이 굶어죽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아니더라도, 한 가지 작물을 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지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아일랜드는 원래 목초지에 수많은 가축이 뛰어올던 곳이었다. 아일랜드 지주들은 산업혁명이 진행중이던 18세기 영국에 암소, 양털을 팔고자 했고, 그래서 경작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다. 아일랜드 농부들은 17세기 초반 스페인에서 들여온 감자를 심어 연명했다. 아일랜드 토양에서 잘 자랐던 감자는 다른 곡물에 비해 2배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다. 1840년대 아일랜드 인구 800만명 중 300만명이 감자만 먹고 살았다. 1845년 9월 감자역병이 발생하자 감자 농사는 완전히 망했다. 100만명이 굶어죽었고, 100만명이 기근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떠났다.  


식품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는 미국도 문제다. 온화한 날씨, 비옥한 토양을 가진 미국 캘리포니아는 미국산 과일과 견과류, 채소의 약 50%를 생산한다. ‘현대 농업의 표본’이자 ‘야채 및 과일 발전소’가 된 이 곳의 농부들은 농사 준비물 조달, 재배, 가공, 유통 등 전통사회의 농부가 해야했던 일 중 단 한 가지만 한다. 마치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처럼 한 가지 일, 즉 재배만 하면 나머지는 국제적인 농산물 기업들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이러한 대규모 농업은 돈이 되지만, 심각한 환경오염이 따른다. 한 가지 작물만 심어진 농장은 그만큼 질병에 취약하다. 농부들은 작물을 농약에 담그다시피 한다. 게다가 아래로는 화학 비료를 쏟아붓는다. 캘리포니아 하천 인근 삼림의 89%가 농장이 됐고, 결과적으로 해안 습지는 말라버렸다. 대규모 축산시설의 동물 학대, 열악한 노동 환경, 환경 오염 역시 익히 알려졌다. 


저자들은 몇 가지 대안적인 움직임을 소개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공정무역, 유기농, 슬로푸드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직 완전하진 않다. 공정무역 식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공급이 달리자, 공정무역 단체들은 ‘공정무역 인증’ 기준을 완화했다. 기존엔 작은 협동조합, 가족 농장에서 나온 식품만 인증했지만, 이제는 농장에서 나온 상품 일부에도 공정무역 마크를 붙여준다. 유기농 식품이 도시 고소득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자, 유기농의 기준은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것’ 정도로 좁혀졌다. ‘유기농 우유’의 이미지는 푸른 목장에 드문드문 방목된 젖소가 풀을 뜯어먹은 뒤 생산하는 우유겠지만, 실제로는 축사에 갇혀 곡물이 포함된 사료를 먹으면서 만든 우유도 포함된다.  


<음식의 제국>은 16세기 피렌체의 상인이자 세계 무역 여행을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1573~1636)의 세계 일주 여정을 따라가며 세계 문명 속 음식의 역할을 소개한다. 카를레티는 세계를 돌며 식료품 등을 거래하며 이문을 남기려 했던 평범한 상인이었다. 자신의 물욕, 성욕, 식욕을 채우는데 충실했고,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 서안의 카보베르데 군도를 거쳐 파나마 운하를 지나 페루 리마까지 갔다가 필리핀 마닐라, 일본 나가사키, 중국 마카오에 들른다. 이후 인도의 고아에 머물다가 훗날 나폴레옹이 유배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고초를 겪은 뒤 네덜란드 미델뷔르흐를 통해 유럽에 돌아온다. 이 여행에는 15년이 걸렸다.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온갖 환락, 고난을 경험한 끝에 큰 부를 축적했지만, 귀향길에 네덜란드 사략선(국가의 허가를 받아 무장한 개인선박)에 전재산을 털린다. 그의 여정은 인류가 기르고 사냥하고 교역해온 1만3000여년 음식의 연대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한 점은 “음식으로 장난치면 벌 받는다”는 것이다. 1917년 미국 뉴욕의 유대인 주부들은 식료품 가격이 중간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갑자기 오르자 매디슨스퀘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비싼 가격을 반대하는 어머니 연맹’이란 이름의 이 여성들은 “오직 마진이 가장 적게 붙은 몇 가지 식료품만 사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요커들은 이들의 기세에 눌려 식품을 사지 못했다. 팔리지 않은 식품은 썩어갔고, 상인들은 결국 굴복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명박 정권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잘못들을 저질러 비판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한 순간 찾아왔다. 표현의 자유 문제, 검찰 개혁 문제, 재벌 중심 경제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청앞 광장을 가득채우는 일은 없다. 음식 문제 정도가 대중을 그토록 분노케할 수 있다. 


<음식의 제국>은 새로운 지식이나 지혜를 전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알고 있던 음식과 문명에 대한 상식을 구체적인 정황과 명쾌한 서술을 통해 읽기 쉽게 전한다.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수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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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휴머니스트/각 권 380쪽·392쪽/각 권 2만3000원


역사는 사실의 나열을 넘어 관점의 개입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 각기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함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학자들의 국적이 공존, 평화가 아니라 침략, 피침략으로 엮여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해선 안되는 일이 있다. 2차대전이 끝난 지도 70년이 다 돼가지만, 한중일 세 나라는 여전히 근현대사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잊을만하면 '망언'이 나오고, '피해보상'이나 '사과' 문제도 여태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세 나라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기술해놓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기능커녕 곪고 덧나 더 큰 아픔을 부를 수도 있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는 2001년 일본에서 나온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우익 단체의 지원으로 후소샤에서 출간한 이 교과서는 일본이 아시아 이웃 국가를 침략한 사실을 부정하고 군국주의를 변호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충격받은 세 나라의 역사학자, 교사들은 "생각이 다르다고 싸우고 있을수만은 없다. 서로 만나 이야기하면 함께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2002년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4년간의 작업 끝에 <미래를 여는 역사>를 냈다. 


이 책은 의미와 한계를 고루 드러냈다. 한중일이 처음으로 공동 집필한 역사책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집필자들이 각기 자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바람에 역사를 나열하는데 그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미래를 여는 역사>가 나온 이듬해 이들은 다시 모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2>(이하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이들이 6년간의 집필 기간을 거쳐 내놓은 새 결과물이다.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한국, 중국, 일본의 '관계사'에 주목한다. 지역, 국경을 넘은 사람의 왕래, 물자의 교역이 광범위하지 않았던 전근대였다면 일국사적 관점의 역사 서술이 유효할 수도 있겠으나, 19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신만의 역사를 써나갈 수 없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제국주의를 받아들인 서구 열강은 커다란 배에 선교사, 상인, 군인을 태워 동아시아 국가들의 영토를 넘나들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서양의 신문물과 영향력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려 했고, 그 소화 정도에 따라 다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이 국사 시간에 배운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은 중국, 일본은 물론 서구 열강과 맺은 관계를 따지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1권에서는 3국 근현대사의 구조적 변동을 시대순으로 다루고, 2권에서는 3국 민중의 생활과 교류를 주제별로 집필했다. 그래서 1권은 처음부터 읽어나가는 것이 좋겠고, 2권은 내키는 주제를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미래를 여는 역사>가 중학생 수준에 맞춰져 있었던 반면,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고교 심화과정 수준이다. 대학생이나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인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식민지 개발을 위해 전세계를 누볐던 서구 열강은 아편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마각을 드러냈다. 청과의 전쟁에 이긴 영국은 1848년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해 홍콩을 빼앗고, 광저우, 상하이 등 다섯 항구를 개항시켰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 '화이관념'이 무너진 계기였다. 반면 1853년 일본이 미국과 맺은 미일화친조약은 난징조약이나 같은 해 청이 열강과 맺은 톈진조약에 비하면 일본에 유리한 점이 있는 조약이었다. 물론 이는 일본은 청과 달리 전쟁 패배가 아닌 교섭을 통해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는 청의 태평천국 봉기, 인도의 세포이 봉기 같은 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서구 열강이 강압적인 개방 정책을 수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개방을 향한 첫 발을 비교적 순탄하게 내디딘 것은 이웃 아시아 민중이 피를 흘린 덕분이었다. 


서구 열강은 자신을 문명·진보로, 아시아를 야만·미개로 인식했고, 일본은 이 관점을 재빠르게 받아들였다.  근대화의 여정에 속도를 낸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외교 정책, 즉 함포 외교를 조선에 똑같이 적용했다. 일본은 그동안 대등한 관계를 맺어온 조선을 자신들보다 후발국이라고 여기고, 서구 열강이 아시아와 맺었던 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를 다져가던 일본은 동아시아 바깥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영향력을 확대할 뜻이 없다고 밝힘으로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역내의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당시 피지배자에게 가장 강력한 저항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였다. 아시아의 피지배 민중들은 두 가지 이념의 영향력을 서로 주고받으며 저항 의지를 다져갔다. 1917년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이 세워졌다. 일본은 천황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가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시베리아를 무대로 한 열강의 간섭전쟁에 참여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 맥락에서 주로 이해되던 독립군의 활약도 더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시베리아 간섭전쟁이 끝난 뒤에도 철수하지 않았다. 독립군이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방해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 일본은 시베리아 주둔군과 조선 주둔군을 합세시켜 조선인 독립군의 섬멸에 나섰다. 


소련의 레닌, 미국의 윌슨이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자,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자결이 세계사의 흐름이라고 여기고 3·1 운동을 일으켰다. 중국 지식인, 학생은 3·1 운동을 신선한 자극제로 받아들여 곧 5·4 운동을 추동했다. 1919년 동아시아 민중은 반제국주의라는 저항의 이념과 행동을 공유한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 정세는 이렇게 긴밀히 엮여 있었다. 


서구 문물이 이식되는 과정, 목적, 결과도 3국이 조금씩 달랐다. 1825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건설된 철도는 반 세기 후 동아시아에도 잇달아 선보였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 내륙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철도를 놓으려 했으나, 중국과 일본은 모두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도 부설을 거부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던 일본은 경제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철도를 놓았다. 처음엔 영국의 기술자, 자재를 수입해 철도를 건설했던 일본은 곧 자립적인 철도 경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륙 침략의 길목이었던 조선에도 서둘러 철도를 놓아 빠른 물자, 인력 수송을 준비했다. 이전에는 일본에서 조선을 경유해 만주까지 가는데 한 달이 걸렸으나, 철도 개통 이후 사흘 반나절로 단축됐다. 식민지의 철도는 일본으로 향하는 열차를 상행선으로 불렀기에, 조선에서는 경성에서 부산가는 열차가 상행이었다. 


2권 8장 '전쟁과 민중-체험과 기억'에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핵심적 주제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수준 높고 사려 깊은 논의가 쉬운 언어로 전달됐다. 일본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에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피해가 없었더라도 모든 사람을 '전쟁 기계'이자 '군국주의자'로 만든 이 전쟁의 영향력은 오랫동안 남아있다. 


문제는 기억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었고, 강제적이든 자율적이든 활발한 인적 교류로 인해 세 나라의 영토에 수많은 이주자가 살고 있었고, 일본은 전쟁 가해국이자 원폭 피해국이라는 이중적 위치를 갖고 있기에, 전쟁에 대한 민중의 기억은 제각기 다르게 남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불러일으키는 논란은 기억을 둘러싼 세 나라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한 군인을 신으로 모시고 전황을 그린 패널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는 등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지만, 정작 이 전쟁이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 미친 피해는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또 세계 최초의 피폭 도시인 히로시마에 세워진 평화기념공원은 핵무기 폐기 같은 평화 과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만, 평화 담론을 피해자 의식과 결합시키면서 일본인 스스로 희생자 의식에 빠져드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가 전쟁의 침략적 역사성을 제거하여 전쟁의 낭만화를 시도하고 있다면, 히로시마 평화자료관은 역사적 맥락이 제거된 피해 의식을 갖고서 평화의 낭만화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한국측 대표저자인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일본에서는 '죽음은 평등하다'는 관점이 있어서 침략자와 피해자를 같이 기념하지만, 한국은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제적인 야스쿠니 신사(위)와 히로시마 평화공원.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역사를 써냈다. 6년간 19차례의 국제회의, 60차례의 국내회의가 열렸고, 주고 받은 전화와 e메일은 셀 수도 없다.  논란이 격렬하다보니 한 장을 2~3년씩 수정하기도 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관계에 대해 '조공-책봉'이라고 쓸 것인가, '책봉-조공'이라고 쓸 것인가를 두고도 의견교환이 치열했다. 전자는 중국에 대한 조선의 종속 이미지가, 후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질서 속에서 호혜적 관계를 맺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결국 책에는 '책봉-조공'이라고 쓰여졌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됐다.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중국, 일본에서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는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넘은 동아시아 통사 개발을 목표로 삼고 있다. 신주백 교수는 "우리의 원대한 미래를 위해 만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학문적인 의견 차이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며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올바른 역사 인식, 공동의 역사 인식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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