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 해당되는 글 3건

  1. 지금 누구를 바보로 아는가, 부산시와 부산영화제
  2. 좌파도 자기계발합시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
  3. 미다스의 손, 장민승



역시 때늦은 업데이트.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산시와 부산영화제의 갈등이 봉합됐다. 영화계 내 일부 강경세력은 여전히 불만을 표한다. 이후 전개 양상을 두고볼 일이다. 


<다이빙벨>은 영화사에 남을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거칠고 엉성하고 자기과시적이다. 영화의 목적이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함인지, 큰 차원에서의 국가 개혁을 위함인지 알 수가 없다. 임권택 감독의 말마따나 “어쭙잖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작은 <다이빙벨>이었다. 20년 역사를 지닌 아시아 최고의 영화축제, 부산을 넘어선 한국문화계의 소중한 자산, 세계의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아시아 영화의 창구, 무엇보다 세계의 그 어느 영화제도 넘볼 수 없는 뜨거운 열기를 가진 행사가 좌초 위기를 맞은 건 영화제 조직위원장인 서병수 부산시장이 <다이빙벨>의 상영을 막으려 한 때부터였다. 

정치인이자 관료인 서 시장으로선 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다이빙벨>은 참사 직후의 울분에 가득 찬 영화다. 합리적인 해결책이나 이성적인 대응방식은 찾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목마른 사람조차 호의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이빙벨>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300여편의 영화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영화제에는 <다이빙벨>보다 더 큰 논란을 부를 만한 영화도, <다이빙벨>보다 못 만든 영화도 많다. 심의 당국이 인상을 찌푸릴 영화도, 무심코 입장권을 산 관객이 거세게 항의할 영화도 있다. <다이빙벨>은 그런 수많은 영화들 중 한 편이었고, 그렇기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상영됐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들을 보고 골라 상영해왔던 영화제 집행위가 선택한 이상 조직위는 그 안목을 믿어야 했다. 심지어 <다이빙벨>의 상영 중단을 요청했을 당시 서 시장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이빙벨




서 시장은 영화제가 완전히 검증된 영화만 상영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합리적이고, 따뜻하고, 성숙한, 그래서 누구라도 만족시키는 영화만이 상영되길 원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술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예술은 종종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수만번의 헛발질을 한다. 목불인견의 작품이 대다수다. 그렇게 수많은 졸작 중에 단 한 편의 걸작이 불현듯 탄생한다. <다이빙벨> 이후 한국 영화인들은 여러 편의 세월호 관련 작품을 내놨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언젠가 세월호를 다룬 위대한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 <다이빙벨>은 그 초석이었을 뿐이다. 

부산시는 내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다이빙벨> 문제가 불거진 건 2014년이었고, 지난해엔 별 갈등 없이 영화제를 치렀다. 그러나 서병수 시장이 <다이빙벨> 상영 중단을 요구하면서 만들어진 ‘탄압의 프레임’이 이후 상황에 대한 인식을 좌우했다. 예산, 조직, 인력 등을 둘러싼 부산시와 영화제 간 갈등이 모두 이 프레임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탄압의 프레임’을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서 시장 자신이었다. 

얼마전 부산시는 평소 접촉이 없던 서울 지역 영화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자청했다. 김규옥 경제부시장이 나와 그간의 사태에 대한 부산시의 입장을 밝혔다. 김 부시장은 부산시와 영화제를 언론사의 발행인과 편집국의 관계에 비유했다. 발행인은 편집국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행정·예산의 측면에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부산시 역시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되, 잘못된 행정·예산의 운용 관행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비유를 고스란히 이용하자면, <다이빙벨> 사태는 발행인이 편집국장에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사를 빼라고 요구한 사건이다. 그것도 기사를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한바탕 평지풍파가 일어나고, 발행인이 기자들에게 사과하고 남을 사안이다. 그러나 서병수 시장은 <다이빙벨> 사태에 대해 사과는커녕 그 흔한 유감 표명도 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누굴 바보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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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말을 받아치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분과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 오랜 공부를 짧은 시간에 압축 전달받은 느낌이 들어 기자 생활의 유익함을 새삼 깨닫는다. 아래 글에는 지면 분량상 넣지 않은 건강론에 대한 부분을 덧붙였다. 




예술가는 누구일까. 미술관에 작품이 걸려 있고, 커다란 무대 위에 오르며, 도서관이 그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일까.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59)는 4년만에 낸 단독 저서 <예술인간의 탄생>(갈무리)에서 ‘예술가’와 ‘예술인간’을 구분한다. ‘예술가’는 예술대학 졸업장, 수상 실적에 의해 자격을 얻지만, ‘예술인간’은 저마다의 삶에 내재한 에너지를 끄집어낸 즉시 태어난다. 그는 우파의 전유물처럼 들리는 ‘자기계발’이란 말을 쓰기도 꺼리지 않았다. 다만 체중 관리, 영어 점수 향상 등 자본이 원하는 방식의 자기계발이 아니라, 삶에 충실한 자기계발이어야 한다. 조 대표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만났다. 


-당신은 2008년 광화문 촛불집회, 2010년 아랍의 봄,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평가한다. ‘예술’이 무엇인가.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삶 자체가 예술의 원료이며, 에너지다. 현대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제도적 예술가는 역사 속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적 존재다.”


-당신은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 아서 단토 등의 예술종말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안토니오 네그리,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의 미학을 예술진화론으로 위치시킨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가. 

“인류가 종말을 맞는다면 예술은 사라지겠지만,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예술이라는 활동양식이 사라질 수는 없다. 네그리는 다중이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매 순간을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범상하거나 모자라는 사람에게도 ‘예술의지’가 약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생>의 장그래를 보라. 회사에서 이런저런 압력을 받은 장그래는 옥상에 올라 산다는 것, 일한다는 것이 뭔지 생각한다. 이런 순간 예술의지가 밀려오지만, 결국 회사의 방파제에 부딪혀 맥을 못추곤 한다. 지금 다중의 예술의지는 자본주의의 돈벌이에 접합돼 끌려가는 상태다. 이 접합을 끊은 뒤 자신의 생명을 돌보고, 삶을 배려하는 기술을 회복할 수 있을지 여부가 예술 진화의 핵심 문제다.” 


-촛불집회는 예술의지가 발현된 사례인가.

“촛불집회는 경제인간으로 접합됐던 사람들이 저항의 방식으로 탈주한 순간을 보여줬다. 유모차를 끌고 집회에 나온 주부를 떠올려보자. 주부는 가정에서 남편, 사회의 명령을 받았다. ‘오늘 저녁 된장찌개를 끓여놓으라.’ 이 명령에 꼼짝 못하게 묶여있던 개인들이 혁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자기를 제약하는 모든 조건과 싸웠다. 지금까지 잠식되고, 감추어지고, 불완전연소된 예술의지가 그 순간 나타났다. 이는 위대한 예술가가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낸 순간과 다를 바 없다.”



다중지성의 정원을 이끌고 있는 조정환 대표/ 강윤중 기자


-개인이 이처럼 드물게 찾아오는 격변의 순간을 기다리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에서 가족대책위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가족은 항상 보수적, 반동적이었다. 1980년대에도 가족들이 나타나 ‘파업 깨고 돌아오라’고 말하면 깨졌다. 그때 가족은 경찰보다 더 경찰 역할을 했다. 세월호의 가족은 달랐다. 죽은 304명 앞에서 가족들이 보여준 감수성, 정직성, 그에 충실하려는 노력, 이것을 사회에 알린 전파력…. 지금까지 ‘진실’은 상투화된 말이었다. 그러나 가족대책위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 ‘진실’은 반짝이는 말로 닦였다. 이제 ‘진실’은 수많은 생명과 합쳐져 천근만근의 무게를 가진 말이 됐다. 물론 촛불집회, 세월호는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삶에 충실하고, 그 정직성에 직면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삶을 양보한다. 부모가 시키는대로 하고, 국가의 명령에 따른다. 하지만 시스템에 복종하지 말고, 끈덕지게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때 일상 속에 촛불이 빛나고,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을 좌파식 자기계발로 이해해도 되나. 

"자기계발이란 말을 쓰길 꺼리지 않는다. 좌파들은 자기계발의 논리를 비난하지만, 각 개인이 건강 돌보는 것은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데 결정적 문제다. 다만 현재의 자기계발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갖기 위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지, 삶에 충실한 건강을 추구하진 않는다. 수영선수가 남성 호르몬을 투입하면 근력이 건강해지지만, 그 사람의 삶은 건강해지기는커녕 희생된다. 부자가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병원 다니면서 몸 튼튼하고 근육 만드는 것이 건강한 것인가. 오히려 그것은 질병이다. 현대의 건강은 보양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양기를 돋워 머리가 팡팡 돌아가게 하고 힘이 세지게 한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몸 좋고 힘 있는 상태를 만들 순 있지만, 이를 위해 음기는 희생된다. 이는 양기에 대한 편집증이다. 병들어도 약먹고 출근하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진짜 건강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서운 싸움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건강에 충실하자는 것은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 예술은 어떻게 보나. 

“제도 예술에도 드물게 삶에 충실한 작품이 있다. 백남준, 민중예술, 발자크, 톨스토이, 1930년대의 아방가르드, 황석영, 박노해…. 이렇게 드물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제도가 요구하는 흐름을 위반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는 특권과 자격의 이름이다. 우리는 ‘예술가’라는 특수 집단에게 ‘예술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양도하고 있다. 난 사람 모두에게 정치능력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을 진단하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서 실행하는 능력. 그러나 투표를 통해 정치인에게 그 능력을 양도한 뒤 4~5년간 꼼짝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가 정말 못해서 못하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 속에는 지금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보다 더 활기찬 에너지가 잠재해 있다고 왜 말하지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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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팁을 얻어 추진한 인터뷰였는데, 대단히 즐겁고 알찬 시간이었다. 그는 음악 만들고, 가구 만들고, 사진 찍고, 설치 한다. 다만는 글쓰기엔 좀 취약하다고 고백했다. 나로선 다행이다. 




장민승(36)은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음악을 하다가 가구를 만들었고 또 얼마 있다가 사진을 찍고 설치 작업을 했다. 그리고 모두 성공했다. 작업 매체를 바꾼 이유는 “싫증을 잘 느낀다”는 것이다. 평생 한 가지만 하고도 이름을 못떨치는 사람이 보기엔 복장 터지는 노릇이다. 


그는 최근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 3인에 올랐다. 서울 강남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그의 신작 <검은 나무여>가 전시중이다.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일본의 단시 하이쿠 6편이 수용성 종이에 인쇄돼 걸려있다. “파도는 차갑고, 물새도 잠들지 못하는구나” “꿈은 마른 들판을 헤메고 돈다” “검은 나무여, 에전엔 흰 눈 쌓인 나뭇가지였겠지”. 검은 방에 들어가면 스크린 속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수어(手語)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장민승 작가의 신작 <검은 나무여>의 영상(위)과 하이쿠를 적은 수용성 종이. 바쇼가 임종 직전 남겼다는 이 하이쿠는 수어로 옮긴 뒤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쇼의 원래 구절과 조금 바뀌었다. 


작품은 아무 것도 지시하고 있지 않지만, 관람객은 즉시 <검은 나무여>에서 죽음, 특히 지난해 벌어진 커다란 참극을 감지할 수 있다. 그 사건이 벌어진 날, 장민승은 절친한 친구이자 작업 동료인 정재일과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식당의 벽걸이 TV를 통해 거꾸로 곤두박질한 배를 보면서도 “전원 구조”라는 자막에 먹고 마시기만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사람이 가라앉아 죽어가는 모습을 하릴없이 보고 있었다”는데 대한 수치, 분노, 자괴감으로 뒤덮였다. 사건 이틀 뒤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기쁘지도 않았고,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가톨릭 신자인 장민승은 수어 성가대의 공연에서 ‘소리 없는 들림’을 들었다. 사회의 차별, 갈등 속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느꼈다. 우울할 때는 우울해하고, 슬플 때는 슬퍼해야 한다. 그는 “이 사회에선 우울한 사람에게 약 먹으라 하고, 슬퍼하면 경제 살리자고 한다”며 “조증으로 미친 사회에서 난 긍정적인 비관론자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장민승은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울지 않는 상주’에 비유했다. 상주가 통곡하는 대신, 문상객들이 울든 웃든 이야기하든 마음대로 하게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뜻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부재하는 대상이 있다. 누구나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머리와 표정에 힘을 준 장민승 작가. /김정근 기자


지금까지 장민승의 작품들은 그렇게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것은 ‘예술’이라고 포괄할 수 있는 온갖 분야를 거치며 쌓아온 태도였다. 20세때 아버지인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1997)의 영화음악으로 데뷔해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등 20여편에서 음악 작업에 참여했다. 영화 현장으로 치면 막내 연출부 나이에도 못미쳤으니, 초년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셈이다. 이 때는 홍대 앞 인디 음악계가 폭발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장민승 역시 아방가르드한 록음악을 들려준 황신혜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대 후반엔 가구 만들기에 도전했다. 대학 전공이 조소였기에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데에는 자신 있었다. 그렇게 2~3년 가구를 만들면서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를 받고, 테이블 하나에 1000만원을 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장민승은 공방에 머물지 않았다. “재능을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구를 만들 때 남의 사무실에 들르는 일이 잦았는데, 이때 공간과 가구에 개인 및 사회의 특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A multi-culture>(2008~2010) 프로젝트였다. 이는 브라질, 독일, 루마니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20개국 주한 대사의 집무실을 담은 사진 연작이었다. <수성십경>(2009~2010)은 옥인시민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찍은 수성동의 절경 사진 연작이었고, <상림>(2014)은 경남 함양의 숲을 영상과 음악으로 담아낸 작품이었다. 




<A multi culture> 프로젝트 중 브라질 대사관(위)과 숨막히게 아름다운 <수성십경> 중. 


장민승은 “개념, 논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엔 오랜 파트너인 정재일과 함께 영화를 찍어볼 생각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기반으로 한 실험적 영화가 될 전망이다. 그는 “한 분야만 잘하는 예술가가 많으니, 나같은 사람 한 명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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