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에로티시즘과 장애물, <열쇠>
  2. 아름답지만 입맛에 안맞는 일본요리, <가면의 고백>
  3. 80년전의 매저키스트,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성을 다룬 의학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의 차이는 무얼까. 아마도 섹스를 하기 위해 포르노는 다큐보다 조금 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섹스가 벌어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몇 겹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혹은 섹스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만 남겨두고), 카메라나 조명은 관객의 목적은 충족시키되 너무 직설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영상의 각도, 움직임, 명암에 변화를 줘야 한다. 처음부터 나체로 나온 파트너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섹스를 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미동도 없이 정면으로 비춘다면? 그건 의학 다큐다. 


에로티시즘은 방해받을 때 자극받는다. 지난 세기의 정신분석가들은 에로티시즘을 금기와 연계시키기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창비식 표기로는 타니자끼 준이찌로오!)의 <열쇠>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것도 매우 일본적인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을 고취시키기 위해 정말 세심한 방해 장치들을 몇 겹이나 꾸며두었다. 


50대의 남편과 40대의 아내. 남편은 대학 교수고, 아내는 옛스겁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이다. 남편은 아내가 엄청난 성욕을 가졌지만 이를 개발하지 않은 채 수동적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그 성욕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을 미안하게 여긴다. 남편은 남편대로 불만이 있는데, 아내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욕구마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은 남편과 아내의 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일기를 훔쳐본다고 짐작하면서도, 이를 방관한다. 오히려 아내에게 자신의 내밀한 욕구를 전하는 매체로 일기를 이용하려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일기를 쓴다. 아내는 남편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열어본 적도 있지만 결코 읽은 적은 없다고 적는다. 이것이 일기 본연의 목적대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한 것인지, 남편에게 이렇게 알리고 싶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둘에게 일기는 자신의 마음, 상대방, 독자를 모두 속이는 도구다. 둘은 일기라는 비밀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미디어를 통해서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알린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변태남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29세에 9살 연하 아내 치요와 결혼했으나 그다지 애정을 느끼지 못하던 차, 함께 살게된 14살의 처제에게 빠져들어 버림. 정작 동료 평론가 사토 하루오가 치요에게 연정을 느끼자, 그에게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세상에 알림. 


그러나 일기만으로는 안된다. 남편은 부부 관계에 제3자를 개입시킨다. 딸의 정혼 상대로 눈여겨 보던, 즉 사위 후보자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투의 대상이 있을 때 에로티시즘은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남편, 아내, 사위 후보자는 몇 차례 함께 브랜디를 마시는데, 아내가 술에 취해 사라져 욕실에서 쓰러지면 두 남자는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의학적인 처치를 한다. 의학적인 처치라고 하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게 사실 그다지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라는데서 문제가 달라진다. 아내는 자신이 술을 마신 뒤 혼수상태에 빠지리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고, 두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속고 속이며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임이 벌어진다. 나중엔 부부의 딸까지 이 게임에 뛰어든다.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겹의 속임수와 장애물로 섬세하게 구축한 에로티시즘의 탑을 투박한 살의와 욕망의 덩어리로 변환시켜버린다고 할까. 작가는 70세에 이 소설을 썼고, 그로부터 9년 뒤 세상을 떴다. 지난해 이맘 때쯤 읽었던 , 역시 변태적인 성애의 세계를 다뤘던 <만>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각각 42세, 63세에 썼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참 꾸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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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내가 그리 좋아하는 소설은 아니었다'는 점만 기억이 난다. 교토 여행중 실제로 금각사를 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도금된 외관이 밝게 반짝이는 쾌청한 날이었다. 명색이 절인데 그토록 호화롭게 금빛으로 번쩍이는 모습이 아름답거나 멋있다기보다는 어딘지 과잉으로 여겨졌다. 전혀 반짝이지 않지만 기품있으며 충격적으로 모던하기까지한 은각사와 비교하니 금각사의 아름다움이 더욱 이상했다. 아마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도 실제의 금각사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미시마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1949년에 출간한 <가면의 고백>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쓰긴 했지만, 그리고 많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변형해 내놓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면의 고백>을 '픽션'으로 상정하고 읽는 것은 당황스러운 경험이다. 미시마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연구가 밝히다시피, 이 책은 당시 24세이던 미시마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에 대해 내놓는 솔직한 '고백'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문학동네판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는 "작품 자체가 미시마의 자서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사실에 입각"했다고 밝힌다. 


또 해설은 "자신의 성관념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은 일본문학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전한다. 하지만 일본문학의 전통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성적 취향을 독자에게 알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을 스스로 연민하는 내용이 이 '고백'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백'을 보면, 미시마는 어린 시절부터 동성애 성향을 간직해왔다. 어린 미시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을 우연히 본 뒤 가슴이 두근댔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의 군인이었으나 기독교인임이 밝힌 뒤 기둥에 묶인 채 화살을 맞은 성인이다. 서양의 화가들은 날씬한 근육질의 젊은이가 몇 대의 화살이 꽂힌 채 고통인지 황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피를 흘리는 모습을 그리곤 했는데, 미시마가 이런 그림 중 하나를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그저 잘 다듬어진 남성의 몸이 아니라, 피 흘리고 찣기고 고난당하는 남성의 몸.  



미시마 유키오가 재현한 성 세바스티아누스


이런 성적 취향을 가진 남자가 세계를 상대로 총력전을 치르던 당시의 일본에서 원만하게 살아갈 리가 없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삼대째 도쿄대 법대에 진학하고, 운좋게 징집을 면했고, 조신한 처자와 혼담도 오가지만, 그는 '이대로 폭격을 당해 가족이고 뭐고 모두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허나 이런 자학적, 파괴적인 마음을 '세상과의 불화에 따른 절망'으로 정리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는 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느냐고 외치지 않고, 세상을 저주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고, 그런 세상을 조용히 기대하지도 않는다. <가면의 고백>은 분명 처절한 고백이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데, 이유는 독자들이 '고백'을 들으며 놀랄 때 저자는 '가면' 뒤에서 어딘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자기 자신마저도 비웃고 있다. 




도쿄대 전공투 학생과의 토론(1969), 미시마 유키오의 자위대 난입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1970)


24살 청년의 이러한 위악적인 제스처는 어딘지 허세처럼 보인다. 200쪽 남짓해 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은 감상을 "허세 쩐다"는 네 글자로 적는다면 정확하고 함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혼담이 오간 처자를 사랑했지만 어떠한 육체적 끌림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을 알린다. 그러나 전기적 사실은 그가 33세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매로 결혼을 했으며, 자녀를 두었고, 부인과 수차례 해외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았음을 보여준다. '가면'이라는 표현으로 피해가긴 했지만, 소설이 드러내는 성적 취향과 어긋나는 이러한 전기적 사실은 다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미시마는 이 책을 "정신적 위기에서 생겨난 배설물"로 설명했다고 하고, 어느 평론가는 이 책에서 "풍요로운 불모"를 느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가면의 고백> 같은 책은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나오기 어려우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젓가락을 데기 미안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막상 먹어보면 어딘지 입맛에 맞지 않는 일본요리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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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소설 중에 '막장스러운' 내용이 많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만>의 줄거리는 그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에세이 <그늘에 대하여>는 내가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한 적도 있는 책인데, 혹시라도 내 추천에 <그늘에 대하여>를 읽은 뒤 <만>이나 그외 다른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볼까 하는 마음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타임스는 1965년 8월 6일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부음 기사에서 그를 '동양의 D H. 로렌스'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에서 드러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성관념은 로렌스식의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만>의 네 남녀를 한 마디로 '변태'라 불러도 무방하다. 차라리 다지나키 준이치로를 매저키즘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동양의 자허마조흐'라고 부르면 그런대로 수긍하겠다. 



멀쩡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설을 써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소설 속에는 네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는 돈, 남자는 번듯한 직업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어 결혼했지만 그다지 사랑이 넘치지는 않는 가키우치 부부, 비너스 같기도 하고 관음보살 같기도 한 절세의 미녀 미쓰코, 그의 숨겨진 애인이자 어딘가 음흉해보이면서 잘생긴 얼굴을 가졌지만 성적으로는 무능한 와타누키의 4인이다. 일단 어딘지 건강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구도는 확실히 갖춰졌다. 


처음엔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가 통정한다. 이 소설은 1928~1930년 사이 연재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광수, 카프, 김동인 등이 계몽하거나 계급의식을 고취하거나 바람난 남녀 이야기를 그릴 때, 일본에선 본격 레즈비언 소설이 나왔던 셈이다. 둘은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갈수록 대담해져 이곳저곳으로 데이트를 다니고 남편이 직장에 나간 틈을 타 가키우치 부부의 침실도 이용한다. 다음으론 미쓰코의 숨겨진 애인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됨됨이나 신분이나 어느 것 하나 훌륭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미쓰코는 왠지 그의 잘생긴 얼굴만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미쓰코는 양성애자다. 와타누키는 미쓰코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가키우치 부인을 찾아와 서약서를 쓰자고 제안한다. 서약서의 내용이란 자기가 미쓰코와 결혼하게 가키우치 부인이 도와주면, 결혼 후에도 미쓰코와 가키우치 부인의 관계를 용인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가장 결속력이 강한 사랑은 역시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 사이에 맺어진다. 둘은 일종의 자살소동을 벌여 자신들의 의지를 각자의 남편, 연인에게 알리고자 한다. 동성결혼이 허용된 것도 아니니 이혼을 하거나 파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둘의 관계를 인정해달라는 시위 같은 것이다. 이 소동 와중에 이번엔 미쓰코와 가키우치씨의 인연이 맺어진다. 미쓰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지 않으면 못견디는 타입의 여자다. 결국 어느덧 와타누키의 존재는 흐지부지 사라지고, 미쓰코가 가키우치 부부로부터 동시에 애정 혹은 숭배를 받는다. 미쓰코는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이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방법까지 고안한다. 


매저키즘은 통념과 달리 그저 "날 떄려달라"며 육체적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 숭고한 것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구도에서 가키우치 부부는 일종의 매저키스트라 할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을 마스무라 야스조가 영화화한 <만지>(1964) 


문학동네판 작품집에 <만>과 함께 실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1949~1950년에 연재된 작품이다. 일본 고전문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작품에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기묘한 것은 그 사랑을 잊기 위해 쓰는 방법들이다. 호색한 헤이쥬는 "흠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아름다운 여인" 지쥬노기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그녀로부터 정을 떼기 위한 수를 쓴다. 헤이쥬는 하녀가 내다버리려는 그녀의 변기를 다짜고짜 탈취한 뒤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살펴본다. "여자의 변기를 훔쳐내서 그 내용물을 본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더러운 것을 싸는가 하고, 자기도 대변에 징그러워지며 정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기를 가져가는데는 성공한 헤이쥬도 정을 떼는데는 실패한다. 그 안에는 "반쯤 담긴 향나무 색깔 액체 속에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에 두서너치 길이의 검정색이 섞인 누런 덩어리가 세 조각 정도 둥그스름하게 뭉쳐져" 있었는데 헤이쥬는 이것을 보자 정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지어 냄새를 맡고 나무 막대기로 찔러 맛을 보기도 한다. 그는 생각한다. "배설물까지도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 사내를 뇌쇄하려고 손을 쓰다니, 얼마나 얼마나 철저한 여자냐"


책에는 아예 사람의 정을 떼기 위한 수행법까지 등장한다. 이 수행법은 부정관(不淨觀)이라 불린다. 관능적인 쾌락이 한때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위해 내장이 튀어나오고 구더기가 슨 시체 같은 것을 매일 찾아 그 앞에서 묵상을 하는 방법이다. 즉 "내 몸은 부모님의 음탕한 즐거움의 산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부정관을 수련한 남자는 수행에 성공하지 못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대신 역시 성을 다루지만 상대적으로는 온건하고 서정적인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만일 다지나키 준이치로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일본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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