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었다. 2001년작 <죽어가는 짐승>(The Dying Animal)이다. 옛 글을 정리하다가 벤 킹슬리, 페넬로페 크루즈가 나온 <엘레지>(2008)의 원작이 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마침 수중에 책이 있어 집어들었다. (확실히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읽으면 좋지 않다. 책을 읽다가 자꾸 킹슬리, 크루즈가 떠오른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고, 사건이란 것도 얼마 벌어지지 않지만(노년의 문학교수 데이비드와 젊은 여제자 콘수엘라가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몇 년 뒤 콘수엘라는 유방암에 걸려 나타난다), 로스의 많은 소설들이 그렇듯 감정의 흐름이 폭포처럼 급격하다. 먼저 호색적인, 세간의 도덕 기준에 무심한 한 남자 이야기를 한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데이비드란 남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이니야-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 죽음을 잊지 마. 절대 그걸 잊지 마. 그래 섹스도 그 힘에 한계가 있어. 나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아. 하지만 말해봐 섹스보다 큰 힘이 어디 있어?



필립 로스(1933~)




중반부엔 남자가 '성적 생득권' 추구에 충실한 사이, 그로부터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은 자의 항변이 나온다. 남자의 아들 이야기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이 아들은 가정 바깥에서 사소한 성적 모험을 즐기면서도, 가정의 가치를 넘어서진 못한다. 아들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와 '하고 싶은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런 갈등이야 흔한 것이지만 이 갈등을 숙고하거나 극복하기 보단 그저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아버지를 찾아와 원망하고 지질댄다는데서 이 아들의 한심함이 드러난다. 호색한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죽어가는 짐승>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엘레지>. 원제가 나은 듯. 


호색한 교수는 별다른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또 헤어졌지만, 콘수엘라와는 '미학적 분리'를 하는데 실패했다. 필립 로스가 페넬로페 크루즈같은 여인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데이비드가 콘수엘라의 옛날 어린 남자친구들 이야기에까지 질투를 느끼고 그들이 콘수엘라에게 요구했던 성적 모험을 그대로 반복하는 대목에서 수십년간 지켜왔던 원칙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그 '성적 모험'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데이비드는 그 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콘수엘라를 유독 사랑했다. 데이비드가 콘수엘라의 마음 씀씀이, 생각, 취향을 아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데이비드의 입장에서 본 콘수엘라의 가슴, 엉덩이, 음모 이야기 뿐이긴 하지만, 콘수엘라의 아름다운 육체, 그것과의 섹스를 사랑하는 것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로스는 말하는 것 같다. 


아름다웠던 콘수엘라가 70대에 이른 데이비드보다 이르게 죽음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결말은 로스가 즐겨 제시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런 쓸쓸함, 아이러니, 기이한 팔자에 대한 가벼운 한탄 같은 것 때문에 로스의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