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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 지식 소매상, '바디: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까치)를 감탄하면서 읽다. 브라이슨은 생물학자도 의사도 아닌데, 피부와 털에서 시작해 뇌, 심장, 뼈, 소화기관을 거쳐 생식기, 질병, 현대 의학의 문제까지 우리 몸과 관련된 온갖 상식들을 흥미롭고 알기 쉽게 풀어낸다. 가끔 '평균적인 인간이 평생 내놓는 똥의 양은 6톤' 같이 '굳이 이런걸 알아야 하나' 하는 지식도 있지만, 저 지식을 내가 책을 들추지 않고 적을 수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 지식들은 기억에 남을만큼 재미있다기도 하다. 수많은 책을 살피고,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취재한 공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식 소매상'이란 말은 이 정도 글을 쓴 뒤에 자칭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몸에 대해 500페이지 이상 서술한 이 책을 읽은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더보기
페더러와 조코비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오랜만에 글 자체에 감탄하고 집중하면서 읽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이다. 10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아 각종 항우울제 복용, 전기치료 요법을 병행하면서 살았고, 섹스, 마약, 술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적이 있으며, 결국 약이 듣지 않아 46세에 자살한 작가. 월리스는 미완성 유고를 포함해 단 세 편의 장편을 남겼으며, 평생 이런저런 매체의 청탁을 받아 취재하고 글을 작성했다. 이 책 역시 그런 에세이들의 편역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에서 "넌더리가 날 정도로 강박적인 자기 관찰, 삶이 진부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대한 또렷한 혐오, 심원한 존재론적 감수성에 촌스러운 비장함이 더해지는 것을 막는 냉소적 재치, .. 더보기
어제는 한 방울 정액, 오늘은 시신 '메멘토 모리' 영국의 고전 학자 피터 존스의 '메멘토 모리'(교유서가)를 읽다.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로마인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혜'에 방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초반부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로마의 사회학적, 통계적 사실이 먼저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 로마에서 사람이 태어나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현대보다 훨씬 낮았다. 10만명이 동시에 태어난다고 가정하면, 다섯 살에는 5만명만 살아있다. 마흔 살까지 사는 사람은 3만명, 예순을 넘기는 사람은 1만3000명, 일흔살까지 사는 사람은 5500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50%가 20세 이하로 추정된다. 그러니 고대 로마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축복, 사회적 행운이었다. 가부장 사회였던 로마에서는 아버지인 가장이 가.. 더보기
SF와 역사소설,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열린책들)을 읽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2054년이 배경이다. 하지만 책이 1992년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2020년의 독자에게는 작은 당혹감이 생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만 빼놓으면 많은 부분의 과학기술이 2020년에 뒤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유선 전화로 한다! 화상을 볼 수 있는 데, 별로 유용한 것 같지는 않다. 비상사태가 벌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급박하게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화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것도 회선이 적은지 잘 터지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살다보.. 더보기
묘비 대신 교향곡,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미국 작가 M T 앤더슨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돌베개)을 읽다. 흥미진진한 서술, 뚜렷한 관점,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자료의 측면에서 모범적인 논픽션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삶에 대한 책이자, 2차대전 전쟁사이며, 소비에트 정치 비판서다. 546쪽에 이르는데, 책을 무겁지 않게 만든데다가 번역이 매끄러워 수월하게 읽힌다. 책 초반부는 간략하게 요약된 쇼스타코비치의 성장기, 1920~30년대 소비에트의 분위기와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다. 쇼스타코비치가 10살이던 1917년 러시아엔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여느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 일가 역시 혁명의 흐름에 발을 담근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던 시절 등장한 지도자는 '강철 인간'이란 뜻의 스.. 더보기
하드SF 이후의 SF, '에스에프 에스프리' '모든 SF팬들의 필독서'라고 하면 출판사도 민망해서 사용하지 않을 책 띠지 문구 같지만, 셰릴 빈트의 '에스에프 에스프리'(아르테)엔 그런 수식을 붙이고 싶다. SF 비평서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통시적인 관점과 공시적인 관점에서 이 책은 모두 충실하다. Science Fiction의 측면과 Speculative Fiction의 측면을 두루 살피면서, 좋은 작품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한다. 'Science Fiction: A Guide for the Perplexed'라는 원제의 느낌보다는 조금 더 아카데믹한 서술이라 읽기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다코 수빈의 '인지적 소외' 개념이 흥미롭다. 수빈은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또는 그가 몸담은 문화의 과학.. 더보기
어느 위대한 작가의 전처 비난,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 필립 로스(1933~2018)가 1991년 펴낸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은 작가의 분신 주커먼이 표현하는 대로 "내 전처는 쌍년이었다"라고 말하는 글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의 초반 3분의 1은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작가의 성장기를 다룬다. 아버지는 유대계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차별을 굳건한 의지로 이겨낸 남자였다. 로스는 그런 가정에서 모나지 않은 삶을 살다가 대학에 진학한다. 여기까진 부드럽게, 애상 어리면서도 적당히 진지한 분위기의 글이다. 그러다가 로스가 조시라는 여성을 만나는 대목부터 글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연상의 조시는 유대계가 아니었고, 다소 난폭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이혼한 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웨이트리스였다. 단편 작가로 데뷔했고, 이제 남은 삶을 문학에 바치겠다고 다짐하.. 더보기
위대하고 진정한 관심사를 찾아라, '오늘부터, 시작' 영국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의 '오늘부터, 시작'(비아북)을 읽다. 휴즈가 BBC 프로그램 '듣기와 쓰기'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시작법에 대한 책으로 현지에선 1967년 출간됐다. 한국에 1990년 해적판으로 출판됐는데 이후 절판돼 중고서점에선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번에 매끈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으로 단장돼 출간됐다. 52년 전 출간된 책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휴즈는 사냥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돌이키고, 오소리, 파리, 달팽이, 여우, 안개, 바람을 관찰하고 시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인용하는 시인도 D H 로렌스, 실비아 플라스, T S 엘리엇 같은 옛 시인들이다. 휴즈가 살아서 올해 책을 냈다면 전혀 다른 소재의 시와 최근의 시인들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 솔직히 여우를 .. 더보기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포퓰리즘'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교유서가)을 읽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책이지만, 포퓰리즘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사례를 적재적소에 제시했다. 교과서적으로 명료하다. 역자는 친절하게도 라클라우와 무페, 슈미트, 베버 등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참고할만한 책도 제시해주었다. 편집의 센스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그들(포퓰리스트) 주장의 핵심은 실제 권력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즉 포퓰리스트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림자 .. 더보기
백색의 두 가지 방향, '눈'과 '흰' 지난해 김민정 시인은 인터뷰하는 자리에 넓직한 교정지를 들고 왔다. 무슨 책이냐 물어보니 곧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눈'(난다)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책이라고 자랑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작가 한강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페르민은 처음 듣는 작가라 이름만 기억했다. 인터뷰 다음 달 '눈'이 출간됐으나, 곧바로 집어들만큼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막바지가 돼서야 챙겨두었던 '눈'을 펼쳤다. 1999년 출간된 책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24쪽에 불과하고, 게다가 행간이나 여백이 넓어 텍스트는 더욱 적다. 마음 먹으면 1시간 이내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마음 먹고' 읽을 이유는 없다. 책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독서에도 여백.. 더보기
모든 병사의 죽음, '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교양인)을 읽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진진한 논픽션. 원제는 'The Last Full Measure: How Soldiers Die in Battle'이다. 말 그대로 고대 전투 서사시 '일리아스'부터 현대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서 군인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그린다. (번역제목을 좀 점잖고 심심하게 달았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흔하고 말초적인 미시사 서술 같은데, 막상 읽으면 방대하게 수집돼 적절하게 배치된 자료에 감탄하고, 자료를 관통하는 저자의 안목에 또 감탄한다. 분량이 648쪽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는 좀 버거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완독했다. 청동기부터 무기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죽음의 방식도 달라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1대1의 전투를 선호하던 .. 더보기
자연에 끼어든 초자연,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스티븐 킹의 신작 '아웃사이더'(황금가지)를 읽다. 72세의 킹은 여전히 다산이다. 꽤 두꺼운 장편을 별다른 공백기 없이 매년 펴낸다. '아웃사이더'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해도 또다른 장편이 예정된 모양이다. 내년엔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를 내세운 또다른 소설이 나온다. 예전에 미국의 장르 소설 작가는 이름을 내세운 기업처럼 작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혹시 스티븐 킹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자료를 조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소도시의 리틀 야구단 코치이자 교사가 끔찍한 소년 성폭행 살해범으로 백주에 체포된다. 경찰들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야구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 더보기
테드 창과 김초엽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 더보기
줌파 라히리의 세계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잇달아 읽다. 사실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라히리에 대해 몇 자라도 적어놓고 싶다. 먼저 읽은 책은 신간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이었다. 인도계 영국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히리는 어느날 갑자기 이탈리아어를 배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곤 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했지만,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얻어낸 짤막한 이야기들이 '보도에서' '길에서' '사무실에서' '수영장에서'와 같은 제목을 단 채 이어진 연작 형태다. 감각적이고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로 삶의 감각을 전한다. 작가가 모어보다 덜 익숙한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이 그러한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한때 내.. 더보기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 더보기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더보기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더보기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더보기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스포일러 있음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 더보기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 더보기
패러디와 통찰 사이, '생명창조자의 율법'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더보기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 더보기
가장 이상한 도시들,'이중도시'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서던 리치' 시리즈 1권 '소멸의 땅'을 읽다가 '뉴 위어드'라는 장르 이름을 알게 됐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데, 그냥 '위어드'의 원조는 러브크래프트라고 한다. 그러니 '뉴 위어드' 분위기가 대략 짐작이 됐다. 호러 같다가 판타지 같다가 SF 요소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뉴 위어드'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서던 리치'의 제프 밴더미어와 함께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한다. 그의 '이중도시'(아작)를 찾아 읽었다. 미에빌은 특이하게도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인류학을 공부했고, 런던정경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톨킨류의 권선징악적 판타지에 대한 혐오를 여러 차.. 더보기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 더보기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 더보기
앞선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문명에게,'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의 1954년작 '중력의 임무'는 하드SF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교과서'란 표현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학계 다수로부터 인정받은 주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 적도 지름 7만7000km, 극 지름 3만km의 찌그러진 팬케이크 모양 외계 행성 메스클린이 배경이다. 자전 속도가 매우 빨라, 지구 시간으로 18분이면 하루가 지난다. 메스클린이 지구와 가장 다른 점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행성의 중력은 적도에서는 지구의 3배, 극지방에서는 지구의 700배에 달한다. 메스클린 행성의 엄청난 중력이 이 하드SF가 보여주는 트릭의 원천이다. 이 행성에는 납작한 애벌레 모양의 지적 생명.. 더보기
스와핑, 섹스봇, 신경개조, 감옥실험...'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2015년작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원제 The Heart Goes Last, 위즈덤하우스)를 읽다.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무언가 굉장히 복잡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도가 났다. 읽으면서 뭔가 빠트린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사회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붕괴한 근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집도 직장도 없이 자동차에 의탁해 떠돌며 살아간다. 그런 부부가 흥미로운 광고를 접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포지트론 프로젝트 광고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사람들은 한 달은 감옥에서, 한 달은 주민으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한 집을.. 더보기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 더보기
SF? 로맨스! '스타터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더보기
난삽하지만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한, '유령퇴장' 타계를 추모하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필립 로스의 2007년작 (문학동네)을 뒤늦게 읽다. 국내에는 2014년 출간됐는데, 언젠가 입수했다가 회사 책상 앞 책꽂이에 꽂아놓은 뒤 읽지 않고 두었다. 알다시피, 책은 한 번 읽을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로스의 책을 몇 권 읽어나갔을 때 은 제 순서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 로스의 책에 조금 지쳤고, 그렇게 을 방치했다. 그래도 책을 치워버리지는 않아서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도 줄곧 눈에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 사이 은 100년전부터 거기 있었던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70대의 유대계 미국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다. 주커먼은 1974년 로스의 책에 처음 나온 뒤, 까지 모두 9번 등장했다. 등 로스의 대표작이 그 9편에 속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