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 해당되는 글 222건

  1. 데이비드 밴의 악스트 인터뷰 중 발췌. 13살때 아버지가 자살한 작가의 이야기.
  2. 오래 살자, 살아서 말하자, '눈먼 암살자'
  3. 기자와 작가, '헤밍웨이의 말'
  4. 삶은 고된가, 김훈의 '공터에서'
  5. 요점 정리의 대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6. 채식이 아니라 소멸, 한강의 '채식주의자'
  7. 공포와 센티멘털, 스티븐 킹의 '리바이벌'
  8. '해리 포터'와 다른 점, '나를 보내지 마'
  9. 스타로서의 히치콕 '히치콕'
  10. 살아남기 위해선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돌로레스 클레이븐'
  11. 공적 업적을 위한 사적 삶의 희생, '아우구스투스'
  12. 어느 삶의 압축, '가만한 당신'
  13. 고결한 남자의 죽음, '왕좌의 게임'
  14. 좀비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응, '세계대전 Z'
  15. 눈 먼 현인의 말들, '보르헤스의 말' (2)
  16. 문화에 대한 경제적 접근, '박스오피스 경제학'
  17.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죽어가는 짐승>
  18. 지루함의 제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19. 애국주의 첩보소설? <레드 스패로우> (1)
  20. 버니 샌더스의 수수께끼, 샌더스 관련 2제
  21. 호모 사피엔스의 3가지 혁명, <사피엔스>
  22. 삶과 죽음은 연결돼 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23. 수목원에서의 오후, <우리나무 백가지>
  24. 도식적인 구도, <리틀 스트레인저>
  25. 육즙이 내리는 땅, <전설의 땅 이야기>
  26. 일본 어느 자유주의자의 초상, <양의 노래>
  27. 성스러운 카타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28. 불안증의 공포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29. 김현희 눈물의 효과, <슬픈 쌍둥이의 눈물>
  30. 누가 더 과학적인가 <언던 사이언스>

1966년 미국 알래스카주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작가 데이비드 밴의 인터뷰 중 발췌.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15호에 실림. 작가가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 국내에는 '자살의 전설' '고트 마운틴' '아쿠아리움' 등이 출간.



"대부분의 작가는 (적어도 초기작에서는) 개인사와 가족 이야기를 끌어다 쓴다. 그 소재에는 무게와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역경은 품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역경을 선택하는 것은 피학적일 것이다. 차라리 품성을 덜 발달시키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질문에)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저절로 떠오르거나 안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며 바보들의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 발행인, 에이전트, 서평가, 사서 등 문학을 홍보하는게 일인 사람들조차 새로운 문학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저 행운을 빈다. 번역 시장도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비극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은 옳다. 어느 정도는 고통이 우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관점을 바꾸는데, 관점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다. 경험을 통해 인물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학의 본질이다."


"글쓰기를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다른 무엇도 글쓰기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신과 엄마,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당시는 이혼하기 전이었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며 나 자신보다 글쓰기가 더 좋다고 말이다.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종교의 대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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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2000년작 '눈먼 암살자'(민음사)를 읽다. 작가가 61세에 집필한 작품이다. 한국 번역본으로 두 권, 900쪽에 육박하는 묵직한 분량이다. (덕분에 추석 연휴 전에 시작해 지금까지 읽었다) 분량만으로만 봐도 작가 후반부의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라 여겨진다.  


액자 안 액자 소설 구조다. 82세의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픈이 말한다. 아이리스는 유복한 단추공장 사장의 손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대에 이르러 사업은 조금씩 쇠락기에 접어든다. 아이리스는 결국 10대 후반의 나이에 신흥 사업가인 리처드와 일종의 정략 결혼을 했다. 부와 함께 명예를 중시하던 아버지와 달리, 리처드와 그의 여동생 위니프리드는 속물적인 졸부였다. (애트우드는 이 남매의 한심한 행각을 신나게 놀린다) 타협적인 아이리스와 달리, 동생 로라는 리처드의 속물성에 반항한다. 스페인 내전, 2차대전 등을 거치며 사업은 부침을 겪고, 아이리스와 로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정 안팎의 파고에 맞서 나간다. 이 이야기 안에는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로라가 남긴 소설 '눈먼 암살자'가 포함돼 있다. 로라는 이 소설 한 편으로 당대에는 논란이 됐고, 후대에는 불멸의 작가가 됐다. '눈먼 암살자'는 부유층 여성이 노동운동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내용이다. 노동운동가는 여성에게 우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SF를 들려준다. 여성은 때로 이 SF의 이야기를 이어 자신만의 이야기로 꾸며낸다. 이것이 액자 안 액자 소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1939~)



이 복잡한 구조는 매우 지적이고 정교하다. 액자와 액자의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고, 간혹 삽입되는 가상의 신문 기사는 사건의 전후맥락을 건조하게 안내한다. 신흥부자이자 속물적 허영을 가진 남편과 전통부자이자 귀족적 정신을 가진 아내의 불화로 가득찬 결혼생활 묘사는 익숙해서 새롭지는 않다. '눈먼 암살자'가 나온지 17년밖에 안된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액자 가장 바깥의 이야기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읽힌다. 


20대에 요절한 로라는 물론, 숙적 같던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모두 죽은 뒤, 노년의 아이리스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제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겐 입이 없기에, 역사의 주도권은 아이리스에게 있다. 소설은 노년의 아이리스가 걷거나 먹거나 하는 일상생활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묘사하지만, 기억하고 말하는 능력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일생을 힘겹게 살아왔을지언정, 적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이리스는 승자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권력이나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아이리스의 특권이기에, 아이리스는 그것을 마음껏 누린다. 


물론 특권은 남용되선 안된다. 그리고 내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끝없이 하는, 그러면서 그 말에 과도한 확신을 담은 노인들이 자꾸 떠오른다. '눈먼 암살자'도 그런 소설일까. 아이리스는 불특정다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종반부에 가면 청자가 특정돼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먼 암살자'의 이야기는 한껏 부풀었다가 겸손하게 수그러든다. 난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청자, 넓게는 후속세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나지막한 조언도 좋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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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뭬이 말년의 인터뷰들을 묶은 '헤밍웨이의 말'(마음산책)을 읽다. 소문난 플레이보이이자 낚시광, 사냥꾼, 투우애호가, 기자, 작가였던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쿠바의 거처에서 글을 썼는데, 좀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1954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중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건강은 이후 쇠퇴일로였다. '헤밍웨이의 말'에 실린 인터뷰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헤밍웨이가 나이보다 늙어보인다는 점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부상 때문에 그럴 것이고, 에너지를 젊은 시절에 모두 쏟아부어버렸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7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2시간 공연을 거뜬히 소화하는 믹 재거 같은 괴물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한평생 쓸 수 있는 정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말년의 헤밍웨이는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글쓰는데 쏟기로 한 뒤,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친교는 자제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헤밍웨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4편의 인터뷰 중 2편이 허락 없이 불쑥 찾아가 얻어낸 것들이다. 나도 기자지만, 어휴, 기자놈들. 그래도 이런 기자들 덕분에 헤밍웨이 말년의 생각과 태도들을 전해들을 수 있으니 기쁜 반면, 원치 않은 유명세에 시달렸을 헤밍웨이가 가엽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헤밍웨이가 유명세를 지겹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유명세 덕에 누린 이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기자로 일했는데,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되는 명사의 사생활을 캐물어야 하는 인터뷰가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말에서 내가 인터뷰 기사를 늘 힘들어하는 근거를 대려고 애썼다. 하지만 난 헤밍웨이도 아니고 어찌 됐든 일을 해야 하니 명사 인터뷰 거리가 있으면 한다. 마침 오늘 그런 기자회견이 있는데, 지독히도 가기 싫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직업상 책무에 속하니 간다.   


'헤밍웨이의 말'에 대해 쓰려다가 딴 얘기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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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작 '공터에서'(해냄)를 읽다. 작가는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의 인상과 파편들을 엮은 글"이라며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뒤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후기에 썼다. 소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차세의 삶은 실제 작가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동수 일가 4인의 삶이 각 장마다 시점을 달리하며 제시돼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마동수는 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해방후 귀국했다. 피난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마장세, 마차세 2남을 두었으나, 집에 발붙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았다. 간혹 집에 들어올 때 고등어나 쌀을 가져와 며칠 쉰 뒤 다시 사라지는 식이었다.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은 함흥 철수 때 남편, 그가 안고 있던 젖먹이 딸과 헤어졌다.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마동수와 살림을 차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도순의 삶은 여전히 신산했다. 이도순의 말년은 요양원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 싸우면서 사그러졌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현지에서 전역한 뒤 귀국하지 않고 미크로네시아 일대에서 고철 사업체를 차렸다. 서울에 며칠 돌아온다 해도 가족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마차세는 형이나 아버지에 비해선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전역후 복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했으며, 미대를 나온 여성과 결혼했고, 병이 깊어가는 노부모를 돌봤다. 밥벌이가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아내가 학원 강사일을 해 돈을 벌었다. 마차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한국의 가장으로 살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마차세의 처 박상희의 이야기가 살짝 끼어든다. 


'공터에서'를 "소설판 '국제시장'" 혹은 "거꾸로선 '국제시장'"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지근거리에서 보며 자랐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세대), 그래도 마침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세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시장'에서 코믹한 기운을 모조리 뺀 뒤, 김훈 특유의 비장미가 섞였다고 하겠다. 거기에 '국제시장'에 비해서는 아버지 세대와 조금 더 거리를 두려는 의식이 강하다고 하겠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연고지 없는 열대의 섬을 떠도는 마장세처럼. 그러나 마장세조차 기이한 우연과 그 자신의 과오로 인해, 결국 한국땅으로 소환되고 만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 우리가 발 딛고 선 문화적 터전, 과거로부터 온전히 놓여날 수는 없다고 결국 작가는 수긍하고 있다. 마차세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평생 치러보지 않은 부모 제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그의 아내 박상희다. 소설에서 박상희는 이상적인 아내, 좀 더 과감히 말해 구원의 여신처럼 그려진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는 문장은 책 뒤 표지, 그리고 신문의 책 광고에도 나온다. 세상살이의 엄혹함, 밥벌이의 고단함은 김훈 소설의 주된 정조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을 봐도, '공터에서'를 읽어도 아버지 세대에게 그런 정조는 뿌리 깊은 것 같다. 광복 이전부터 전쟁 이후까지 마동수의 삶, 베트남전에 참전한 마장세의 삶이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성장기의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간 마차세의 삶도 무척이나 고되다. 입사 3개월만에 문 닫은 경제잡지에서 나온 마차세는 수차례의 면접에서 떨어진 뒤 오토바이 수송일을 하는데, 육중한 트럭 사이, 여름철 녹아내려 달라붙는 아스팔트 자국을 끌며 배달을 하는 묘사가 그럴싸하다. 단지 나의 성장배경이나 현재의 생활환경은, 이렇게 고단한 삶의 묘사에 대해, 적자생존의 잔혹함을 다룬 잘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이상의 이입을 허락하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고단함을 강조하는 작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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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를 읽다. 2011년 나왔고, 2017년 1월 개정신판이 나왔다. 그 사이 유시민은 직업 정치인에서 전업 작가가 됐고, '이명박 정부 3년차'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가 됐다. 바뀐 시대 상황이 일부 포함됐지만, 유시민은 "초판본을 읽은 독자라면 개정신판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고 '개정신판 서문'에 적었다. 전업작가로서 이런 태도는 훌륭하다. 표지와 제목만 바꾼 개정판을 슬쩍 내면서 신간처럼 시치미 떼는 출판사가 많아서 더욱 그렇다. 


홉스, 스미스, 마르크스 등의 국가론을 정리하는 초반부를 읽으면 "이 사람 공부 정말 잘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각 분야의 전공자가 보면 오류를 발견하거나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한 방식으로 본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리가 정말 잘돼있다. 각 이론가들의 핵심 저서를 읽고 이 정도로 정리해낼 수 있으면, 그 어떤 시험도 문제가 없겠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유시민은 '머리 속에 차곡차곡 서랍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100% 객관'은 없다. 이 정리 작업에도 당연히 저자의 주관이 들어간다. 유시민은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등을 언급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지향을 내비친다. 국가주의 국가론에 대한 거부감이야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한국의 좌파에 대해서도 은근히 조롱한다. 여전히 혁명의 꿈을 꾸는 좌파들을 '고독한 블로거' 정도로 묘사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표현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국가관, 정치관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정치인이 따라야할 도덕법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이 대표적이다. 이 장에서는 아예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 정당, 자유주의 정당, 진보 정당이 치른 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연합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 정당이 각자 나설 경우, 보수정당의 승리는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결과"이기에 그렇다. 그러면서 노무현 집권 당시 진보파들의 비판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고, 정치인은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더 많은 가중치를 둬야 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만, 반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반발에 다시 날선 비판을 하는 것보단, 어떻게든 결과를 만드는 것이 '책임윤리'에 충실한 정치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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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넘어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이 한 마디씩 걸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가 쑥스럽지만, 그래도 무언가 적어본다. 


3편의 연작 중편 중 '채식주의자' '나무 불꽃'은 좋았고, '몽고반점'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작중 성행위 퍼포먼스를 권유받은 뒤 당혹해하는 아티스트의 반응처럼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온건한 사람"인 이유인지도 모르고. 


첫번째 중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평범한, 그래서 고루한 사람이다. 이런 지루한 남편의 목소리로 '영혜'라는 문제적 인물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은 독자를 소설 속 세계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데 전략적인 도움이 된다. 영혜는 끔찍한 고깃덩어리와 피와 이것들이 연상시키는 살육의 이미지로 가득찬 꿈을 꾼 뒤 육식을 거부한다. 세상은 그녀를 간단히 '채식주의자'라 부르지만, 소설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영혜의 생각과 행동이 단순히 채식이라는 식습관으로 요약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영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숨쉬고 걷고 먹고 싸면서 우주에 미치는 해악 그 자체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폭발'이니 '환경파괴'니 하는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지 않더라도, 인간 존재는 우주의 오점이다. 크나큰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인류의 찬란한 문명' 따위 기억하고 기려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영혜에겐 이러한 인간의 해악스러운 조건이 육식과 살육이라는 이미지로 먼저 떠오른 것이고, 다른 존재를 의식적으로 해하지 않는 식물은 영혜가 닮고 싶은 존재가 된다. 두번째 중편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아티스트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에 불현듯 느낀 바 있어, 영혜의 몸에 식물을 그리고 자신과 영혜가 교접하는 상상을 시작한다. 영혜는 형부의 기괴한 제안을 거부하기는커녕 기꺼이 받아들이며, 형부는 상상의 장면을 마침내 실현한다. 




세번째 중편 '나무 불꽃'에 이르면 영혜는 식물 너머의 무언가가 되길 원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혜는 종종 물구나무를 선 채 머리가 뿌리로 박히고 음부에서 꽃이 피어나는 상상을 하더니, 결국 육식이건 채식이건 일절 음식 섭취를 거부한다. 마치 식물처럼 햇빛과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동물로 태어난 영혜에게 햇빛과 물만 섭취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라는 언니의 절규에 영혜는 "왜, 죽으면 안되는거야?"라고 답한다. 이제 영혜는 말과 생각이 끊기길 희망한다. 


식물은 가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혜는 죽음으로 조금씩 발을 딛는다. 그러므로 영혜가 원하는 것은 식물이 되는 일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소멸이다. '나무 불꽃'의 화자인 영혜 언니 역시 영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듯 하다가, 결국은 그 역시 불현듯 소멸을 꿈꾼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해내기에 이른다. 


'몽고반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형부와 영혜의 섹스가 너무 '동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채식을 넘어, 식물 되기를 넘어, 궁극의 소멸로 향하는 영혜가 열대 우림의 거대하고 썩은 냄새 풍기는 식충식물 같은 섹스를 하다니, 부주의하게 과속방지턱을 넘다가 덜컹거리는 느낌이었다. 평론가 허윤진은 작품 말미의 '해설'에서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 등 외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주변의 생태계를 포괄하는 역동적인 체계라는 점을 기억하자.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때로 냉정한 광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욕망에 달아오른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과 영혜를 식물의 형상으로 구성한 결과가 지독한 동물적 욕망으로 낙착된 것은 어쩌면 예고된 결말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이 섹스를 이해하지만, 내겐 그들의 섹스가 여전히 소화되지 않는 덩어리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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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70)은 죽지 않았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그는 꾸준히 작품을 써낸다. 간혹 평작이 나오기도 하지만 때로 수작도 섞여 있다. 2014년작으로 최근 국내에 번역된 '리바이벌'은 수작이다.  젊은 시절부터 스티븐 킹이 줄곧 보여줬던 공포와 어느덧 노년에 이른 작가의 여유가 어울렸다. 때로 으스스하다가, 때로 촉촉하게 센티멘털하다. 물론 결론은 센티멘털이 아니라 으스스. 


노년에 이른 록 기타리스트 제이미 모턴이 작중 화자다. 그는 여섯 살의 자신 앞에 나타난 젊은 목사 찰스 제이컵스와 가진 일생에 걸친 인연을 회상한다. 시골 마을에 부임한 목사 제이컵스는 활기차고 유능하고 친근한 태도로 모턴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아름다운 젊은 아내와 귀여운 아이가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뜨고(이 장면의 묘사는 역시 스티븐 킹답게 무시무시하다. 잔잔하게 나가다가 이런 장면을 넣는 걸 보면 악취미 같기도 하다), 제이컵스는 얼마후 예배 시간에 신성을 모독하는 설교를 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다. 제이미는 이후 그런대로 괜찮은 실력의 프로페셔널 기타리스트가 됐다가 약물에 중독돼 심각한 나날을 보낸다. 전기를 이용한 떠돌이 마술사가 된 제이컵스가 제이미 앞에 나타나 기묘한 전기 치료 방식으로 제이미의 마약 중독을 치료해준다. 제이컵스의 전기 사용법은 이후 소설의 핵심 소재가 된다. 


스티븐 킹의 많은 소설이 그렇지만, '리바이벌' 역시 '미국적'이다.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 나타난 젊은 개신교 목사라는 설정이나, 그가 테슬라 같은 괴짜 과학자를 연상시키는 전기 오타쿠라는 설정이 그러하다. 전기를 초자연적이고 강력한 힘과 연결시키는 설정은 미국 공포문학의 대가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내가 더 끌린 건 이런 공포 문학의 요소를 끌어안는 아련한 회고조의 분위기였다. 록 기타리스트로서 산전수전을 겪은 주인공은 어쩌면 평범하고 어쩌면 비극적인 가족사를 간간이 돌이킨다. 어머니는 암으로 비교적 일찍 돌아가셨고, 사랑스러운 큰 누나는 제정신 아닌 남자를 만났다가 죽음을 맞았다. 남은 형제들은 그럭저럭 성공한 삶을 살았다. 가족의 슬픔은 큰 상처를 남겼지만,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인생을 이어간다.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애송이 기타리스트 시절에 만난 첫사랑, 그녀와의 풋풋하고 서툰 연애,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사랑이 별 이유 없이 시드는 모습, 그리고 먼 훗날의 우연하지만 결국은 계획된 재회. 살다보면 슬프고 끔찍하고 잊고 싶은 기억들이 생기지만, 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산다. 상처엔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는다. 물론 흉터는 남지만, 흉터 몇 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공포 문학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전언들이 '리바이벌'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리바이벌'의 또 하나의 교훈은 '공짜는 없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는 것. 생각해보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대개 그랬다. 깊은 우물에 빠트린 부인의 시체가 살아 돌아오고, 나쁜 교도소장은 결국엔 파멸한다. 인과응보, 뿌린대로 거둔다는 믿음이 자주 배신당하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이 아니면 저 세상을 포함해 생각해서라도 그런 세계관을 유지하고 싶다. 스티븐 킹은 그럴 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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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민음사)를 읽다. 1970~80년대 영국의 기숙학교 헤일셤을 배경으로,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캐시와 그의 친구 토미, 루스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다. 영국의 기숙학교, '3인조'라는 점에서는 '해리 포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폐쇄적인 공간, 엄격한 학교 규율 아래서 그들만의 스릴과 자유를 추구하는 청소년들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모두 다르다. 


'해리 포터'가 비록 서양 전래의 괴담이나 전설에서 많은 소재를 따왔고, 영국 기숙학교라는 공간 역시 청소년 소설의 전형적 배경이라 할 수 있지만, '해리 포터'는 회고에 빠진 적이 없다. 오히려 미래에 펼쳐질 볼드모트와의 결전을 예비하는 것이 시리즈의 주된 동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는 회고한다. 예정된 비극을 향해 한발씩 다가가는 주인공들은 기숙학교의 불안하면서도 잔재미가 있던 나날을 자꾸만 돌아본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회고뿐이라는 듯이. 




'나를 보내지 마'의 '회고'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소설이 SF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2005년 나온 이 책에는 복제인간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즉, 캐시, 토미, 루스는 복제인간이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배양된 존재들이다. '아일랜드' 같은 영화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깨달은 복제인간이 반란 같은 것을 일으켰지만,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반란은커녕 불만의 계기조차 없다. 모든 복제인간들은 그저 주어진 운명을 따르고, '기증일'을 몇 년이나마 뒤로 늦출 수 있다는 뜬소문에 조금 들뜰 뿐이다. 아무리 봐도 복제인간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은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복제인간은 어딘지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캐시, 토미, 루스를 젊은 나이에 장기를 기증하고 죽어나갈 복제인간이라 봐도 좋지만, 결국 작가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쓸쓸한 말로를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책 뒤 표지에는 "클론들의 사랑과 성, 슬픈 운명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을 진지하게 성찰한 문제작"이라는 평이 실려 있지만,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복제인간이 아니라도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내지 마'의 탁월한 점은 인물들의 대면, 대화를 구성하는 능력에 있다. 작가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경제적인 문장들로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을 때 발생하는 호의, 질시, 애정, 적의의 묘한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그려낸다. 헤일셤 학생들 뿐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딱히 폭력을 쓰거나, 욕을 하거나, 호들갑 떨거나, 광기어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지만, 점잖고 때로 생략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런 감정이 전해진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에 바탕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생각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영국 집사들이 주인공인데, 그 점잖은 태도 아래 숨겨진 격렬한 감정들이 이야기의 동력이었다. 작가의 특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이전에 캐리 멀리건, 키이라 나이틀리,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영화 '네버 렛 미 고'로 미리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먼저 보면 원작 소설을 읽는데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자꾸 배우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앤드류 가필드의 정말 아픈듯 구부정한 포즈, 캐리 멀리건의 멀뚱하게 슬픈 얼굴, 키이라 나이틀리의 발랄한 척 하는 말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영화가 담아낸 가을, 겨울 무렵 영국의 스산한 전원 이미지는 소설에 빠져드는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말하겠다. 



영화 '네버 렛 미 고'. 잘난 배우들은 아무리 황량한 배경에 있어도, 아무리 후줄근한 옷을 입어도 어쩔 수 없이 멋있다. 그건 그냥 타고 내어난 거다. 오히려 '무심한 듯 쉬크하게' 멋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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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쪽에 달하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평전 '히치콕'(패트릭 맥길리건/그책)을 읽다. 책의 두께에서 알 수 있듯 "타인의 사생활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꺼림칙한 기분"(박찬욱 감독의 추천사)까지 들게 하는 상세한 책이다. 데이비드 오 셀즈닉, 살바도르 달리,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 캐리 그랜트, 제임스 스튜어트, 버나드 허만 같이 잘 알려진 영화인들과의 인연, 뒷이야기도 나오지만, 잘 모르는 영화인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 영국 시절이나 할리우드 초반부까지 읽다 읽다 지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오기가 생겨 <북북서>나 <현기증>이나 <사이코>나 <새>까진 읽어야지 않겠냐는 생각에 꾸역꾸역 읽다가 결국 히치콕 말년의 실패작에 이르기까지 완독했다. 


히치콕은 자기보다 하루 늦게 태어난 알마 레빌과 결혼해 평생 해로했다. 현장의 스크립터였던 알마는 히치콕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에도 시나리오를 사전에 검토하며 아이디어를 주는 일종의 '막후 실세'로 활동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크레딧에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히치콕은 그 어느 누구보다 알마의 의견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런 히치콕이 사실상 성불능이었다는 점도 이 평전이 알려주는 의외의 사실 중 하나다. 히치콕은 걸쭉한 농담을 즐기고 떄론 여배우에게 성적 도발을 일삼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못했다). 




히치콕은 쇼맨십이 강한 사람이었다. "배우는 가축이다" "각본가는 꼭둑각시다"라는 유명한 금언이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훈계의 일환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잠깐 갇힌 경험 때문에 누명을 쓰고 경찰에 쫓기는 주인공(이른바 롱 맨)을 자주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아리송하다. 아마 이런 금언이나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 흥미진진한 인물로서의 히치콕의 위상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매우 많이 한 감독으로 꼽힌다. 최대 150kg에 달했던 비만 체구로 대표되는 독특한 모습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히치콕 역시 기자들을 피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보란 듯이 기나긴 그리고 지나치게 풍성한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스스로를 다소 희화화시키면서까지 유명세를 누렸던 것이다. 


히치콕은 시나리오 작성이 영화 제작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촬영이란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기는 지루하고 딱딱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영국 시절엔 촬영 중 조는 일도 잦았다. 컷을 한 후 배우와 스태프가 꺠우면, "음...잘 찍었지? 그럼 다음 장면" 하고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역시 히치콕이라는 인간을 재미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에피소드일 가능성도 있지만. 


인기 많은 장르 영화 감독이었던 히치콕을 '작가' 반열에 올린 건 프랑스인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인터뷰였다. 트뤼포를 비롯한 프랑스 비평가들은 히치콕의 장면 장면을 분석하며 의미를 찾아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히치콕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고 한다. "굳이 그들의 환상을 깰 필요는 없지"라는 것이 히치콕의 반응이었다. 영화 안과 밖에서 모두 능란했던 히치콕은 1980년 4월 29일 8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오늘날 히치콕에 비견되는 '스타 감독'이 있을까? 스콜세지? 우디 앨런? 타란티노? 글쎄. 어딘지 조금씩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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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지 않은 스티븐 킹의 소설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꽤 읽었는데도 아직 남아있다. 언젠가 영화로도 제작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추석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가정폭력 문제를 이보다 더 잘 쓰기가 쉬울까. 이른바 '순수문학'에선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여성이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에선 복수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현실에선 전자의 경우가 많겠지만, 우린 장르소설 속에서라도 복수를 꿈꾼다. 


영화화된 <돌로레스 클레이본>. 캐시 베이츠가 <미저리>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 원작 영화에 출연했다. 



소설은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안주인 베라를 죽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온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1인칭 진술 형식이다. 돌로레스는 자신은 베라를 죽이지 않았지만, 사실 수십년 전 남편을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은 개차반이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돌로레스가 참지 못해 대항하자, 이번엔 어린 딸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돌로레스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죽이기로 한다. 남편 살해의 모티브는 베라가 제공했다. 베라는 심술 궃고 까탈스러운 마나님인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서로를 싫어하는 듯 보인다. 침대에 누워 거동을 못하는 말년의 베라는 일부러 똥을 싸 돌로레스를 골탕먹인다. 돌로레스 역시 베라를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친다. 그러면서도 둘은 은근하고 묘한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제 너무 흔히 사용되는 말 '애증'이다. 소설의 핵심은 베라가 돌로레스에게 건네는 아래와 같은 충고다.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사건이 한 판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이 소설의 묘미가 있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모두 범행 후의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 죄책감은 스티븐 킹 식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로 표현됐다. 끔찍하게 썩은 시체가 살아나 산 자에게 돌아오는 설정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에서 종종 나온다.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됐지만, 이 역시 일정 수준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티븐 킹의 전언이다. 영원히 발 뻗고 편히 자는 죄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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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로마와 그에 이어지는 중세 시대에 관심이 많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니지만, 괜찮은 대중서가 있으면 손길이 뻗는다.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구픽)란 장편 소설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마음이 동한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의 첫번째 황제(본인은 '제일 시민'이라고 칭했지만)인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편지, 일기, 보고서 등의 형식으로 엮어낸 소설이다. 아우구스투스, 키케로, 아그리파, 클레오파트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건 문서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창작이다. 


정작 아우구스투스의 목소리는 소설 마지막의 서한문을 통해서야 나온다. 이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면모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아우구스투스, 즉 옥타비우스가 애송이였던 시절, 정적들은 그를 무시했다. 어쩌다 카이사르의 눈에 들어 그의 양자가 돼 이름을 얻었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는 없는 인물로 파악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옥타비우스의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성품은 난세를 버텨내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음이 밝혀진다. 옥타비우스는 힘을 얻을 때까지 정중동하며 누구의 마음에도 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옥타비우스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궁극의 권력을 쥔 배경에는 얼마 정도의 행운도 작용했겠지만, 오직 준비된, 그리고 시대에 걸맞은 행동양식을 지닌 사람만이 그런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삶이야 어느 정도 널리 알려졌지만, 흥미로운 건 소설 후반부에 상당수 할애되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삶이다. 옥타비우스의 고명딸로 그의 사랑을 흠뻑 받았던 율리아는 로마의 안정과 국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한 아버지의 전략에 따라 수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국가의 안정, 아버지의 뜻이라는 '의무'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여긴 율리아는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의무'에 회의를 느꼈다. 율리아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지만, 결혼 제도의 구속을 넘어 육체의 유희에 탐닉하는 것으로 국가와 아버지에 반항했다. 이전까지 율리아는 육체엔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으로 알았으나, 식민지에서 '여신 숭배' 체험을 거친 뒤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그러한 모험의 끝은 국가, 아버지의 뜻과 충돌해 음울한 결과를 낳는다.  


<아우구스투스>란 제목을 단 소설에 '세계의 주인'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바람난 딸 율리아를 비슷한 비중으로 배치한 선택은 과감하다. 이런 구조는 공적인 업적을 이루는 과정에 희생되는 사적인 관계의 비극을 드러낸다. 게다가 '공적인 업적'이란 것도 은근히 허무하다. 에필로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주치의의 편지다. 주치의는 40여년전 황제가 죽을 떄의 모습을 그리면서, 새로 등극할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의 못다한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한다. 새로 등극할 황제의 이름은 네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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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을 읽다. 저자는 한국일보 기자고, 덜 알려진, 그러나 중요한 인물들의 부고로 이루어진 이 책은 한국일보에 연재됐다. 연재 당시에는 챙겨보지 못하다가, 책으로 묶인 뒤 접했다. 


소수자의 가치를 옹호한 사람들, 좌충우돌하는 모험의 일생을 보낸 사람들, 주류가 강제한 폭력적 제도에 저항한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2012년 4월 대통령자유메달 수상자인 인권법률가 존 마이클 도어였다. 그는 같은 해 수상한 매들린 울브라이트, 밥 딜런, 토니 모리슨, 존 글렌에 비해 '무명'에 가까운 법률가였지만, 앞선 누구보다 용기있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도어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 평등, 정의 같은 가치를 지켜낸 공무원이었다. 이를 위해 때론 목숨을 걸었다. 전통적인 남부 공화당 출신인 그는 1960년대 흑인 인권 투쟁의 거의 모든 현장에서 분노한 시위대, 폭력적인 경찰 사이에 있었다. 법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으로서의 역할과 헌법의 가치를 믿는 법률가로서의 역할을 모두 해냈다.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끝내 스스로를 드러내길 꺼려했고, 격동의 시대가 끝난 뒤인 1980년대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이 운영하는 로펌에서 인권 사건을 맡아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인물을 울브라이트 옆에 세워 영예를 안기는 것이 미국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남들 보기엔 정신 나간 모험을 즐기는 이들의 삶도 눈길을 끈다. 모험가 딘 포터는 안전 장비 없이 절벽을 기어오르고, 그렇게 오른 뒤 윙슈트플라잉으로 뛰어내린다. 그는 결국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미터 '태프트 포인트'에 올라 낙하하다가 사망했다. 오늘날의 그 유명한 노스페이스 창업자였으나, 사업이 궤도에 오를 떄쯤 모든 지분을 정리하고 과격한 생태주의 운동에 나선 더글러스 톰킨스도 그렇다. 톰킨스는 자연보호가 아니라 자연복원을 꿈꾸었는데, 인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개발조차 못마땅해했다.  


책 전체를 통독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가만한 당신>에는 존엄사의 인정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우 많다. 목사이자 종교신학자로 존엄사 합법화에 나선 제럴드 라루, 다발성경화증과 오랜 기간 투병하는 와중에 조력자살 합법화 운동의 선두에 선 데비 퍼디, 젊은 시절엔 낙태와 피임의 권리를 위해, 노년엔 조력자살 합법화 운동에 투신한 엘리자베스 리비 위비 윌슨 등이다. 읽고 다면 셋의 삶이 헷갈릴 정도다. 혼란을 무릅쓰고 이런 구성을 한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갈수록 평전, 전기 등에 눈길이 간다. 이런 글들이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보다 직접적이고 압축적으로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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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누구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그래서 많은 시청자들이 정을 주었던 인물을 사정 없이 죽여버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 시초는 시즌 1  종반부 에다드 스타크의 참수 장면이다. 사전에 정치적으로 정지된 바에 따르면, 스타크가 죄를 고백하면 조프리 왕은 자비를 베풀어 스타크를 풀어준 뒤 스타크가 영주로 있는 윈터펠로 쫓아내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제멋대로인데다가 갓 물려받은 권력의 크기에 도취된 소년왕 제프리는 이후의 정치적 후폭풍 따위엔 아랑곳 없이 스타크의 목을 베도록 명한다. 실질적으로 수렴청정을 하는 어머니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시즌 6의 종영에 즈음해 조지 R R 마틴의 원작 소설 1부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이전엔 번역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번 번역은 깔끔해 보인다. 드라마를 통해 대략의 줄거리를 알고 있기에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에다드 스타크가 죽는 장면을 빨리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도 훌륭했지만, 소설은 드라마에서 간략히 소개된 인물의 내면과 행동 배경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 에다드 스타크는 누가 뭐래도 왕좌에 오를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고결하고 정직하고 덕망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육체와 의지가 모두 강인하다. 가족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낀다. 피를 보는 걸 즐기진 않지만, 필요할 땐 주저없이 직접 수행한다. 그가 왕좌를 차지하기에 부족한 점은 왕좌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없다는 것 뿐이다. 


마틴은 그런 에다드를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1부에서 에다드의 정치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세르세이는 "왕좌의 게임이 시작되면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리였다. 오늘의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옛 이상을 숭배하던 에다드는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고결한 이상주의자 에다드의 죽음으로 1부를 마친다는 점에서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이후 잔혹하지만 현실적인 권력 투쟁의 실상으로 접근해간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개성이 우리 삶에서 마주칠만한 유형의 인간으로 수렴된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장점이다. 로버트 바라테온은 현재 왕좌에 앉아있긴 하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진군하는 장군이었던 그는 왕이 가져야할 현명함, 인내심, 인자함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왕좌에 앉아서도 전장을 그리워하는 술주정뱅이 임금이 돼있다. 에다드의 부인 캐틀린은 현명하고 신중하면서도 필요할 땐 과감한 여인이다. 부창부수로, 남편 에다드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라니스터가의 '꼬마 악마' 티리온은 타고난 장애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냉소적인 인물인데, 그런 면모 덕분에 잔혹하기 그지없는 '왕좌의 게임' 속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애초 누구의 선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악의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에다드의 장녀 산사는 꿈꾸는 소녀다. 냉혹한 현실 대신, 동화 속 낭만을 믿는다. 물론 그 믿음은 산사를 배신한다. 드라마 팬들 사이에 '용엄마'로 불리는 대너리스는 조금씩 성장하는 인물이다. 대너리스는 처음엔 산사와 다를 바 없이 순진한, 사실은 어리석은 소녀였으나 기마족의 왕 칼 드로고와 정략결혼을 하고 '칼리시'의 자리에 오르면서 차츰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다. 대너리스는 명색이 판타지지만 사실은 정치드라마인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가장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드래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고,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존 스노우. 그는 1부에선 아직 어린애다. 의무와 욕망,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통해 줄거리를 다 알지만 2부 <왕들의 전쟁>이 나오면 다시 구해 읽을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드라마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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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브룩스의 장편 '세계대전 Z'를 뒤늦게 읽었다. 정확히 10년 전인 2006년 출간된 작품인데, 그 사이 브래드 피트의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 제작사가 이 소설의 판권을 산 이유가 궁금해진다. 소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와 소설이 너무 달라 굳이 판권을 사지 않고 오리지널 시나리오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원작과 영화가 공유하는 건 '세계 각국에 좀비가 나타났다'는 설정과 중심 인물의 직업이 유엔 산하 기구의 조사관이라는 점 뿐이다. 


영화에선 유엔 소속 조사관(브래드 피트)이 전세계를 돌며 좀비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해결책을 찾지만, 소설 속 조사관은 여러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고 르포 형식으로 옮긴다. 그렇게 옮긴 관계자들의 증언 묶음이 바로 이 책이 된다. 영화 속 조사관은 행동하지만 소설 속 조사관은 듣는다. 광범위한 지역, 사람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소설 속 조사관은 군인, 의사, 스파이,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모두 '세계대전 Z'라고 칭해지는 좀비와의 대결 이후의 생존자들이며, 새로운 세계를 재건하는 일원이기도 하다.    


영화 <월드워 Z>




각 문화권, 국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병렬되면서 나오는데, 그래서 미증유의 재앙에 대한 각 문화권, 국가의 각기 다른 대응, 생각을 비교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소설의 재미다. 각 문화권, 국가의 특징에 대한 작가(혹은 일반 독자)의 고정관념이 나타나는데, 꽤 그럴싸하다. 고정관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국제 관계, 각 문화권의 생활양식, 정치경제적 위상 등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지 않았으면 쓰지 못했을 대목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에선 국정원 부원장이 인터뷰이로 나선다. 그는 북한이 좀비 바이러스가 퍼질 낌새를 채고 바로 남북관계를 전면 단절했다고 증언한다. 증언 시점에서 남북 관계는 여전히 단절돼 있는데, 국정원 부원장은 북한 주민이 거대한 지하 벙커에 숨어 잘 살아 있는지, 아니면 모두 좀비가 돼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일본의 인터뷰이는 2명이다. 하나는 히키코모리, 하나는 2차대전 당시의 피폭자다. 둘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함께 생존을 도모한다. 이스라엘 하면 역시 스파이다. 좀비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가장 처음 알아차린 이가 바로 이스라엘 스파이라는 설정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면 또 인종차별이 떠오른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좀비가 된 상황에서 국가가 취해야할 잔인한 혹은 실용적인 비상대책의 최초 입안자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인사다. 왠일인지 피델 카스트로가 탁월한 혹은 교활한 정치력을 발휘해 전후 최고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설정도 재미있다. 


다만 역시 보고서 형식이라는 점은 빠른 독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읽다 보면 조금 지치는 감이 없지 않다. 영화판은 공포영화 중에서도 하위 장르에 속했던 좀비물을 여름용 블록버스터로 끌어올린 공이 있는데, 개봉을 앞둔 '부산행'의 흥행을 보면 좀비물에 대해 대중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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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 즈음에 한 인터뷰들을 엮은 '보르헤스의 말'(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마음산책)을 읽다. 책 속에 주요 인터뷰어로 등장하며 책을 편집하기도 한 인디애나대 비교문학 교수 윌리스 반스톤은 부처, 예수,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등 "오로지 말로만 가르침을 전하는 현자의 오래된 전통"을 언급하며 그 끝자락에 보르헤스를 위치시킨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보르헤스는 중년을 즈음해 시력을 잃었고 이후 구술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다수의 청중 앞에서 행해진 이 인터뷰들은 그래서인지 매우 훌륭하다. 심오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알쏭달쏭하면서도 명쾌하고, 무엇보다 우아하고 박식하다. 인상적인 대목을 옮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난 지옥이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늘 진행되는 것이지요.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의 구원은 글을 쓰는데 있다고, 꽤나 가망 없는 방식이지만 글쓰기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나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필요한 환상이지요. 


시를 읽을 때, 이 점은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도 해당되는데, 만약 소리 내어 읽는 게 더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면 그 글에는 뭔가 잘못된 게 있는 거예요.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쓸 거야. 그리고 나서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너무 시시해. 좀 치장을 해야겠어. 그래서 바로크적으로 치장을 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의 한 형태인 거죠. 공격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할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작가는 같은 책을 되풀이하여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 모든 세대는 다른 세대들이 이미 썼던 것을 아주 약간 변형하여 다시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누구든 혼자 힘으로 많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언어는 전통이기 때문이에요. 


단편소설의 경우, 플롯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나 장편소설의 경우 플롯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말 중요한 건 인물이죠. 


나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나 자신에 관해 글을 쓴답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인물을 한 사람도 창조하지 않았어요. 내 소설에서는 나 자신이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아주 적은 수의 비유만 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비유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우리에겐 시간과 강, 삶과 꿈, 잠과 죽음, 눈과 별이 있어요. 그거면 충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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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오피스 경제학'(김윤지/어크로스)을 읽다. 책에는 두 가지 목적의 글이 혼재돼 있다. 대중문화산업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전략들을 경제학의 도구로 풀어보기, 혹은 경제학의 여러 이론들을 대중문화에 빗대 설명하기. 대중문화산업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전자의 글에, 현대의 경제학 이론에 관심있는 이라면 후자의 글을 보고 싶을 것이다. 대체로 책 전반부엔 전자의 글이 많이 보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반대가 된다. 난 물론 전자의 글이 더 잘 읽혔다. 


대중문화 관계자들이 감, 직관에 의존해 풀어왔던 일들을 경제학적, 과학적으로 해석해낸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찌 보면 산업내 명민한 플레이어라면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들인데, 이 경험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예를 들어 '강남 스타일'이 해외에서 인기라면, 정말 한국산 휴대폰, 음식 등의 인기도 올라갈까?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지만,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이런 직관이 사실이라는 근거를 댄다. 영화사들이 개봉일 스크린수 확보에 사활을 거는 건 다 알려진 일인데, 이 책은 감독, 배우, 스태프가 만들어내는 영화 자체의 퀄러티보다 개봉관수가 흥행에 더 큰 영향을 미침을 숫자로 보여준다. 


반면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틀렸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즐길 수 있는 영화는 대표적인 불황산업"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소득이 줄어들면 영화 관람객도 줄어들고, 영화 티켓 가격이 싸지면 더 많이" 본다는 경제학의 당연한 결론을 제시한다. 불황이라고 영화 많이 보는 건 아니고, 영화를 많이 보는 건 개별 영화가 좋기 때문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경제 불황과 한국 영화산업의 호황을 연결짓는 주제의 기사를 가끔 써온 입장에서 쑥스러운 독서 경험이다. (앞으론 그런 기사 안쓰겠습니다)


저자가 여러 차례 경계하고 있기는 하지만, 개별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야심, 모험심, 창의력 등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최적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처럼 계산다는 점은 경제학에 기반한 책의 한계라고 봐야할지 모르겠다. 하긴 그런 부분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니 뭐라고 비판할 대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친밀감을 높이기 위함인지 저자가 간혹 개인적 사연과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것도 트렌드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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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었다. 2001년작 <죽어가는 짐승>(The Dying Animal)이다. 옛 글을 정리하다가 벤 킹슬리, 페넬로페 크루즈가 나온 <엘레지>(2008)의 원작이 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마침 수중에 책이 있어 집어들었다. (확실히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읽으면 좋지 않다. 책을 읽다가 자꾸 킹슬리, 크루즈가 떠오른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고, 사건이란 것도 얼마 벌어지지 않지만(노년의 문학교수 데이비드와 젊은 여제자 콘수엘라가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몇 년 뒤 콘수엘라는 유방암에 걸려 나타난다), 로스의 많은 소설들이 그렇듯 감정의 흐름이 폭포처럼 급격하다. 먼저 호색적인, 세간의 도덕 기준에 무심한 한 남자 이야기를 한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데이비드란 남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이니야-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 죽음을 잊지 마. 절대 그걸 잊지 마. 그래 섹스도 그 힘에 한계가 있어. 나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아. 하지만 말해봐 섹스보다 큰 힘이 어디 있어?



필립 로스(1933~)




중반부엔 남자가 '성적 생득권' 추구에 충실한 사이, 그로부터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은 자의 항변이 나온다. 남자의 아들 이야기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이 아들은 가정 바깥에서 사소한 성적 모험을 즐기면서도, 가정의 가치를 넘어서진 못한다. 아들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와 '하고 싶은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런 갈등이야 흔한 것이지만 이 갈등을 숙고하거나 극복하기 보단 그저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아버지를 찾아와 원망하고 지질댄다는데서 이 아들의 한심함이 드러난다. 호색한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죽어가는 짐승>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엘레지>. 원제가 나은 듯. 


호색한 교수는 별다른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또 헤어졌지만, 콘수엘라와는 '미학적 분리'를 하는데 실패했다. 필립 로스가 페넬로페 크루즈같은 여인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데이비드가 콘수엘라의 옛날 어린 남자친구들 이야기에까지 질투를 느끼고 그들이 콘수엘라에게 요구했던 성적 모험을 그대로 반복하는 대목에서 수십년간 지켜왔던 원칙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그 '성적 모험'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데이비드는 그 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콘수엘라를 유독 사랑했다. 데이비드가 콘수엘라의 마음 씀씀이, 생각, 취향을 아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데이비드의 입장에서 본 콘수엘라의 가슴, 엉덩이, 음모 이야기 뿐이긴 하지만, 콘수엘라의 아름다운 육체, 그것과의 섹스를 사랑하는 것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로스는 말하는 것 같다. 


아름다웠던 콘수엘라가 70대에 이른 데이비드보다 이르게 죽음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결말은 로스가 즐겨 제시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런 쓸쓸함, 아이러니, 기이한 팔자에 대한 가벼운 한탄 같은 것 때문에 로스의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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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작가지만, 나는 대체로 그의 작품을 즐겁게 읽었다. (읽다가 그만둔 건 에세이집 뿐이다.) <IQ84>나 <노르웨이의 숲> 같은 소설도 재미있었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무라카미의 작품은 <언더 그라운드 1, 2>였다. 특히 옴 진리교 소속 신도들의 인터뷰를 담은 2편을 완전히 몰입해 읽었다. 이 인터뷰는 후일 <1Q84>의 창작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가 작심을 하고 취재를 시작해 그것을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옮길 때 훌륭한 작품이 나올 때가 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오웰은 소설가이기 이전, 기자이기도 했다) 최근엔 알렉시예비치의 작품들이 훌륭했다. 그러고보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중요한게 아니다. 단지 왠지 모르게 우리의 문화 제도가 픽션에 예술적 가중치를 두는 것으로 합의를 해왔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올림픽 취재기 <시드니!>(비채)도 재미있었다. <언더그라운드>만큼 밀도가 있지는 않았지만, 스포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무라카미는 잡지사의 의뢰로 시드니 올림픽 취재를 가게 됐는데, 그 자신이 거대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올림픽 같은 것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재하면서도 이런저런 불평을 계속 늘어놓지만, 그 와중에 올림픽에 대한 가끔의 경탄이 섞여 달콤쌉싸레한 글이 나왔다. 무라카미 자신이 마라토너인만큼 마라톤이나 장거리 경기에 대한 묘사와 통찰이 인상적이다. 무라카미는 올림픽의 전후에 일본의 유명한 마라토너를 따로 인터뷰함으로써 애정을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1949~). 광화문 교보문고 복도에 얼굴을 올릴 수 있을까. 



경기에 대한 묘사나 개인적 인상만 나열하고 그치면 뭣하니까, 무라카미는 결론부에 이르러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한다. 아마 작가로서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형식적 완결성을 추구한 것 같다. 조금 옮겨보자면 이렇다. 


그러니 내게 시드니 올림픽은 끝까지 지루했지만, 그래도 그 지루함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어쩌면 간신히 보상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긴 결혼 생활에 일종의 어두운 측면과 마찬가지로. 


베토벤은 (아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를" 하고 외쳤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 피가 끓고 가슴이 뛰던 로맨스 시절의 이야기다. 영웅이나 악한조차 긴 단어를 사용해서 사색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 시절은 이미 옛날에 지나갔다. 요즘은 '지루함을 통한 감명(같은 것)을' 정도가 그나마 우리가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감상이 아닐까. 그리고 올림픽이란(적어도 내게는), 그러한 밀도 높은 지루함의 궁극적인 제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 내면의 공격성을 만족시키고, 우리 외부의 영웅을 손에 넣는다. 모험이라는 빛나는 영예를 얻은 영웅을, 물론 우리의 대리인으로서. 


그나저나 무라카미는 하루에도 조깅을 60분가량 하고, 밥을 다 챙겨 먹고, 막히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올림픽을 관전하고, 저녁에 호텔 부근의 바에 가서 맥주도 한 잔 하면서, 매일 30매는 넘는 글을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고 한다. '매일 30매'라는 대목에서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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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CIA에서 일한 제이슨 매튜스의 데뷔작 <레드 스패로우>(오픈 하우스)는 흥미진진한 스파이 소설이다. 출판사는 '존 르 카레의 계보"를 잇는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턱없는 과장은 아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치열한 정보전을 치르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스파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은 상대를 포섭하고, 그런 상황을 역이용하고, 때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잔인한 무력에 호소하고, 거대한 정보조직에는 다른 모든 관료 조직과 같이 비효율적이고 때론 음험함 음모가 판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솜씨가 근사하고 박진감 있다. 


발레리나의 꿈을 키우다가 동료의 음모로 부상을 당한 뒤 무대를 떠나고 여러가지 우연으로 러시아의 스파이가 되는 도미니카, 안정적이고 부유한 가문을 벗어나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찬 CIA 요원으로 일하는 네이트가 주인공이다. 네이트는 러시아의 이중첩자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정보조직의 거두이지만, 조직의 무정함과 빛바랜 대의에 회의를 품은 뒤 미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 후에 네이트와 도미니카는 서로를 포섭하라는 조직의 명령을 받고 접근한다. 그외 미국과 러시아 정보 조직 내, 정치계 내의 다양한 인물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그 행동에도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대중소설에서 그런 일관성이 '단순함'으로 비치진 않는다. 


하지만 날렵한 스파이 소설이 될 뻔 했던 <레드 스패로우>는 몇 가지 자극적인 양념을 첨가함으로써 스스로 격을 떨어뜨린다. 도미니카가 상대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스패로우 학교에 들어간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 내 교육에 대한 묘사가 피상적인데다가 군더더기가 많다. 게다가 쓸모없이 성적으로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스패로우 학교의 잔인함을 폭로한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묘사를 하는데, 그 방식이 적절하지 않다. 교육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학생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낭비됐다. 





네이트와 도미니카의 로맨스 묘사 역시 과하다. 날카로운 첩보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그저그런 에로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작가는 작품에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첨가하려 그랬겠지만, 잘 모르는데다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은 안하는게 낫다는 교훈을 준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작가의 이력이 그렇기 때문인지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미국 정보 조직에 대한 애정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제이슨 매튜스가 존 르 카레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여기다. 존 르 카레는 스파이 활동 자체에 대한 낭만, 애정을 품고 있을지언정, 그들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국가, 조직, 정치 논리에 대해선 냉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레드 스패로우>의 타겟 독자층이 애국심 넘치는 미국인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이국의 독자까지 염두에 둔다면 좀 더 차가워지는것이 낫겠다. 영화화 이야기도 있던데, 당연히 세계시장을 염두에둔 할리우드 사람들이 알아서 다듬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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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는 할 말 다 하고도 선거에서 이긴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버니 샌더스 지음·홍지수 옮김/원더박스/416쪽/1만8000원


버니 샌더스의 모든 것

버니 샌더스 지음·이영 옮김/북로그컴퍼니/328쪽/1만5000원


“국민들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도 국민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법안을 거부하고 이 나라의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가족,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보다 나은 법안을 만들어낼 수 잇다고 믿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저는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2010년 12월 10일 오후 7시, 백발의 정치인이 미국 상원회의장 발언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당시 69세였던 그는 식사를 하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8시간 37분의 연설을 이어갔다. 회의장에는 보좌관과 직원들, 중계진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회의장 바깥에는 난리가 났다. 정치인의 사무실에는 격려전화와 이메일이 쇄도했다. 연설 동영상의 조회수가 폭발했고, 각 언론은 기사를 쏟아냈다. 이 정치인은 이후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 지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버니 샌더스 이야기(74)다. 


이날 샌더스의 필리버스터는 부자 감세 조치를 2년간 연장하는 법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전임 부시 정부의 감세정책을 비판했던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뒤 이 정책을 연장시키려 했다. 거대 양당인 민주당, 공화당이 밀어붙이는 법안을 막을 힘이 무소속 샌더스 상원의원에게는 없었다. 샌더스는 법안 표결을 3일 앞둔 이날 법안 통과에 반대하는 이유를 전 미국에 알리고자 했다. 부자 감세가 아니라 부자 증세여야 하며, 그 돈은 기반시설에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고, 이를 통해 중산층 붕괴와 빈곤층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필리버스터 연설의 골자였다. 백악관은 이날 샌더스의 필리버스터에 적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오후 4시쯤 오바마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비공개 만남에 관한 기자 브리핑 시간에 아예 클린턴을 대동해 기자들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에 관한 책 2권이 나란히 나왔다. <버니 샌더스의 모든 것>(원제 The Speech)은 이날 필리버스터 연설을 번역한 책이다. 통상 필리버스터 연설은 전화번호부를 읽거나 노래를 하는 등 시간을 끄는 수단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샌더스는 이날 별다른 대본 없이 자신의 이전 연설과 관련 자료들을 총동원해 연설했다.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원제 Outsider in the White Houes)은 1997년 나온 샌더스의 자서전이다. 샌더스의 성장과정과 정치 이력, 특히 정치적 고향인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 시절의 이야기들이 많이 담겼다. 미국내 샌더스 바람 때문에 미국에서도 올해 개정판이 나왔고, 샌더스가 서문도 새로 썼다. 


샌더스는 1941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 재학 시절 진보적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군소 진보정당인 자유연합당의 후보로 버몬트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매체들은 거대 양당 후보들에만 관심을 가질 뿐, 군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했다. 샌더스는 양당과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이를 널리 알리진 못하는 제3당의 역할과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다. 


한동안 정치를 떠나 개인 사업을 하던 샌더스는 1980년 버몬트 주 최대도시 벌링턴 시장 경선에 무소속 후보로 나서면서 정치인으로 복귀했다.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버몬트 주 유권자들이 진보적인 무소속 후보에 호의적일리 없었다. 하지만 샌더스 진영은 각 선거구의 투표 성향을 분석했고, 밑바닥부터 표를 다졌다. 저소득층 거주 지역 대표, 대학교수, 환경보호주의자, 재산세 인상을 우려하는 보수적 주택 소유자 등 다양한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샌더스는 처음부터 ‘교육’이 아니라 ‘승리’를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미 전역에서 유일하게 거대 양당이 아닌 무소속 시장으로 선출됐다.  


버몬트 시장 4선, 미국 연방 하원의원 8선, 미국 연방 상원의원 재선의 정치 이력 동안 샌더스는 자신의 견해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 이라크전에 반대하다가 보수진영으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성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고, 탐욕스러운 1%의 거부들을 격한 언어로 비난했다. 샌더스는 말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내게 선거에서 이기려면 보수적이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고 할 때마다 돌아 버리겠다.” 





그래도 샌더스는 이겼다. 그는 탁상공론하는 급진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었다. 덕분에 보수적인 경찰 노조부터 빈곤층 시민까지 유권자의 고른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샌더스가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걸 알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샌더스는 항상 주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최우선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사실 샌더스의 메시지는 35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최고 부유층 15명이 하위 40% 국민보다 많은 것을 소유한 체제는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월스트리트의 사기꾼들’을 비난하며, 인권을 옹호한다. 정적들은 “샌더스는 똑같은 얘기만 주구장창 해대서 따분하다”고 비난한다. 샌더스는 답한다. “그들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반면 극소수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현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돌풍을 일으키고는 있지만, 힐러리 클린턴을 제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결과야 어찌됐든, 샌더스 현상의 의미는 분명하다. “정의는 그리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 벌어진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당하기 어려운 대학 등록금, 여성 차별, 지구 온난화, 전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샌더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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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읽은 책. 장구한 역사를 잘 요약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봐도 손색이 없는지는 봐야겠지만.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조현욱 옮김/김영사/636쪽/2만2000원


셰퍼드, 요크셔 테리어, 시추 등 다양한 종류의 개가 있듯이, 200만~1만년 전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인간 종들은 모두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고,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 각기 다른 장소로 퍼져나가 환경에 맞게 적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기자나 읽는 독자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루돌펜시스 등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멸종했다. 7만년전쯤 동아프리카를 벗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유라시아, 아메리카로 뻗어나가면서 부터다.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미 해당 지역에 살던 네안데르탈인 등을 멸종시켰다는 ‘교체이론’,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서로 교배해 한 집단이 됐다는 ‘교배이론’이다. 지난 몇 십 년간 교체이론이 상식이었지만, 2010년 현대인의 DNA 중 1~4%가 네안데르탈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교체이론이 대체로는 옳지만, 일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는 말과 당나귀처럼 다른 종, 블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경계에 있었다. 교배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못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젊은 역사학자가 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에는 다른 인간 종을 물리쳤고, 이후엔 동물, 식물을 지배했다. 저자가 그리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은 좀 으스스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자신을 멸종시킬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는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인지혁명

7만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를 지어 아프리카를 벗어나 선주민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했다. 7만~3만년전 사이에 배, 기름 등잔, 활과 화살, 장신구, 종교, 상업, 사회 계층화가 나타났다. 저자는 이 시기의 호모 사피엔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지 혁명’이 일어났다고 본다.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호모 사피엔스 뇌의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인지혁명의 핵심은 언어다. 특히 “저기 사자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라는 허구를 전하는 언어 능력이 중요하다.


허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의 침팬지 무리는 20~50마리 정도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결속할 수 있는 규모는 150명 선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하지만 공통의 신화는 수억 명의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카톨릭 신자가 이교도를 처단하기 위해 뭉치고, 서로 본 적도 없는 두 변호사가 한 사람의 인권 수호를 위해 함께 변론한다. 종교나 인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이것들을 믿음으로써 집단을 이뤄 힘을 키웠다.


▲농업혁명

1만2000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는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몇몇 동물과 식물의 삶을 조작하는데 바치기 시작했다. 수렵채집인으로 떠돌며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밀, 완두콩, 올리브나무, 포도를 재배했고, 염소, 말을 기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류가 먹고 사는 칼로리의 90%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등 우리 선조가 기원전 9500~기원전 3500년 사이 작물화한 식물이다.


농부는 수렵채집인에 비해 행복해진 걸까.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수렵채집인은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도 적었다. 하지만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도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식량생산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남은 식량은 폭증한 인구와 소수의 엘리트를 부양하는데 바쳐졌다. ‘번성’이라는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다 수천년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간 밀이야말로 승자다. 호모 사피엔스가 밀을 재배한게 아니라, 밀이 호모 사피엔스를 이용했다.


▲과학혁명

지난 500년간 호모 사피엔스의 힘은 유례없이 커졌다. 인구는 5억명에서 70억명으로, 하루에 소비하는 에너지는 13조 칼로리에서 1500조 칼로리로 늘었다. 현대의 전함 한 대만 있으면 500년 전 열강의 모든 군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 현대의 대형 은행 한 곳이 보유한 돈은 중세의 모든 왕국이 가진 돈을 합친 돈보다 많을 것이다.


과학혁명의 핵심은 ‘무지의 인정’이었다. 500년전까지의 호모 사피엔스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황금시대는 과거에 있었고, 세상은 퇴화 혹은 정체한다고 생각했다. 자연 현상은 모두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기에, 인간은 더 많이 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문제를 풀어나갔고, 문제를 풀면 진보가 가능하다고 짐작했다. 물론 무지를 인정한 과학자 홀로 과학혁명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제국의 군대, 자본주의의 교리 없이 과학은 스스로 번성할 수 없었다.


변화의 속도는 아찔하다. 오늘날은 모든 해에 혁명이 벌어진다고 해도 좋다. 오늘날의 30대가 10대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1990년대 초반 등장한 인터넷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종말의 전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적, 기계적 방법으로 스스로의 모습에 변형을 가하고 있다. 기계를 몸에 이식하고, 유전자를 조작해 생물을 만든다. ‘지적설계’란 진화론에 대응하기 위한 기독교도들의 조어지만, 사실 지금 호모 사피엔스가 하고 있는 일이 지적설계다.


<사피엔스>는 지적으로 짜릿한 책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발부터 언젠가 닥칠 종말까지의 모습을 쉽고 재치있게 그려낸다.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생물학, 고고학, 경제학의 성과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 하지만 ‘쉽다’는 것은 ‘단순화했다’는 말과도 통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본다면,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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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좋은 책은 학문의 분과를 뛰어넘는 깨달음을 준다. 이번에 읽은 <생명에서 생명으로>가 그랬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김명남 옮김/궁리/304쪽/1만8000원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기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종교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더 넓은 물질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 갓 숨이 끊어진 생명체가 있다. 생명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육체만큼은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온마저 따뜻해 마치 깊은 잠에라도 빠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몸이 식어간다. 이제 어딘가에서 ‘자연의 장의사’들이 나타난다. 이른바 청소동물이다. 송장벌레, 구더기, 큰까마귀, 독수리, 곰…. 이 동물들은 송장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활약을 통해 지구의 소중한 물질이 재분배된다. 물론 청소동물들을 이루는 물질들도 언젠가는 해체돼 자연으로 흩어질 것이다. 지구 위에선 수십 억년 동안 이렇게 거대한 순환이 이뤄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원제 Life Everlasting)는 청소동물의 활약과 그들로 인한 물질의 순환을 그린다. 저자 베른트 하인리히(75)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다. 1951년 미국으로 이민와 살며 생물학 박사가 됐고, 대학에서 은퇴 후 현재 미국 시골 메인주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공터에 덫을 놓아 잡은 쥐, 로드킬 당한 사슴 등을 두고 청소동물을 불러모은다. 노생물학자의 정밀한 자연 관찰기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갈파한 종교서적에 육박한다. 


송장벌레과 니크로포루스속 딱정벌레는 딱 ‘장의사’다. 인간이 그러하듯, 매번 동물 사체를 적당한 땅으로 옮겨 묻기 때문이다. ‘니크로포루스’라는 속명은 그리스어 ‘네크로스’(죽은)와 ‘필로스’(사랑)에서 나왔다. 하지만 송장벌레가 죽음을 사랑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사체를 옮기는 건 죽음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부터 새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새까만 등에 선명하고 밝은 오렌지색 무늬가 있어 그 이름과 달리 놀랍게 아름다운 송장벌레는 낭만적인 연애 풍경을 연출한다. 생쥐 같이 적당한 사체를 발견한 수컷은 꽁무니 분비샘에서 냄새 물질을 뿜고, 냄새를 맡은 암컷은 수컷을 찾아와 사체를 옆에 두고 짝짓기를 한다. 암수는 사이좋게 힘을 합쳐 사체를 묻는다. 암컷이 근처 흙 속에 낳은 알에선 며칠 뒤 유충들이 깨어난다. 유충들은 사체로 기어와 부드러워진 살점을 먹는다. 


북반구 최고의 장의사는 큰까마귀다. 에드거 앨런 포는 큰까마귀를 두고 “음침하고 볼품없고 섬뜩하고 수척하고 불길한 태고의 새”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하늘을 나는 큰까마귀는 ‘힘과 우아함의 전형’이다. 사슴, 소, 너구리 등의 죽은 동물이 있으면 포유류가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로 사체를 연다. 다음은 큰까마귀 차례다. 하인리히는 모두 합쳐 무게가 1t 정도 나가는 소 두 마리의 사체를 얻어 큰까마귀의 처리 능력을 시험했다. 2주만에 500마리 가까운 큰까마귀가 날아들어 소의 살점을 완전히 발라냈다. 물론 고기는 큰까마귀의 몫만은 아니었다. 큰까마귀는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고깃덩어리를 물고 1㎞ 넘게 날아가 숨겨두는데, 이런 고기를 다른 새나 코요테 등이 훔쳐 먹는다. 





나무의 장례식은 동물에 비하면 한없이 길다. 살아생전 끈끈한 수지, 딱딱한 껍질 등으로 자신을 방어해온 나무는 죽으면 곤충들을 그 부드러운 속살로 맞아들인다. 비단벌레는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산불난 곳을 알고 찾아온다. 균류 역시 죽은 나무에 자리잡는 생명체다. 균류의 생식기관으로서 포자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자실체(子實體)가 버섯이다.  


연어는 질소, 인, 기타 영양분을 바다에서 강과 주변 삼림으로 배달하는 ‘꾸러미’다.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랐다가 민물로 돌아오는 연어는 알을 낳고 얼마 뒤 그 자리에서 죽는다. 곰들은 알을 낳기 위해 사력을 다해 강을 거슬러 오르거나 혹은 죽은 연어를 잡아먹는데, 먹이가 풍부할 경우 곤, 생식소, 뇌 등 별미만 맛본 뒤 버리곤 한다. 하지만 자연에 낭비란 없다. 곰들의 만찬장 주변엔 갈매기 등 다른 청소동물이 나타나 남은 연어를 포식한다. 


죽은 고래는 빛 한 점 없고 수온은 0℃에 가까운 심해의 영양 공급원이다. 심해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고래는 빛이 넉넉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괴생명체다. 죽은 고래가 심해로 가라앉으면 돔발상어, 먹장어, 민태, 왕게 등이 나타난다. 부드러운 조직이 다 먹히면 세균이 뼈에 엉겨 붙고, 삿갓조개와 달팽이가 그 세균을 먹는다. 낙하한 고래 주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물은 400종이 넘는다. 고래가 완전히 분해되기까지는 10년~100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인리히는 불치병 진단을 받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의 편지를 받고 이 책을 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친구는 죽음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재생에 대한 야생의 찬양”이라고 적었다. 그러니 시체를 구멍에 넣고 밀봉하는 매장은 “인간 육체의 영양분을 자연계로부터 박탈”하는 일이다. 화장도 답은 아니다. 시체를 태우는데 걸리는 3시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하고, 또 유독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는 자신을 하인리히가 소유한 공터의 ‘영구 거주자’로 받아들여달라고 청한다. 


하인리히는 친구의 편지에 쉽게 답장하지 못했다. 그의 논리에 수긍하면서도, 시신을 발가벗겨 겨울 숲에 방치한 뒤 큰까마귀에게 맡기기는 꺼림칙하다. 인간의 유골이 야산에 뒹구는 상황도 윤리적, 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인리히조차 자신의 매장 방법을 쉽게 선택하기 어려워 한다. 독성 화학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주입해 매장하는 것도, 반환경적인 화장도 답은 아니다. 다만 “인간도 동물이고, 생명 순환의 일부이고, 먹이 사슬의 일부”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첫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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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를 위해 20년 전에 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나무 백 가지>를 책장에서 찾아봤다. 책 뒤편엔 대학 구내서점 영수증이 붙어있었다. 아직 그 서점이 '슬기샘'이란 이름을 쓰는지 모르겠다. 왠지 '위즈덤 파운틴'같은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 같다. (농담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기자 선배와 함께 국립수목원을 잠시 걸었다. 때마침 날이 흐려 다소 음산했다. 하지만 잘생긴 나무 사이를 걷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인터뷰이나, 인터뷰이에게 안내해준 연구사 모두 사람이 좋아 보였다. 둘 다 국립수목원에서 20년, 10년은 근무한 이들이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난 그들이 '식물적 인간'이라 느꼈다. 사진 선배는 "수녀 같다"고 평했다.  





1995년 나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현암사)는 식물학 도서로는 이례적으로 19쇄를 찍은 스테디 셀러였다. 일본, 유럽에서 들여온 도감류가 전부였던 국내 출판계에서 ‘우리 나무’ 이야기가 대중에게 다가선 순간이었다. 10년 뒤 개정판에 이어, 20년 뒤인 최근에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20년전 국립수목원 연구사였던 저자 이유미씨(53)는 지난해 국립수목원장이 됐다. 국립수목원 최초의 여성 수장이자, 첫 자체 승진 사례다. 그는 “20년간 수목원으로 오는 전나무 길을 따라 출근했지만 매일 아침이 다르다. 안개낀 날이 좋고 눈이 와도 좋다”고 했다. 이유미 원장을 최근 국립수목원에서 만났다.


“글을 쓰기 이전엔 나무와 머리로 만났다면, 글을 쓰면서는 마음으로 만났어요. 100가지 나무 하나 하나와 사연을 공유하고,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식물학자들은 일생에 참 많은 식물을 만나지만,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을 좀처럼 갖지 못합니다. <우리 나무 백 가지>는 제 인생을 바꾼 책입니다.”


책은 저자뿐아니라 다른 이의 인생도 바꿨다. 이 책을 읽고 숲해설가 혹은 식물학자가 되기로 한 이도 많다. 출판계에서도 <우리 나무 백 가지> 이후 대중을 위한 식물학 도서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이 원장은 “내 책에 영향받아 진로를 정했다는 이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면서도 “평생 접해야할 대상이 자연이라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 나무’라는 명칭을 쓰긴 했지만, 자생종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이 땅에 들어와 그 정서까지 우리 것처럼 변한 나무들도 포함되는 넓은 의미의 ‘우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명백히 ‘우리 나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과거 어느 시점에는 외래종이었다. 나무에는 국적이 없다. 다만 일본에서 최고의 목재로 쳐 황실에서 사용하는 편백나무,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왕벚꽃 등에 ‘우리’라는 말을 붙이긴 애매하다. 이 원장은 “편백은 우리나라에서 더디 자라 더 질이 좋다고 한다”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무 백 가지>의 저자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강윤중 기자


책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출판사의 시리즈 명인 ‘백 가지’에 맞추느라 아쉽게 탈락한 나무들도 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가 빠져서 못내 마음에 걸렸어요. 개정판에서 넣으려는 생각도 했지만, 다른 나무를 빼낼 수도 없고….”


개정증보판에는 20년 사이 우리 나무들이 겪은 변화상도 기록됐다. 95년판에는 옛 기록에 따라 ‘(능소화의) 수술 끝에 달리는 꽃가루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있으므로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독자들로부터 “한여름에 아름다운 능소화를 보다가 눈이 멀 수도 있는 것이냐”는 문의가 잇달았다. 국립수목원 연구진이 꽃가루를 관찰하고 독성을 분석한 결과 능소화의 안전성이 밝혀져 내용을 수정했다. 20년 전에는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최고 인기 가로수였는데, 요즘엔 은행나무에 자리를 내줬다. 산개나리는 자생지를 찾지 못했으나 그 사이 군락을 발견했다. 조선 정조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264호 용주사 회양목은 노쇠해 줄기와 잎을 대부분 잃은 뒤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됐다.


<우리 나무 백 가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난 20년 사이 나무와 숲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분명하다. 요즘은 숲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정원 가꾸기도 유행할 조짐이라고 한다. 이 원장은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 영감, 휴식을 얻을 수 있다”며 “우리 삶에 나무를 들여놓는 일은 정말 특별하다”고 말했다. 





‘가장 마음이 가는 나무’를 꼽아달라고 하니, “자주 듣지만 참 곤란한 질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원장은 몇 마디를 보탰다.


“나무가 어디에 어떻게 서있느냐에 따라 다르죠. 어제는 갈참나무의 가을빛이 나를 사로잡더니, 오늘은 창밖에 내다보이는 소나무가 좋고…. 전나무는 크게 자라는 나무인데, 봄이면 연한 연두빛 새순이 그렇게 섬세할 수 없어요. 노각나무는 동백나무처럼 하얀 꽃이 피는데 흔히 만날 순 없지만 정말 좋습니다. 남산에 가면 종종 만나는 때죽나무는 작은 종처럼 생긴 하얀 꽃들이 수줍게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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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세라 워터스의 장편 <리틀 스트레인저>를 읽었다. 워터스는 한국에선 <핑거스미스>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에 의해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고 있다. 


<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데, <리틀 스트레인저>는 2차대전 직후다. 이때라면 그저 '현대물'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리틀 스트레인저>는 시대물 분위기를 물씬 낸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귀족 에어즈 가문과 그들의 집 헌드레즈홀이기 때문이다.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이자 자수성가한 의사 닥터 패러데이가 작중 화자인데, 독자는 그의 눈을 통해 한때 영화로웠던 헌드레즈홀과 전쟁 이후 완전히 몰락한 헌드레즈홀을 비교해 관찰한다. 패러데이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깊이 각인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에게 1950년대는 전후 상처를 치유하고 본격적인 자본주의 소비 사회로 접어드는 시기를 준비한 때인 반면, 패러데이와 그를 통해 묘사되는 에어즈 가문 사람에게는 그저 고딕 호러의 시대 배경이다. <어셔가의 몰락>의 얌전한 버전 정도?


그렇다. 이 소설은 얌전하다. <리틀 스트레인저>에는 귀신 비슷한 것이 나오긴 하지만, 진짜 귀신인지 아닌지 끝내 알 길이 없다. 화자인 패러데이가 철저히 합리성, 이성에 의존한 사람이기 때문에, 에어즈 가문 사람들(에어즈 부인, 장녀이자 한때 패러데이와 약혼한 캐럴라인, 상이군인인 장남 로더릭)이 아무리 패러데이에게 초자연적 현상을 증언해도 패러데이는 믿지 않는다. 화자가 믿지 않으니 독자도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힘들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있는둥 마는둥 전해지는 귀신의 존재가 무서울리 없다. 책 띠지엔 '불면의 밤' 운운하는 스티븐 킹의 추천사가 있지만, 나는 '스티븐 킹이라면 150쪽 정도의 중편으로, 그것도 훨씬 무시무시하게 썼을 것'이라고 투덜대며 읽었다. 





700여쪽 동안 워터스가 공들이는 건 무시무시한 귀신 묘사가 아니라, 과거에 발목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몰락하는 귀족들의 정신과 생활 양식이다. 에어즈 가문은 아무런 수입원이 없기에 영지를 조금씩 팔아가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가문의 몰락을 막지는 못한다. 귀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가문은 어차피 망했다. '차츰 몰락하는 영국 귀족'의 이미지에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다고 말하기까진 어려웠다. 더 공감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책의 구도가 너무 계산적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귀족 여성-초자연-여성 vs 평민 의사-합리-남성'의 구도가 너무나 뚜렷해, 결과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 같았다고 할까. 역자는 저자가 화자의 신뢰성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으며 심지어 패러데이가 사건 배후의 범인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는데, 뭘 놓친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작가의 의도가 거기까지 뻗어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리틀 스트레인저>는 여러모로 만족스럽지 못한 독서 경험을 제공했다. 몰랐던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환상도, 캐릭터와 상황이 엉망으로 뻗어나갈 때의 광기도, 예상치 못한 전개가 주는 감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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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땅 이야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오숙은 옮김/열린책들/480쪽/5만5000원


에덴동산, 아틀란티스, 엘도라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현대 과학·상식의 견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장소다. 하지만 과거의 누군가는 이 장소들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는 지금도 믿는 사람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로 인해 ‘믿음의 흐름’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런 장소들은 신의 존재와 비교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이 신의 부재를 아무리 엄밀한 방식으로 검증한다 한들, 신자들은 신의 존재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신이 있건 없건, 신자들의 믿음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움베로트 에코의 <전설의 땅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전설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박학다식으로는 따를 이가 적은 이 작가·사상가는 동서고금의 전설적 장소들을 목록으로 만들고, 그곳으로 향하는 투어가이드를 자처한다. 가상의 장소들에 덧붙여진 터무니없는 사연들에는 때로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꾸며진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에코가 관심을 두는 것도 그 대목이다. 


고대·중세의 지식인들은 현대인이 믿는 것보다 똑똑했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지구를 평평하게 여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구형이라는 건 고대 후기에 이미 상식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아래 학문을 펼쳐나갔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의 끝까지 내려갔다가 연옥의 산 아래로 나오는데, 이는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 아래 가능한 서술이다. 


그런데도 고대·중세의 지도에서 지구를 평평하게 그리곤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세의 지도는 경험적 재현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재현이었다. 실제의 지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들이 마주칠 위험을 알려주거나 예루살렘 같은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대중의 믿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솔로몬 성전의 건설 장면을 상상한 중세의 그림. 중세에 유행한 고딕성당 풍으로 그려냈다. 


기독교 문화는 유럽 문화의 기저에 흐른다. 헤브라이즘은 유래가 오래된 만큼 전승 도중 많은 부분이 변형됐다. 사람들은 구멍난 서사의 수수께끼들을 온갖 믿음의 행동으로 채우려 했다.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인들에게 정복당했을 때, 이곳에 살던 이스라엘 10개 지파 성원들은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 타민족과 섞여들며 뚜렷한 계보를 잃어갔다. 그러나 잃어버린 신도들을 재통합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남은 과제와 같았다. 이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생겼다. 어떤 이들은 사라진 이스라엘 지파들이 카슈미르에 있다고 지목했다. 심지어 중앙아시아 타타르 부족, 줄루족, 일본인, 말레이시아인 등과 이스라엘 지파를 연관시키기도 했다. 간혹 색슨족(Saxons)이 이삭의 아들들(Isaac‘s sons)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는 물론 어원을 완전히 무시한 추정이다. 


성배 역시 오랜 시간 유럽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원래 성배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담은 접시 혹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잔을 일컬었는데, 사람들은 성배의 존재와 그 이동 경로를 둘러싸고 온갖 추측을 쏟아냈다. 이럴 때는 먼저 말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가는 법이다. 아서왕과 엑스칼리버의 전설을 정리한 중세인 로베르 드 보롱은 성배가 아서왕 전설 속 이상향인 아발론에 보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성배 추종자들은 아발론의 위치를 찾아내려 갖은 노력을 다했다. 어떤 이들은 아서왕의 묘비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떠돈 영국 글래스톤베리를 아발론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역시 지상낙원은 영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풍요가 핵심이었다. 10세기에 기술된 시 ‘우니보스’에는 코케인의 땅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중세의 시, 우화 등에 종종 등장한 이곳은 강에는 우유가 흐르고, 샘에서는 포도주가 솟아나고, 산은 치즈로 돼 있고, 나무에는 소시지가 열리는 땅으로 묘사됐다. 폭풍이 칠 때는 당의를 입힌 아몬드 우박, 비가 올 때면 육즙이 내린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올 법한 상상력이지만,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던 중세인들에게는 먹을 것 풍부한 코케인의 땅이야말로 진정한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뿐 아니라 사회 질서조차 전복적이었다. 농부가 주교를 조롱하고, 물고기가 어부를 잡고, 동물이 우리에 갇힌 사람을 구경한다. 



19세기의 풍자적 그림 '뒤집힌 세계'. 어떤 유토피아는 이런 식의 가치 전도를 특징으로 한다. 


전설의 땅 이야기는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했다. 독일 나치가 대표적이다. 나치는 고도의 관료적 합리성과 밀교적 신비주의가 뒤섞인 집단이었다. 나치 핵심 관료 하인리히 힘러는 1935년 ‘선조의 유산 연구와 교육을 위한 협회’를 발족시켰다. 협회는 고대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재발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북유럽 신비주의에 영향받았고,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역시 고대 북유럽의 룬 문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북극 신화다. 보스턴대 석좌교수였던 윌리엄 F 워렌은 북극에 지상낙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다윈의 주장과는 반대로, 북극에 살던 아름답고 수명이 긴 최초의 주민들이 대홍수와 몇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며 현재와 같은 열등한 인류가 됐다고 주장했다. ‘북극 민족’의 우월성과 아시아, 지중해 민족의 열등성을 은연중 드러내는 이 이론은 훗날 아리안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나치들에게 전용됐다. 


이런 전설들은 완전한 허구이거나, 일부 사실에 대량의 상상력이 가미된 결과다. 극심한 허기 속에 육즙이 내리는 땅을 꿈꾼 빈자들의 상상력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안쓰럽다면, 북극 민족의 존재까지 상정하며 자기 종족의 우월성을 강조한 뒤 타 종족을 말살시키려 한 나치의 상상력은 끔찍하다. 에코는 한 인터뷰에서 “갈릴레오보다는 프톨레마이오스에 관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코웃음치며 무시하기보다는 왜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폭넓은 지식인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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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런 말 하긴 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서전, 전기류에 관심이 생긴다고 한다. 


찾아보니 서경식 선생이 한겨레에 가토 슈이치의 부음을 접한 뒤 적은 글이 있다. 링크한다. 가토 슈이치, 한 교양인의 죽음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지음·이목 옮김/글항아리/552쪽/2만5000원


가토 슈이치(1919~2008)란 인물을 쉽게 설명하긴 어렵다. 도쿄대 출신의 의사였는데 학창 시절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시, 소설, 평론을 썼다. 일본의 패전 직후 미·일 합동조사단의 일원으로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사에 참여했고, 1951년 프랑스로 유학가 혈액학을 연구했다. 그러면서도 모국 언론에는 문예평론을 발표했다. 도쿄도립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했고, 베를린자유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한 적은 없지만,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타계할 때까지 헌신했다.


<양의 노래>는 가토 슈이치가 50대에 출간한 자서전이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영미권, 유럽에서도 번역됐다. 이번에 한국에 번역된 판본은 저자가 미국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1990년대 중반 상황까지를 추가 서술한 대목까지 엮었다. 


가토는 유복하고 양식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특히 외조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해 서구의 교양을 흠뻑 흡수한 인물이었다. 가토는 어린 시절 외조부와 함께 서양 영화를 보러가는 등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했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지식인의 시점에서 본 전쟁 전후 일본의 모습이 흥미롭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를 우려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세계사의 전후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진 못했다. 그들은 ‘황군’이 수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던 독일 국민, 폭격당한 베트남 민간 마을을 몰랐던 미국 국민과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에 대한 인식도 비슷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이라느니 ‘대동아공영권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느니 하며 환호했다. 가토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관람을 예정했던 일본 전통공연 분라쿠 공연장으로 향했다. 관객이 적어 공연이 취소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려는 순간, 정교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공연이 시작됐다. 어제와 달라진 세계 속에 어제와 똑같이 열린 아름다운 공연과 그것을 바라보는 가토. 이렇게 가토는 상황에 다가서기보단 한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45년, 가토는 대학의 내과 교실을 떠나 인근의 결핵요양소로 배치됐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은 8월 15일 ‘중대 방송’을 함께 들었다. 천황의 발표를 다 듣고도 그 뜻을 몰랐던 사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립니까?”라고 물었고, 원장은 짧게 “전쟁이 끝났다는 얘길세”라고 답했다. 지역의 젊은 아가씨들로 구성된 수십 명의 간호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병실로 흩어졌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토는 “전쟁은 그 어떤 교육에도 불구하고 또 그 어떤 선전선동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가씨들의 세계 내부까지는 스며들지 못했던 것”이라고 적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사를 나가서는 여러번에 걸쳐 살아남은 피폭자들에게 피해 상황을 물었지만, 그들은 몇 마디를 한 뒤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 한쪽에 있고, 가토는 그 반대편에 있었다. 히로시마는 이 둘의 극심한 대비를 가르쳐주었다. 가토는 그래도 말못할 경험을 말로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것이 가토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가토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또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늘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물렀다”고 회고한다. 그는 세계시민이었지만, 또한 프랑스, 영국, 독일, 캐나다, 미국에서 늘 이방인이었다. 1960년대말~70년대 초 서유럽 학생들의 영웅은 호치민, 체 게바라, 마오쩌둥이었다. 가토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반식민제국주의 지도자라는 사실과, 활동무대가 베를린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개의 학생이 이들의 발언이나 행동이 나온 자세한 배경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확실히 신은 인근 도시가 아니라 천상에 사는 법”이가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가토는 급진적인 학생들로부터 ‘권위주의적 교수’로 몰리곤 했다. 


그래도 이 박학하고 우아한 지식인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가토와 저녁 식사를 하던 한 실업가는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일은 알고 싶지 않아. 난 그저 평화를 즐기며 살고 싶을 뿐이라네. (…) 설사 안다고 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가토는 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다’는 인간과 ‘그래도 알고 싶다’는 인간이 있다. 나에겐 전자가 틀렸다는 논리는 없다. 다만 나는 자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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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은 궁금하긴 한데.... 만약 가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나로선 여기서 묘사된 걸 읽는 정도로 충분하겠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게일 루빈 지음, 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 옮김/현실문화/904쪽/4만4000원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게일 루빈 미국 미시간대 교수(66)는 문제적 인물이다. 인류학, 비교문학, 여성학을 가르치는 그는 1970년대부터 논쟁적인 글을 써왔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진영 내에서도 미움받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역자를 대표해 서문을 쓴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조차 1997년쯤 <일탈: 게일 루빈 선집>의 번역을 제안받고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임 교수는 “마음속의 금서”였던 <일탈>을 번역해 펴내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게일 루빈이 40년간 써온 주요 논문을 엮은 선집이자, 유일한 단독 저서다.


루빈이 천착한 주제는 성(性)이었다. 루빈 자신이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자 사도마조히스트다. 9장 <카타콤>은 연구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카타콤은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어들어 예배를 치른 지하 묘지다. 이 글에서 카타콤은 1975~81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교장소를 말한다.


엄격한 절차를 거쳐 카타콤에 모인 이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쾌락을 즐겼다. 각종 장치와 행위에 대한 묘사가 눈 앞에서 보듯 생생하다. 부부의 섹스 이외의 모든 성은 부도덕하게 간주하는 이들이라면 한 쪽도 넘기지 못할 만한 묘사다. “카타콤의 환경은 성인들이 거의 아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경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는 문장만 인용하자.



게일 루빈/현실문화 제공


그러나 카타콤에 대한 루빈의 시선은 들뜨기보다는 애잔하다. “대부분 우리 사회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추구를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것과 유사하게” 여기지만, “카타콤은 신체와 감각적 경험에 대한 신체의 능력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찬양하며 사랑”하는 장소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여러가지 몰이해와 비극을 이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루빈은 현대의 성을 둘러싼 갈등이 지난 세기의 종교 분쟁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를 가장 격렬히 반대하는 집단이 보수 개신교단이라는 사실과 맞물린다. 미국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보수 세력은 ‘부도덕한’ 성 행동을 미국의 국력 쇠퇴와 연괸짓기까지 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번의 ‘일탈’ 때문에 사회에서 매장되곤 했다.


루빈은 “생식기가 본질적으로 신체의 열등한 부위”라거나 “최상의 유일한 성교 방식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성 해방이 남성 특권을 확장시킬 뿐이라고 보는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비판한다. 이들은 포르노그래피, 성산업을 반대하면서 그것이 성차별적 현실을 고착화한다고 주장하지만, 루빈은 반대로 성산업은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루빈이 보기에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결국 성적 보수주의 담론과 공명할 뿐이다.


임옥희 교수는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성이 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총론을 작성하려 했다면, 루빈은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각론의 장을 전개해왔다”고 적었다. 주디스 버틀러와의 인터뷰는 루빈의 생각에 대한 길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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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영화 보면 코미디인데, 실제로는 공포다. 한국판 표지 역시 귀업게 표현하려 했다. 저자는 최대한 담담하게 쓰려 하고, 또 가끔 유머를 발휘하려고도 하지만, 웃기기보다는 끔찍하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스콧 스토셀 지음·홍한별 옮김/반비/496쪽/2만2000원


우디 앨런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기막힌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예술가다. 앨런이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영화 <애니홀>(1977)의 주인공 앨비 싱어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어린 시절의 싱어는 “우주가 계속 팽창하다가 결국 터져버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하며 나날을 지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불안증을 극복하지 못한 싱어는 15년째 정신과에 출입하고 있는데, 별로 나아질 기미는 없다. 싱어의 불안은 그의 직업, 대인관계까지 잠식한다.


실제의 앨런을 연상케하는 싱어의 불안은 관객을 포복절도케 한다. 그런데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중에 실제로 앨런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니면 나 자신이 앨런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면? 그건 코미디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포영화다.


미국의 유명 잡지 애틀랜틱의 저널리스트인 스콧 스토셀은 영화 바깥으로 나온 우디 앨런이라 할만하다. 그는 기억이 닿는 한 최대치의 유년기부터 각종 불안에 시달렸으며, 지금도 그렇다. 약물, 상담, 명상, 독서 등 온갖 방법으로 불안을 다스리려 했지만 영구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낸 것은 없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원제 My age of anxiety)에서 스토셀은 자신의 불안 증상의 이력,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실패담을 털어놓는다. 그는 이를 위해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서 시작해 다윈, 프로이트의 저작을 거쳐 현대 의학 서적까지, 불안에 관한 수십만 장의 글을 8년에 걸쳐 읽었다.


생의 주요 고비는 물론, 가벼운 일상의 와중에도 불안은 스토셀을 덮쳤다. 결혼식을 치르면서는 하도 땀을 흘리고 몸을 떠는 바람에 신부, 주례, 하객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첫 아이가 태어나는 날, 간호사들은 산모를 내버려두고 창백한 얼굴로 쓰러진 스토셀을 돌봤다. 강의나 발표를 하기 위해 나섰다가 얼어붙어 버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데이트 약속을 했다가 못나가고, 취업 면접을 보다가 나와 버린 적도 많다. 좀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도 마찬가지다. 스토셀의 어머니는 야간 로스쿨에 다녔는데,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거나 아예 가출했을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가장 심각한 건 구토공포증(emetophobia)이다. 스토셀은 “내 일상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이 구토를 피하는 일과 만에 하나 구토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에 대비하는 일에 소비된다”고 적었다. 스토셀은 1977년 3월 17일 구토한 이래 한 번도 구토를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구토공포증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토할리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몸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의사들은 온갖 요법을 적용했다. 대표적으로 ‘노출 요법’은 공포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 환자를 적극적으로 노출시키는 방법이다. 스토셀은 거대한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이 토하는 장면을 끝없이 지켜보기도 했고, 구토를 유발하는 토근 시럽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스토셀이 수시간이 지나도록 구토를 참는 바람에 요법은 실패했고, 오히려 이를 지켜보던 의료진이 구토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약으로 해결할 수 없을까. 실제 미국에서는 발륨, 프로작 등 불안증, 우울증 약이 보편적으로 상용화된 상태다. 불안이 생물학적, 의학적 요인으로 발생한다는 설명을 믿으면, 약을 먹는게 큰 도움이 된다. 스토셀 역시 각종 약을 상시 복용해왔으며, 현재까지도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특정한 약이 등장하면서 듣도 보도 못했던 병이 유행처럼 번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미국인 중 1100만명이 공식적으로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는데, 1979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병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황 장애라는 개념은 이미프라민이라는 약의 개발과 함께 나왔다. 젊은 정신과 의사 도널드 클라인은 자신이 치료하는 정신과 환자 대부분에게 무조건 이미프라민을 투여하기 시작했고, 특히 불안 발작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클라인은 이미프라민이 효과가 있는 증세를 불안 발작(훗날의 공황 발작)이라 불렀다. 약에 대한 반응이 병을 정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발륨이 나오자 모든 증상은 ‘불안’과 연관됐고, 프로작이 나오자 같은 증상이 ‘우울’로 해석됐다.


불안은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스토셀의 아내는 불안증이 없고, 스토셀 자신도 불안증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린 두 딸이 일찌감치 이런저런 불안증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스토셀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디 앨런 유전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유전자 변이가 있다. 이 유전자들은 부정적 정서를 강조하거나, 강박적인 몰두를 유도한다.


그러나 불안은 또한 환경에 의해 조성되기도 한다. 유방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유방암이 발현되는 건 아니듯, 불안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불안에 떠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불안이란 문명의 산물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돌림병이나 맹수에 의해 고통받지 않고,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진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이런 편의가 없었던 옛날 사람들에 비해 훨씬 큰 불안에 떤다. 신분이 고착화돼 있었고 문명 발달이 더뎠던 옛날 사람들은 일종의 만성적 체념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현대인들은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에서 갈등하고 또 불안에 떤다.


스토셀은 불안의 정의를 내리고, 또 자신의 불안증을 고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정리해 책을 썼어도 불안증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건 키케로, 마하트마 간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타이거 우즈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는 재판 도중 몸이 얼어붙어 그냥 내려온 적이 있고,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무대공포증 때문에 15년간 공연하지 못했다. 타이거 우즈는 “내가 긴장하지 않는 날은 골프를 그만두는 날”이라고도 말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불안은 현대인의 존재 조건이다.


많은 불안은 그 불안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불안을 호소했다가는 “나약하다”거나 “호들갑 떤다”는 핀잔을 받기 일쑤다. 스토셀의 안타까우면서도 솔직한 고백은 불안에 떠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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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쌍둥이의 눈물

박강성주 지음/한울아카데미/320쪽/3만4000원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방콕을 거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던 대한항공 858기가 안다만해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에는 승무원과 탑승객 등 115명이 타고 있었다. 당국은 비행기가 공중폭파됐을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12월 1일 테러 용의자 2명을 바레인에서 체포했다. 둘은 곧바로 자살을 기도했는데, 중년 남성은 사망했으나 젊은 여성은 목숨을 건졌다. 이 여성 용의자는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됐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된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 하루 전이었다. 12월 23일, 이 여성은 자신이 북한 공작원 김현희라고 자백했다.


김현희는 이듬해 1월 15일 기자회견에도 등장했다. 김현희는 북한 지도부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비행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보름 뒤 사면됐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의 공식 개요다. <슬픈 쌍둥이의 눈물>은 이 사건을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의 측면에서 다룬 학술서다.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인 저자는 대한항공 858기 사건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학부 시절 통일부가 주최한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이 사건을 다룬 논문으로 입상했으나, 통일부로부터 논문 일부의 수정을 요구받았다. 사건의 공식 수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한 대목이었다. 저자는 수정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수상은 취소됐다. 이후 그는 이 사건을 학문적 관심사로 삼아 석·박사 논문을 써냈다. <슬픈 쌍둥이의 눈물>은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에 바탕한 책이다. 지난해 영국에서 영문판으로 먼저 나왔고, 저자가 직접 한국어로 번역해 이번에 출간됐다.





저자는 김현희라는 인물을 둘러싼 당대의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사건 당시 김현희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데다 미혼이었으며 20대 중반으로 젊었다. 이는 종래의 ‘테러리스트’ 이미지와 상충했다. 김현희가 ‘미개발되고 원시적인’ 사회로 여겨지는 북한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남한 남성들은 화장이나 성형에 의존해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남한 여성이 아닌, ‘오염’되지 않은 이 북한 여성에 주목했다. 김현희가 기자회견에서 눈물까지 흘리자, 이 아름답고 가녀린 모습은 ‘비행기 폭파범’이라는 인상을 완전히 대체했다.


김현희와 정부도 이를 이용했다. 정부는 김현희의 공작 물품을 공개하며 속옷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김현희가 처음 꺼낸 한국말은 “언니, 미안해”였다고 보도됐다. 김현희의 수기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 같이 여성성을 강조한 제목을 달았다.


김현희는 훗날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이전에도 숱한 남한 남성들의 청혼을 받았다. 저자는 “전통적 의미에서 테러범이 된다는 것은 남성다움으로 무장한다는 뜻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며 “테러범이 여성일 경우 이 특정한 개인은 젠더 규범을 위반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틀에 따라 훈육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혼은 훈육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순진무구하고 아름다운 김현희를 이용한 무자비한 나라가 됐고, 남한은 그녀를 품에 안은 따스한 나라가 됐다.


지난 해 세월호 참사에서도 반복된 일이지만,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고 이후에도 유족들은 충분한 위안을 얻지 못했다. 저자는 정부의 공식 수사 발표를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점을 지적했다. 김현희의 진술에 몇 가지 모순이 있고, 북한의 동기도 석연치 않다. 88올림픽을 방해하려 했다고 하지만, 폭파 사고와 올림픽 사이의 시간 간극이 너무 커 이 사건을 올림픽과 관련짓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북한의 테러 시기는 대선 국면에서 보수적인 노태우 후보를 도왔을 뿐이다. 무엇보다 관계당국은 수색 작업을 철저히 하지 않았다. 실종자의 시신은 커녕, 블랙박스도 찾지 못한 채 금새 철수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점, 즉 탑승객들이 확실한 사망자가 아니라 애매모호한 실종자로 남았다는 사실은 가족들의 불안함, 원통함을 가중시켰다. 한 유족은 “밤이면 자식이 어디선가 전화할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고, 또다른 유족은 “백 몇 명이 넘는데 (죽었다는) 아무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증거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유족들의 끈질긴 요구로 인해 2000년대 들어 두 차례의 공식적인 재조사가 있었다. 사건 전모를 밝힌 유일한 증인인 김현희를 직접 조사하지 못했다는 등의 한계가 있었지만, 이 재조사에서도 당시 정부의 발표는 대체적으로 사실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만 재조사 과정에서 당시 정부가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나왔다. 대한항공 858기 탑승객은 대부분 중동에서 일한 노동자들, 즉 정부가 그토록 치켜세운 산업역군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고통받는 유가족들의 원을 풀고 배려하기보다는, 사건을 국내외 정치·외교 상황에 유리하도록 이용하는데 전력했다.


저자는 지난 10여년간 실종자 가족, 관계 기관 종사자 등 63명을 인터뷰하고, 사건 정보를 보유한 한국, 영국, 미국, 호주, 스웨덴 등 5개국에 정보공개를 요청했다. 그럼에도 김현희의 대면 인터뷰가 불가능했을 뿐더러, 북한쪽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작업은 일정 수준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논문으로서는 실험적인 방법론을 취했다. 바로 김현희와 실종자 가족이 만나고, 연구자와 실종자의 영혼이 등장하는 단편 소설 2편을 책에 각 한 장씩 할애한 것이다. 실제 최근 국제관계학 분야에서는 학술서에서는 금기시됐던 일인칭 시점 글쓰기를 도입한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 같은 대안적 글쓰기 방법론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소설적 상상력의 힘과 통찰을 학술서가 이용하면 안되는지 묻고 있다. 제목의 ‘쌍둥이’란 남한과 북한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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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과학책을 프런트로. 




언던 사이언스

현재환 지음/뜨인돌/248쪽/1만4000원


미국에선 일찌감치 유방암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중년 남성을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한 현대의학 및 과학 연구에서 여성 질환인 유방암이 경시되어 왔다”고 비판해왔다. 반면 의학계 내부에서는 유방암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왔음에도 일부 여성 활동가들이 과학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 성차별주의 관념을 내세운다고 반박했다. 결국 ‘나쁜 과학자 집단 대 정의로운 여성운동가들’, 혹은 ‘진실한 과학자 집단 대 히스테릭한 여성들’이라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유방암 관련 논쟁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결 구도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 논쟁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일부 부위를 제외하고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대가 연일 광화문 부근을 가득채웠다. 정부와 보수세력은 일부 좌파들이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시위대는 친미적인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다. 양측은 서로 자신들이 ‘과학적 진실’의 담지자임을 주장한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특정 목적을 위해 과학적 진실을 오도한다고 여겨지는 집단을 ‘용의자 X’라고 부른다. 과학 논쟁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용의자 X를 찾아낸 뒤, 그에게 소동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용의 선상에 오르는 이는 시국에 따라 정부, 기업, 언론, 좌파세력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시각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용의자 X론’은 “과학을 오용하는 일부 사람들이 문제일 뿐 과학 자체는 순수하고 가치중립적이며 확실한 답을 제공해 주는 진리의 집합체라는 믿음”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본다. “과학 활동은 사회 바깥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이뤄지고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맥락들이 과학지식 생산과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뭔가 정제되고 독립적이며 순수한 과학적 진리만을 따로 솎아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과학의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 너는 비과학'이라고 싸우는 사람들. /뜨인돌 제공


이런 작업을 수행하려면 과학에 대한 고정 관념 혹은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학자인 쉴라 자사노프는 1990년 ‘규제 과학’(regulatory science) 개념을 제안했다. 규제 과학이란 ‘규제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혼종적 영역’이다. 학술과학은 대학 실험실 등의 장소에서 명료한 방법론, 연구자들의 높은 합의 수준, 확립된 기준에 의해 수행되기에 논쟁이 적다. 하지만 규제과학의 결과물은 정부·기업·대중 등 이해 당사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에, 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과학적 목적 외에 정치적·경제적 목적까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규제과학은 “다양한 수준의 과학적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포함한다.


광우병 관련 논쟁만 지켜봐도 규제 과학의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표준에 근거해 미국 소고기 수입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OIE의 기준 자체가 소고기 수입국과 수출국들의 치열한 논쟁 끝에 다수결로 결정된 사안이었다. 즉, OIE의 ‘과학적 진실’은 표결에 의한 것이었다.


구제역 대처법을 두고도 큰 논란이 있었다. 구제역 대처법은 크게 봐서 두 가지로 나뉜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살처분 방식을 써온 반면, 다른 유럽 국가나 남미는 백신 접종을 선호해왔다. 상황은 유럽통합 작업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1989년 유럽경제공동체는 구제역 통제 정책의 손익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살처분 비용이 백신 예방접종 비용보다 적게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는 ‘백신을 사용하지 않는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차지해 가축 수출을 늘리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살처분 결정은 ‘국익’ 혹은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공공선은 결국 ‘경제적 이익’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닌 축산업 수출에 관련한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공선을 농촌 환경파괴에 관련된 환경적 관점, 농부들의 정신적 피해나 동물권에 관련된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살처분은 오직 경제적 관점의 공공선만을 지지할 뿐이다. 저자는 “영국 구제역 사태에서 영국 정부가 내렸던 ‘비합리적인’ 정책적 결정 또한 ‘합리적’인 과학에 기대어 이뤄진 것”이라고 썼다.


과학 논쟁은 섬세하고 미묘하다. 세상엔 분명 악당이 있고 이들이 음모를 꾸밀지 모르지만, 모든 나쁜 일이 특정집단의 계략에 의해 벌어지는 건 아니다. 표면만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이면을 살피면 예상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이들의 ‘청부과학자’가 유포하는 과학지식을 의심하고 검증하려는 시도는 당연하고 또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들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적 진리로 승인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 즉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란 특정 지식이 어떤 사회적·정치적·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생산됐으며 또 무시되고 배제됐는지 살피기 위해 제안된 용어다. 저자는 여러 차례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진술이 “과학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만 ‘왜곡된 과학 대 순수한 과학’ 식의 단순한 이분법, 용의자X를 찾으려는 노력으로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과학 논쟁의 판을 읽어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순수한 과학’이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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