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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다 '비밀은 없다'와 '굿바이 싱글'


전혀 다른 작법으로 제작된 전혀 다른 영화지만, 두 편 모두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영화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비밀은 없다'는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굿바이 싱글'은 비교적 순항중이다. 



한동안 한국영화에는 30~40대 남성뿐이었다. 남성이 주인공이고, 남성이 악당이었다. 남성들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사이, 여성들은 악당의 손에 희생되거나 주인공에게 구조되길 기다려야 했다. 이번주 개봉작 <비밀은 없다>와 다음주 개봉작 <굿바이 싱글>에는 ‘이상한 여자’들이 나온다.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손예진, 김혜수는 이 영화들에서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낯선 여성의 모습을 연기한다.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이 두 여성에 의해 한뼘 넓어졌다. 


■비밀은 없다

경상도의 어느 도시. 연홍(손예진)은 방송 앵커 출신으로 국회 입성을 노리는 남편 종찬(김주혁)의 선거운동을 돕는다. 그러나 공식 선거운동 첫날, 외동딸이 실종된다. 연홍은 사색이 돼 딸을 찾아다니지만, 종찬과 그의 참모들은 선거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수색에 소극적이다. 홀로 딸의 행방을 쫓던 연홍은 예상치 못한 비밀과 마주한다. 

아이가 실종된 특수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연홍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신경질적이고 예측하기 힘든 엄마라 할 만하다. 얼마간의 권력을 쥔 연홍은 경찰, 학교를 들쑤시며 아이를 찾아 다니는데 그 방법이 과격하고 무례하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듯한 배타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심지어 흉기로 자기 손등을 찍는 방식으로 결의를 보이기도 한다. 연홍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관객이 감정이입하기 쉽지 않은 낯선 여자다. 

그러나 연홍의 이 같은 감정적인 행동은 겉으론 이성적이지만 사실 음험한 남편과 그가 상징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오해받은 남편이 연홍의 뺨을 한 대 때리자, 연홍은 세 대로 돌려준 뒤 남편의 얼굴에 침까지 뱉는다. 물론 연홍도 남성 권력자의 아내로 권력을 누리겠다는 야망을 간직했던 인물이다. 지금은 무당이 된 학창 시절 친구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연홍의 꿈은 ‘힐러리’, 즉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결국 연홍이 겪는 비극은 연홍의 일그러진 사회적 야망이 초래한 부작용이다. 

연홍은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타고난 끼를 갖고 있지만 보수 정치인의 조신한 아내로 살았고, 전라도 사투리를 감춘 채 경상도의 국회의원 선거전에 뛰어들었고, 제도권을 혐오하면서도 권력은 탐했다. 관객이 정붙이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지만 타고난 악인은 아닌 여성. <비밀은 없다>는 현란한 편집과 기묘한 음악을 통해 이 여성의 정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데뷔작 <미쓰 홍당무>로 미증유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 적 있는 이경미 감독은 “연홍은 불완전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엄마이자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며 “관객이 연홍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굿바이 싱글

배우 고주연(김혜수)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톱스타다. 아들뻘 남자친구의 배신에 충격받은 주연은 “영원한 내 편”을 만들겠다며 아이를 갖기로 한다. 입양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출산은 폐경기에 접어든 몸 때문에 여의치 않자 주연은 꾀를 낸다. 바로 낙태를 위해 산부인과를 찾은 여중생 단지(김현수)의 아이를 키우겠다는 것. 주연은 단지와 은밀한 계약을 맺은 뒤,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한국의 여성 연예인들은 때론 정치인, 성직자보다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굿바이 싱글>의 고주연은 ‘국민 밉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자유롭게 사는 인물이다. 사회가 특정 나이와 지위의 여성에게 기대하는 처신을 거부하고, 혼전 임신이나 싱글맘에 대한 편견을 이겨내려 한다. 고주연에게 특별한 정의감이나 반골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차라리 철없는 아이처럼 보인다. 심지어 상당히 무식하기까지 하다. <굿바이 싱글>은 이 철없고 교양 없는 40대 여성을 결국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만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주연이 주변 사람과 맺는 관계도 여느 상업영화에서 보기 힘들다. 주연과 그의 스타일리스트인 평구(마동석) 사이엔 로맨스가 싹트지 않는다. 요즘 상업영화의 관습대로라면 평구를 동성애자로 그릴 법도 하지만, 평구는 아내와 세 아이가 있는 남자다. 사고를 치는 주연과 이를 수습하는 평구는 직업적으로 궁합이 잘 맞는 파트너이자, 서로의 속내를 잘 이해하는 친구다. 주연과 여중생 단지는 처음에는 냉정한 계약관계였지만, 차츰 여성 사이의 연대로 뭉친다. 주연은 불우한 단지의 처지를 이해하고, 단지는 화려한 톱스타 주연에게서 인간적인 친밀감을 발견한다. <굿바이 싱글>은 관객이 편하게 웃을 만한 2시간을 제공하면서, 여성과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 영화로 데뷔한 김태곤 감독은 신선한 감각의 독립영화 <족구왕>의 각본가이자 제작자였다. 김 감독은 “카리스마 넘치고 당당한 여성을 대변하는 배우 김혜수가 그 반대 역할을 맡았을 때 관객이 재미를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며 “주연이 스스로를 희생하고 성장함으로써 중요한 사람을 얻는 과정을 그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