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에 해당되는 글 325건

  1.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2. 투명성의 지옥 '아논'
  3.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4. 유령을 보는 혹은 보는 척 하는 형사 '리버'
  5.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6.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7.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8.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더 포스트'
  9. 서사가 아니라 감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10. 전통과 초현대가 공존하는 그곳, '블랙 팬서'
  11. '스타트렉'과 소화가능한 윤리적 딜레마
  12. 메트로폴리스에서 청년이 방 한 칸을 가진다는 것, '프란시스 하' (2)
  13. 에이리언의 기원, '에이리언: 커버넌트'
  14.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기, '특별시민'
  15. 영화는 영화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16. 조금 달콤, 많이 씁쓸한 '토니 에드만'
  17. 공주는 없다. '미녀와 야수'
  18. 캐릭터에 대한 존중과 애정, '로건'
  19. 나와 너의 연결고리, '컨택트'
  20. 검사 영화의 최종판? '더 킹'과 한재림 감독 인터뷰
  21. 질투는 나의 것? '여교사'
  22.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너의 이름은.'
  23.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혁신적인, '라라 랜드'
  24. 프로파간다가 두렵지 않은 '판도라'
  25. 공식 포스터가 티저 포스터보다 촌스러운 이유, 이관용 인터뷰
  26. 마법과 현실의 크로스오버, '신비한 동물사전'
  27.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슈퍼소닉'
  28. 외로운 소년, 소녀의 진실과 거짓말, '가려진 시간'
  29. 영감의 원천으로서의 웨스턴, '로스트 인 더스트'
  30. 슈퍼히어로물의 생명연장, '닥터 스트레인지'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을 때의 쾌감은 대단했다. 네트에 걸리지 않고 금에 걸치지도 않은 공이 코트를 때린 뒤 재빠르게 튕겨나가는 순간의 쾌감에 대해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클리셰를 쓸 수밖에 없다.

스포츠 영화에 스포츠 장면을 잘 잡는건 필수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경기만 박진감 넘치게 촬영한 영화는 아니다. 윔블던을 4번 연속 우승한 뒤 다섯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스웨덴의 스타 선수 비외른 보리와, 그에 도전하는 신성 존 매켄로의 1980년 윔블던 결승을 보여주는 동시, 두 선수의 성장기와 개인사를 조금씩 드러낸다. 영화는 두 선수의 극명한 스타일 차이를 대비해 보여준다. 매켄로는 알려져있다시피 '악동'이다. 판정에 납득할 수 없으면 심판에게 막말을 하며 대들고, 때로 관중하고도 싸운다. 관중은 그런 매켄로에게 야유를 퍼붓지만, 매켄로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반대로 보리는 '미스터 아이스'다. 경기 중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로 대중과 만날 기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고, 상대 선수를 칭찬한다. 보리는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린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둘은 비슷하기도 하다. 둘 모두 강박적으로 이기고 싶어하고, 이기지 못했을 때는 터져나갈 듯 분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리 역시 청소년기에는 매켄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사적인 스포츠'임을 자부하는 테니스계는 보리의 불같은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고, 보리는 이기기 위해선 분노를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물론 보리의 화는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코트 위에서, 대중 앞에서 차갑게 감추었을 뿐, 보리는 내면에선 여전히 불같은 사람이다. 가끔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보리의 불꽃은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 약혼자에게 상처를 주고, 오랜 기간 함께한 코치를 갑작스럽게 해고하게 만든다. 

이기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이기지 못하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성과를 낸다. 스포츠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스포츠 선수의 팬 서비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지만, 최고의 팬서비스는 역시 승리다. 그런 점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팬서비스를 제공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선수들 본인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상영후 나오는 자막에 따르면, 보리는 영화 배경으로부터 1년 뒤인 81년 윔블던 결승에서 매켄로에 패배했다. 그리고 얼마뒤 은퇴했다. 불과 26세의 나이였다.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스포츠 영화, 만화에 나온 주인공처럼, 보리는 짧은 순간 모든 걸 불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일의 조' 식의 '완전연소'. 

보리 역의 스웨덴 배우 스베리르 구드나슨과 매켄로 역의 샤이어 라보프는 모두 잘한다. 구드나슨은 1978년생 배우인데, 이번에 처음 알아봤다. 스웨덴 배우가 비외른 보리 역을 연기한다는 건, 한국 여배우가 수십년 뒤 김연아를 연기하는 것 비슷한 심정일까. 라보프는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역시 이상한 사람 연기를 잘한다. 그에게 계속 이상한 역을 맡겨줬으면 좋겠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지어 연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너 어젯밤 누구하고 있었어? 어젯밤 기록 보여줘"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살(클라이브 오웬)은 형사다. 이 사회에서 경찰 노릇 하기란 2018년보다 쉬워보인다. 범죄가 일어났을 당시의 시각 기록을 확인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시각 기록이 끊기기 전까지를 재생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범인을 잡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의 마지막 시각 기록이 해킹됐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 살인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즉 일부 기록이 삭제되고, 불필요한 기록이 삽입된 채 남겨진 것이다. 살은 사건 배후에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삭제해주는 해커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언더커버에 착수한다. 살은 연인을 두고 매춘부를 부른 증권거래인인 척 해, 해커에게 자신이 매춘부와 접촉한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다. 살에게 익명의 해커(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접촉한다. 

'가타카'는 지금까지도 유전자 조작에 의한 사회 변화를 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유전자 가위' 같은 기술이 키워드가 되면서 '가타카'의 혜안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가타카'는 컨셉을 잘 잡은 영화지, 잘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컨셉을 잘 잡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영화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 '가타카'의 시나리오와 미술을 사용해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더 그럴싸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논'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논'은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듯, 현대사회의 빅데이터 축적과 투명성, 그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알 수 있다. 경찰은 간단한 접속 해제 코드로 많은 이들이 본 것을 고스란히 데이터화할 수 있다. 별다른 장치도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현대 혹은 근미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유용한 설정이지만, '아논'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이후의 전개를 예측가능하게 만든다. 클라이브 오웬,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배우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은밀하게 만나 쿨하게 일만 하고 헤어질리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등장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팜므 파탈은 궁극의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100년은 된 클리셰다. '블랙 미러'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아논'에는 없다.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무표정, 무감정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여주기보다는 배우의 역량을 제한한다.  

결국 '가타카'처럼, 아논'은 잘만든 영화는 아니면서도 만듦새와 무관하게 종종 언급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영화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사회학자나 IT 칼럼니스트가 더 언급하기 좋은 종류에 속한다.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잔을 깨트려버리는 단순무식함이 재미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성장영화다. 역시 핵심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메리제인과의 풋사랑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좀 더 봐야 알겠는데,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시각적 트릭은 뛰어나다. 그건 정말 영화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한 적은 없다. 지난 두 번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반쯤은 의무적인 기분으로 봤다. 사실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영웅들이 나왔고, 악당이 시시했다는 것 정도.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의 유머도 기억은 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오늘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독과점'을 말하는 건 진부하고 어색하다. 동시기 개봉작 중 이 영화와 상영관을 나눠가질 만한 상업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 표를 끊었는데, 사실상 매진이었다. 



악당 타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사실상 주인공.


난 '인피니티 워'를 커다란 농담처럼 여긴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이 영화의 '밖'에서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시빌 워'에 나타난 히어로들의 대립구도나, 아이언맨이 미국의 군산복합 슈퍼리치를 그리는 방식이나, 헐크의 심리적 여정에 대해선 뭔가 말할 수 있다. 블랙 팬서와 흑인문화의 '쿨'과 '쉬크함'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 설화니, 다 모으면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를 절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 같은 것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할 뜻이 없다. 일각에선 이 영화의 악당 타노스가 '이유 있는 악당'이라며 '인피니티 워'에 깊이를 부여하려 한다.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하는 악당보다야 깊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의 자원이 부족하니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한다는 논리는 18세기 '인구론'의 조야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피니티 스톤이라면, 생명체를 줄여 자원을 아끼기보단 자원을 늘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더 경제적이고 마음도 편할텐데. 차라리 비슷한 논리로 다수 인류를 죽이려한 '환경주의자' 발렌타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타노스보다 그럴듯했다. (정말 발렌타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IT 거물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반면 타노스의 존재나 행동 동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요즘 인기 있는 '이유 있는 악당'이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차라리 로키처럼 그냥 천성이 비뚤어져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 있을 것 같다.

사실 '인피니티 워'는 웃긴다. 조금 진지해지려는 순간마다 농담을 배치한다. 그루트의 사춘기 유머, 드랙스의 부동자세 유머, 스타로드의 지방과 근육 유머 모두 웃긴다. 자아가 뾰족한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브루스가 브루스 자신(헐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토르: 라그나로크' 때부터 본격 유머를 보여준 토르도 여전히 웃긴다. 와칸다의 '스타벅스' 유머에도 피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인피니티 워'를 2시간 40분짜리 유머이자 팬서비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많은 히어로와 빌런을 등장시키고도 균형을 유지한 점도 높이 사야겠다. 그외엔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영국의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리버'를 보다. 영국, 경찰, 티비 시리즈라 했을 때 떠올릴법한 정서는 '우울'이다. '리버'도 다르지 않다. 6부작, 6시간에 걸친 시간동안 내내 우울하다. 주인공이 70년대 디스코 'I love to love'에 맞춰 2인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울하다. 

형사 존 리버와 파트너 스티비 스티븐슨이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스티비는 이미 죽은 사람임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리버는 죽은 이를 본다. '식스 센스'의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리버'는 '식스 센스'의 아이처럼 유령을 두려워하기보단 주로 짜증과 화를 낸다. 가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주먹질 하는 걸로 비춰지는게 문제긴 하다.  

이쯤되면 형사와 유령 형사의 버디물이라고 짐작할 법하다. 유령의 직관과 인간의 행동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구도가 그럴듯하다. 하지만 '리버'는 다른 길을 걷는다. 유령이 자주 나타나 무언가 말을 건네기는 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파트너 스티비의 유령 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어간 사건 관계자들의 유령도 종종 나타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의 단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사건을 헛짚는 리버를 빈정댈 뿐이다. 가장 특이한 유령은 옛날 내복을 입은 채 나타나는 남자다. 이 유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 리버의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한다. 리버는 매번 광분한다. 


'리버'의 등장인물들. 가운데가 리버, 가장 왼쪽이 옛 경찰 파트너이자 지금은 죽은 스티비

그러니 회차가 거듭될수록 의심이 생긴다. 리버가 유령을 보긴 보는건가. 유령은 뭔가 얘기를 하긴 하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리버가 이미 아는 얘기들이다. 리버의 성질을 돋우는 말들도 결국 리버의 성격적 약점을 공략한다. 그러니, 유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리버의 직관 혹은 무의식 아닌가. 리버는 유령의 도움을 받는 척 하며 이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 아닌가. 어찌된 일인지 경찰 조직은 제정신이 아닌 듯 혼잣말을 하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리버를 눈감아준다. 리버는 유령 혹은 자신의 죄의식과 싸우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시즌2는 소식이 없다. 유령하고 이야기하는 이상한 형사 얘기를 또 보고 싶은 시청자들이 많지 않았나보다. 

스웨덴 배우 스텔란 스카스카드가 리버 역을 맡았다. 스카스가드는 사건 해결에 출중한,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형사 역을 너무나 훌륭히 소화했다. 배우의 존재감이 작품의 50% 이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시 '토르'의 작은 역할에 그칠 배우는 아니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팬은 후회가 없다. 40대에 접어든 한 팬은 생에 이러한 열정은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10년 뒤쯤에는 여기 저기 아프고 병들텐데, 그 전까지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일본의 아이돌은 한국처럼 '완성형'으로 데뷔하기보다는, 춤이든 노래든 캐릭터든 어딘가 어색한 상태에서 데뷔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례인데, '도쿄 아이돌스'의 아이돌들도 그렇다.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데, 팬들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응원한다. 예전 '우정의 무대'에서 봤을법한 함성과 일사분란한 응원이 아이돌 무대 앞에서 재현된다. 

젊은 여성 하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남성들이 소리지르며 응원한다. 무섭거나 기괴할 것 같은데, 막상 이 남자들과 대화하면 대체로 순박하고 쑥스러워한다. 아이돌들도 팬들이 아빠처럼, 오빠처럼 잘 대해준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신체 접촉이 일절 금지돼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악수회'라는 '회색지대'가 생겼다. 아이돌은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팬은 최소한의 성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상상의 연애, 유사 연애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는데, 팬들도 이것이 '유사'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아무리 아이돌과 친해져도, 설령 아이돌 팬클럽의 회장이라 하더라도, 아이돌과의 관계가 진짜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도쿄 아이돌스'의 중심인물인 아이돌 히라기 리오

'도쿄 아이돌스'는 아이돌과 남성팬의 관계가 현실의 연애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팬들은 거추장스럽게 실제 여성과 연애하지 않는다. 현실 연애에서 관계는 천변만화한다. 내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 호의가 상대에겐 적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연애에선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다반사다. 그 모든 모순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연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과 팬은 그렇지 않다. 돈을 쓰고, 정성을 다하면, 아이돌은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아이돌은 팬이 정성을 쏟는만큼의 정확한 비례로 미소지어준다. 연애란 상대에 대한 독점욕을 동반하지만, 아이돌과의 가상 연애는 팬덤에 의해 공유된다. 팬은 연애의 독점욕을 포기하는 대신, 연애의 정직한 거래를 확보한다. 

연애같은 거 귀찮아서 안해. 대신 아이돌과 가상 연애할래. 사실 이해가는 태도다. 연애는 귀찮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돈도 든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나 인류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대해 한숨을 쉴 것 같다. 하지만 난 항상 '후세의 일은 후세가 걱정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이 팬들에게 인구 걱정, 인류 걱정을 하라는건 가혹하다. 다만, '도쿄 아이돌스'의 엔딩이 10대 초반 아이돌을 보여주면서 끝난다는 건 기묘하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봐도, 이제 초등 고학년이나 됐을 법한 소녀들이 아저씨들과 악수하는 모습은 이상하다. 그런 점에서 '도쿄 아이돌스'의 태도는 이 팬덤에 대해 끝내 비판적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일대는 기묘한 빛으로 어른거리는 파장에 휩싸인다. 정부와 연구자들은 이 파장을 '쉬머'(the shimmer)라고 부른다. 쉬머가 점점 넓어지자 미국인들(아마 세계인들?)은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쉬머 안으로 들어간 정찰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군복무 경험자인 생물학자 리나의 남편 역시 쉬머로 정찰나간 이였다. 1년이 흘러 남편이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뒤 곧 쓰러진다. 리나는 심리학자, 지리학자 등 또다른 4명의 정찰대(모두 여성)와 함께 쉬머 안으로 들어간다. 쉬머 안에서는 DNA가 '굴절'돼 동, 식물이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리나 일행의 기억이나 지리 감각도 흐릿해지고, 정찰대는 하나 둘씩 죽거나 사라진다. 찾아보니 동명의 3부작 소설이 한국에서 출간돼있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시작해, '컨택트'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풍으로 해석하면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혹은 '서던 리치'의 속편이 '언더 더 스킨'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돌아보면 외계인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지구를 공격해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생각은, 외계인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회고라 할만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지난 세기(혹은 현재도 마찬가지) 제국주의 열강을 닮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 가능하고, 그 동기도 분명하다. 하지만 '컨택트'나 '서던 리치'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마나 '컨택트' 속 외계인의 동기는 선의에 가깝게 해석되지만, '서든 리치'는 그마저도 모호하다. 인류의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끼겠지만, 외계인은 인류를 위협하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다. 비둘기가 돌을 위협하는가? 바람이 거미를 보호하는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비둘기와 돌, 바람과 거미는 다른 차원의 존재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고, 각자의 논리대로 존재할 뿐이다. 

감독의 취미인지, 대중적 고려인지 모르겠지만, 쉬머 안에 스릴러 혹은 호러 영화의 장치들이 조금 놓여있다. 그것 때문에 완전히 안심한 채 명상하고 사색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늑대(와 비슷한 생물)와 곰(과 비슷한 생물)이 정찰대를 공격한다. 특히 곰을 무섭게 그리는데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를 찢어발긴 바로 그 곰이 진화해서 '서던 리치'에 나오는 것 같다. 그저 흉포해서 무서운게 아니라, 이 곰이 인간의 목소리를 흡수해 들려준다. 방금 "살려줘!"라고 외치면서 죽은 사람의 "살려줘" 소리가 곰의 목에서 반복해서 들려온다면? 그것도 테이프가 조금 늘어진 듯 기괴하게 변형된 소리로 흘러나온다면? 

'서던 리치'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인식의 틀이 확장됨을 느낀다. 아니, 금세 수정하겠다. 인간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갑자기 확장될리도 없고, 확장되어봐야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것 아닐까 . 그렇다면 '서던 리치'를 보고 내가 재확인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것. 인간을 이루는 구성물은 언젠가 우주의 일부가 되고, 그때 '나'라는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것.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다는 것.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 이 영화 보고 이런 생각하는 나도 이상한가요. 









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위세를 떨며 결국 최형배의 절을 받아내고, 이후 전직 공무원과 현직 조폭은 환상의 호흡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국 사이가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난 얼마전 모 감독의 오디션 중 성희롱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최형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일하러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오디션을 볼 땐 오디션 얘기만 하면 된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터이고, 좀 더 확장해 배우의 인생관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카메라 앞과 뒤가 무 자르듯 나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영화계 현실'을 알려준답시고, 어느 여배우가 어느 감독과 잤다느니, 주연이 되기 위해선 남자를 유혹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디션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소리'다.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도 난데없이 최형배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물먹은' 기자들 이야기다. 뉴욕타임즈가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베트남전 정책과 관련한 잘못을 폭로한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즈를 고소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타임즈에 물먹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사로든 낙종을 만회해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포스트의 경영자인 캐서린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캐서린은 주식시장 상장, 정부와의 관계,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을 추동하는 최초의 힘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도,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벤이 일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라이벌 언론사에 대한 경쟁심이다. 벤은 타임즈의 에이스 기자가 몇 달 째 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초조해한다. 해당 기자가 분명 엄청난 특종을 준비중이라고 예상하고, 그 기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꼼수까지 쓴다. 마침내 타임즈가 '펜타곤 페이퍼' 특종을 내고 며칠 연속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벤은 산하 기자들에게 히스테리를 폭발시킨다.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 쓸 방법이 없다. 해당 보고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별 수 없이 경쟁사의 단독 기사 행렬을 감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자의 마인드로 볼 때, 이런 상태는 치욕이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마침내 포스트에는 비행기 일등석을 탄 보고서 일부가 도착한다. 이제서야 포스트 기자들은 살맛을 느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볼멘소리는 아님을 누구나 안다. 


캐서린은 고민한다. 포스트가 쓰려는 기사는 캐서린의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을 괴롭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입장과 인간적인 우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벤도 직업 윤리와 인간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이 있었다. 벤은 JFK 부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음을 결정적인 순간 깨닫는다. 



캐서린은 포스트의 이사, 변호사,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평생 직업을 가질 일이 없던 캐서린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포스트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진 못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내건 결정을 내리고서야 캐서린은 진짜 경영자가 된다. 



벤이 법정에 나란히 선 뉴욕 타임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라이벌 의식과 동업자 의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결국 일은 일이다.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고 '더 포스트'는 말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직업윤리'의 고귀함 정도가 되겠다. 기자가 기자 윤리에 충실하고, 공무원은 공무원 윤리에 충실하며, 정치인은 정치인 윤리에 충실하면 된다. (조폭의 윤리, 사기꾼의 윤리는 말하지 말자) 지난해의 영화 '택시 운전사'도 결국은 택시 기사로서의 윤리에 충실했던 한 남자를 영웅으로 삼은 영화다. 두말할 것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는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스포일러 있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영화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요약된다. 말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가 양서류 괴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들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료 청소부 젤다와 이웃집 게이 화가 자일스가 엘라이자를 돕고, 실험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를 방해한다. 과학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여기에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추근대는,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그래서 엘라이자-괴물-스트릭랜드의 삼각 관계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기능적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끌리는 과정이 매끈하지 않을 뿐더러(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며 아내의 입을 틀어막는 장면, 즉 조용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트릭랜드의 성적 취향이 유일한 단서인데, 좀 뜬금없다), 이 대목은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의 대립을 강화하는 '수단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느낌이다.



'괴물' 역의 더그 존스는 양서류를 닮은 피조물로 자주 등장한다. '헬보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등등. 


마이클 섀넌과 샐리 호킨스의 팽팽한 열연. 



대신 '셰이프 오브 워터'는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지만 말하진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설정이 도움된다. 물소리, 발소리, 차소리, 텔레비전 소리 등이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꽤 즐거울 것 같다.) 영미권 작곡가와는 작곡의 결이 다른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복고적인 음악도 이 소리의 향연에 한몫한다. 엘라이자는 내내 수어로 대화하다가, 종반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의 방식으로, 벼르고 별러 찍은 느낌이다. '라라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뮤지컬 장면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싶다.    


'동화같은 영화'라고 쉽게 말하기엔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당연히 청소년관람불가다) 초반에는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 후반에는 엘라이자와 '괴물' 사이의 이종 섹스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의 수위도 높아진다. 스트릭랜드가 호프스테들러의 총에 맞은 볼 안쪽의 입으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는 장면은 기예르모 델 토로식 잔혹 취미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얼굴 찢는데 취미가 있는지, '판의 미로' 때는 스페인 파시스트 군인의 볼을 찢은 적이 있다)


엘라이자 역의 샐리 호킨스,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섀넌이 좋은 배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들의 연기는 한국 관객, 감독이 좋아하는 방식의 열연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섀넌은 박찬욱이 연출하는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 캐스팅됐다. 아울러 샐리 호킨스는 물론 좋은 배우지만,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그를 주연으로 삼은건 모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가 한국 언론 시점에는 블록버스터지만, 미국에선 20세기 폭스가 아니라 그 산하 스튜디오인 폭스 서치라이트가 제작한 19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블랙 컬쳐는 쿨하다. ('흑인 문화'보다는 '블랙 컬쳐'가 쿨해 보여서 그렇게 표현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감수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블랙 컬쳐는 쿨하고 쉬크하고 모던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랙 컬쳐는 미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국에선 물론이다. 유색인종인 한국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바뀐 건 힙합의 인기와 맞물린 듯하다. 지금 힙합은 대중음악의 확고부동한 중심 장르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쇼 미 더 머니'다. 그 서브 컨텐츠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고등래퍼'까지 인기 있으니, 반면 록을 중심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탑밴드'는 어땠나. KBS라는 공영방송의 형식적, 감성적 한계가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밴드'는 한 마디로 '구렸다'. 내가 수십년간 록을 좋아했지만, '탑밴드'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방송에서 재현되는 록에선 더 이상 신선하거나 세련되거나 쿨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인터뷰 방식, 옷매무새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조금 슬펐다)


연휴기간중 '블랙 팬서'를 봤다. 또 마블 영화다. 사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마블의 최근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재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각 효과적 도전이 없었다. 상영시간이 134분에 달하는데 이야기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 팬서'엔 다른 강점이 있다. 흑인 배우가 대부분의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그것도 미국 바깥 시장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배우들이다. 이건 블랙 컬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쿨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자신감이다. 


배경은 서부 아프리카에 있다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국제 사회에서는 '세게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와칸다는 우주에서 온 금속 비브라늄을 사용해 막대한 부와 첨단 기술을 축적한 국가다. 이곳의 생활수준과 이를 떠받치는 테크놀로지는 동시대 지구 어느 국가도 능가한다. 다만 와칸다는 국제 사회에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자족적인 삶을 즐긴다. 외교적으로 일종의 '고립주의'다. 이들의 고립주의는 나중에 원로와 젊은 세대의 갈등 요소가 된다. 



전통과 초현대가 뒤섞인 '블랙 팬서'의 소품과 의상들. 저 망토를 펼치면 방패가 된다. 


재밌는 건 와칸다가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선취한 나라이면서도, 아프리카의 전통적 이미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전히 간직한 나라라는 점이다. 와칸다는 왕정 국가이며, 왕위는 부계의 장자가 세습한다. 왕이 되기 위해선 와칸다의 주요한 여러 부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대일 결투로 완력을 증명해야할 때도 있다. 도전자와의 결투에서 이기면 정당하게 왕위를 이어받는다. 부족의 원로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의상을 입고 회의에 참여한다. 와칸다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창을 든 민머리 여인들인데, 이들 역시 전통에 기반한 의상을 입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총을 미개한 무기라고 여긴다. 왕은 신비한 허브로 만든 약을 마시고 '블랙 팬서'의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이 허브의 성분은 물론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 초현대,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비의 영약이 공존하는 곳이 와칸다 왕국이다. 


과거였으면 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이런 설정을 넣었을 것이다.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나 '배트맨 비긴즈'가 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그리긴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한 나라 전체가 이렇게 묘사된 적은 없었다. 그건 이미 20세기 초 세계 열강에 든 일본은 물론,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과 중국이 더 이상 '신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 '신비의 영약'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꽁꽁 숨어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블랙 팬서'는 블랙 컬쳐의 근원인 아프리카의 전통을 '쿨'하게 그리면서도, 아프리카가 처한 저개발의 현실에서 나온 이미지를 교묘히 활용하는 영화다. 그래서 '블랙 팬서'의 시선은 어딘지 이중적이다. 아울러 아직 아시아계 슈퍼히어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블랙 컬쳐가 아시안 컬쳐보단 주류가 되었거나 주류에 거의 근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는 신화적이고 '스타트렉'은 철학적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유보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두 시리즈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 강력해 뭐라고 함부로 말을 보태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조셉 캠벨이 잘 지적했듯 '스타워즈'는 신화에서 볼법한 오랜 영웅 서사를 담았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소명을 깨닫고 머나먼 여정에 나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당했다가, 결국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베이더 부자의 오이디푸스 궤적도 엮여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시퀄 시리즈에선 고아 소녀 레이에게 루크의 궤적을 따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조금의 뒤틀림을 줬는데, 이 때문에 팬덤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다고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구조에 기반한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왕, 귀족, 기사, 유목민의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스타트렉'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군인, 과학자, 탐험가다. 행성연방 소속의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 대원들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방에 대항하는 적들을 만나 전투를 벌이거나, 미지의 행성 종족들의 낯선 풍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함선의 명칭과 대원들을 달리 하며 몇 차례의 시리즈가 이어져온데서 알 수 있듯, '스타트렉'에는 '스타워즈'에서 보이는 '중심 서사'랄 것이 없다. '스타트렉'은 기본적으로 단막극에 가깝고, 각 에피소드에서 각자 사건을 해결하고 윤리적 교훈을 주곤 한다. '스타워즈'는 전편을 보지 않으면 다음편에 정붙이기 어렵지만, '스타트렉'은 그 연계성이 희미하다. 


새로운 '스타트렉' 텔레비전 시리즈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가 15개의 에피소드로 최근 끝났다. 두번째 시즌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커버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설정이 있었다. 시리즈 최초로 선장이 아닌, 대원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그 대원은 반역죄를 저질렀다가 일시적으로 사면된 흑인 여성이다. 이 여성의 이름은 남성적인 마이클 버넘이다. 마이클이 보필하던 선장 필리파 조지우도 여성(양자경)이다. 조지우의 상급자인 제독도 여성이다. 남성은 악당이거나, 조력자 정도다. 중요한 또다른 남성 캐릭터가 있는데, 암시적이었던 예전 시리즈와 달리 동성애자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동성 간의 키스신이 있다)


'디스커버리'는 9편까지 잇달아 방영되었다가 잠시 휴방후 10편부터 다시 방영되었다. 그리고 10~15편은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9편 마지막에 디스커버리호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기 위해 스포어 점프를 시도하는데, 이후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한다. 디스커버리호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평행우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디스커버리호가 위치했던 우주와 정확히 같은 인물들이 살고 있지만, 역사는 전혀 달리 진행된 곳이다. 현우주의 인간이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연방제를 추구한다면, 평행우주의 인간은 무력에 근간한 독재, 제국을 구성하고 있다. 현우주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의 선장 필리파가, 평행우주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황제다. 디스커버리호는 우여곡절 끝에 현우주로 돌아오지만, 그 사이 연방은 숙적 클링온의 기세에 밀려 전쟁에 거의 진 상태였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마이클이 현우주로 충동적으로 데려온 평행우주의 황제가 유용해진다. 연방은 평행우주의 독재자 필리파의 리더십을 빌리려 한다. 필리파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포로에 대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다. 승리,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상과 원칙에 어긋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미국이 좀 더 효율적인 대테러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입한 '강화된 심문기술' 같은 것. 


물론 '디스커버리'는 청소년도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 파국적이고 암울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건 '스타트렉' 시리즈의 이상적이고 희망차고 낙관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으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되는가'라는 윤리학의 오랜 딜레마를 슬쩍 던졌다가 회수하는 솜씨는 미국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허용하는 적절한 수준이다. 시즌 2를 보고 싶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주인공 마이클 버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현우주에선 자애로웠던 필리파 조지우 선장이 평행우주에선 무자비한 황제로 등장한다. 양자경이 상반된 역할을 잘해냈다. 솔직히 황제 역은 최고였다. 


뒤늦게 노아 바움벡의 '프란시스 하'(2012)를 보다. 감독 바움벡과 주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 이후 좋은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바움벡의 최근작 '마이로위츠 스토리'는 지난해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지난해 각종 시상식에서 가장 각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바움벡하고 거윅은 지금 사귀고 있대나 어쨌대나. 


'프란시스 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다. 20대 후반의 프란시스는 현대무용가, 그의 절친인 소피는 출판 편집자다. 하지만 아직 입지가 확고하지는 않다. 프란시스는 일종의 연습단원으로 겨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상태다. 생활비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쉽지 않다. '프란시스 하'는 그래서 현대 대도시 청년 1인 가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프란시스는 소피와 함께 살기 위해 남자친구의 동거제안을 거부한다. 이를 계기로 프란시스와 남자친구는 헤어진다. 하지만 소피는 임대 계약이 끝나자 평소 동경하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 한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프란시스는 꽤 부유한 두 남자 사람 친구의 집의 방 한 칸에 자리잡지만, 그마저도 일시적이다. 무용가로서의 프란시스의 커리어는 피어날 기색이 없고, 그에 따라 프란시스의 주거 환경도 점점 열악해진다. 결국 프란시스는 오래전 떠난 대학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이곳에서 프란시스는 행사 알바로 연명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의 패러디.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 프란시스가 도심을 달려간다.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은 오른쪽으로 달려가지만, 프란시스는 왼쪽으로 달려간다는 점이 다를뿐. 바움벡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빠'임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영화 포스터로 쓰인 장면. 사실 영화에선 정말 짧게 스쳐간다. 


랜덤하우스 편집자는 왼쪽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제목인 '프란시스 하'란 프란시스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뉴욕에서 얻어낸 자기 집 우편함에 끼워 넣은 이름이다. 풀 네임은 '프란시스 할러데이'인데, 우편함의 이름 적는 곳이 부족해 종이를 접다보니 '프란시스 하'로 끝났다. 이 이름이 보여주듯 부족한 것 많은 집이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한 프란시스의 표정은 뿌듯하다. 다 적히지 않은 이름을 보여주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간다. 귀엽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엔딩이다. 


그래서 이 엔딩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청년이 집값 비싼 도심에서 자기만의 번듯한 공간을 얻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청년이 몸담고 있는 분야가 그 어느 곳보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예술 분야라면. 프란시스가 무용단의 행정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만든 안무작을 작은 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으로 주변 사람에게 격려받는 엔딩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난 비슷하게 해피엔딩이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한국영화 '4등'의 결말부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프란시스 하'가 현실과 무관한, 억지스러운 가짜 엔딩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난 '프란시스 하'가 좋았고, 때로 자기 자리에서 분투하는, 집정리를 안하고 얼렁뚱땅하고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어깨를 토닥이는 연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가 정말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재미 없지는 않지만, 기대만큼 좋지도 않은 '에이리언: 커버넌트'. 


여섯 번째 ‘에이리언’ 시리즈인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갓 깨어난 인공지능(AI)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와 그의 창조자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대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피아노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고, 차도 만들 줄 아는 데이비드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문득 묻는다. “누가 당신을 창조했습니까?” 

42세에 전설적인 SF호러영화 <에이리언>(1979)을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80)은 30여년이 흐른 뒤 <에이리언>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2012)로 돌아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우주 식민지 개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나먼 목적지로 향하던 커버넌트호는 비행 도중 사고를 당한다. 예상보다 일찍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은 목적지 대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해 보이는 근처의 또 다른 행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공포를 경험한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했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초기 시리즈로 돌아간 듯 에이리언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과 살육전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스콧은 순수한 추격전과 폭력의 쾌감을 전시하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1편 이후 3편의 후속작 <에이리언 2>(제임스 카메론·1986), <에이리언 3>(데이비드 핀처·1992), <에이리언 4>(장 피에르 주네·1997)가 더 제작됐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내가 1편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 묻듯, 스콧 역시 자신이 창조한 에이리언 세계의 시발점을 궁금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악당이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성장 배경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지만, 철창 뒤의 한니발이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무서웠다. 1편 제작 당시 <에이리언>을 소개하는 마케팅적 설명은 ‘우주의 죠스’였다. 밀폐된 우주선 안에서 에이리언과 인간은 숨막히는 생존게임을 벌였다. 그때 에이리언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었을까. 죠스가 왜 사람을 공격하는지, 죠스의 어미는 누구인지, 혹시 죠스가 핵실험에 의해 생긴 돌연변이는 아닌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AI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감정까지 표현하는 AI 데이비드, 좀 더 이성적인 AI 월터로 1인 2역을 하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이름이 배우 중 제일 처음 등장한다. 인류 최고 과학기술의 결집인 AI와 인류의 힘을 능가하는 괴생명체인 에이리언이 만나는 셈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과 미묘하게 다른 AI 패스벤더의 연기는 소름이 끼친다. 에이리언들이 인간의 육체를 갈가리 찢고, 피와 살과 뼈를 분리하는 풍경은 이 시리즈의 시각적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끔찍한 풍경이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충분히 즐길 만한 수위를 유지하는 데서는 스콧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9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아이디어라든가, 개봉시점이라든가, 괜찮았으나, 결과적으로 흥행은 미적지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하지만, 막상 선거를 치르는 후보와 참모들은 ‘꽃길’을 걷지 못한다. 선거전(選擧戰)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오늘날의 선거는 ‘전쟁’에 가깝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 개인의 목소리가 증폭되는 요즘 세상에선 선거 캠프 바깥의 유권자까지도 이 전쟁에 뛰어들곤 한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특별시민>에선 더 원색적이고 색다른 표현을 쓴다.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는 거야. 손에 똥 안 묻히고 진주 꺼낼 수 있겠어?”(변종구 캠프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

박인제 감독은 3년 전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촬영 기간은 지난해 4~8월이었다. 그땐 천하의 용한 점쟁이라도 19대 대선이 2017년 5월 치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자유당 소속 변종구(최민식)는 민선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이다. 3선에 성공하면 청와대까지 노릴 기세다. 변종구는 정치공작의 달인 심혁수(곽도원)를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해 우세를 이어나간다. 젊고 패기 있는 광고인 박경(심은경)도 기발한 캠페인으로 변종구 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판세는 혼란에 빠진다. 상대 후보인 인권변호사 출신의 다함께미래당 양진주(라미란)는 미국 유학파 ‘엄친아’인 아들 스티브 홍(이기홍)까지 불러들여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다.

이념, 돈, 복수심, 승부욕, 권력, 열정, 미신이 뒤섞인 선거전 자체가 상업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건 자연스럽다. <특별시민>을 보면, 선거 열기가 유독 뜨거운 한국에서 왜 지금까지 ‘선거영화’가 안 나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특별시민>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는 데서 시작해, 선거 결과가 나오는 데서 끝난다. 선거 이전과 이후를 거두절미한 선택은, 선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인다.




과연 <특별시민>은 선거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변수들을 재현한다. 지하철 공사장 인근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각 후보 진영은 그 책임 소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가족 문제도 불거진다. 변종구의 부인은 고가의 미술품을 샀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술품 구입 자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은 후보자는 물론 그 주변 인물에게도 고결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양진주 진영도 마찬가지다. 양진주의 아들은 미국 변호사이자 자전적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명인이지만, 그를 유세에 활용하면 후보자의 이혼 문제, 아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선거전에서 “어떤 서울을 만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진다. 변종구와 양진주는 모두 ‘승리를 위한 승리’를 추구하는 검투사들처럼 보인다. “일단 이기자”고 생각하는 이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은 공식적인 캠페인을 넘어, 도청하고 협박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검은돈을 쓴다.

다만, 선거의 다양한 변곡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절정에 오르기보다, 평평하게 나열된다는 점은 문제다.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가 해결되고, 다음 변수가 발생했다가 또 해결되는 식이다. 매회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였다면 이런 방식이 어울렸겠지만, 상영시간 130분짜리 상업영화의 호흡으로서는 능란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의 성긴 틈새를 잇는 것은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정치부 기자 정제이 역) 같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다. 정치인을 ‘악마화’하거나, 설익은 계몽주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도 <특별시민>의 장점이다.

최민식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엔딩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18일 서울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최민식은 “ ‘정치 현실도 징글징글한데 이런 시국에 또 정치영화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라며 “이 작품은 그 지겨운 데로 들어가서 끝을 보고 결론을 내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박인제 감독은 “권력욕의 상징인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의 꽃이 선거라고 생각했다”며 “영화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두렵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를 영원히 기억할 걸작으로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원작'에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풍조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새로운 필드로 들어온 한, 새로운 평가 기준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1989년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만화,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얻은 <공각기동대>는 이후 나온 많은 SF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설정은 <매트릭스>(1999) <아바타>(2009) 등에서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기획 단계부터 여러모로 기대와 우려를 받았다. 복잡하고 기묘한 원작의 세계관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어떻게 소화할지 관건이었다. 주인공 ‘메이저’ 역에 스타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됐다는 소식도 원작의 유색인 역할을 백인 배우로 대체하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을 불렀다.

인간의 영혼과 기계의 신체를 결합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미래 사회.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는 강력 범죄를 담당하는 특수부대 섹션 9을 이끈다. 섹션 9은 첨단 로봇 기술기업 한카 로보틱스를 파괴하려는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메이저는 사건의 실체에 근접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원작으로부터 30여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묻는 질문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프고 병든 사람들은 이미 신체의 많은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인체의 확장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충격 이후, 인간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원작의 정체성 질문을 주제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시각적으로 정교화했다. ‘잘하는 것을 잘하겠다’는 태도다. 빼어난 시각효과 기술력으로 인간과 기계의 기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덕분에 주인공 메이저에게서는 ‘인간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다 상처를 입으면 ‘부상’이 아니라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요한슨의 아름다운 얼굴 역시 인조 피부가 벗겨질 때 섬뜩한 느낌을 안긴다. 걸음걸이도 조금 부자연스럽고, 대사엔 웃음기가 말라있다. 크고 작게 이같은 ‘의체’를 받아들인 인물들이 많다보니, 온전한 인간으로 남은 인물들이 오히려 어색하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에게 느끼는 불쾌감을 뜻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 정도는 아닐지언정, 음산하고 기괴한 시각효과와 음악으로 인해 <공각기동대>의 미래도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쪽에 가깝다. 

로봇끼리 싸우는 모습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신물나게 봤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 기계를 이식한 인간, 기계가 얽혀 싸운다. 액션 설계가 독특하기보다는 분위기가 독특해 인상을 남긴다. 스칼렛 요한슨의 ‘백인 메이저’는 후반부에 나오는 설정 덕에 ‘화이트워싱’ 논란을 교묘히 피했다. 다만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요한슨이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메이저 역에 잘 어울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정도 규모의 액션영화를 홀로 이끌 여배우가 요한슨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29일 개봉했다.




웃긴 것 같으면서도 우울하고, 해피엔딩 같으면서도 슬픈 '토니 에드만'. 


딸은 가족 모임에서도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일중독자다. 반려견이 죽은 뒤 적적함을 느낀 아버지는 예고 없이 딸이 일하는 루마니아로 찾아간다. 

새로운 계약 체결에 사력을 다하는 중인 딸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부담스럽다. 약간의 다툼 끝에 아버지는 독일로 돌아가는 척하지만, 얼마 뒤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자아로 분해 딸의 친구 모임이나 직장 주변을 배회한다. 우스꽝스러운 틀니와 검은 더벅머리 가발을 쓴 토니 에드만은 매번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며 딸을 당황스럽게 한다.

<토니 에드만>의 줄거리를 읽으면 일에 쫓겨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고, 부녀 간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가슴 따뜻한 가족극이 연상된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아 토니 에드만의 황당한 언행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토니 에드만>은 뭉클한 가족애와 유쾌한 코미디를 통해 현대인이 되새길 만한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 만한 영화다. 할리우드가 2010년 <에브리씽 유브 갓>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였던 잭 니컬슨을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으로 컴백시키기로 한 이유도 <토니 에드만>의 보편성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꺼풀 들춰보면 <토니 에드만>은 보기보단 조금 복잡하고 비전형적인 영화다. 영화는 택배 배달부 앞에서 아버지가 벌이는 기행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배달부를 맞이한 아버지는 집 안에 동생이 있는 척하며 퇴장하고, 곧이어 토니 에드만으로 분한 아버지가 나와 택배를 받는다. 코믹하게 묘사되지 않았으면 다중인격자의 섬뜩한 기행처럼 보일 법한 상황이다.






아버지가 딸 앞에서 꾸미는 상황들도 심상치 않다. 아버지는 딸의 푸대접에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말했다가 금세 “농담이다”라고 정정하거나, 딸의 주요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딸 노릇을 대신 해줄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고 진지하게 말한다. 이런 ‘과격한’ 농담들은 토니 에드만으로 변신한 뒤 정도가 심해진다. 스스로 독일대사라고 거짓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딸의 직장 상사에게 접근해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은 착한 창녀 셴테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한 사촌 슈이타로 1인 2역을 한다는 내용의 희곡이었다. 

<토니 에드만>의 딸은 혹독한 경쟁에 내몰리다 못해 스스로를 착취하기에 이르고, 아버지는 맨정신으론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토니 에드만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불러낸다. 토니 에드만은 서구 상류층 기업인의 관습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언행으로 조금씩 상황을 반전시킨다. 

조금씩 코너로 몰리던 딸이 즉흥적으로 꾸민 누드 파티는 영화 결말부 하이라이트다. 모두를 당황시키는 이 해프닝은 딸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목표의 파괴와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

딸이 아버지의 기행을 이해하는 걸 넘어 심지어 그를 뛰어넘는 일을 벌였다는 점에서 <토니 에드만>은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채 허탈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기다리는 딸의 표정은 여러 가지 뉘앙스를 안기는 결말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며, 서구의 각종 언론들에게서 ‘올해의 영화’로 선정됐다. 여성 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했다. 16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엠마 왓슨은 지금보단 연기를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미녀와 야수'는 흥행했지만. 


‘미녀와 야수’의 모티브는 18세기 프랑스 동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흉측한 외모의 야수와 용기 있는 미녀가 차이와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다는 줄거리에는 세월을 뛰어넘는 호소력이 있다.

오는 16일 개봉하는 영화 <미녀와 야수>는 1991년 선보인 동명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리메이크다. ‘미녀와 야수’ 모티브는 수차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됐지만, 이 디즈니 애니메이션만큼 광범위한 인기를 끈 작품은 없었다. 영화 <미녀와 야수>는 원작의 인기를 계승하는 동시에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줄거리는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 어느 고성의 왕자(댄 스티븐스)는 오만한 언행 때문에 저주를 받아 야수의 외모를 갖는다. 진정한 사랑을 얻는다면 저주가 풀리지만, 문제는 무서운 외모의 야수를 사랑할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인근 마을의 젊은 여성 벨(에마 왓슨)은 야수의 성에서 꽃을 꺾으려다 붙잡힌 아버지를 대신해 야수의 포로가 된다. 벨은 차츰 야수 내면의 다정함과 지성에 끌린다.






<겨울왕국>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21세기 디즈니 영화 속 여성은 더 이상 왕자의 키스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다. <미녀와 야수>에서도 그렇다. 벨은 마을에 얼마 되지 않는 책을 빌리고 또 빌려 읽는 책벌레이며, 당나귀를 이용한 ‘세탁기’를 만든 발명가다. 벨이 야수에게 처음 반하는 계기 역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야수의 지성이었다. 벨은 핍박받는 야수를 구하기 위해 성으로 말을 달릴 때 아름다운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마을의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전쟁영웅 개스톤(루크 에반스)의 구애를 간단히 물리치는 당찬 성격도 가졌다. 개스톤이 겉으론 용맹하지만 사실 무례하고 소유욕에 사로잡힌 ‘옛날 남자’라면, 야수는 내면이 따뜻하고 지적인 현대적인 남성상을 구현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똑똑한 헤르미온이자, 스크린 밖에서는 페미니즘 관련 이슈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에마 왓슨은 ‘벨’이 되기 위한 여러 요소를 두루 갖췄다. 6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상을 통해 한국 기자들과 만난 왓슨은 “영화는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며 “여성이 동등한 사회의 일원임을 상상하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스톤의 친구인 르푸(조시 게드)가 성소수자처럼 보인다는 점도 <미녀와 야수>의 새로운 요소다. 이 때문에 미국의 일부 보수적인 지역 극장에서는 <미녀와 야수>를 상영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빌 콘돈 감독은 “<미녀와 야수>의 주제는 포용”이라고 말했다.게드 역시 “사람들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개스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야수가 마을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해 공격하려 하는데,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녀와 야수>는 한동안 거의 만들어지지 않다가 <라라 랜드>로 재조명된 뮤지컬 장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미녀와 야수>의 전반부는 <라라 랜드>의 성취가 특수한 사례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은 분명 판타지이지만, 한동안 관객은 이 판타지적 관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어두운 방에 들어갔을 때처럼,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영화는 벨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장르를 가동하지만, 왓슨과 여러 배우들의 노래와 춤은 마치 현실을 모방한 애니메이션을 다시 따라 연기한 것처럼 어색해 보인다. 벨과 야수의 본격적인 감정선이 드러나 관객을 몰입시키기까지는 그 어색함을 참아내야 한다.





'로건'은 한동안은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로 기억될 듯. 캐릭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해석이다. 그 캐릭터는 창조된 것이지만, 관객이 좋아하는 한 살아있는 생명체나 마찬가지기 때문. 






늙고 지친 표정의 사내가 있다. 주름진 피부와 희끗한 머리의 남자는 한쪽 다리를 전다. 리무진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는 어디서든 술을 찾는다. 그는 퇴행성 뇌질환에 걸린 채 휠채어에 앉아있는 90대 노인을 봉양중이다. 근사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노년의 남자들이다. 


이들은 한때 슈퍼히어로였다. 다리 저는 사내는 ‘울버린’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로건(휴 잭맨), 90대 노인은 ‘프로페서X’였던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다. 2000년 처음 나온 <엑스맨> 시리즈에서부터 이들 돌연변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도 묵묵히 제 길을 걸어왔다. 프로페서X는 박해받는 돌연변이들을 위한 영재학교의 교장으로 세상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했고, 울버린은 두려움 없이 거친 세상을 떠도는 터프가이였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자>가 ‘수정주의 서부극’인것처럼, 28일 개봉하는 <로건> 역시 ‘수정주의 슈퍼히어로영화’라 불릴만하다. <용서받지 못한자> 속 늙은 총잡이는 젊은날의 살육과 무모함을 되새기며 쓸쓸한 삶을 살아갔다. <로건>의 로건과 자비에 역시 늙고 병든 채 ‘살인의 추억’에 괴로워한다. 

로건은 돈을 모아 요트를 사서 자비에와 함께 바다로 나가 말년을 보내려 한다. 한때 강력한 두뇌를 소유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비에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쫓기는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로건에게 맡겨진다. 로건은 자신을 닮은 로라를 살리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영화 '로건'




<로건>의 공간적 배경은 멕시코 접경 지대다. 시대 배경은 2029년이라지만, <로건>이 떠올리는 장르는 고전 서부극이다.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땅, 국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는 총 든 사내들이 득실댄다. 영화 속에 직접 인용되는 서부극 <셰인>의 마지막 대사는 <로건>의 주제를 함축한다. 셰인은 다시 황야로 떠나기전 소년에게 말한다.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해. 어쩔 수 없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더군. (…) 여기선 살인을 저지른 뒤 살 수 없어. 옳든 그르든, 그건 낙인이야. 돌이킬 수 없어. 이제 가서 엄마에게 말하렴. 모든게 잘될 거라고. 이제 이 계곡에 총은 더이상 없다고.” 

셰인처럼, 홀로 거칠게 살아온 로건 역시 지나간 시대의 죄업을 짊어지기로 한다.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피에 물든 손으로 평화롭게 은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로건>은 그만큼 잔혹한 액션을 보여준다. 신체훼손의 수위가 높다. 격렬하고 육중하게 설계된 액션장면 사이로 늙은 로건의 고단함과 슬픔이 묻어난다. 

휴 잭맨은 <로건>을 마지막으로 17년간 9번 연기한 울버린 역을 떠난다. 휴 잭맨 울버린의 마지막으로서는 처연하지만, 이런 결말이야말로 처음부터 울버린에게 준비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낳고 저녁마다 텔레비전을 보는 울버린을 상상하기는 어려우니까. 

어떤 사내는 예정된 고난을 담담히 맞이한다. 운명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진짜 슈퍼히어로다. <앙코르> <3:10 투 유마>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연출했다.


음...영화를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차기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다는 단점이 생긴다. 



타자와의 접촉은 위협인 동시에 축복이다. ‘나’의 경계가 무너지는 동시, 그 경계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2일 개봉한 SF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세로로 선 거대한 조개 모양의 괴비행체(쉘)가 전세계 12개 지역에 동시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쉘은 18시간마다 한 번씩 열리고, 각국의 과학자, 군인들은 이때 쉘 안으로 들어가 다리가 7개 달린 거대한 문어 모양의 외계인 헵타포드와 접촉한다.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외계인의 언어를 알아내기 위해 나선다. 정부는 외계인이 왜 지구에 왔는지, 지구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외계인의 의도 파악이 늦어지면서, 인류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컨택트>의 원작은 최근 가장 명망있는 SF 작가로 꼽히는 테드 창의 중편 <네 인생의 이야기>다. 테드 창은 지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소설들로 유명하다. 영화 역시 원작의 사색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접촉에서 예상되는 영화 줄거리, 즉 지구 자원을 둘러싼 전투라든가 환상적인 모험은 찾기 어렵다. 영화 전반부는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음성·문자 언어를 알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특히 뿌연 유리벽에 먹물을 원형으로 뿌린 듯한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는 요령부득이다. 헵타포드의 문자가 단지 이상한 모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헵타포드의 낯선 사유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외국어에 몰입하면 사고의 방식도 그 언어를 따라 바뀐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영화 후반부 중요한 반전을 예비한다. 




그러나 지성만으로 영화를 만들 순 없다. <컨택트>의 장점은 영화의 지적 논리들로 결국 감성을 자극한다는데 있다. 루이스는 헵타포드 언어의 비밀을 알아낸 후 큰 혼란에 빠진다. 이 언어는 인류의 사유 체계는 물론, 루이스의 삶조차 통째로 뒤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루이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으로 파악하면, 이는 커다란 행운일수도 불행일수도 있다. 루이스는 이 모든 감정과 사건들을 받아들인다. 그걸 ‘운명’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사유와 논리의 도래 앞에서 ‘운명’이란 전통적인 어휘는 어딘지 낯설다. 그저 기존의 루이스가 파괴되고 새로운 루이스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광폭한 맹수나 자연 재해 아래 살아남으려 애쓰던 선사시대부터 그랬다. 새 사유 체계의 도래 앞에서 어떤 인간들은 어리석은 짓을 한다. 극중 중국 정부는 가장 먼저 외계인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다. <컨택트> 후반부는 이 어리석은 결정을 막아내기 위한 루이스의 노력을 따라간다. 익숙하지만 낡은 사유를 고집할 것인가, 낯설지만 새로운 사유를 받아들일 것인가. <컨택트>는 그런 선택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사유 체계의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컨택트>는 가족애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감정을 그린 <인터스텔라>보다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경외감을 그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닮았다. 

에이미 아담스가 루이스 역을 맡아 거대한 경이를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어려운 연기를 해냈다. 제레미 레너가 그를 돕는 물리학자 이안 역을 맡았다. <그을린 사랑>(2010),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2015)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했다. 빌뇌브는 올 하반기 최고 기대작중 하나인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준비하고 있다.



'더 킹' 시사 끝나자마자 극장 아래 스타벅스에 가서 후다닥 쓴 리뷰. 사실 이 리뷰 이후에도 '더 킹'에 대해 언급한 기획 기사를 몇 번 썼다.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예전에 자주 쓰던 말로) '징후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태수(조인성)는 목포의 시시한 건달의 아들이다. 양아치로 고교 시절을 보내던 태수는 아버지가 검사 앞에 굽실대는 모습을 본 뒤, 검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태수는 ‘서울 법대 입학→시위에 휘말려 군입대→사법시험 합격→검사 임명→마담뚜 소개로 부유한 집안의 아나운서 임상희(김아중)와 결혼’의 코스를 밟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하루 30건씩 시시한 범죄를 처리한다. 지역 유지의 아들을 성폭행범으로 잡아넣으려던 태수는 대학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제안을 받는다. 사건을 덮으면 검찰 핵심 부서로 끌어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서에는 굵직한 사건만을 맡아 처리하며 나라를 쥐고 흔드는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이 있었다. 태수는 양심에 눈감고 강식의 수하가 된다. 아울러 고향 친구이자 ‘들개파’ 2인자인 조폭 최두일(류준열)과도 친분을 쌓아간다.

설날 전주인 18일 개봉하는 <더 킹>(감독 한재림)은 검사가 주인공이자 악당인 영화다. ‘조폭 같은 검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 킹>은 <내부자들>(2015), <검사외전>(2015) 같은 흥행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범죄영화의 주인공이 경찰이 아니라 검찰이라는 점은 최근 한국영화의 특성이기도 한데, 이는 한국의 영화 창작자들이 비대한 검찰 권력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줄거리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줄곧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태수, 강식, 동철은 안동 하회탈이 대마초에 취해 웃고 있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가 난다. 세 배우의 얼굴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는 와중에도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심각한 사회비판 드라마보다는, 좀 더 코믹하고 대중적인 해학극의 위치를 점유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최고 수준의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조인성, 정우성 두 배우는 늘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일한다. 두 배우는 일부 관객이 불편을 느낄 법한 욕설, 폭력을 직접 보이지도 않는다. 조인성이 간혹 내뱉는 욕설조차 살기가 있다기보다는 귀엽게 들린다. <아수라>의 일그러진 정우성이나, <내부자들>의 성적 묘사가 못마땅했던 관객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더 킹>은 15세 관람가다.

‘진짜 힘’을 갖고 싶었던 태수는 강식을 자신의 멘토로 삼는다. 아직 일말의 양심을 버리지 못해 쭈뼛거리는 태수의 뺨을 후려치며 강식은 말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마.” 이에 대한 태수의 답, “부장님, 씨X. … 러브샷 한잔 하겠습니다!”는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명대사 후보다.

<더 킹>은 조폭, 언론과 유착한다든지,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든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과 정보를 거래한다든지 하는 검찰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검찰 개혁을 화두로 내세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게 굿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있다. 물론 영화는 이렇게 타락한 검찰이 ‘1%’라고 강조하긴 하지만, 여느 평범한 검찰 관계자가 이 영화를 본다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제작비 134억원대의 상업영화가 이런 내용을 당당하게 담고 있다는 건 검찰에 대해 가진 대중의 인상을 보여줄 뿐이다.



한재림 감독(42)의 <더 킹> 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평소 늦게 잠드는 습관이 있는 그는 아침 일찍 전해진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비몽사몽간에 전해 들으며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하루 종일 소파에 파묻혀 울었고, 이후 1주일간 우울의 늪에 빠졌다. “속 시원하게 정의를 이야기한 사람이 그들(주류 기득권층) 권력의 단단함 앞에 패배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영화 속 잘나가는 검사 한강식(정우성)의 말이 ‘그들’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 마.”

<더 킹>은 설날 연휴를 앞두고 개봉해 <공조>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개봉 13일 만에 426만 관객을 모으며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한 순진한 검사가 권력의 단맛에 빠져 ‘왕’이 되려다가 좌절하는 이야기인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 <더 킹>은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다.

“기존 한국영화들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피해자 입장에서 봤다. 답답하고 힘들고, 영화가 끝나도 감정적 해소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무너지지 않는 권력의 성벽이 궁금해졌다. 노무현 당선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시스템을 이해하자’고 생각했다.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그들의 시스템에 대응하자는 생각이었다.”

- 수양대군과 김종서 이야기를 다룬 전작 <관상>도 그렇고, 권력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조선시대부터 권력을 숭상하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런 것들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낳고 있다. 반면 그런 인식을 비트는 쾌감도 있다. 대단하면서도 하찮은 권력의 양면성에 관심이 있다.” 

- 권력을 이야기하려면 재벌, 대통령도 있을 텐데 왜 검사였나. 

“관객이 스스로 권력에 다가서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 했다. 검사는 사법고시라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순식간에 권력에 들어간다. 반면 평범한 관객이 재벌,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

<더 킹>의 핵심 장면은 펜트하우스에서의 파티다. 초임 검사 박태수(조인성)는 한강식이 주관하는 이 화려한 파티에서 초심을 버리고 권력에 투항한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태도로 순간을 즐긴다. 파티가 끝날 무렵엔 어디선가 불어온 깃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영화 분위기는 의외로 무겁다기보다는 코믹하다. 

“펜트하우스냐 룸살롱이냐 선택해야 했다. 후자는 혐오스럽고 거리감이 느껴지니, 전자로 가서 재미있고 경쾌하게 만들려 했다. 깃털처럼 화려하지만 금세 가라앉고 이후엔 쓰레기가 되는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 정우성, 조인성이 검사라니, 외모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조인성에게 역할을 제안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어 안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흔쾌히 응했다. 박태수는 한강식처럼 되고 싶어 한다. 한강식은 누가 봐도 ‘폼’이 나야 했다. 이런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천박하게 놀 때 그 아이러니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정우성이 ‘딱’이었다.”

- 박태수의 삶은 노무현과 겹친다. 별 볼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한때 권력의 맛을 본다. 그러다깨달은 바 있어 정치에 투신한다. 노무현이 서거한 날 박태수가 무너지고, 노무현 지역구였던 종로에 박태수도 출마한다. 

“노무현을 생각하면서 박태수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다.”

- 관객에게 말을 걸면서 끝나는 결말이 ‘낯간지럽다’는 말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바로 ‘우리한테 힘이 있다’는 그 말이다. ‘닭살’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다.”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영화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난 이 영화가 좋았다. 



새해 벽두부터 <여교사>를 본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만하다. 건조하고 단순한 영화 제목은 격렬하고 음험한 감정, 사건을 숨기고 있다.

효주(김하늘)는 사립고등학교의 계약직 과학 교사다. 불안정한 일자리, 무능하고 뻔뻔한 남자친구(이희준) 때문에 효주는 늘 피로하고 짜증이 난 상태다. 어느 날 이사장의 딸인 혜영(유인영)이 과학 정교사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다. 효주는 학교 후배였다면서 살갑게 구는 혜영이 못마땅해 쌀쌀맞게 대한다. 효주는 임시 담임을 맡은 반의 무용 특기생 재하(이원근)와 혜영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를 빌미로 효주는 혜영을 위협한다. 효주 역시 재하에게 조금씩 끌린다.


영화 대부분은 사립고등학교라는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공간에서 진행된다. 효주는 학생들에게 위압적으로 구는 교사지만, 임신·출산을 하거나 교장·교감의 지시에 싫은 기색을 보이면 언제라도 교사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는 처지다. 그런 효주에게 정교사 자리는 삶의 불안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그 자리는 혜영에게 간단히 돌아간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고 어딘가 화난 표정의 효주는 애초 젊고 예쁘고 상냥하고 부유한 혜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아마 혜영은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은 사람이 아니겠지만, 효주에겐 혜영의 존재 자체가 악의다. 세상이, 그리고 그런 세상을 반영한 <여교사>가 잔인한 이유는 효주가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잠겨드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효주가 마음을 다스려 조직과 자신 중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결과를 이끌어낸다거나, 불평등한 사회에 통쾌하게 복수하거나, 그도 아니면 숭고하게 희생해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다면 차라리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교사>는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여교사>는 매우 극적이되 많은 관객이 기대하거나 원치도 않은 방식의 파국을 연출한다. 마치 ‘이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인물의 감정과 사건을 그곳으로 몰고 간다. 

김태용 감독은 2014년 <거인>으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등을 수상한 신예다. <여교사>는 인간의 감정을 탐구할 때, 여느 창작자라면 멈출 법한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영화다. 이는 즐겁지만 또 괴로운 일이기에, <여교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하늘은 여러 영화, 드라마에서 달콤 쌉싸래한 멜로 주인공으로서의 강점을 보여온 배우지만, <여교사>에선 이전에 본 적 없는 서늘하고 냉소적인 표정을 보여준다. 김하늘 이미지의 대비가 <여교사>를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든다. <베테랑> <부당거래> 등 대규모 흥행작을 만들어온 강혜정·류승완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이 제작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4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얼마전 방한한 '너의 이름은.'의 프로듀서 가와무라 겐키에 따르면, 신카이 마코토는 지브리 같은 대형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작업해온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에 가깝다고 함.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도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기대는 꾸준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도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작품성이나 대중성의 어느 한 측면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보이며 후보군에서 탈락하곤 했다. 

신카이 마코토(43)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과 이를 감싸는 서정성으로 인정받아왔다. <초속 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 등은 각종 애니메이션 상을 휩쓸며 신카이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그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불릴 만큼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진 못한 상태였다. 

최근작 <너의 이름은.>은 다르다. 일본에서 지난 8월 개봉해 지난주까지 관객 1640만명, 흥행수익 213억엔(약 2189억원)을 돌파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은 역대 일본 영화 흥행 2위 기록이다. 

미츠하는 카페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의 여고생이다. 따분한 마을 분위기, 일본 전통의 신사 의식을 치러야 하는 가업 때문에 늘 답답한 상태다. 어느 날 미츠하는 도쿄의 남고생 다키가 된 꿈을 꾼다. 다키 역시 난생처음 본 시골 마을의 여고생 미츠하가 된 꿈을 꾼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둘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일주일에 2~3일 정도 몸이 뒤바뀌는 현상임을 알게 된다. 둘은 스마트폰의 일기를 통해 서로에게 전할 말들을 남긴다. 1000년 만에 한 번 나타나는 혜성이 점차 지구로 다가오고, 몸이 뒤바뀌는 현상은 갑자기 멈춘다. 다키는 미츠하를 직접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너의 이름은.>의 초반부는 전형적인 일본 청춘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띤다. 밝고 명랑하고 코믹하다. 그러면서도 전통의 무게에 짓눌린 청춘, 자유로워 보이지만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한 청춘의 고민도 살핀다. 미츠하의 몸에 들어온 다키는 활발한 체육 활동을 통해 남성성을 드러내고, 또래 아이들은 이에 반한다. 다키의 몸에 들어간 미츠하는 함께 일하는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상대의 환심을 산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로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러한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드러낸다. 

그러나 중반부 이후 <너의 이름은.>은 급격히 얼굴을 바꾼다. 예기치 못한 설정상의 반전이 일어나고, 분위기는 어둡고 급박해진다. 임박한 재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작은 희망을 찾으려는 인물들의 모습에선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가 읽힌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은 사건들을 겪은 한국 관객들도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전개에 무감할 수 없다. 

<너의 이름은.>은 대중성에 더해, 그 안에 담긴 생각의 깊이와 상상력, 표현력 역시 만만치 않다. 신카이 마코토는 “지금까지의 작품은 제 생각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기 바빴다”며 “(<너의 이름은.>은) 우선은 ‘재미’를 위해 여러 요소를 쌓아 올리고 겹친 작품”이라고 말했다. 오랜 수련 끝에 세상에 나온 고수를 본 느낌이다.



처음 10분을 그냥 멍하니 쳐다봄. 


때론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혁신적이다. 위대한 전통을 가진 문화권은 그래서 강하다.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위대한 전통은 할리우드에 있다. 할리우드는 때로 지지부진하거나 비틀거리지만, 금세 기력을 회복해 새로운 영화들을 쏟아낸다. <라라 랜드>는 195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21세기 관객들의 눈과 귀를 매혹시킨다. ‘황홀하다’ ‘마법 같다’는 표현은 이런 영화를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

꿈을 품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로스앤젤레스.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는 스튜디오 내의 카페에서 일하며 수시로 오디션을 보지만 매번 낙담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시류에 맞지 않는 1950~1960년대풍 프리 재즈를 좋아하는 탓에 별 볼 일 없는 연주 경력을 이어간다. 

우연히 만난 미아와 세바스찬은 사랑에 빠지고,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 미아는 그저 그런 오디션에 응하기를 그만두고 스스로 대본을 쓴 1인극 무대를 준비한다. 생계를 고민하던 세바스찬은 학창 시절 라이벌이자 대중적인 재즈 음악을 추구하는 키이스(존 레전드)의 밴드에 들어간다.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줄거리인데다가 별다른 반전도 없다. 이렇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는 현대적으로 활용된 뮤지컬 테크닉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다. <라라 랜드>는 꽉 막힌 고속도로 위 차량 속 승객들이 갑작스럽게 노래하고 춤을 추는 5분간의 롱테이크 오프닝부터 관객의 혼을 뺀다. 이 한 장면을 위해 배우들은 3개월을 리허설했고, 실제 고속도로에서 단 한 차례의 촬영으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춘다. 전문 가수처럼 뛰어나진 않지만 인물의 감성을 전하기에는 충분히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 석양 무렵의 로스앤젤레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두 남녀가 함께 추는 탭댄스 역시 6분간의 롱테이크로 완성됐다. 빼어난 피아니스트가 돼야 했던 라이언 고슬링은 몇 달간의 혹독한 연습 끝에 모든 연주를 실제로 해냈다. 눈을 현혹하는 현란한 편집 기술 대신, 오직 다채롭게 몸을 쓸 줄 아는 배우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할 말을 다한다.






<라라 랜드>에서 사용된 테크닉은 매우 고전적이다. 2.55:1이라는 화면 비율은 텔레비전에 대응하기 위한 1950년대 할리우드 기술 혁신의 산물이다. 그리피스 공원 천문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두 남녀 배우는 와이어에 매달려 별을 배경으로 날아오른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유치하고 촌스럽기는커녕 최면에 걸린 듯 아름답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대안적 연애담을 상상하는 종반부의 한 장면은 시간을 자유롭게 응축하거나 확장하는 영화 매체 고유의 장점을 영리하게 사용한 대목이다. <이유 없는 반항> <사랑은 비를 타고> <쉘부르의 우산> 같은 고전의 영향력도 확인할 수 있다.

눈과 귀가 행복해지는 영화지만,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사람들을 그리는 영화는 아니다. 거대한 벽처럼 가로막힌 현실 앞의 절망, 인생의 다음 단계로 발을 디딜 때 필요한 용기와 지혜, 아름답지만 쓸쓸한 젊은 날 사랑의 추억은 많은 관객이 공감할 만한 모티브들이다. 

이렇게 감정과 기술을 능숙하게 다룬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올해 불과 31세다. 전작 <위플래쉬>로 주목받은 그는 <라라 랜드>를 통해 미래의 할리우드를 이끌 만한 확실한 재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라라 랜드>의 제작비는 2000만달러로 추정되는데, 이는 <위플래쉬> 제작비의 10배다. <라라 랜드>는 일찌감치 내년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라라 랜드>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엠마 스톤은 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7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며, 아이맥스 버전으로도 볼 수 있다. 12세 관람가.




인터뷰를 보니, 감독은 이 영화의 전형성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그 목적은 일정 부분 달성됐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무서웠으니까. 



재난영화인 줄 알았는데 공포영화다. 어쩌면 ‘한국의 원자력발전 정책 비판’이라는 뚜렷한 목적의 프로파간다 영화다.

총제작비 150억원대가 투입된 한국 영화 <판도라>가 29일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경남 어느 지역을 연상시키는 40년 된 원전 소재지가 배경이다.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가져다 준 얼마간의 일거리에 반색하면서도, 노후한 원전의 안전성이 늘 불안하다. 원전 노동자들은 출근할 때마다 원전 폐쇄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힘겹게 뚫어야 하는 상황이다. 어느 날 이 지역에 예기치 못한 지진이 발생한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원전이 극도로 불안해진다. 원전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전이 폭발해 방사능이 누출된다. 주변 주민은 물론 전국이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 역시 거대한 재난 앞에 무기력할 뿐이다.

<판도라>가 마스크 쓴 살인마, 좀비, 유령이 출몰하는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러운 이유는,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의 가능성이 매우 높지는 않겠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역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박정우 감독은 시사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영화 배경은 90%가 현실적이고, 사고 이후 벌어지는 상황, 양태는 최대한 과학적·논리적 틀 안에서 구현했다”고 말했다.






지진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면, 원전 재앙을 키우는 것은 인간이다. 정부는 전문성이 전혀 없는 ‘낙하산’ 인사를 소장으로 앉히고, ‘예스맨’들을 간부로 기용한다. 오히려 원전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한직으로 발령낸다. 사고 수습도 엉망이다. 

대통령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실세 국무총리는 “국가 경제”라는 명목으로 사고를 덮으려고만 든다. 주민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거나, 사건을 보도하려는 언론을 ‘유언비어’ 운운하며 통제하려는 건 최근 한국 재난영화 속에서 자주 묘사된 정부의 모습 그대로다. 

<해운대> <터널> 같은 재난영화와 달리, <판도라>에는 유머가 거의 없다. 지진이 일어나는 20여분쯤부터 끝날 때까지 원전 사고와 그에 이어지는 전국적인 패닉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상영시간 136분의 상업영화로서는 모험적인 일이지만, 제작진은 무능한 정부 대신 직접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뛰어든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묘사로 영화에 온기를 남기려 한다. 가족애라는 감정으로 끈끈함을 더하는 건 대부분의 한국형 재난영화가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따져보면 <판도라>에 새로운 건 ‘원전 재난’이라는 소재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컨트롤타워,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소시민 영웅들,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보여주는 우정과 사랑 등은 모두 익숙한 요소들이다. 길고 감상적인 음악과 함께 관객의 누선을 자극하는 방식 역시 새롭지 않다. 말하자면 <판도라>는 ‘공식’에 충실한 영화다.

영화가 끝나면 “한국은 원전 밀집도 1위 국가”라는 내용의 자막이 흘러나온다. 한국이 원전을 폐쇄하기는커녕 신규 원전을 짓고 있다는 사실도 친절히 알려준다. 극중 인물들도 원전의 위험성을 어색할 정도로 상세히 설명한다. 제작진은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안전한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클리셰와 설명은 감수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김남길, 정진영이 원전 직원을 연기하고, 김명민이 대통령 역으로 특별출연한다. 12세 관람가.




배우, 감독, 가끔 제작자 인터뷰를 하지만 그외 영화인 인터뷰를 할 일은 많지 않다. 포스터 디자이너를 만나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책도 그렇고 인터뷰도 흥미로웠다. 



한 편의 영화를 가장 먼저 세상에 소개하는 이미지는 뭘까. 영화 속 영상의 일부도, 배우의 스틸 사진도 아닌 영화 포스터다. 많은 경우 포스터 디자이너는 영화가 전혀 촬영되지 않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포스터 디자인을 구상한다. 포스터는 영화와 대중을 최전선에서 연결하는 이미지다.미지 원본보기
이관용 스푸트닉 대표(44)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에서 시작해 <범죄와의 전쟁> <명량> <터널> 등 300여편의 포스터를 만든 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터 아트디렉터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포스터 51컷과 그 뒷얘기를 소개한 <디스 이즈 필름 포스터>(리더스북)를 최근 펴냈다. 책과 인터뷰를 통해 영화 포스터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것들을 알아봤다.

■왜 영화의 공식 포스터는 티저·해외용 포스터보다 촌스러운가지 원본보기
“당연하다. 티저 포스터(공식 포스터에 앞서 만드는 포스터)는 영화의 내용을 충실히 담기보다는 시각적인 충격을 줘 관심을 끄는 게 목적이다. 해외용 포스터 역시 상업적인 기능보다는 디자인 요소를 강조한다. 해외용 포스터에는 한국 배우의 사진을 잘 담아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어차피 한국 배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보다는 스토리, 장르 같은 영화의 본질에 충실하게 만든다. 포스터에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배우의 얼굴이 없으니 공간에 여백이 생기고 화면 구성을 세련되게 할 수 있다. 다만 배우 사진을 이용한 포스터에도 굉장한 디자인적 노력이 필요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배우 사진을 크게 쓰는 할리우드 포스터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엔 조금 달라졌다. 그때보다 할리우드 영화가 발전하면서 포스터도 세련돼졌다. 영화의 정보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에는 할리우드 포스터만 한 것이 없다. 요즘엔 한국 포스터들도 정보와 디자인적 감각을 접목한 할리우드 포스터를 따라하는 추세다.”


■어떻게 영화를 찍기도 전에 포스터를 만드나

"포스터 디자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콘셉트와 내용을 정하는 ‘아이데이션’이다. 아무리 훌륭한 표현 기법과 형식을 갖췄더라도 새롭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없는 포스터는 좋은 포스터가 될 수 없다. 시나리오에서 인상 깊었던 지문과 대사를 뽑아내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현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사진으로 단초를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차>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작나비를 씨앗 삼아 이미지를 연상했다. <화이>는 화분 속에 감춰져 납치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 소년의 다리에 식물 뿌리를 합친 시나리오 표지를 디자인했다. 디자이너로서 문학적 메타포에서 출발하는 포스터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의 포스터를 참고하는 게 위험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했다가는 바로 악플이 달린다. ‘인류의 미술문화유산을 활용하자’는 편이다. 렘브란트, 카라바조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참조한다.”






■포스터 만들기 좋은 장르가 따로 있나

“가장 실험적인 영화 포스터가 만들어지는 장르는 공포 영화다. 공포 영화의 경우 영화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포스터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때는 연무로 가득한 강의실 칠판 위에 형광등 두 개를 조명 삼아 찍었다. 화면은 거칠고 배우들의 얼굴도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배우의 얼굴보다는 포스터 전체의 분위기와 디자이너가 뽑은 의미심장한 상징이 도드라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어둠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건 포스터 디자이너들에게는 대단한 자유다.”



■관객, 제작자, 투자자의 요구가 모두 다를 때 어떻게 조율하나

“포스터가 공개되면 영화 사이트에선 이런저런 댓글이 달리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일반 관객과 영화팬의 취향은 다르기 때문이다. 기준이 되는 건 일단 일반 관객이다. 분명한 건 포스터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구현하는 ‘클라이언트 잡’이라는 점이다. 요즘엔 디자이너들도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며 현대미술로서의 욕망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스터를 만들 때는 사회적 요구, 개인적 욕구를 제쳐두고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는 상품을 내놓는 것이 디자이너의 사명이다. 내 생각에 더 좋은 시안이 있다 하더라도, 채택되지 않으면 그럴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워너가 향후 먹거리를 장만한듯. 에디 레드메인의 오타쿠스러운 해석이 흥미로웠다. 


외로운 고아 소년이 선량하고 강인한 마법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해리 포터’ 시리즈는 소설, 영화로 나오며 지난 20년간 가장 사랑받은 대중문화 콘텐츠였다. 소년·소녀들은 해리 포터의 성장담에서 어떻게 좋은 친구를 사귀는지, 두려움과 악을 이기는 용기는 어떻게 얻는지, 꿈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은 성인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기에, 많은 성인 독자와 관객도 당당하게 해리 포터의 팬을 자처했다.

해리 포터가 강력한 악당 볼드모트를 무찌르면서 장대한 소설과 영화는 모두 끝났다. 그러나 해리 포터 세계관의 매력은 빛바래지 않았다. 눈치 빠른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이를 놓칠 리 없다. 영화판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제작한 워너브러더스는 이 영화의 스핀 오프 시리즈를 기획했다. 소설 원작자인 J K 롤링도 흔쾌히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신비한 동물사전>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사용된 한 교과서에서 제목을 따왔다. 롤링은 팬들을 위한 보너스 형식으로 실제 이런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는데, 책은 말 그대로 신비한 동물을 항목별로 정리한 사전 형식이었다. 그러므로 <신비한 동물사전>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하되, 줄거리는 영화를 위해 완전히 새로 창작된 셈이다.

1926년, 악한 마법사 그린델왈드가 유럽에서 큰 테러를 저지른 뒤 종적을 감춘다. 미국의 마법 세계는 테러의 공포, 인간들에게 발각될 위험에 크게 긴장한 상태다. 영국 마법사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가 의문의 가방을 든 채 뉴욕에 도착한다. 뉴트는 세계를 여행하며 신비한 동물을 구조해 가방 속에서 보살피고 있다. 동물 몇 마리가 가방 속에서 탈출해 뉴욕은 더욱 큰 혼란에 빠진다. 미국 마법 의회의 안보 책임자인 그레이브스(콜린 파렐)는 허가 없이 동물을 들여온 뉴트를 체포한다. 뉴트는 영문을 모르는 인간 제이콥, 마법사 자매인 티나와 퀴니의 도움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신비한 동물사전>은 남은 해리 포터 팬들의 푼돈을 긁어모으기 위한 억지 프로젝트는 아닐까. 의구심은 초반 10분 만에 사라진다. 오프닝에서는 ‘예언자 일보’가 마법 세계에 드리운 테러의 공포를 전한다. 인간은 인간대로 낯선 자들을 경계한다. 영화 배경은 1920년대지만, 서구 세계의 테러리즘 공포, 무슬림 등 낯선 자들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현실의 어두움을 환기시키자마자 재빨리 아기자기한 마법 세계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뉴트의 가방 속에서 도망친 신비한 동물들이 뉴욕에서 펼치는 소동이 그 핵심이다. 오리너구리를 닮은 ‘니플러’는 보석이나 동전같이 반짝이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장난꾸러기다. 작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보우트러클’은 뉴트의 옷깃 속에 숨어있다가 결정적인 활약을 펼친다. 날개 달린 뱀처럼 생긴 ‘오캐미’의 알은 은으로 돼 인기가 많다. 신화적 상상력과 대중문화적 재미를 갖춘 동물들이 스크린을 마음껏 활보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장점은 정의. 우정, 박애 같은 보편적 가치를 원대하면서 흥미로운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데 있었다. <신비한 동물사전>도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세계 사회에서 관용, 공존 같은 가치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이지만, 때마침 나온 <신비한 동물사전>은 이에 대한 대중문화계의 반격처럼 느껴진다. 어떤 가치는 너무나 깨지기 쉬워 때론 지키기 힘들지만,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순간이 있음을 <신비한 동물사전>은 말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등장인물인 덤블도어, 레스트랭 같은 이름을 언급하면서 향후 시리즈 전개에 대한 ‘떡밥’을 던진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영국 출신 명우들의 향연과 같았는데, <신비한 동물사전>도 비슷하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에디 레드메인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콜린 파렐 정도를 제외하면 캐서린 워터슨, 앨리슨 수돌, 댄 포글러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들이 주요 배역으로 출연하지만, 캐릭터 구현 능력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 없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 2> 등 마지막 4편의 ‘해리 포터’를 연출한 데이비드 예이츠가 감독했다. 워너 브러더스는 앞으로 2년에 한 편씩, 총 5편의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향후 10년간 먹고살 양식을 발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초창기부터 마법같이 대중을 홀리는 볼거리였다. <신비한 동물사전>은 아름다운 극장 안 마법 세계와 어두운 극장 밖 현실 세계를 매혹적으로 뒤섞는 데 성공했다. 16일 개봉한다.



오아시스 2집 같은 음반을 내기 위해선 그저 무언가 타고나야 한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996년 8월 10, 11일 영국 넵워스에서는 25만명의 관객이 운집한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 예매를 시도한 사람만 260만명이었다. 공연의 주인공은 1990년대 영국 최고의 밴드 오아시스였다. 

오아시스가 정식 데뷔 싱글 ‘슈퍼소닉’을 발매한 건 1994년 4월이었다. 오아시스가 영국을 넘어 90년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밴드로 자리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년여에 불과했던 셈이다. 24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슈퍼소닉>(감독 맷 화이트크로스)은 오아시스가 전설적인 넵워스 공연을 치르기까지 겪었던 짧지만 격렬했던 사건들을 그렸다. 

영화 시작부터 ‘f’로 시작되는 욕설이 섞인 대화들이 들려온다. 오아시스의 핵심인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노엘 갤러거와 그의 5살 연하 동생인 보컬리스트 리암 갤러거의 말들이다. 갤러거 형제는 오아시스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맨체스터의 중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형제는 밴드를 결성해 지역의 소규모 클럽들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같은 연습실을 사용하던 밴드를 따라 글래스고에서 열린 페스티벌 무대에 어부지리로 오르게 됐고, 공연 이후 음반사 관계자의 눈에 들어 음반 발매 계약을 맺었다. 

갤러거 형제는 오만한 언변으로 유명하다. <슈퍼소닉>을 보면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엘은 어느날 집에서 홀로 곡을 써 다음날 밴드 멤버에게 들려줬는데, “니가 쓴 거 아니잖아”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무명 밴드의 작곡가가 썼다고 보기엔 너무나 좋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 곡이 ‘리브 포에버’였다. 녹음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은 어느 새벽에 멤버들은 야식이나 먹자며 중국음식을 사왔다. 노엘은 그 짧은 틈을 타 곡을 썼는데, 그 노래가 ‘슈퍼소닉’이었다. 데뷔 음반인 ‘데피니틀리 메이비’ 녹음 과정에서도 멤버들은 매일 술을 마시고 마약에 취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였는데, 그러면서도 매일 1곡씩 녹음을 마쳤다. 때로 그들에겐 음악보다 축구 경기 관람이 더 중요한 일과처럼 비춰질 정도였다. 노엘은 쟁여두기라도 한듯 곡을 내놨고, 리암은 어렵지 않게 노래했다. 

음반이 나온 뒤 모든 것이 변했다. 언론에선 중산층 출신의 밴드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결 구도를 만들기도 했지만, 대중적 영향력 면에선 누구도 오아시스를 따를 수 없었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은 씁쓸했다. 갤러거 형제의 불화는 늘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형제간의 소소한 다툼 정도가 아니라, 밴드 유지가 위태로울 정도의 싸움이었다. 밴드 내부의 갈등과 갑작스러운 성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다른 멤버들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공연 직전 갑자기 밴드를 그만두겠다며 나가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리암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말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몇 번 동생을 대신해 노래하던 노엘은 아예 보컬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사이가 나빴던 형제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영광의 기간은 짧았다. 오아시스는 94, 95년의 1, 2집 이후 이처럼 좋은 음반을 내지 못했다. 노엘의 창작력이 쇠한 것인지, 밴드 내부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린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지”같은 말들을 하던 형제는 근근히 오아시스의 명맥을 이어가다가 2009년 공식 해체했다. 

<슈퍼소닉>은 한 영국 밴드가 누린 영광을 그리지만, 감상의 느낌은 쓸쓸하다. 인생에서 반짝이는 순간은 매우 짧으며, 여생은 그 순간을 되새기며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와 함께 '강동원'이 장르가 됐다는 주장은 사라지게 됐다. 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지만, 관객이 강동원의 존재에도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이 조금은 짐작된다. 그거 나중에. 


엄마를 사고로 잃은 수린(신은수)은 새아빠(김희원)를 따라 화노도로 이사온다. 외로운 수린은 유체이탈, 귀신소환 같은 자신만의 놀이에 빠져 있다. 고아 소년 성민(이효제)은 수린에게 조금씩 다가서고, 외로웠던 소녀와 소년은 곧 친구가 된다. 

어느 날 성민과 또래 친구들은 공사장 발파 현장을 구경하겠다고 나서고, 이를 발견한 수린도 소년들을 따라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발견한 의문의 동굴 속에서 신비하게 빛나는 돌을 줍는다. 수린이 동굴에 떨어뜨린 머리핀을 주우러 갔다 돌아온 사이, 소년들은 모두 사라진다. 경찰은 유괴 등의 가능성을 두고 수사에 나선다. 

며칠 뒤, 홀로 돌아온 수린 앞에 자신이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성인 남자(강동원)가 나타난다. 남자는 수린에게 자신이 ‘가려진 시간’에 갇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한다.

<가려진 시간>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태연하게 풀어내는 영화다. 아이들이 ‘요괴알’을 깨트렸다가 시간의 간극 사이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영화 속에서도 대부분의 어른들이 믿지 않는다. 

혹시 이 모든 이야기는 소아성애 성향이 있는 유괴범이 꾸며낸 거짓말이고,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 외로운 소녀는 그 거짓말을 쉽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영화는 청소년정신과 의사가 수린을 상담하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가려진 시간’ 이야기에서 살짝 거리를 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감정이다. 수린은 어머니를 잃었고, 새아빠와는 친해지지도 못했고,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도 은근한 따돌림을 받는다. 그렇게 홀로 남은 수린이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성민은 수린에게 먼저 다가온 단 한 명의 타인이었다. 얼핏 티없이 자란 듯 보이지만, 성민 역시 다섯 살에 친부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였다. 넓은 세상에서 고립된 소녀와 소년은 둘만의 암호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간다.

진실은 다수결이 아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아도, 두 아이는 ‘가려진 시간’의 진실을 믿는다. 소수의 진실이라도 진실일 수 있음을, 그 진실을 공유할 수 있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가려진 시간>은 말한다. 

<가려진 시간>으로 상업영화계에 데뷔한 엄태화 감독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세련된 감각으로 풀어냈다. 신인답게 독특하고 참신한 소재를, 신인이 아닌 듯 능숙하게 소화했다. 

강동원은 영화가 3분의 1쯤 지난 시점에서 후드티로 산발을 감춘 채 등장한다. <검사외전>의 코믹함을 버린 채, 겁먹고 순수한 소년 연기를 한다. 12세 관람가. 




미국의 창작자들에게 웨스턴은 영원한 영감의 원천인 것 같다. 한국 창작자들에게 조선 후기나 구한말이 그런 것처럼. 


가본 적도 없는 낯선 곳에 순식간에 다녀온 듯한 경험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다. 11월 3일 개봉하는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를 보는 관객은 103분 동안 황량하고 건조한 미국 텍사스를 헤매고 온 듯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입 안에서 버석버석한 흙먼지가 씹히는 느낌이다. 

빚더미에 앉은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범죄 이력이 많은 형 태너(벤 포스터)와 함께 텍사스의 작은 은행들을 돌며 강도 행각을 벌인다.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이 은행에 차압당할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형사 해밀턴(제프 브리지스)과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의 파트너 질베르토(길 버밍햄)는 형제 강도단의 뒤를 좇는다. 

메마르고 뜨겁고 누르스름한 대지 위의 범죄자들은 병맥주를 물처럼 들이마신 뒤 운전하고 은행을 털고 도주한다. 경찰들도 ‘과학수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강도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 은행 앞의 오래된 바에 앉아 마냥 기다릴 뿐이다. 이곳엔 시민들도 범상치 않다. 총기 소지의 자유를 사랑하는 텍사스 남자들은 범죄자가 들이닥치자 숨기는커녕 저마다 바지춤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저항한다. 카메라는 거대한 땅덩이 위 드문드문 점처럼 늘어선 건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행동을 무심하게 잡아낸다.




미국 영화사 초기부터 존재한 서부극은 미국 건국사를 영화적으로 다시 쓰려는 욕망의 일환이었다. 현대적 서부극이라 할 수 있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오늘날 미국의 상황을 담담하게 포착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화들이 자주 표현하듯, 은행은 날강도로 변해 서민의 재산을 강탈하려 든다. 여느 텍사스 남자들이 총을 들고 스스로를 지키듯, 형제의 강도 행각도 남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자구행위에 가깝다. 옛날의 서부극에서도 한줌의 의무감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외로운 보안관이 있었는데,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도 그렇다. 딱히 정의롭거나 명민하지 않아 보이는 경찰들이지만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해내기 위해 묵묵히 범죄자들을 좇는다.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던 경찰들은 범죄의 냄새가 가까워지면 맹수처럼 재빠르게 달려든다. 미국 건국 초기의 서부가 그러하듯, 21세기의 텍사스도 각자도생의 세상인 것 같다. 

<영 아담>, <할람 포>의 데이비드 맥켄지가 연출했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테일러 쉐리던이 각본을 썼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진출작이다.




마블 슈퍼히어로에 조금 싫증이 나는 느낌이었는데, '닥터 스트레인지'로 약간 생명 연장한 것 같다. 



슈퍼히어로물은 어디까지 진화할까. 유전적 돌연변이(엑스맨),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갑부(아이언맨, 배트맨), 외계인(슈퍼맨), 신(토르)에 좀도둑(앤트맨)까지 나왔으니, 더 나올 것이 있나 싶다. 그렇게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나오는 사이, 관객들이 조금씩 피로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24일 시사회를 통해 국내에 처음 공개된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유명한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이다. 결과적으로 <닥터 스트레인지>는 조금씩 시드는 조짐이 있던 슈퍼히어로 장르의 활력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고, 향후 나올 또 다른 <어벤져스> 시리즈와의 연결고리도 확보했다. 

신경외과 의사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탁월한 실력을 가졌지만 다소 오만한 인물이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채 고급 자동차를 운전하던 그는 운전 부주의로 큰 사고를 당한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위험하고 정밀한 수술을 거침없이 해내던 손은 망가져버렸다. 스트레인지는 재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네팔의 신비로운 사원 카마르 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곳에서 스승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턴)을 만난 스트레인지는 특별한 능력을 전해받는다. 스트레인지는 스승을 도와 세상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악당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를 막아내야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미국 현지에서 예고편 개봉 시점부터 논란이 있었다. 1960년대 원작 만화에선 아시아계로 설정된 에인션트 원을 영화 속에선 영국 출신 백인 여배우 틸다 스윈턴이 맡았기 때문이다. 이는 할리우드에서 유색인종 배역을 줄이는 표백(화이트워싱) 문제와 맞물려 반발을 샀다. 공개된 영화는 ‘동양의 신비’에 대한 서양식 고정관념에 적절히 기대면서도, 이에 매몰되지는 않는 영리한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식 의학기술, 이성, 물질주의의 신봉자인 스트레인지는 삶의 막바지에 몰린 끝에 동양의 대안적 가치를 찾아나서지만, 이를 선뜻 받아들이진 못한다. 에인션트 원이 내미는 동양의학 서적은 선물가게의 기념품 취급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경험은 환각물질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에인션트 원의 압도적인 능력 앞에 결국 무릎 꿇은 스트레인지는 제자가 되길 자처한다. 




그렇다고 스트레인지가 갑자기 교주 행세를 하는 건 아니다. 이성과 추론을 통한 서구식 회의주의를 간직한 그는 카마르 타지의 오랜 규율을 가볍게 어기는가 하면, 스승의 무오류, 절대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근대 아시아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이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면, 스트레인지는 ‘서도동기’를 따른다. 

영화의 분위기도 이 같은 방법론을 뒷받침한다. 고대의 엄숙하고 신비로운 사원 카마르 타지에선 적재적소의 서구식 유머가 터진다. 예고편에서도 공개된 ‘와이파이 유머’가 대표적이다. 에인션트 원의 또 다른 제자 모르도가 스트레인지에게 기괴한 문자 쪽지를 전해준다. 스트레인지가 마법 주문이냐고 묻자, 모르도는 “와이파이 비번이야”라고 답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본분에 걸맞게 탁월한 시각적 쾌감도 제공한다. 뉴욕, 런던, 홍콩의 혼잡한 도심 속 거리, 마천루들이 수직, 수평으로 쪼개지고 생성되는 모습은 이전 슈퍼히어로 영화에선 보지 못한 풍경이다. 배트맨, 아이언맨, 헐크가 제아무리 장쾌한 액션을 선보였다 한들, 이 액션은 단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것들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간과 공간을 재치있게 뒤섞음으로써 슈퍼히어로 영화 액션의 범위를 한 뼘 넓혔다. 

제아무리 기묘한 시각효과를 쓴다 해도, 영화의 중심엔 스타로서의 광휘를 뽐내는 배우가 있어야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자(컴버배치),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미켈슨),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스윈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레이첼 맥애덤스) 등 연기력과 스타성을 두루 갖춘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특히 텔레비전 시리즈 <셜록>으로 공전의 인기를 얻은 컴버배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첫 주연을 맡아 연착륙에 성공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2018년 공개 예정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합류할 예정이다. 컴버배치의 개성있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또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어떤 화학작용을 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