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7월 말에 내한한다고.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54)는 국내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가장 힘센 이름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4만명)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고레에다의 팬층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12만명),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10만명)를 통해 확고해졌다. 이는 가와세 나오미, 구로사와 기요시 등 동시대의 유명 일본 감독들이 가지지 못한 팬덤이다.21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제작된 고레에다의 데뷔작과 최신작이 나란히 선보인다. 지난 7일 개봉한 <환상의 빛>(1995)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던 고레에다가 처음으로 연출한 장편 극영화다. 그동안 영화제에서만 몇 차례 상영됐던 <환상의 빛>은 이번에 처음으로 정식 개봉됐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11번째 장편 <태풍이 지나가고>는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다. 영화의 스타일은 조금 달라졌지만, 두 영화엔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과거에 발목 잡힌 현재’다.



■남편은 왜 자살했을까-환상의 빛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건실한 남편, 3개월 된 아이와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주부다. 어느날 남편이 귀갓길에 철로 위를 걷다가 기차를 피하지 않은 채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남편은 죽음의 징조를 보이지도, 유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몇 년이 흘러 유미코는 재혼해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로 이사 간다.

영화는 유미코의 상처를 과장해 드러내지 않는다. 남편의 처참한 시체를 보여주거나 통곡하는 유미코를 찍지 않는다. 유미코의 삶은 심상하게 이어진다. 재혼한 유미코와 가족은 함께 밥을 지어먹고, 수박을 크게 잘라 한 덩이씩 베어 먹는다. 어린 의붓남매는 아무 걱정 없이 바닷가를 쏘다니고, 유미코와 새 남편은 에어컨 없는 다다미방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섹스한다.


영화 <환상의 빛>


하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상처는 드러나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 남아 있다. 유미코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눈앞에서 행방불명된 기억을 갖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유미코는 꿈속에서 할머니를 잃어버린 순간을 되뇌고 있다. 재혼한 뒤에는 이웃 할머니가 비바람 속에 실종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한다. 다 아문 듯했던 과거의 상처에선 갑자기 피가 흐른다.

유미코를 더욱 괴롭게 하는 건 남편이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세상 누구도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져놓은 채 떠났다. 망자를 원망할 수도, 수수께끼를 풀 수도 없는 유미코는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레에다 감독 역시 끝내 자살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남편은 가족에게, 고레에다는 관객에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고레에다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곤 하지만, 난 의미로 삶을 생각한 적이 없다”며 “의미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태풍이 지나가고

료타(아베 히로시)는 한때 촉망받는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불륜을 캐는 흥신소에서 일한다. 그렇게 번 돈은 경륜장이나 파친코에서 써버린다. 늘 돈이 궁한 료타는 얼마 전 별세한 아버지의 유품에 눈독을 들이기도 한다. 이혼한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이 없진 않지만, 양육비는 늘 밀린다. 이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귀는 기색을 보이자, 료타는 남자의 뒷조사를 하기도 한다. 료타는 한 달에 한 번 만난 아들을 어머니 집으로 데려온다. 아내가 아들을 데리러 옛 시댁에 온 사이 태풍이 상륙하고, 한때의 가족은 예기치 않게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료타는 현재를 살지 않는 남자다. 과거의 잘나갔던 시절을 생각하거나, 허황한 미래를 꿈꾼다. 료타는 흥신소 일은 소설 취재를 위해 임시로 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소설은 한 줄도 적지 않는다. 스스로 “대기만성형”이라고 자부하다가 어머니로부터 “뭐 그리 오래 걸리느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야구를 시작한 아들에게 비싼 야구화를 사주지만, 아내는 “그렇게 열심히 아빠 노릇 할 거면 같이 살 때 잘하지 그랬냐”고 핀잔을 준다. 오늘은 어제의 조각들로 이루어졌고, 내일은 오늘의 조각들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료타는 모른 척한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생의 교훈들을 전한다.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남자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흥신소 사장), “행복이란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란다”(어머니) 같은 대사들이 나온다. 이처럼 귀에 박히는 대사들 사이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흐른다. 하지만 고레에다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이 사건들이 인물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일은 없다. 사건과 대사들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고, 등장인물은 그 속에서 아주 조금씩 변한다.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느덧 인물은 인생의 다음 국면에 반 발짝쯤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