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난다”고 말했다. 20일 개봉한 <고지전>(사진) 역시 그 많은 등장인물을 모조리 죽이고야 끝내겠다는 듯 참혹하고 처절한 전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프로덕션을 진행했던 장훈 감독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전쟁영화를 찍는 게 맞느냐는 회의” 속에서 작업해야 했다. 회의와 번민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 결과물인 <고지전>은 보여준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일어나 53년 7월27일 휴전협정과 함께 끝났다. 그러나 역사에 굵은 글씨로 남는 사건은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1·4 후퇴 정도다. 51년 6월 이후 전선이 교착되면서 전쟁 당사자 간의 휴전 협정이 진행됐다. 그 사이 교착된 전선에선 지도 위 1㎜로 표시되는 땅을 빼앗기 위해 남과 북의 군인들이 서로를 죽고 죽였다. 한국전쟁의 총 사망자 400만명 중 그렇게 죽은 사람이 300만명이었다. <고지전>은 그 상황을 그린다.

1953년 2월.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는 남북의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의 악어중대에 배치된다. 전사한 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되는 등, 아군이 적과 내통한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강 중위는 그곳에서 전쟁 초기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김수혁(고수)을 만난다. 유약한 이등병이었던 수혁은 그 사이 ‘전쟁기계’를 방불케 하는 베테랑 중위가 돼 있었다. 진통제를 상시로 투약하는 어린 대위 신일영(이제훈), 북한 사투리를 쓰는 상사 양효삼(고창석), 음주가무를 즐기는 중사 오기영(류승수) 등의 사이에서 강은표는 악어중대가 감춘 비밀에 접근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가지 대사에 영화의 주제가 담겨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계속 여기에 살아가는 것 아닐까”, “우리는 빨갱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전쟁이랑 싸우는 것 같다” 등의 대사다.


내일이면 다시 빼앗길 고지를 오늘 빼앗기 위해 군인들은 총을 쏜다. 군인들은 장기판의 말이 아니지만, 말처럼 움직여진 뒤 죽는다. 왜 싸우는지, 왜 죽는지라도 알면 다행이겠다. 전쟁 초기 마주쳤던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류승룡)은 그 이유를 안다고, 알면 이길 수 있다고 했다. 3년 후 다시 만난 현정윤은 싸우는 이유를 말해달라는 요청에 머뭇거린다.


총제작비가 130억원대를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작으로서의 자랑거리인 스펙터클도 놓칠 수 없다. 실제 화재가 나 민둥산이 된 경남 함양산에서 촬영한 전투 장면이 장관이다. 거대한 전쟁벽화처럼, 미시적 백병전과 거시전 전황이 동시에 그려진다.


<만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찍은 김우형 촬영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주제의식,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술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전쟁영화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를 잇달아 성공시켰던 장훈 감독의 세번째 작품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각본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을 쓴 박상연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당신이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인 한반도의 관객들 역시 한국 영화계가 내놓는 전쟁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전쟁영화는 영화 이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