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장 기간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다 읽었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 나리타 공항의 22번 게이트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쓴다. (음...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쿨하고 고독한 도시 남자 같군. 그래도 여기선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나중 일)

 

하루키(사실 성으로 사람을 표시하는 관습을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라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기사라면 그렇게 쓰겠지만, 여기는 블로그이고, 한국에서는 왜그런지 하루키라고 표기하고 있어, 그냥 하루키로 씀)의 꾸준한 독자는 아니었다. 남들이 그렇듯이 (<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시절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고, 몇 편의 단편집을 읽었고, 에세이는 읽다 말았고, 몇 년 전 <1Q84>를 읽었다. <1Q84>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3권이 나왔을 때 구해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주인공이 어정쩡하게 죽는 듯 끝난 2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그 사이에 옴진리교의 피해자와 교단 관계자들의 인터뷰집인 <언더그라운드>의 1, 2편을 읽었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읽은 하루키의 작품 중 <언더그라운드>가 가장 좋았다고도 생각한다.

 

<색채...> 역시 재미있었다. 쓰쿠루를 포함해 5명의 친구들이 모인 친밀한 공동체에서 영문을 알 수 없이 추방당했던 주인공 쓰쿠루가 절망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살아가고, 16년이 흐른 후 자신의 추방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옛 친구들을 찾아간다는 구조가 가벼운 미스터리 형식을 갖고 있다. 이런 구조는 말할 것도 없이 독자의 흥미를 끈다. <1Q84>가 작심한 대작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면, <색채...>는 몇 시간 집중하면 읽어내려버릴 수 있는 두께로 보나 사적인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형식으로 보나 소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여기서 ‘소품’은 나쁜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니다. 하루키가 작품 후반부에 배치한 일본 도자기에 대한 묘사처럼, <색채...>는 작가의 분명한 뜻을 섬세한 손놀림으로 전한다.

 

쓰다보니 서설이 길어졌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었다. 내가 정작 하고픈 이야기는, 혹시 다들 아는지 모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업비밀’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수법 때문에 그의 소설이 그토록 큰 인기를 끌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름 아니라, 하루키는 여자를 정말 아름답게 그린다. 무턱대고 “예쁘다” “섹시하다”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하는 여성 각자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살린 뒤 그것에 고유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살다보면 만나는 여자들이 이토록 하나같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사실 (통상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은 다들 브라운관, 스크린 안에 있거나, 특정 지역에 모여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자들이 지나는 곳에 있는 여자들은 다들 아름답다. 이것이 영화라면 주인공은 물론, 행인1, 시체1까지 아름다운 것이다. 로맨스 소설이 아니고서는 여성 등장인물 모두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하는 소설은 없다. 다들 리얼하게 한답시고 평범한 외모로 그린다.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기서 반칙을 하는 셈이다. 어떤 이는 <색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리얼리즘으로 귀환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리얼리즘인가.

 

몇 가지 묘사를 따오겠다. 우선 다자키 쓰쿠루와 함께 친밀하고 완전한 공동체를 이룬 동갑내기 여자 친구 2명을 살펴보자. 먼저 시로(백).

 

“시로는 옛날 일본 인형을 연상시키는 단정한 얼굴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가 꼭 모델 같았다. 옻칠이라도 한 듯 까맣게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길을 가다 스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는 그 아름다움을 귀찮아하는 듯한 구석이 있었다. 성실하고 곧은 성격에 어떤 경우건 남에게 주목받는 것을 어려워했다. 피아노를 아름답게 잘 쳤지만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솜씨를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방과후 활동에서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시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 나오지만, 일일이 찾기 귀찮으니 이 정도로 정리하자. 시로는 이 작품 속 미스터리의 핵심 인물이자, 많은 여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구로(흑)를 보자.

 

“구로는 용모가 평균보다 약간 위 정도였다. 그렇지만 표정에 생기가 넘치고 애교가 있었다. 몸집이 크고 전체적으로 풍만한 편이었는데, 열여섯 살 때부터 이미 가슴이 컸다. 자립심 강하고 터프한 성격에 말이 빠르고 머리 회전도 그만큼 빨랐다. ....구로는 시니컬한 말을 자주 했지만, 독특하면서도 상큼한 유머 감각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고 자극적이었다. 열성적인 독서가이기도 해서 늘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로가 이름처럼 하얗다면, 구로는 검다. 하지만 그 검정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하루키가 그렇게 묘사하진 않았지만, 구로같은 여성을 ‘건강미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란한 가정을 이룬 구로에 대한 묘사는 작품 후반부에 한번 더 나온다. 하루키는 그때도 구로의 큰 가슴에 대한 묘사를 잊지 않는다. “한 쌍의 풍만한 유방이 무슨 증거처럼 그의 가슴에 꼭 달라붙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살아가기 위한 힘을 잔뜩 머금었다.”


다자키 쓰쿠루에겐 현재의 여자친구도 있다. 기모토 사라라는 이름의 2살 연상 여인이다. 대형 여행사의 해외 패키지여행 기획 담당자로, 나중에 쓰쿠루의 '순례'를 결정적으로 이끈다. 사라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표준적인 의미에서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튀어나온 광대뼈가 좀 고집 있어 보이고, 코도 가늘면서 약간 뾰족해 보였다."


왠일인가 싶다. 그러나 이어지는 글을 읽으면 '아니나 다를까'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살아 움직이는 뭔가가 있어서 그의 눈길을 끌었다. 눈은 평소에는 가늘었지만 뭔가를 보려 할 때면 크게 활짝 열렸다. 그리고 결코 거침이 없는, 호기심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 한 쌍이 거기에 나타났다."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쓰쿠루는 사라의 몸을 넘어 의상이나 분위기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한다. 


"사라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그녀가 몸에 걸친 옷에도 호감이 갔다. 지나친 장식이 없었으며 선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기분 좋게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쓰쿠루와 사라는 30대 중후반의 연애를 하고 있는만큼, 어디까지나 성인의 묘사가 나온다. 


"옷을 입었을 때도 옷을 벗었을 때도,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젊어 보였다. 피부는 새하얗고 유방은 너무 크지 않으면서도 둥글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는 감촉은 정말 좋았고...(이쯤에서 생략)"


그래. 사라는 지금의 연인이다. 쓰쿠루는 그녀를 아주 좋아하고 있다. 그러니까 38세의 사라를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 8달 정도 사귀다 쿨하게 헤어진 옛 연인은 어떤가. 쓰쿠루가 처음으로 실제의 섹스를 한 것은 21살 6개월 때의 일이다. 설계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4살 연상의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4쪽 정도 나온 뒤 다시 보이지 않는다.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 그녀는 이렇게 묘사된다. 


"자그만 몸매에 긴 머리카락, 귀가 크고 다리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몸이 전체적으로 밀도 있게 농축된 듯한 인상이었다. 얼굴은 미인이라기보다는 귀여웠다. 농담을 하면 하얗고 예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안나오나 했다. 하루키는 언제나 여자의 '귀'를 주의 깊게 본다. 그의 소설에는 귀가 두드러지는 여자가 하나씩은 나온다. 이번 소설에서는 4쪽 짜리 단역 여성이 그 역할을 했다. 


아무튼 이 여성은 짧게나마 쓰쿠루의 연인이었다. 그러니 아름답게 그리는 것을 다시 한번 이해해주자. 그러면 쓰쿠루의 삶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야말로 '행인1' 정도의 여성은 어떨까. 쓰쿠루는 자동차 세일즈왕이 된 친구 아오(청)을 만나러 그의 사무실로 가 리셉션 데스크의 직원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쓰쿠루가 아오를 기다리는 15분 정도의 시간, 2쪽 분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의 첫인상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위로 틀어올리고 가느다랗고 뽀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밝고 청결한 쇼룸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산뜻한 미소로 그를 맞아 주었다. 자연스러운 색깔을 입힌 입술에 치열이 아름다웠다."


렉서스는 고급차이니까 렉서스 딜러의 사무실에는 이 정도의 여성만 일하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쓰쿠루(어쩌면 하루키)는 이렇게 단 15분 만난 뒤 영원히 보지 못한 여성의 아름다움까지 놀라운 순발력으로 잡아낸다. 


물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여자들의 아름다움만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많은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이, 이 소설도 결국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모두들 물어서 물을 것도 대답할 것도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물어봐야 하는 그 질문. 우리는 한때 '흐트러짐없이 친밀하고 완벽한 공동체'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잠시의 행운일 뿐, 그러한 공동체는 존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알지도 못했던 우리 안의 어둠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 없는 만큼의 삶을 살아버린다. 그리고 가끔은 운이 나쁘게도 악령 같은 것에 사로잡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산다. 지금을 즐기고, 눈 앞의 것을 잡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그런 삶이 슬프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대개 그렇다. 슬플 겨를도 없이, 그저 살아낼 뿐이다. 마치 무언가를 만들 때처럼. 그것이 거대한 철도역이든, 도자기든 관계 없이. 최종 결과가 아름다울 수도 있고, 반대로 흉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철도역에 기차가 정차하고, 도자기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한, 그걸 만든 삶은 괜찮다. 그렇게 하루키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나저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여성은 하루키의 행적을 수소문해보자. 혼자 마라톤을 하는 60대 남자를 찾는다면 그나마 수색의 폭을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함께 5분만 이야기할 수 있어도 좋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다음 소설에서 당신을 개성 넘치는 미녀로 등장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