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런 말 하긴 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서전, 전기류에 관심이 생긴다고 한다. 


찾아보니 서경식 선생이 한겨레에 가토 슈이치의 부음을 접한 뒤 적은 글이 있다. 링크한다. 가토 슈이치, 한 교양인의 죽음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지음·이목 옮김/글항아리/552쪽/2만5000원


가토 슈이치(1919~2008)란 인물을 쉽게 설명하긴 어렵다. 도쿄대 출신의 의사였는데 학창 시절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시, 소설, 평론을 썼다. 일본의 패전 직후 미·일 합동조사단의 일원으로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사에 참여했고, 1951년 프랑스로 유학가 혈액학을 연구했다. 그러면서도 모국 언론에는 문예평론을 발표했다. 도쿄도립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했고, 베를린자유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한 적은 없지만,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타계할 때까지 헌신했다.


<양의 노래>는 가토 슈이치가 50대에 출간한 자서전이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영미권, 유럽에서도 번역됐다. 이번에 한국에 번역된 판본은 저자가 미국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1990년대 중반 상황까지를 추가 서술한 대목까지 엮었다. 


가토는 유복하고 양식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특히 외조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해 서구의 교양을 흠뻑 흡수한 인물이었다. 가토는 어린 시절 외조부와 함께 서양 영화를 보러가는 등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했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지식인의 시점에서 본 전쟁 전후 일본의 모습이 흥미롭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를 우려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세계사의 전후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진 못했다. 그들은 ‘황군’이 수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던 독일 국민, 폭격당한 베트남 민간 마을을 몰랐던 미국 국민과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에 대한 인식도 비슷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이라느니 ‘대동아공영권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느니 하며 환호했다. 가토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관람을 예정했던 일본 전통공연 분라쿠 공연장으로 향했다. 관객이 적어 공연이 취소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려는 순간, 정교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공연이 시작됐다. 어제와 달라진 세계 속에 어제와 똑같이 열린 아름다운 공연과 그것을 바라보는 가토. 이렇게 가토는 상황에 다가서기보단 한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45년, 가토는 대학의 내과 교실을 떠나 인근의 결핵요양소로 배치됐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은 8월 15일 ‘중대 방송’을 함께 들었다. 천황의 발표를 다 듣고도 그 뜻을 몰랐던 사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립니까?”라고 물었고, 원장은 짧게 “전쟁이 끝났다는 얘길세”라고 답했다. 지역의 젊은 아가씨들로 구성된 수십 명의 간호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병실로 흩어졌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토는 “전쟁은 그 어떤 교육에도 불구하고 또 그 어떤 선전선동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가씨들의 세계 내부까지는 스며들지 못했던 것”이라고 적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사를 나가서는 여러번에 걸쳐 살아남은 피폭자들에게 피해 상황을 물었지만, 그들은 몇 마디를 한 뒤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 한쪽에 있고, 가토는 그 반대편에 있었다. 히로시마는 이 둘의 극심한 대비를 가르쳐주었다. 가토는 그래도 말못할 경험을 말로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것이 가토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가토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또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늘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물렀다”고 회고한다. 그는 세계시민이었지만, 또한 프랑스, 영국, 독일, 캐나다, 미국에서 늘 이방인이었다. 1960년대말~70년대 초 서유럽 학생들의 영웅은 호치민, 체 게바라, 마오쩌둥이었다. 가토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반식민제국주의 지도자라는 사실과, 활동무대가 베를린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개의 학생이 이들의 발언이나 행동이 나온 자세한 배경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확실히 신은 인근 도시가 아니라 천상에 사는 법”이가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가토는 급진적인 학생들로부터 ‘권위주의적 교수’로 몰리곤 했다. 


그래도 이 박학하고 우아한 지식인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가토와 저녁 식사를 하던 한 실업가는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일은 알고 싶지 않아. 난 그저 평화를 즐기며 살고 싶을 뿐이라네. (…) 설사 안다고 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가토는 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다’는 인간과 ‘그래도 알고 싶다’는 인간이 있다. 나에겐 전자가 틀렸다는 논리는 없다. 다만 나는 자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