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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연결돼 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좋은 책은 학문의 분과를 뛰어넘는 깨달음을 준다. 이번에 읽은 <생명에서 생명으로>가 그랬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김명남 옮김/궁리/304쪽/1만8000원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기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종교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더 넓은 물질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 갓 숨이 끊어진 생명체가 있다. 생명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육체만큼은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온마저 따뜻해 마치 깊은 잠에라도 빠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몸이 식어간다. 이제 어딘가에서 ‘자연의 장의사’들이 나타난다. 이른바 청소동물이다. 송장벌레, 구더기, 큰까마귀, 독수리, 곰…. 이 동물들은 송장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활약을 통해 지구의 소중한 물질이 재분배된다. 물론 청소동물들을 이루는 물질들도 언젠가는 해체돼 자연으로 흩어질 것이다. 지구 위에선 수십 억년 동안 이렇게 거대한 순환이 이뤄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원제 Life Everlasting)는 청소동물의 활약과 그들로 인한 물질의 순환을 그린다. 저자 베른트 하인리히(75)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다. 1951년 미국으로 이민와 살며 생물학 박사가 됐고, 대학에서 은퇴 후 현재 미국 시골 메인주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공터에 덫을 놓아 잡은 쥐, 로드킬 당한 사슴 등을 두고 청소동물을 불러모은다. 노생물학자의 정밀한 자연 관찰기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갈파한 종교서적에 육박한다. 


송장벌레과 니크로포루스속 딱정벌레는 딱 ‘장의사’다. 인간이 그러하듯, 매번 동물 사체를 적당한 땅으로 옮겨 묻기 때문이다. ‘니크로포루스’라는 속명은 그리스어 ‘네크로스’(죽은)와 ‘필로스’(사랑)에서 나왔다. 하지만 송장벌레가 죽음을 사랑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사체를 옮기는 건 죽음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부터 새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새까만 등에 선명하고 밝은 오렌지색 무늬가 있어 그 이름과 달리 놀랍게 아름다운 송장벌레는 낭만적인 연애 풍경을 연출한다. 생쥐 같이 적당한 사체를 발견한 수컷은 꽁무니 분비샘에서 냄새 물질을 뿜고, 냄새를 맡은 암컷은 수컷을 찾아와 사체를 옆에 두고 짝짓기를 한다. 암수는 사이좋게 힘을 합쳐 사체를 묻는다. 암컷이 근처 흙 속에 낳은 알에선 며칠 뒤 유충들이 깨어난다. 유충들은 사체로 기어와 부드러워진 살점을 먹는다. 


북반구 최고의 장의사는 큰까마귀다. 에드거 앨런 포는 큰까마귀를 두고 “음침하고 볼품없고 섬뜩하고 수척하고 불길한 태고의 새”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하늘을 나는 큰까마귀는 ‘힘과 우아함의 전형’이다. 사슴, 소, 너구리 등의 죽은 동물이 있으면 포유류가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로 사체를 연다. 다음은 큰까마귀 차례다. 하인리히는 모두 합쳐 무게가 1t 정도 나가는 소 두 마리의 사체를 얻어 큰까마귀의 처리 능력을 시험했다. 2주만에 500마리 가까운 큰까마귀가 날아들어 소의 살점을 완전히 발라냈다. 물론 고기는 큰까마귀의 몫만은 아니었다. 큰까마귀는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고깃덩어리를 물고 1㎞ 넘게 날아가 숨겨두는데, 이런 고기를 다른 새나 코요테 등이 훔쳐 먹는다. 





나무의 장례식은 동물에 비하면 한없이 길다. 살아생전 끈끈한 수지, 딱딱한 껍질 등으로 자신을 방어해온 나무는 죽으면 곤충들을 그 부드러운 속살로 맞아들인다. 비단벌레는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산불난 곳을 알고 찾아온다. 균류 역시 죽은 나무에 자리잡는 생명체다. 균류의 생식기관으로서 포자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자실체(子實體)가 버섯이다.  


연어는 질소, 인, 기타 영양분을 바다에서 강과 주변 삼림으로 배달하는 ‘꾸러미’다.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랐다가 민물로 돌아오는 연어는 알을 낳고 얼마 뒤 그 자리에서 죽는다. 곰들은 알을 낳기 위해 사력을 다해 강을 거슬러 오르거나 혹은 죽은 연어를 잡아먹는데, 먹이가 풍부할 경우 곤, 생식소, 뇌 등 별미만 맛본 뒤 버리곤 한다. 하지만 자연에 낭비란 없다. 곰들의 만찬장 주변엔 갈매기 등 다른 청소동물이 나타나 남은 연어를 포식한다. 


죽은 고래는 빛 한 점 없고 수온은 0℃에 가까운 심해의 영양 공급원이다. 심해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고래는 빛이 넉넉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괴생명체다. 죽은 고래가 심해로 가라앉으면 돔발상어, 먹장어, 민태, 왕게 등이 나타난다. 부드러운 조직이 다 먹히면 세균이 뼈에 엉겨 붙고, 삿갓조개와 달팽이가 그 세균을 먹는다. 낙하한 고래 주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물은 400종이 넘는다. 고래가 완전히 분해되기까지는 10년~100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인리히는 불치병 진단을 받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의 편지를 받고 이 책을 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친구는 죽음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재생에 대한 야생의 찬양”이라고 적었다. 그러니 시체를 구멍에 넣고 밀봉하는 매장은 “인간 육체의 영양분을 자연계로부터 박탈”하는 일이다. 화장도 답은 아니다. 시체를 태우는데 걸리는 3시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하고, 또 유독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는 자신을 하인리히가 소유한 공터의 ‘영구 거주자’로 받아들여달라고 청한다. 


하인리히는 친구의 편지에 쉽게 답장하지 못했다. 그의 논리에 수긍하면서도, 시신을 발가벗겨 겨울 숲에 방치한 뒤 큰까마귀에게 맡기기는 꺼림칙하다. 인간의 유골이 야산에 뒹구는 상황도 윤리적, 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인리히조차 자신의 매장 방법을 쉽게 선택하기 어려워 한다. 독성 화학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주입해 매장하는 것도, 반환경적인 화장도 답은 아니다. 다만 “인간도 동물이고, 생명 순환의 일부이고, 먹이 사슬의 일부”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첫 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