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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아트 전시회 2제







공교롭게 미디어아트 전시회 2건이 비슷한 시기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와 금천문화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다. 또 공교롭게도 두 전시회의 주체는 모두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문화재단이다. 시기와 주제가 다소 겹치기에 두 기관 사이에 모종의 껄끄러움이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올해 내가 본 몇 안 되는 전시중 최고다. 솔직히 리움 10주년 기념전보다 좋았다. 물론 리움도 훌륭했다. 어딘가에 숨겨뒀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미언 허스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면 천박하게 들리겠지만) '돈값'을 한다. 이전에 상설전시돼있던 허스트와 부르주아의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 나온 작품은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는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도 사서 걸어주셨으면 한다. 그만한 돈을 쓸 수 있는 미술관은 리움밖에 없다....) 


모던, 클래식 예술의 정수만을 모아놓은 리움 전시회의 작품들이 눈을 호사롭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기획력의 승리라 할만했다. 기사 마지막에 "여러번 찾으면 좋겠다"고 쓴 것은 빈말이 아니다. 회사 근처이기에 나부터 여러번 찾을 생각이다. 전시회에 가서 영상 작품을 끝까지 본 적은 드물지만, 미디어시티 2014에 나온 작품들은 시간을 내 천천히 볼 생각이다. 


미디어시티서울에 누가 뭐라해도 '작품'이 나온 반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는 그렇게 말하기 머뭇대는 순간이 생긴다. 기사에 쓴대로 어떤 것들은 '직품'이라기보다는 '제품'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느냐고 물었을 때 평론가라면 무언가 기준을 제시하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긴 하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의 작품들은 신기했지만 그 신기함이 어떠한 여운을 주진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언캐니'했던 '살' 정도가 기억에 남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두 전시회 모두 무료다. 서울시민으로서 이런데 쓰는 세금은 더 내라면 내겠다. 






1층에 전시된 양혜규 작가의 작품. 수많은 방울로 이루어져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난다. /미디어시티서울 제공


초현대적인 미디어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한복판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예능보유자 이상순 만신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개막공연을 1일 오후 연 것이다. 


“여기가 원래 재판소 자리라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많아. 오늘 다 극락가는거야. 세월호에 죽은 사람들 원혼도 달래야 해. 서울미술관도 잘 되게 해주시고, 여기 온 분들 모두 재수 좋게 해주시고…”


박찬경 예술감독은 만신에게 손을 조아리며 미디어시티서울의 성공을 빌었다. 외국에서 온 아티스트들은 만신이 건네주는 제주를 음복했다. 구경온 사람들은 쫄깃한 떡을 받아 오후의 허기를 달랬다. 


개막공연으로 굿이 선택된 것은 이번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가 ‘귀신 간첩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의 화두를 ‘아시아’로 잡은 박찬경 감독은 귀신, 간첩, 할머니가 현대 아시아를 돌아보는 세 가지 키워드라고 했다. 귀신은 아시아의 누락된 역사와 전통, 간첩은 냉전의 기억, 할머니는 가부장제 사회를 견딘 여성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는 보이지 않거나 보여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전형적 타자’인 동시, 매혹과 금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에는 17개국 42팀의 작가들이 230여점이 출품됐다. 최원준의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1959년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교시에 의해 설립된 미술 스튜디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료 등으로 구성됐다. 만수대 스튜디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대형 동상, 기념비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공건축물을 지으며 ‘외화벌이’를 한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에티오피아, 세네갈, 토고의 기념비, 건축물에 ‘주체예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4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에 영상 일부가 공개된 바 있다.  



최원준 작가의 작품을 설명중인 박찬경 예술감독(오른쪽 마이크 든 이). 내 사진 올리는 거 별로 안좋아하긴 하지만, 보기 드물게 시건방진 자세로 박 감독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미디어시티서울 제공


<해녀>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미카일 카리키스가 2012년에 3개월간 제주 해녀공동체와 함께 지내며 만들어낸 작품이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가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제주해녀의 숨비소리(해녀의 전통적 숨쉬기 기술)가 들리고, 전면의 영상에서는 노동요를 부르는 해녀들이 보인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카리키스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황폐해져가는 문화는 내 작업의 일반적 주제”라고 설명했다. 


다무라 유이치로는 1928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고등재판소가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는 장소성에 주목했다. 그는 1764년 조선통신사 수행원 최천종이 일본 오사카에서 통역을 맡은 하급무사 스즈키 덴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영상으로 옮긴 뒤 이를 당시 법정을 연상케하는 세트에서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일으켜 가부키 공연 등의 소재로 사용됐으나, 미묘한 국제 문제 때문에 상연이 중지됐다고 한다. 


양혜규의 <소리 나는 보름달> 등 신작들은 방울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스스로, 혹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작품들은 방울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로 공간을 채워 작품이 주문을 외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자오싱 아서 리우의 <코라>는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출발해 에베레스트 산에 이르는 2300㎞의 여정을 고화질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몽환적인 전자음악과 현악기 소리가 숭고한 자연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영적 여정을 안내한다. 


민간위탁사업이었던 미디어시티서울은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미술관 직영사업으로 전환됐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은 “위탁사업일 때는 예술감독의 1회성 이벤트로 끝나 아카이브 구축에 어려움이 있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며 “미술관이 행사를 직영함으로써 정보를 축적하고 예술감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려 한다”고 말했다. 


9월 2일~11월 23일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한국영상자료원 두 군데서 함께 만날 수 있다. 영상 작품들은 2차원의 시각 정보를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고 기발하게 고안된 전시 공간과 어울려 3차원의 감흥을 안겨준다.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하고 풍부한 관점, 정보, 감상을 전하면서도 전시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근처를 지나는 이들은 시간을 내어 들를만하고, 지날 일이 없다면 일부러라도 찾을만한 전시다. 관람에 시간을 요하는 영상 작품이 많은데다가 입장료가 무료라 여러번 찾으면 더 좋겠다.  





김병규의 '에이티필드-마비된 감각'. /서울문화재단 제공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SF작가 아서 클라크는 말했다. 10월 17일까지 서울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2014’(이하 다빈치)를 본 뒤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


금천구 독산동의 금천예술공장은 대규모 인쇄공장을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주변엔 소규모 공업사와 의류공장들이 여전히 밀집해 있다. 개막한 3일 둘러본 ‘다빈치’에는 <해리 포터>의 마술, <스타워즈>의 미래기술로나 구현될법한 아이디어들이 현실의 ‘작품’의 형태로 선보였다. 2010년부터 아이디어 공모전 형태로 열리던 ‘다빈치’는 올해부터 처음으로 페스티벌로 확대됐다. 관람료는 무료다. 


김정환의 ‘이미지-무브먼트’는 멀찌감치 떨어진 피아노와 그 앞을 가로막은 빛의 커튼으로 구성돼있다. 커튼을 가로지르며 손을 저으면 2m 가량 앞에 놓인 피아노의 건반이 눌리면서 소리가 난다. 건반은 다시 허공으로 푸른색 레이저를 쏜다. 


김병규는 두 개의 정육면체 작품을 선보였다. ‘에이티필드’는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보호막에서 이름을 따왔다. 관람객이 커다란 정육면체 안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아무 것도 없던 육면에 레이저 보호막이 쳐진다. ‘살’은 한 손에 잡히는 세 개의 정육면체 실리콘 덩이다. 어떤 것을 만지면 맥박이, 어떤 것을 만지면 체온이 느껴진다. 어떤 것에는 뾰루지까지 나있다. ‘언캐니 밸리’(로봇공학계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인간과 닮았으나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은 로봇이 주는 섬찟함, 혐오감)의 의도적인 구현이라 할만하다. 신승백과 김용훈의 ‘아포시마틱 재킷’은 ‘입는 컴퓨터’다. 재킷에 여러 개의 렌즈가 붙어있어 위급할 때 착용자가 버튼을 누르면 주변을 360도로 찍은 영상을 웹으로 전송한다.


하이테크가 아닌 로우테크(저차원 기술)를 재치있게 사용한 작품들도 있다. 프랑스 작가 조니 르메르시에의 ‘후지’는 벽에 나무, 산을 그린 후, 그 위에 프로젝터로 빛을 쏴 풍경이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한 작품이다. 작품 설치를 위해 방한한 르메르시에는 “어디나 쏠 수 있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스마트폰, 텔레비전 등으로 한정된 스크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다”며 “프로젝터는 낡은 기술이지만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술의 발전은 예술의 개념을 흔들어왔다. 인상주의는 유화와 캔버스의 개발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는 야외에서 들고 찍을 수 있는 경량 카메라의 도입 이후 나타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술에 경도돼 예술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이날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제한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의 엠마 퀸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기술에 지원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청중과 재원을 모을 수 없는 기술에 투자해선 안된다는 점이 밝혀진다면, 다른 예술 단체들이 여기에 돈,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빈치’의 손미미 예술감독은 “테크닉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방법을 연마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면서도 “이는 완성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작가로서 바람직한 집착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우선 작품들에서 국가적·지역적 흥취를 찾기 어렵다. 작품만 봐서는 한국 작가의 것인지, 독일 작가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 손미미 감독은 “디지털 문화에서는 ‘오픈 소스’가 대세”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업 노하우를 감추기보다는 다른 작가도 알 수 있도록 예술가 커뮤니티에 공유한다는 것이다. 김치앤칩스 스튜디오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손 감독은 “개인 작업을 할 때도 기술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면 다른 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며 “인터넷을 통해 국경, 문화의 경계가 사라지다보니 외국 작가와 한국 작가의 작품 경향에도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사회와 역사의 흔적이 희미하다. 작품들은 공시적·통시적 맥락과 소통하지 않고, 현장의 관람객들과만 대화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품’이라기보다는 ‘기발한 전자제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장지대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의 취지 역시 기술, 예술, 산업의 연계임을 강조한다. 손미미 감독은 “미디어아트를 전통적인 예술관으로 정의내리면 오해가 생긴다”며 “미디어아트는 좀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환 '이미지-움직임' /서울문화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