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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을 제 맘대로 부리는 사람들,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 단상





오랜만에 무용 공연을 보고 왔다. '문화'라는 넓은 카테고리에 속해도, 공연마다 관객의 분위기가 다르다.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 무용, 뮤지컬, 전통적인 회화, 미디어아트 관객의 느낌은 미묘하게 다르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몇 가지만 예를 들면 클래식 음악 공연엔 "나 이런데 오는 사람이에요"라고 머리 위에 말풍선을 달고 있는 중장년층이 좀 계시다. 오늘 본 무용 공연에는 무용수임이 티가 나는 관객이 많았다. 매우 짧은 머리카락에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으며 몸매가 날렵해 보이는 남자 관객은 어떠한 뮤지컬 전용관, 미술관에서도 만나기 어렵다. 


오늘 본 공연은 스위스 링가무용단의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였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일환으로 열리는 공연이었다. 취재를 위해 며칠전 연습실을 방문해 무용수인 김혜경씨를 인터뷰했는데, 그러리라 짐작은 했으나 바로 옆에서 보니 정말 온몸이 근육이었다. 얼굴은 물론 주먹만했고. 그런 체형을 가진 사람이 무용을 하는 것인지, 무용을 하면 그런 체형을 갖게 되는 것인지(심지어 얼굴도 작아지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스포츠 경기를 보기는 좋아하나 하기는 젬병인 처지라, 자신의 육체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을 보면 외계인같다. 요즘 드문드문 읽고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은 대체로 육체의 부질없음, 영혼의 고결함을 이야기하지만, 플라톤조차 혹독한 수련 끝에 자신의 신체를 목적에 맞게 최적화해 활용하는 사람들을 백안시하진 못하리라.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는 소리와 동작의 연계를 확실히 표현한 중반부가 좋았다. 활용한 기계장치를 일부러 티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왕 한 거 그렇게 노골적으로 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움직임이 그대로 소리로 표현되니, 정말 감각이 다차원으로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공감각적 이미지'를 예술과 기계장치로 구현한 셈이다. 아래는 관련 기사. 



링가 무용단의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 /서울세계무용축제 제공




춤으로 음악을 연주한다. 스위스 링가 무용단의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를 보고 나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2014 출품작 중 하나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는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는 몸과 음악이 과학기술을 통해 엮이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용수들은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채 무대에 떠 있는 작은 기계 장치를 신기한 표정으로 만지작 거린다. 무용수들은 이 장치들을 하나씩 떼어 팔, 다리 등에 장착한 뒤 춤을 춘다.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가 여느 무용 공연과 다른 이유는 공연에 사용되는 모든 음악이 무용수들의 동작에 의해 연주된다는 점이다. 링가 무용단이 스위스 로잔대학과 1년여의 개발 기간 끝에 만든 장치는 동작의 가속도, 운동방향, 근전도를 측정할 수 있게 돼 있다. 이렇게 측정된 수치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데이터화되고, 이 데이터는 다시 소리로 변환된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의 한 연습실에서 만난 링가 무용단 안무가 마르코 칸탈루포는 “무용수들이 자신의 동작을 보고 움직이는게 아니라 듣고 움직이게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용의 새 어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링가 무용단의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서울세계무용축제 제공


물론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의 기본 동작은 정해져있다. 7명의 무용수들은 사전에 안무된 동작을 선보인다. 그러나 공연의 음악은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무용수들의 미세한 움직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연 종반부에는 조명까지 신체 움직임에 연동된다. 근육에 힘을 주면 조명이 밝아지고 빼면 어두워진다. 


칸탈루포는 휴식 시간 동안 연습실 구석에 앉아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무용수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보세요. 사람 수만큼의 컴퓨터가 있네요.” 무용수들은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칸탈루포는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삶을 침해하는 듯하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존재해 나간다”며 “특히 테크놀로지에 친화적인 한국 관객이 공연을 보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낙 민감한 기계장치였기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공연 도중 기계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칸탈루포는 “그럴 때 필요한 건 인내심 뿐”이라며 웃었다. 


이번 작업은 무용수들에게도 도전이었다. 2009년부터 링가 무용단에서 활동해온 무용수 김혜경씨는 “내 몸의 움직임과 기계의 원리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새로운 지도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연습은 힘들었지만, 작품 이후 달리 느낀 점도 많다. 김혜경씨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출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몸이 앞으로 쏠릴 때와 같이 지금까지 무심코 벌어진 동작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동작을 청각적으로 증폭시켜 받아들인 경험이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대해 갖고 있던 시선을 다차원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1992년 부부 안무가인 마르코 칸탈루포와 까타쥐나 그다니예츠에 의해 창단된 링가 무용단은 사회적 이슈를 결합한 무용공연으로 주목받아왔다. <Go!>(2004)에서는 이민 문제, <포장된 나>(2005)에서는 소비사회 문제, <부엌>(2006)에서는 가정폭력 문제 등을 다뤘다. 칸탈루포는 “유럽 무용계에서는 사회적 이슈를 다룬 공연이 주된 흐름”이라고 전했다.  



링가무용단의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서울세계무용축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