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맥카시(위)와 잭 런던
한반도란 땅덩이는 여기 봐도 사람, 저기 봐도 사람이라 어디 개척하겠다고 나설 데도 없지만, 그래서 한때 확인할 길 없는 '만주 벌판' 운운하는 농담이 나왔겠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한국과 조건이 달라, 인구가 늘어나 동부 연안이 좁아지자 금이 묻혀있다고 소문난 서부로 달려가는 모험가, 건달, 사기꾼, 부랑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서부엔 샌 프란시스코니, 로스 앤젤레스니, 샌 디에고니 하는 도시들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19세기엔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의 모험 혹은 한탕의 정신은 1세기쯤 지난 뒤 낭만화됐고, 발빠른 영화인들은 서부의 '신화'를 영화로 만들어 장르로 정착시키기도 했고, 아마 소설에도 비슷한 장르가 있는 것 같다.
잭 런던이 태어난 1876년은 대략 서부 개척 시대도 절정을 지나 끝물로 접어들던 때였다. 샌 프란시스코가 고향인 런던은 온갖 날품팔이로 생계를 잇다가 1897년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대열에 합류해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했다. 물론 그때 딱히 한몫을 챙기지 못했으니까 훗날 <강철군화>나 <늑대개> 같은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번에 읽은 <잭 런던 단편선>은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 런던의 체험담이 녹아있다.
처음 몇 편을 읽다가 글들이 비슷비슷한 것 같아 그냥 덮으려다가 참고 마저 읽었다. 일종의 대중소설로 접근하는 것이 괜찮은 독서법이겠다. 눈덮힌 황야의 떠돌이들, 그들이 겪는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불인한 자연과 '문명인'의 눈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인들이 글의 소재다.
자연이나 야만인의 광포함을 마주하면서도 절대 굴하지 않는 사나이들. 재미있긴 한데, 요즘엔 이런 정서로 글을 쓸 수는 없다. 사나이들을 프런티어 어쩌구 하면서 이념적으로 미화하지 않는 건 물론 미덕이다. 이 사나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갈 곳이 없어서, 아니면 그냥 떠도는 걸 좋아해서 이 황량하고 척박한 곳까지 흘러든게 분명하다. 이들의 행동을 '이메리칸 프런티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는 얘기다. 런던의 알래스카에 대한 태도는 많은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오지를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돼 있다.
런던의 단편들이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서 배경을 알래스카로 바꾼 것이었다면,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은 서부 장르물을 처음부터 다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도 압도적으로 황량한 자연, 잔인무도한 야만인이 나오긴 하지만, 그에 대한 서술 태도는 런던과 크게 다르다. 일단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년과 인디언 머릿가죽을 벗기는 그의 백인 용병 무리들의 잔혹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 현상금 사냥꾼 무리들의 잔혹한 행동은 미국 역사의 나무는 핏물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 다가올 죽음 앞에선 파리약 맞은 파리처럼 버둥댈뿐인 인간의 조건을 그린다. 영화로 만든다면 서부극보다는 고어영화에 가까울 이 소설은 내가 읽어본 맥카시의 또다른 소설 <더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비해 압도적이다. 그래서 솔직히 뒤의 두 소설은 왜 썼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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