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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시대-아렌트 읽기

첫 문장은 명백히 개인 의견이다. 아렌트를 읽을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990년대의 탈근대주의자들은 대체 뭘 한 걸까.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던 데리다의 주장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렌트 읽기>(원제 Why Arendt matters)의 역자 서유경은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 차원을 넘어서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에 불과한 공허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다시 소환된다.


저자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아렌트를 사사한 두 명의 수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렌트를 21세기에 다시 읽어야 할 이유를 세 가지 주요 저서를 통해 소개한다.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무명의 지식인이던 아렌트는1951년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면서 미국에서 주목받는다. 전체주의란 무솔리니가 1920년대에 만든 말이지만, 아렌트가 새롭게 활용하면서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정치 형태”로 규정된다. 아렌트의 비판은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 아래 사적 영역과 개인의 자유를 침범한 미국은 전체주의적 요소가 팽배한 사회다.

1958년작 <인간의 조건>은 전체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인간 행위로서의 ‘정치행위’를 살핀다. 시민이 서로 소통하며 공적인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 정치의 본모습이며, 정치행위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장이다.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라는 고대 그리스적 사유를 복원한다.

유작이자 미완성작인 <정신의 삶>은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문제의식을 잇는다. 아이히만은 성실한 관료였으나, 그가 결재한 서류는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아이히만의 악행은 상식이 없고 사유할 능력도 없는 ‘무사유성’(thoughtlessness)에 근거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유한다는 것, 특히 타인의 입장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가장 정치적인 정신 능력이다.

이이히만은 죽었다. 그러나 ‘영혼 없는 공무원’이나 ‘상식 없는 전문가’는 살아있다. 아렌트를 읽기 좋은 시대다.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