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블로그에 썼던 글을 뻥튀기해 칼럼으로 재활용.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인기 있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다. 그걸 운이나 마케팅이나 알 수 없는 유행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나태하다.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해 완구업계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이날을 위해 대량 생산체제를 가동시켰다가 악성재고로 남는 장난감이 있는가 하면, 부모들이 마트 개장 시간에 맞춰 쟁탈전을 벌여야 하는 장난감도 있다. 어린이들은 또래 집단의 취향에 민감하고 싫증을 잘 내기에, 장난감도 유행이 빠르다.

몇 년 전에는 덴마크 블록회사 레고의 ‘닌자고’ 시리즈가 파천황의 인기를 누리더니, 국산 애니메이션인 자동차 변신 로봇 ‘또봇’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겨울왕국>의 엘사와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의 공룡 로봇들이 여아와 남아의 시선을 각각 사로잡았다. 

올해는 ‘요괴워치’가 독주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애니메이션이 방영돼 인기를 끌었고, 장난감 역시 불티나게 팔렸다. 현지에선 다마고치 이후 최고의 히트 장난감이라는 평까지 나왔다고 한다. 

<요괴워치>의 내용은 이렇다. 평범한 초등학생 민호는 어느 여름날 수다스러운 요괴 ‘위스퍼’를 만난다. 위스퍼는 민호에게 요괴워치를 건네고, 민호는 이 요괴워치를 통해 세상 속의 요괴를 본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은 모두 요괴의 장난이었으니, 민호는 요괴를 설득하거나 다른 요괴와 대결시켜 사태를 바로잡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민호와 친구가 된 요괴는 자신을 상징하는 메달을 주고 사라진다. 이 메달을 요괴워치에 넣으면 언제라도 그 요괴를 소환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의 범주는 장난스러운 것에서부터 다소 심각한 것까지 다양하다.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는 자꾸만 음식을 집어먹는데, 이는 요괴 ‘자꾸손’이 꾸민 일이다. 민호는 자기 바로 앞에서 먹고 싶던 멜론빵이 다 팔리거나 막 먹으려던 아이스크림이 난데없이 땅에 떨어지는 불운을 잇달아 겪는다. 이는 무엇이든 실패하게 만드는 ‘슬피우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틀어박쥐’는 현대인이 특히 경계해야 하는 요괴다. 틀어박쥐에 빙의되면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서워 방에 틀어박힌다. 





위로부터 집사를 자처하는 수다스러운 위스퍼, 불운을 부르는 슬피우새(물론 자신도 불운해 침울한 표정이다), 버블경제기의 욕망이 탄생시킨 막써조개. 




계획대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으며, 인간의 의지란 것도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생각. 고대 그리스인들 역시 그렇게 여겼다. 미국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리는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이런 고대 그리스인들의 태도를 칭송한다. <오디세이아>의 페넬로페는 전쟁에 나가 생사조차 불분명한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운다. 그때 아테네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달콤한 잠을 내려준다. 신이 인간에게 잠을 허락한다고 믿는 현대인은 많지 않겠지만, 호메로스의 인간관에는 주목할 만하다. 호메로스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핵심을 통제하기에 불충분한 존재”라고 여겼다. 

니체의 선언처럼, 근대 세계는 신을 죽였다. 세상의 이면을 가정하지 않았고, 인간을 자기 행동의 온전한 주인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근대 이후의 인간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짐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선택의 자유는 현대의 삶이 선사한 기쁨이겠으나, 문제는 선택에 확실한 동기가 없다는 점이다. 아메리카노인지 카페라테인지,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얼 해도 상관없고 어떤 일도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현대인은 너무나 자유롭기에 불행하다. 저자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의미의 생산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던져주는 의미의 발견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하루를 돌아보며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들은 얼마나 됐을지 생각한다. 늦은 밤 라면을 끓인 건 ‘공복영감’ 때문일까, 여름 티셔츠를 서둘러 장만한 건 ‘막써조개’ 때문일까. 하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인간은 약하고 늘 흔들린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작은 의지가 생기고, 타인을 이해하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요괴워치>의 의뭉스러운 세계관을 슬쩍 껴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