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의 <일본의 검은 안개> 상, 하권을 읽다. 마쓰모토는 일본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킨 작가라고 한다. 책날개에는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내서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근 몇 년 사이 읽은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코 모두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읽은 몇 안되는 사회파 추리소설중에는 미야베의 <화차>가 가장 좋았다)





마쓰모토는 찣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다가 41세에 작가로 데뷔해 이후 40년간 장편만 100편, 중단편을 합하면 1000편의 작품을 써냈다고 한다. 단행본으로는 700권에 이른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 정도를 손으로 썼다면, 그 손은 분명 펜을 들기(혹은 끼우기) 좋은 방식으로 굽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중엔 태작도 있을 것이고 자기복제도 있을 테지만, 한 가지 일을 그리 꾸준히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꾸준히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일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떠나지 않고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가치 있다. 


패전 직후 일본에는 승전국 미국의 GHQ(연합국 총사령부)가 들어서 6년간 간접 통치를 했는데, 그 수장이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GHQ는 일본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방부 중심의 G2와 국무부 중심의 GS의 알력 다툼이 심했다. GS는 일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심는 것이 목표였고, G2는 일본을 소련, 중국의 공산주의 블록에 대항하는 최전선으로 활용하려 했다. 초기엔 GS의 힘이 셌으나, 후기엔 G2가 강해졌다. 이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에 따른 공산주의 국가와의 냉전 시작이라는 세계 정세의 흐름과도 맞아떨어진다. 


<일본의 검은 안개>는 GHQ 시기 일본에서 벌어진 12개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논픽션이다. 하나같이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밝혀졌다 해도 의문을 남기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뒤에는 G2, GS의 힘겨루기와 패전 이후 일본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이 놓여 있다. 


GHQ로부터 강요된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고민하던 일본 국철의 총재는 철로변에서 토막난 사체로 발견된다. 당국은 고민하던 총재가 자살을 택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마쓰모토는 GHQ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총재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제거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공산당과 GHQ 사이의 이중첩자 노릇을 한 것으로 추정된 사내는 어느날 연기처럼 종적을 감춘다. 사내는 수십년간 중국에 연금됐다가 80년대에야 일본으로 돌아온다. 마감 직전의 제국은행에 들어와 검역관을 자처하며 은행원들에게 예방약으로 위장한 독약을 먹여 살해한 사내의 뒤로는 731부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국전쟁이 남침이었는지 북침이었는지에 대해 마쓰모토는 모호한 입장인데, 분명한 건 한국전이 미국의 '빨갱이 사냥'에 좋은 구실이 됐다는 사실이다.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한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땅 혹은 세계의 어딘가에 한국이 없으면 안되었다"고 말한다. 


좀 놀라운건 마쓰모토가 이 책을 낸 것이 1960년이라는 사실. 해방 전후, 전쟁 전후의 혼란,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대결, 설익은 외국 제도의 도입과 부작용 등은 한국도 일본 못지 않았을 것이고, 그 와중에 석연치 않은 사건도 많았을텐데, 아무튼 마쓰모토는 그것들을 기록해 나름의 추론과 음모론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고종, 정조대가 추리 소설의 인기 소재가 된 지도 꽤 됐고, 그래서 별로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도 없을 듯 하니, 이제 우리도 현대사를 예술적으로 소화해보려는 노력을 할 때도 됐을텐데, 과문해서인지 그 방면의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 한국 현대사는 엄밀한 역사학자나 논쟁적인 정치학자의 손에서만 다뤄져야 할만큼 뜨거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