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영화 담당이었던 본사 베이징 특파원의 칼럼에 영감 받아 씀. 


10년을 넘게 썼지만 ‘청룽’(成龍)이란 표기는 여전히 낯설다. 우리에게 청룽은 언제나 ‘성룡’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조금 앞 세대인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 속 청춘들은 비장한 리샤오룽의 시대에서 코믹한 청룽의 시대로 옮겨가면서 성장했다. 아마 그 시대 청룽의 대표작은 <취권>이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무술 동작은 영화 속 적과 관객을 모두 무장해제시켰다. 


내게 청룽의 대표작은 <폴리스 스토리>다. 이 영화에서 청룽은 마약왕을 잡으려는 홍콩 경찰이었다. 가끔 실수를 하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무리한 수사도 벌이지만, 그래도 청룽은 좋은 경찰이었다. 악을 응징하겠다는 정의감, 약자를 돕겠다는 의협심,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승진이나 출세에 목을 매지 않으며, 강자에게 아부하지도 않았다. 

경찰은 국가라는 초거대 기구의 치안을 맡아 공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지만, 그 시절 청룽에게서 ‘국가’의 위압감을 느끼긴 어려웠다. 청룽은 누가 봐도 나쁜 녀석을 혼내주는 듬직한 동네 형 같은 남자였다.

지난해 개봉작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에서도 청룽은 경찰이었다. 청룽은 언제나 그랬듯 100% 직접 액션 연기를 소화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나올 때 다치고 넘어지고 대사가 꼬여 엔지가 난 장면을 모아 보여주는 팬서비스도 여전했다. 영화 속 청룽은 러시아 마피아에게 잡혀간 사기꾼을 구출해 홍콩으로 데려온다. 마피아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청룽은 고물차를 타고 중국 대륙을 가로지른다. 청룽은 고비사막에선 모래언덕을 넘고, 황하에선 급류를 탄다. 내몽골 전사와 씨름 대결을 하고, 광시성의 소수민족 동족(동族) 여성과 춤을 춘다.

영화는 코믹하고 무해하지만, 결국엔 공허했다. 청룽이 60대에 이르러 움직임이 둔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는 마치 중국의 유명 관광지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듯한 영화였다. 특히 중국 소수민족 전통에 대한 묘사는 얄팍했다. 이 영화 속 소수민족은 관광 엽서처럼 박제된 전통을 전시하고 있었고, 청룽은 이들을 중국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청룽의 ‘친중국’ 행보는 유명하다. 올해도 청룽은 춘제(설) 전날 저녁 방송되는 유명 프로그램인 CCTV <춘완>에 출연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청룽은 소수민족 대학생 대표들과 함께 ‘국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무대 뒤 배경에는 오성홍기와 만리장성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누가 착한 애고 나쁜 앤지 아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관객도 용하게 알아챈다. 청룽은 ‘국가대표 연예인’이 됐지만, 잃은 건 대중의 사랑이었다.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의 국내 관객수는 2만2000여명. 한때 ‘명절엔 성룡’이란 극장가 법칙이 무색한 흥행성적이었다. <춘완> 역시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화제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무국적 예술가’는 없다. 국가가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는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예술가는 법적·도적적 의무가 있다. 예술가도 때로 국가와 협력한다. 이름 자체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할리우드의 마스터 앨프리드 히치콕은 2차대전 당시 정부 지원으로 홍보 영화를 찍었다. 장이머우는 베이징 올림픽, 대니 보일은 런던 올림픽 개막식 총연출을 맡아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탁월한 기예를 가진 예술가가 국가의 지원을 얻어 자신의 성장 기반이 된 공동체를 위해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가가 국가 권위에 포박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가 예술가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국가는 강하지만, 한 예술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소유할 만큼 강해서는 안된다. 가장 예민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를 쥐고 흔드는 정부는 그 어떤 시민도 통제할 수 있다. 예술에는 국가 아니라 그 어떤 강력한 권위에도 복속되지 않을 자율적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조건이다.

정부를 비판하고 국가 권위를 조롱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국가는 직접 나서 작품을 단죄할 수 없다. 대통령을 쥐에 비유한 그래피티도, 누드화에 합성한 회화도 작품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별다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 비판은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몫이다.

이른바 ‘블랙리스트’는 국가가 직접 나서 예술가를 통제하려 한 사건이다. 돈에 꼬리표를 붙여 지원받은 예술가를 제 맘대로 부리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원을 끊은 비열한 행태였다. 단지 돈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등 뒤에 시커먼 딱지를 붙여놓고, “저 사람을 괴롭히라”고 정부 조직 사람들을 윽박지른 사건이다. 그 돈이 대통령 돈인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디 갔나. 이 정부가 내건 ‘문화융성’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예술을 뭘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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