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쓰던 물건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있다. 따져보면 모빌, 기저귀, 젖병 등은 진작 처분됐지만, 사용한 기간이 적거나 크기가 작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처분한 물건들은 아이가 꽤 오랜 기간 사용한데다가 크기가 커서 물건이 사라진 공간이나 느낌이 각별하다. 


먼저 부스터. (아마 아기를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모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부스터는 일종의 보조 의자다. 몸집이 작은 아이가 성인 의자에도 앉을 수 있도록 돕는 기구다.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아이를 앉힐 수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아이가 홀로 앉을만큼 허리 힘이 받쳐주지 않았을 때, 부스터를 들고가 거기에 앉혀두곤 했다. 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 같은 곳에 갈 때 그랬다.  


다행히도 아이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다. 이 부스터에 앉아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을까. 쌀밥, 죽, 시리얼, 키위, 사과, 저지방 우유,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 볶은 멸치, 두부, 김부각, 복숭아 요거트... 많이 먹고 많이 흘려댔다.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음식을 엎고, 옷을 더럽혔다. 한 번 밥을 먹고 나면 식탁 주변에 밥풀이나 반찬 부스러기가 꽤나 떨어져 있어서, 식탁을 훔치는 것은 물론 바닥까지 청소해야 했다. 


그렇던 아이가 이제 부스터 없이도 의자에 앉을 수 있다. 외식을 할 때도 어린이 의자가 마련돼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의자에 부스터를 고정시키는 끈을 풀고 나니 마치 오래 한자리에 있었던 쇼파를 들기라도 한 듯, 그 밑에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가득했다. 아마 요란했던, 하지만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이 유아기에 거쳤던 그런 식사의 흔적들이겠다. 


이제 아이는 음식을 많이 흘리지 않는다. 손가락을 끼우는 고리가 있긴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한다. 어른처럼 국그릇을 들고 후루룩 들이키는 모습을 보인지도 꽤 오래 됐다. 식탁이 아이의 앉은키에 조금 높아보이긴 하지만, 부스터에 앉으면 오히려 더 불편할 것이다. 


부스터 없이 함께 식사를 시작한 이후, 우리는 진짜 '겸상'을 하고 있다. 아이는 누군가 밥을 떠먹여 주거나 자리를 따로 마련해줘야 할 정도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란히 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다. 같은 음식을 두고 숟가락을 드는 우리의 눈높이는 같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또 하나 처분한 물건은 미끄럼틀이다. 이건 정말 컸다. 거실의 절반을 가로지를 정도였으니까. 그 크기를 미처 생각 못하고 주문한 뒤 설치했을 때는 그리 잘 꾸며지지도 않았던 거실의 정경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많은 어색한 것들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니 미끄럼틀은 마치 원래 거기에 붙박이로 있었던 것처럼 우리 집의 일부가 됐다.  


야심차게 들여놨지만 사실 아이는 미끄럼틀을 잘 타지 않았다. 차라리 미끄럼틀을 이용한 장난을 더 많이 쳤다고 할 수 있겠다. 미끄럼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거나(그래서 미끄럼을 타면 바지에 크레파스를 묻히거나), 미끄럼틀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미끄럼틀 아래의 공간을 은신처로 삼아 장난을 치거나, 미끄럼틀 위에 올라서 아빠가 절벽을 타고 올라오게 하는 인형을 막아내는 놀이를 하거나, 급기야 최근에는 미끄럼틀 위에서 선 채로 후다닥 뛰어 내려오는 놀이를 선보여 엄마를 놀라게 하거나.


미끄럼틀을 처분하기 전 아이에게 혹시나 하고 물었다. 어떤 동생에게 주려고 하는네 섭섭하지 않겠느냐고.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요"라고 했다. 아내는 육아 관련 카페에 '드림'글을 올렸고, 글을 올리자마자 1시간만에 동네 주민이 나타나 미끄럼틀을 가져갔다. 


"괜찮아요"라고 한 아이의 진짜 마음을 나는 모르겠다. 정말 괜찮은 것인지, 이제 미끄럼틀 같은 것에 집착해 떼를 쓰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거실 한 켠이 텅 비어, 마치 이사를 하다만 것 같은 내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다. 저 텅 빈 한 구석에 무언가 가구를 사서 들여놔야 할 것 같은 느낌. 아무튼 아이는 미끄럼틀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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