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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아남아야 할 괴물. <모비 딕>




본문만 684쪽인 장편을 읽었으니 무슨 말이든 한 마디 남겨야겠는데, 선뜻 모르겠다. 초반 100쪽은 '이렇게 재밌는 얘기가 있나' 싶어 읽었는데, 막상 피쿼드 호가 출항을 시작했는데 고래 한 마리 나타나지 않고, 또 그 사이를 틈타 이슈메일은 고래의 생태니 포경업의 유래니 전설 속의 바다 괴물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밑도 끝도 없이 하니, 이게 고래 백과 사전인가 장편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서 차라리 도판이 들어있는 4만8000원짜리 책을 샀으면 고래에 대해선 박사가 됐을텐데 돈 아낀다고 2만원짜리 그림 없는 책 샀다가 읽기 힘들기만 하다고 후회하다가, 그래서 중간에 교보문고에 가서 고래 그림 구경이라도 하려고했는데 광화문점에는 품절이라고 없어서 헛수고하고 오기도 하고.

<모비딕> 텍스트와 큰 관련 없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만, 헤럴드 블룸이 썼듯이 에이허브 선장이 '미국적 프로메테우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문학사상 불멸의, 원형의 캐릭터로 남게 됐다는 사실만은 살짝 감이 오기도 함. 사실 대부분의 독자는 이성적, 합리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소시민적이고 안정지향적인 마음에서 에이허브의 끝모를 복수심과 광기와 집착을 제어하려하는 유일한 인물인 스타벅의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이허브의 막나가는 행동을 글자 너머로 상상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일지도. 다시 블룸은 전하길 기독교도 비평가인 오든은 에이허브를 두고 "실제로 그의 전 생애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반항심으로 십자가를 집어드는 그런 삷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현대인들이 상식선에서 공유하는 생태주의적 감수성 때문인지 몰라도, 놀라운 것은 에이허브를 비롯해 그많은 피쿼드 호의 선원들이 고래를 좇아 죽여 이용함에도, 그리고 알비노 향유고래 모비 딕은 리바이어던 같은 사악한 바다 괴물로 묘사되고 있음에도, 독자는 모비 딕이 피쿼드호를 완전히 박살내 그중 내레이터인 이슈메일만이 흥미진진한 야만인 퀴퀘크의 텅빈 관을 타고 살아남음에도, 결국 피쿼드호의 난파와 패배가 '사.필.귀.정'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 그래서 모비 딕 같은 괴물 고래가 아직도 살아서 태평양과 대서양과 인도양을 휘저으며 여느 고래들을 보호하고 인간을 벌주고 지구를 '있는 그대로'(let it be) 두는데 힘을 보태주기를 꿈꿀 수 있다는 점. 

에이허브, 오래 타오른 촛불이 스스로 꺼지듯 너의 욕망을 재우고 바다 속에 잠들라. 스타벅, 불운한 소시민 가장이여, 다음 세상엔 고래잡이가 아니라 은행원으로 태어나기를. 퀴퀘크, 그대의 선조들 중 누구도 고래잡이인 적 없으나 그대는 세상에 홀로 선 가장 훌륭한 작살꾼이었다. 이슈메일, 기억하고 적어두고 상상하고 완성하라. 또다른 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