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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안과 호기심




'빨래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다가 이번에 썼다. '불안과 호기심'이라고 붙여준 제목이 마음에 든다. 


어느 꿉꿉했던 날의 일이다. 한밤에 세탁기에 빨래를 넣어 돌리는데 아파트 아랫집 주민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아랫집 다용도실 쪽에서 물이 새고 있다고 했다. 당장 원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세탁기의 전원을 꺼야했다.


한창 하던 빨래가 문제였다. 세탁기가 ‘헹굼’ 상태였기에 빨래는 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빨래를 꺼내 욕실로 옮긴 뒤 일일이 헹궜다. 다 헹군 다음엔 있는 힘을 다해 빨래를 짜 건조대에 널었다. 다 짜고 보니 손바닥이 까져 있었다. 탈수기를 썼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물기를 짜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집안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쉰내가 가득차 있었다. 덜 마른 빨래가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해 그렇게나 힘들여 빨래를 짰는데도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엔 그보다 더한 더위, 습도를 기록한 날도 많았지만, 그날만큼 지독하게 빨래 냄새가 난 적은 없었다. 세탁기로 탈수한 빨래들은 섬유유연제 향기를 살짝 풍기며 뽀송하게 말라있곤 했다. 손으로 짠 빨래는 어림 없었다. 천하장사가 와서 빨래를 짠다 해도, 한국의 여름 습기를 이길 방법은 없어 보였다.


새삼 세탁기의 위력을 느꼈다. 따져보면 여름뿐만이 아니다. 한겨울에 살얼음을 깨고 냇가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해야했던 선조들은 더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세탁기는 빨래라는 중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고마운 기계다. 현대의 가정엔 그렇게 훌륭한 기계들이 많다. 냉장고 없이 밑반찬을 보관하는 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전기 매트 없이 보내는 겨울밤이 얼마나 추울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기계의 종류가 갈수록 많아지고 기능이 세밀해진다는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제는 냉장고로 충분하지 않아 김치냉장고 정도는 따로 들여놓는 집이 많다. 전기 매트에서는 전자파가 나올 것 같아 온수 매트를 다시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겨울에 가습기를 쓰는 일에는 일찌감치 익숙했으나, 이젠 여름에 제습기도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기계는 스마트폰이다. 지난 몇 년 사이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대의 삶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버스 시간은 어떻게 알고 정류장에 나갈까. 무지갯빛 케이크 사진은 무엇으로 찍을까. 처음 가본 동네에서 길은 어떻게 찾을까.


오랜 논란 끝에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고 한다. 반대자들은 케이블카가 이 지역의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조금 다른 관점으로 케이블카를 바라보고 싶다. 케이블카가 놓일 오색약수터 부근과 끝청봉 부근의 3.5㎞ 구간은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험해 등산인들이 즐겨찾는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면 등산인들이 땀을 훔치며 오를 정도로 험한 구간을 딱딱한 구두 신고도 갈 수 있다. 케이블카에 올라 내려다보는 설악산 풍경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적 쾌감을 전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케이블카가 놓인다니 그 풍경이 궁금하긴 하다.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계획도


광폭한 현대 문명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일면서 ‘개발’은 어딘지 나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 됐다. 하지만 무정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모두 개발이었다. 그렇다면 설악산 케이블카는 개발일까, 난개발일까.


개발은 끝이 없고, 테크놀로지는 영원히 발전한다. 그것은 마치 질주하는 대형견같다. 목줄을 쥔 주인이 끌려가는지 끌고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달리던 개가 멈춘 뒤 주인이 정신을 차릴 그곳은 어디일까. 무당처럼 신기가 넘쳤던 예술가들은 종종 테크놀로지가 극도로 발전한 미래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그려내곤 했다. 테크놀로지가 안내할 세상에 대해 막연한 불안과 작은 호기심이 뒤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