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놀란'에 해당되는 글 2건

  1. 새로운 볼거리, 오래된 주제, <인터스텔라>
  2. 프리케리아트여, 단결하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 (4)







**스포일러 있음. 



촬영장에서도 잠바데기 같은 건 입지 않으시는 젠틀맨, 크리스토퍼 놀란(왼쪽)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를 보러 간 극장 옆에는 세계 최대의 스크린임을 입증하는 '기네스 레코드' 표시가 붙어있었다. 황폐하고 좁은 지구를 떠나 끝없이 넓은 우주를 탐험하는 영화이니 큰 스크린에서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난 이 영화의 주제가 매우 고전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고루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형용사를 택할 지는 아직 결정 못했다. 


<인터스텔라>가 그리는 지구의 근미래는 그 어느 디스토피아 영화보다 디스토피아적이다. 차라리 혜성과 충돌하거나 외계인의 침략을 받거나 유전자 변형 괴물이 나타나거나 엄청난 독재 체제 아래서 신음하고 말지, 온 지구가 누런 먼지 구덩이 속에서 조금씩 목 마르고 굶주리고 헐벗어 죽어가는 모습은 끔찍하다. 미세 먼지를 연신 들이킨 사람들의 폐가 조금씩 나빠져 늘 기침을 해대는 광경도 참기 힘들다.


모든 인류가 농사를 짓느라 전력해 군대는 사라졌고, 대학은 거의 사라졌으며, 우주 개발은 당연히 하지 않는 시대. 전직 엔지니어이자 조종사였던 쿠퍼(매튜 매커너히)는 하기 싫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우연 혹은 초자연적 현상이 빚어낸 신호를 해독해 비밀리에 우주 탐험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나사 기지를 찾아낸다. 쿠퍼는 졸지에 나사로 계획의 일원으로 꼽힌다.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난 인물이다. 나사 연구진들은 죽어가는 인류를 부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토성 근처에서 누군가(외계인?) 만들어놓은 웜홀을 발견했다. 이 웜홀을 이용하면 지금까진 불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지던 은하계간 우주여행을 할 수 있다. 이미 10명의 용감한 과학자들이 각기 우주선을 타고 선발대로 출발했다. 그들의 목적은 인류가 이주할만한 행성을 찾아서 지구에 보고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3곳의 행성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쿠퍼와 그 팀의 임무는 이 세 행성을 찾아 그곳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플랜A와 플랜B가 있다. A는 적당한 행성을 찾아 전 인류를 그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B는 A가 여의치 않을 때 실행되는데, 수정란 형태로 보관중인 수백 명의 인류를 새 행성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B가 실행된다는 의미는 지금 지구에 남은 인류는 그대로 죽는다는 뜻이다. 



숏커트도 어울리는 앤 헤서웨이(왼쪽). 근 몇 년 사이 갑자기 연기의 신이 된 매튜 매커너히.


지금까지 우주를 탐험, 여행하는 영화는 수없이 제작됐지만, <인터스텔라>는 미증유의 시각적 이미지를 몇 가지 보여준다. 구형으로 설정된 웜홀, 과학계 바깥의 사람으로서는 '검다'라는 인상밖에 없는 블랙홀 같은 것들이다. 스티븐 호킹의 머리 속에는 이런 곳의 모습이 막연하게나마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웜홀, 블랙홀의 생김새와 느낌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월홈보다 블랙홀을 그려내기가 어려운 것인지, 쿠퍼와 그의 로봇 타스가 블랙홀을 지나는 대목은 시각보다는 관념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연출됐다. 블랙홀에 들어간 쿠퍼는 우주선이 폭발 위기에 처하자 탈출하는데, 이후로는 시각보다는 쿠퍼의 거친 호흡 소리가 더 관객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종반부 장대한 관념의 세계로 본격 진입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야말로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 <인터스텔라>의 할아버지 뻘쯤으로 보인다. 타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유명한 모노리스를 닮았다는 점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큐브릭의 인물들이 초인의 탄생, 진화의 새로운 시작, 인류의 기원, 테크놀로지의 위험 등을 말하기 위해 우주로 떠났다면, 놀란의 인물이 우주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식 사랑이다. 쿠퍼는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우주로 떠난 듯 보이지만, 그 사명감의 바탕에는 아직 어린 아들과 딸이 황페한 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쿠퍼에게 우주 탐험을 설득하는 브랜드 박사는 다음 세대, 즉 쿠퍼의 아들과 딸이 지구의 마지막 세대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도 떠난 아버지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 사이에 일어난다. 아버지는 딸을 살리기 위해 떠났지만, 딸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여긴다. 지구에선 우주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우주에선 답할 수 없다. 메시지를 보낸 자식들은 서서히 지쳐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 트릭을 써서 애절함을 배가시킨다. 근처에 있는 블랙홀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지구와 다른 행성이 탐험 초반부에 나온다. 이 행성의 1시간은 지구의 7년. 쿠퍼와 일행은 이곳에 착륙해 생존자의 신호를 찾는데, 몇 가지 사고가 겹쳐 예정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우주의 모선에 남아있던 일행은 그 사이 흰 수염이 날 정도로 늙어 있다. 지구 시간으로는 23년쯤 흘렀다는 말도 해준다. 부모와 자식이 생이별한 시간을 순식간에 수십 년으로 늘려 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나중에 쿠퍼가 블랙홀을 통과하면서 더욱 늘어난다. 


쿠퍼가 우주로 떠난 것은 자식사랑, 지구로 돌아오려 한 것도 자식사랑 때문이다. 어머니도 아닌 할머니처럼 늙어버린 딸과 쿠퍼가 재회하는 모습은 이상하면서도 울컥하다. <인터스텔라>가 하드SF의 상상력에 기반한 장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169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긴박감 있게 연출됐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아이맥스로 2차례 보았다. 한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이나 본 경험은 별로 없는 듯 하지만(아, <인셉션>도 두 번 봤구나), 오늘이 오프라 영화를 한 편 보고 싶은데 달리 보고 싶고 시간이 맞는 작품이 없었다. 안내키는 영화 볼 바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다시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첫번째 관람 후 영화에 대해 조금 투덜대긴 했지만, 아이맥스로 본 시각 경험은 괜찮았다. 앞으로 이 영화를 아이맥스로 볼 기회는 사실상 없지 않은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번째 배트맨 영화, 즉 <배트맨 비긴즈>에선 거의 느끼지 못했고, 두번째 영화 <다크 나이트>에선 조금 느꼈던 그의 우파 성향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조금 놀랐다. 물론 우파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베인과 그의 '군대'는 확신범들이다. 단지 생계가 아니라 신념을 위해 범행을 저지르고, 이를 위해선 스스로를 희생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영화 초반 비행기 납치 장면에서 베인의 부하 중 한 명은 "시신이 잔해에서 발견돼야 한다"는 베인의 말을 웃으면서 따른다. 혁명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이들은 하수구에 마련된 기지에서 준군사집단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폭력 혁명이다. 이 혁명 집단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운동권 세력인 노동자, 농민, 학생이 아니다. 고아, 부랑자 등을 비롯해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자들, 요즘 쓰는 말로 프리케리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고담이라 부르지만 뉴욕임이 분명해 보이는 영화 속 도시에서, 베인의 수하들이 제일 처음 치는 곳은 의미심장하게도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다. "훔처갈 것이 없다"는 거래소 직원의 말에, 베인은 "너희들은 잘도 훔치지 않느냐"고 답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통상적인 제작 기간이라든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후반 작업 시간을 고려할 때,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이미 몇 년 전에 쓰여졌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일어난 것이 지난해 9월이니,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우파 예술가의 불안한 예지력은 이 운동의 발발 조짐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는 소리겠다. 베인은 고담(뉴욕)을 통째로 인질로 잡고 권력 체제의 역전을 시도한다. 미식축구장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 그들이 처음 공격에 나선 곳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소 불법 또는 초헌법적으로 감금해둔 범죄자들이 모인 교도소. 베인은 기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그 교도소를 "압제의 상징"이라 부르며 배트맨에게서 빼앗아온 무기로 정문을 부서버린다. 프랑스 혁명 역시  상징적으로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했다지?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그러나 아무리 베인이 낭만적이고 순정한 남자라 하더라도, 이 프리케리아트 혁명가 집단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블록버스터에서 분명한 악당의 위치를 점한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산 고담(또다시 뉴욕 혹은 전세계) 부유층의 재산을 털고, 기존 군대와 경찰을 무력화하고, 새 법을 만들고, 그래서 명백히 사회주의 혁명기의 인민재판을 연상시키는 군중재판을 열어 기존 체제에 부역하던 자들에게 '추방 혹은 사형'을 언도한다. 계급적으로는 브루스 웨인보다는 베인에게 훨씬 가까울 듯한 셀리나, 즉 캣우먼조차 베인 집단이 일으킨 가치 전도, 체제 전복의 혼란기에 염증을 느끼는 듯 하다. 


기존의 정치, 경제 체제는 어떻게 수호되는가. 배트맨 영화이니 당연하게도 브루스 웨인이 답이다. 이 괴짜 억만장자는 재력과 지능으로 고담시를 구하라는 충실한 집사 알프레도의 조언을 무시하고, 불편해 보이는 망토를 두른 채 직접 범죄자를 잡겠다고 뛰어 다닌다. 만약 이건희에게 사회정의를 세우겠다는 엄청난 열의가 있다면, 그는 경찰력을 개선하는데 돈을 대거나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재단을 만들어 그들이 혹여 범죄를 저질러야할만큼 궁색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편이 나을거다. 그러나 고담시의 이건희는 그 돈으로 온갖 신기한 무기를 만든 뒤 그것을 이용해 직접 범죄자를 막겠다고 나선다. 



빈자 대 부자. 혁명군 대 (유사)정부군. 


배트맨은 8년간 은퇴한 상태였다. '바깥 세상과의 고리'인 연인을 잃고 상심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인으로 대표되는 '악'이 창궐한다. 우리의 선량하고 순진한, 그러나 집요한 베테랑 경찰 고든은 병실에 누워 말한다. "배트맨은 돌아와야 해." 허나 고든 청장님. 악이 체제를 좀먹는게 아니라 체제 자체가 악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어쨌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신경질적인 텍스트다. 지금의 고장난 자본주의 체제에는 온전히 작동하게끔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으며, 체제 수호는 오직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괴짜 백만장자의 편집증적인 정의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나. 배트맨은 인간이고, 인간은 죽을테니. 제2의 베인, 제2의 조커가 나타날 가능성은 많지만, 제2의 배트맨이 나타날 가능성은 그보다 적으니. 정의감, 직관, 지능은 있지만 결정적으로 돈은 거의 없는 로빈으로는 좀 힘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