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 해당되는 글 2건

  1. 살인이 드러내는 삶의 비루함,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야기들
  2. 차가운 현대사의 뜨거운 재현, <일본의 검은 안개>

두 군데 출판사(북스피어, 모비딕)에서 연합해 내고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들을 몇 권 읽었다. <일본의 검은 안개>는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고, 이번에 더 읽은 것은 <짐승의 길>, <D의 복합>, <역로>다. 앞의 두 권은 장편, 마지막 것은 단편집이다. 


흔히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불리는 마쓰모토는 41세에 뒤늦게 작가로 데뷔해 이후 40년 동안 100여편의 장편, 1000여편의 중단편을 써낸 다산의 소설가다. 인간인 이상 그 작품들이 다 훌륭할 수는 없을테고, 한국에서는 그 중 괜찮은 것들이 소개되는 중일 것으로 짐작한다.(101편의 영화를 찍은 임권택 감독도 80년대 이전 영화에 대해선 손사래를 친다.)  이번에 읽은 책들도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마쓰모토 세이초 센세(1909~1992)


그 중 가장 괜찮았던 것은 <짐승의 길>. '짐승의 길'이란 짐승이 자주 오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고 한다. 인간이 이것을 길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그 길을 걸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 제목이 독자에게 주는 암시는, 등장 인물 중 누군가가 인간이 걸어선 안될 길을 걷다가 몰락하리라는 예상이다. '짐승의 길'은 메타포로 뛰어나고, 제목으로서도 탁월하다. 


다미코는 불쌍한 여인이다. 미모가 사라지지 않을 정도의 젊은 나이지만, 인생이 일찌감치, 완전히 꼬여버렸다. 철없는 시절 만난 남편은 건달에 가까운 이였는데, 그나마 불치병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생활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방 안에서 거동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어서 애욕만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에너지가 딱 두 군데로 쏠려 있다. 무시로 성을 내는 성기, 그것을 자극하는 두뇌의 상상.  


다미코는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가계를 꾸려간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수입에 생계를 의존하면서도, 또 아내를 괜히 의심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그 좁은 방에서 상상하고 질투한다. 그리고 아내가 한 주일에 한 번 집에 오면 말로, 몸으로 마구 괴롭힌다. 그 끈적한 마음의 묘사가 '후덜덜'하다. 여기 비하면 이상의 <날개>는 참으로 점잖다.  


그런 다미코에게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이 뻗친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다미코가 '짐승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은 어느 독자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손을 잡지 않는다면 또 어쩔 것인가. 평생 괴물같은 남편에게 붙잡혀 살라는 말인가. 그럴 바에야 짐승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유혹됐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다미코는 일본 사회 '흑막'의 집에 '첩'으로 들어간다. '흑막'이라고 표현된 늙은이에 대한 묘사가 흥미진진하다. 그는 일본 정관계를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실력자인데, 놀랍게도 그 어떤 직책도 없다. (다미코의 남편과 똑같은) 병이 있어 집에만 머무는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일본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간다. 그가 어떻게 이런 권력을 얻게 되었는지 밝혀 나가는 것도 소설의 주요한 축이다. 그의 힘은 전쟁 시기의 어떤 일들과 관련이 있다. 


<짐승의 길>은 추리물로서는 시원치 않다. 우연히 찾아간 호텔 복도에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결정적인 사건을 벌이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건이 풀려나간다. 사실 이 소설에 추리랄 것도 없다. 사건의 진상은 이미 다 드러나 있으니. 남들이 다 덮어둔 사건에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덤벼드는 노회한 형사 한 명이 나오긴 하는데, 그 역시 사건 해결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다름 아니라 다미코의.....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짐승의 길>은 적당히 통속적이면서도, 그 통속성 안에 삶의 비극적 단면을 잘 포착해 제시한 작품이다. 다미코의 사연은 극적으로 꾸며진 이야기 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D의 복합>은 우연 혹은 필연으로 살인사건 풀이에 연루되는 2류 작가 이야기다. 뒷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힘은 있는데, 난 이런 식의 지도 풀이, 암호 풀이 추리물이 조금 작위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역로>는 빼어난 단편집이다. 여기 실린 8편의 단편들에선 대체로 누군가가 죽고, 살아남은 누군가가 무심코 살아가다가 한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어 뒤늦게 진상을 밝힌다. 이 단편들에서 죽는 사람, 사는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한때 바람둥이에 미남이었으나 쉰 네살이 먹도록 자기가 매력있는줄 알고 주접을 떠는 중년 남자, 가족의 삶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 놓은 뒤 정년 퇴직한 뒤에는 뒤늦은 로맨스를 즐기고픈 남자, 자신의 승진을 막고 있는 상사를 미워하는 직장인, 부정부패 사건의 말단에서 연루된 하급 공무원, 성실하고 듬직했던 같은 남편의 외도를 뒤늦게 알아챈 주부 등이다. 하루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온 이들은 창졸간에 죽거나 누군가의 죽음에 임해, 지금까지 애써 모른 척 하거나 무의식으로 덮어두었던 삶의 비루함을 목격한다. 살인자를 잡든 못잡든, 이 과정은 참 슬프다.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의 <일본의 검은 안개> 상, 하권을 읽다. 마쓰모토는 일본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킨 작가라고 한다. 책날개에는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내서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근 몇 년 사이 읽은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코 모두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읽은 몇 안되는 사회파 추리소설중에는 미야베의 <화차>가 가장 좋았다)





마쓰모토는 찣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다가 41세에 작가로 데뷔해 이후 40년간 장편만 100편, 중단편을 합하면 1000편의 작품을 써냈다고 한다. 단행본으로는 700권에 이른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 정도를 손으로 썼다면, 그 손은 분명 펜을 들기(혹은 끼우기) 좋은 방식으로 굽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중엔 태작도 있을 것이고 자기복제도 있을 테지만, 한 가지 일을 그리 꾸준히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꾸준히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일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떠나지 않고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가치 있다. 


패전 직후 일본에는 승전국 미국의 GHQ(연합국 총사령부)가 들어서 6년간 간접 통치를 했는데, 그 수장이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GHQ는 일본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방부 중심의 G2와 국무부 중심의 GS의 알력 다툼이 심했다. GS는 일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심는 것이 목표였고, G2는 일본을 소련, 중국의 공산주의 블록에 대항하는 최전선으로 활용하려 했다. 초기엔 GS의 힘이 셌으나, 후기엔 G2가 강해졌다. 이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에 따른 공산주의 국가와의 냉전 시작이라는 세계 정세의 흐름과도 맞아떨어진다. 


<일본의 검은 안개>는 GHQ 시기 일본에서 벌어진 12개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논픽션이다. 하나같이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밝혀졌다 해도 의문을 남기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뒤에는 G2, GS의 힘겨루기와 패전 이후 일본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이 놓여 있다. 


GHQ로부터 강요된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고민하던 일본 국철의 총재는 철로변에서 토막난 사체로 발견된다. 당국은 고민하던 총재가 자살을 택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마쓰모토는 GHQ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총재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제거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공산당과 GHQ 사이의 이중첩자 노릇을 한 것으로 추정된 사내는 어느날 연기처럼 종적을 감춘다. 사내는 수십년간 중국에 연금됐다가 80년대에야 일본으로 돌아온다. 마감 직전의 제국은행에 들어와 검역관을 자처하며 은행원들에게 예방약으로 위장한 독약을 먹여 살해한 사내의 뒤로는 731부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국전쟁이 남침이었는지 북침이었는지에 대해 마쓰모토는 모호한 입장인데, 분명한 건 한국전이 미국의 '빨갱이 사냥'에 좋은 구실이 됐다는 사실이다.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한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땅 혹은 세계의 어딘가에 한국이 없으면 안되었다"고 말한다. 


좀 놀라운건 마쓰모토가 이 책을 낸 것이 1960년이라는 사실. 해방 전후, 전쟁 전후의 혼란,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대결, 설익은 외국 제도의 도입과 부작용 등은 한국도 일본 못지 않았을 것이고, 그 와중에 석연치 않은 사건도 많았을텐데, 아무튼 마쓰모토는 그것들을 기록해 나름의 추론과 음모론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고종, 정조대가 추리 소설의 인기 소재가 된 지도 꽤 됐고, 그래서 별로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도 없을 듯 하니, 이제 우리도 현대사를 예술적으로 소화해보려는 노력을 할 때도 됐을텐데, 과문해서인지 그 방면의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 한국 현대사는 엄밀한 역사학자나 논쟁적인 정치학자의 손에서만 다뤄져야 할만큼 뜨거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