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해당되는 글 3건

  1. 현대 진화론과 고대 종교의 공통 해답, <초협력자>
  2. 과학과 진보를 믿지말라, <불멸화위원회> (4)
  3. 필연과 자유 사이의 긴장이 미를 만든다. <미의 기원>

초협력자

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사이언스북스/496쪽/2만원


진화론은 보따리다. 이 보따리는 너무나 커서 온갖 이질적인 주장과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보따리 속의 주장들은 서로 자신이 진화론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학계내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작 <종의 기원>(1859)에서 ‘진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찰스 다윈이 이 상황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진화론은 원래 생물학자들이 활개치는 영역이었는데, 나중엔 온갖 배경의 사람들이 진화라는 화두를 공유하려 했다. 사회현상에 진화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격렬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동반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귀여운 괴물들이 ‘진화’하게 만들었는데, 그 결과 전세계 아이들은 포켓몬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하는지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마틴 노왁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 입학학 그는 “수학에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을 정식화하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학적 진실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지구인 뿐 아니라 태양계 너머 머나먼 행성의 촉수 달린 외계인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주 자체가 수학”이다. 그러므로 생물의 진화에 대해 수학적 해석을 덧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옥스퍼드대, 프린스턴대를 거쳐 현재 하버드대 생물학과·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의 연구실은 ‘노왁 랜드’라고 불린다. 전세계에서 모인 생물학, 수학의 천재들이 노왁 랜드에서 수학을 도구로 생명의 기원,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마틴 노왁


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 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는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 쪽이 배신하고 한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 사자, 개미, 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죄수의 딜레마 도식. 수감되는 햇수는 본문과 다르다. 그런데 수감 햇수에 따라 범죄자들의 선택도 달라질 것 같기는 하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 가량의 미성년 박쥐들이 피 한 톨 마시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들이 과거에 자신들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 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 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들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 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들은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 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새,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6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 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 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들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 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기후 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세계 현인들의 말을 살피면 ‘도덕 체게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마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통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들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들,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들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 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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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화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300쪽/1만6500원


1983년 가수 민해경은 ‘서기 2000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우리는 로켓트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그대가 부르는 노래 소리 온 세상을 수놓으리/사바 사바 사바 그날이 오면은/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요” 


민해경의 ‘예언’은 일부 맞고 대부분 틀렸다. 성층권까지 올라가 자유낙하를 감행한 사내가 있긴 하지만, 우주여행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언감생심이다. 1, 2차 세계대전같은 대규모 전쟁은 없지만,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국지전은 오히려 잦아졌다. 결정적으로 틀린 부분은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기대다. 한국인은 30년전보다 즐겁고 행복한가. 경제가 발전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5위지만, 자살률은 그보다 높아져 세계 2위다. 그러나 민해경을 탓할 건 없다. 미래엔 인류 모두가 번영과 행복을 누릴 것이며, 특히 과학 발전이 그것을 추동하리라는 기대는 많은 현대인이 공유했다.


현대보다 훨씬 급격한 과학 기술의 발전을 목도한 19세기 말 유럽의 지식인들은 조만간 도래할 유토피아의 환상에 휩싸였다. 심지어 이러한 환상은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모든 인간이 거쳐야했던 최종 관문, 즉 죽음마저 물리칠 수 있다는 망상으로 이어졌다. 


런던정경대학에서 유럽 사상을 가르치는 존 그레이는 <불멸화위원회>(원제 The Immortalization Commision)에서 이러한 망상의 두 가지 사례를 살핀다. 하나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다른 하나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한 진시황의 후예들이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 영국 지식인들에게 열광의 대상이자 불안의 근원이었다. 19세기 영국 사회가 대단한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있었다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설령 불가지론자라 해도 인간이 지구에서 가장 특별한 종이라는 믿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윈은 <종의 기원>(1859)을 통해 이 믿음을 박살냈다.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모든 종과 같은 수준이며,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게다가 다윈의 진화에는 진보도, 목적도 없었다. 인간이란 종의 출현은 신의 섭리나 우주의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였다. 


지식인들은 명백한 증거 앞에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인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다윈주의의 거대한 흐름을 막진 못했다. 그럼에도 지식인들은 불안해졌다. 정말 인간은 철창 너머 침팬지와 비슷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 삶에는 숭고한 목적이 없으며, 역사는 밝은 내일을 향한 진보가 아니란 말인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윤리관을 간직하고, 앞으로 펼쳐질 인류의 가능성을 믿었던 이들에게 이것은 난제였다. 윌리엄 제임스, 앙리 베르그송, 존 러스킨,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같이 저명한 지식인들은 오늘날 보기엔 황당한 학회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이 회장을 역임하거나 모임에 참여한 ‘심령연구학회’는 초자연 현상을 “편향되지 않은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심령연구학회는 심령 사진, 강신술 등에 얽힌 속임수를 폭로하면서도, 자신들이 과학적 방법으로 내세의 존재,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동 기술(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글의 내용을 의식하지 못한 채 무언가에 이끌리듯 글을 쓰는 것)을 통한 교차 통신(망자가 저승에서 보낸 메시지를 복수의 영매가 따로 수신해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이를 보여주려고 했다. 


심령연구학회 초대 회장을 지낸 사상가 헨리 시지윅은 다윈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서 갈팔질팡했다. 다윈주의를 따르자니 도덕적 의무가 희미해질 것 같았고,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자니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믿음이 아니라 과학으로 내세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목적 없이,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시지윅은 과학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과학에 기대었다. 과학이 세계를 탈주술화했다면, 과학만이 세계를 재주술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고전학자 프레데릭 마이어스는 처음엔 심령주의를 거부했다. 그것은 마치 “천국의 저택에서 앞문으로 내동댕이쳐진 다음에 뒷방 쪽문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이어스는 ‘목적 없는 과정’으로서의 다윈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인류와 과학의 진보에 대한 마이어스의 믿음이 너무나 강했다. 마이어스에게 진화란 이승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저승까지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라기보다는 우주적 진보의 한 단계였다.”


심령학자와 비슷한 시기에 왕성히 활동했던 우생학자는 모두 인간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간직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모가 있다. 우생학자가 이승의 결함 있는 인간을 없애려 했다면, 심령학자는 저승의 육신이 결함 없는 상태라고 믿었다. 말하자면 심령학은 ‘정신의 우생학’이었다. 심령학과 우생학은 결합해 기묘한 계획을 세웠다. 사후 세계의 완전한 인간들이 이승의 여성에게 연락을 취해 ‘영혼의 아이’를 낳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심령학자들은 이 아이가 인류를 혼돈에서 구원할 메시아적 임무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당시 아이 아버지는 60세의 귀족이었는데, “자신이 속한 계급의 규범에 따라” 아이의 핏줄에 대한 의심을 공공연히 말하진 않았다. 어거스터스 헨리 쿰브 테넌트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후 입대해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역 후에는 첩보기관에서 일했으며 훗날 수도사가 돼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쿰브 테넌트는 어머니와 친밀했던 심령학자들의 ‘계획’을 전해듣지 못했는지 메시아를 연상시키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매우 개인적인 감정에서 사후 세계를 연구한 이들도 있었다. 에드먼드 거니는 누이 중 세 명을 익사 사고로 잃었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내세의 누이들과 소통하려 했다. 누이의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어딘가에 있다면, 당장의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한 거니는 죽는 순간까지 영혼이 불멸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심령학자들의 교차 통신 연구는 1930년대 초에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의 이끌림대로 써내려간 문자들을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해낼 방법이 그들에겐 없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부 영국 엘리트들은 ‘혼돈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혼의 불멸성을 연구했지만, 그들은 정작 눈앞에 거대한 혼돈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이것은 '과학'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선형적인 진보사관으로 해석한 소련의 혁명가들은 다른 맥락에서 죽음을 연구했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은 나머지, 인간이 신격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건신주의라고 부른다. 소설가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을 기계라고 상상하는 편을 좋아한다. 소위 ‘죽은 물질’들을 정신의 에너지로 스스로 바꾸어 내고, 먼 미래에는 세계 전체를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어낼 기계로 말이다.” 그들에게 혁명이란 사회구조의 급진적 변혁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기도 했다. 


이제는 분명히 드러났다시피,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인간으로 가득찬 사회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그럴싸하나, 이를 위해 새롭지 않은 인간은 제거돼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했다. 고리키는 말했다. “러시아 시골에 있는 반쯤 야만인에, 멍청하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은 죽어 없어질 것이다.…그리고 그 자리는 학식과 지성이 있으며 열정적인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소련의 인간 불멸 프로젝트는 최초의 지도자 레닌의 시신 처리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됐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의 사망이 발표되자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지금도 레닌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말했다. 레닌의 장례식 주관자들은 이를 시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레닌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영원히 썩지 않게 보존하기로 했다. 당시엔 레닌을 냉동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물론 냉동의 궁극 목표는 레닌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성자의 육신은 부패하지 않는다”는 러시아 정교회의 믿음은 소련의 과학 기술을 통해 실현됐다. 당시 레닌의 장례 위원회 이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불멸화위원회’다. 


볼셰비키들은 스스로를 어떠한 신비주의도 거부하는 합리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상낙원이라는 신화를 구현하고 죽음을 정복하고 과학기술을 신처럼 숭배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 어느 시대의 종교인들보다 더한 신비주의자였다. 내일의 지상낙원을 위해 오늘의 사람들이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에도 출간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추악한 동맹> 등을 통해 ‘반(反)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보여준 그레이는 ‘달콤한 필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영국의 심령학자들처럼 사후 세계의 영혼들과 교신하려는 이도, 소련의 혁명가들처럼 정치적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이도 드물지만, 여전히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겠다고 시도하는 이들은 있다. 그레이는 ‘불멸주의’가 ‘인간 소멸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불멸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결국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과학과 주술은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세계가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레이는 묻는다. “왜 세계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혹은 이런 법칙들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물론 과학을 통한 세계의 탐구, 정치적 진보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맹신해서도 안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내세나 유토피아에는 낙엽이 지지 않는다. 그곳의 나뭇잎은 언제가 푸른색이다. 그러나 지금 창밖의 가로수를 보라. 서서히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 은행잎, 썩은 냄새를 풍기기도 하는 은행열매, 이것이야말로 현세의 아름다운 증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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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기원

요제프 H. 라이히홀트 지음·박종대 옮김/플래닛/376쪽/1만8000원


진화론은 유력하지만 완벽한 이론은 아니다. 찰스 다윈의 방대하고 독창적인 이론 체계 사이에는 몇 가지 구멍이 나있다. 이후 많은 후학들이 그 구멍을 메우려했고,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윈의 골치를 아프게 한 동물이 몇 종 있다. 특히 수컷 공작이 화려한 꽁지깃을 펼칠 때마다 다윈은 당혹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꽁지깃은 길고 많은데다가, 동물의 눈동자를 닮은 강렬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개월간 지속되는 발정기동안 수컷은 꽁지깃을 부채꼴로 펼쳐보이며 암컷에게 구애한다.  


그런데 발정기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수컷 공작의 길게 끌리는 꽁지깃은 이제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꽁지깃은 비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지상에서 걸을 때도 질질 끌린다. 야생에서라면 포식자들에게 잡히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수컷 공작의 꽁지깃은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에 위배되는 예다. 꽁지깃은 엄혹한 환경에서 생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치' 혹은 '낭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치, 공작 꽁지깃


다윈은 고민을 거듭했다. 진화론을 구하고 공작 꽁지깃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윈은 <종의 기원>이 나온 지 12년 뒤 또 하나의 이론을 발표했다. 바로 '성 선택' 이론이다. 수컷의 화려한 깃털 과시 행위, 거대한 뿔을 이용한 사슴들의 싸움, 각기 다른 음색으로 노래하는 새 소리 등은 암컷이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기고 발전했다는 논지였다. 자연 선택 영역에서는 각 개체들이 자연의 변덕에 적응하고, 성 선택 영역에서는 같은 종의 수컷들이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툰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도 허점이 있다. 암컷 사슴이 수컷 사슴의 뿔에 반했다고 하더라도,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연이 개체의 '허영'을 허락할만큼 만만한가. 1975년 이스라엘의 생물학자 아모츠 자하비는 "다윈 퍼즐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고 했다. 자하비는 성 선택 이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 '핸디캡 원칙'을 덧붙였다. 암컷의 마음에 들기 원하는 수컷은 단순하고 쉬운 것이 아니라 힘들고 비용이 드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 젊은 남자가 목숨을 걸고 오토바이를 빠르게 몰듯이, "수컷은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수컷 공작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핸디캡은 암컷에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요란한 깃을 갖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수컷이라면 그 유전자도 훨씬 뛰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독일의 진화생물학자 요제프 H. 라이히홀트는 다윈과 자하비에게 다시 의문을 제기한다. 북유럽의 목도리도요 수컷들은 색과 깃이 무척 다양하다. 그러나 암컷은 가장 눈에 띄는 하얀 깃의 수컷 대신 수수한 색깔의 수컷을 선택한다. 또 목도리도요 정도를 제외한 다른 수컷들은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다. 그러면 암컷은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고급 차를 가진 남자가 1명 있다면 여자는 그를 선택하겠지만, 세상 모든 남자가 고급 차를 갖고 있다면 여자는 선택하기 힘들다. 여기서 핸디캡 원칙의 허점이 드러난다. 


라이히홀트는 공작 꽁지깃의 다른 목적을 의심한다. 그는 화려한 깃이 수컷을 오히려 보호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공작은 자신을 잡아채려는 표범에게 꽁지깃만 떼어주고 나무 위로 도망친다. 그동안 '낭비'처럼 보였던 꽁지깃의 실용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울러 수컷의 화려함은 수컷이 출산 및 양육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이 그렇지만, 동물의 출산·양육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암컷 청둥오리는 몸무게의 3분의1에서 절반을 알에 투자한다. 또 먹이를 먹을 시간도 없이 둥지 자리를 물색하고 둥지를 만들고 그 안에 푹신한 것을 깐다. 알을 부화시키는데도 에너지가 소모되고, 부화한 새끼들이 홀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는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이 사이 수컷은 별다른 할 일이 없다. 놀고 먹으면 살이 찌고, 살이 쪄 둔해지면 포식자의 쉬운 먹이감이 된다. 그래서 수컷은 '다이어트'를 하는데, 몸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시끄럽게 노래하는 것이 바로 수컷의 다이어트다. 


공작이 라이히홀트의 가설을 증명한다. 수컷 공작 장식깃의 단백질 함량은 암컷이 알에 투입하는 양과 비슷하다. 또 수컷 공작이 털갈이를 하는 주기는 암컷이 알을 낳는 주기와 비슷하다. 반면 수컷이 양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종은 수컷과 암컷의 모양. 몸집이 비슷하다. 수컷도 양육에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꾸밀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미의 기원>은 1부 성 선택, 2부 미의 해석, 3부 인간과 아름다움으로 구성돼 있다.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1부에서 라이히홀트는 매우 신중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 후에, 이론과 관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새나 짐승의 생태를 통해 인간의 삶을 엿보겠다는 의도도 드러내지 않는다.  1부에서 그는 다윈을 닮았다. 


그러나 2부 이후부터 라이히홀트는 과감해진다. 자신의 가설과 관찰을 바탕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나간다. 여기서 그의 글쓰기 방식은 프로이트를 연상케한다. 어떤 독자에게는 불쾌감을 주거나 매우 단정적이어서 논란이 될만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1부와 2·3부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다. 


생물은 '환경이 찍어내는 복제품'이 아니다.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적응'은 가능성이지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에, 적응의 개념은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비슷한 환경에서 사는 두더지와 물밭쥐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이 도출된다. "유기체는 내적 복잡성과 신체 크기의 확대와 함께 삶의 외적 조건들에서 점점 자유로워진다. 생물이 비생물적 자연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것이 생물을 더 자유롭게 만들고, 생물은 독립과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미(美)는 환경에 적응할 필요와 환경으로부터의 자유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자유가 얼마나 커질지는 각 생물체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데, 인간이 다른 생물체보다 이 자유를 훨씬 많이 누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화생물학은 모든 생물 중에서도 오직 인간만이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품위'를 공격하곤 했는데,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동물 세계와 달리 왜 인간은 여성이 남성보다 꾸미길 좋아하고 아름다운가. 라이히홀트는 그것이 다른 동물에 비할 수 없이 오래 걸리는 인간의 양육 기간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걷고 1~2년 뒤면 생식 능력을 갖추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14~18년간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 가족, 공동체의 도움이 있어야 아이를 원활히 키울 수 있다. 여성이 스스로를 가꾸는 이유는 배우자인 남성이 아이를 돌보지 않은 채 떠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매력을 유지해야 남자를 붙잡을 수 있다. 동물 세계도 비슷하다. 새끼를 보살피고 번식 조건을 유지하기 어려운 종일수록 암수의 유대 관계가 좋다.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의 성(性)도 비슷하게 해석된다. 아이를 오랜 시간 함께 보살펴야 하는 남녀 파트너는 수시로 결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가장 강력한 수단이 성이다. 성은 자손 생산의 수단을 넘어 인간 결속의 원동력이다. 


3부의 어떤 대목은 문제적이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독자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말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젊게 행동하고, 또 남자들에게 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자들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여성적 공격성의 대부분은 경쟁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것이 미의 표현이다." "'그 여자가 그렇게 잘 살면 안 되지! 그 여자가 어떻게 나보다 잘 살아?' 이런 태도는 지금도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사회적 질투는 대부분 아름다운 여성에게 쏠려 있다."


역시 결론은 '자유'다. 생물은 환경에 길들여지지만, 또 거기서 벗어나려 한다. 어떤 종이 환경에 의해 허락된 이상형에 가까워진다면, 오히려 그 종은 멸망할 가능성이 크다. 유전적 다양성이 미미하면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 병원체에게 취약하다. 단일 혈통으로 내려온 지체 높은 귀족은 면역력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줄곧 이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여신'이라는 수식어를 헌사받는 아름다운 여성은 부와 권력을 누릴 가능성이 높겠지만, 저자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자식을 많이 낳는 여성은 아니"라고 위안한다. 


'표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떠안는 사회가 강한 사회고, 미의 이상에서 벗어난 개성이 강인한 종족을 만든다. 이 정도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질만한 결론이다. 물론 독일에서 '학계의 이단아'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는 저자가 올바름에 대한 세간의 정의에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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