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에 해당되는 글 2건

  1. 일중독자와 포르노배우의 유사성,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2. 어느 일중독자의 삶, <제로 다크 서티>

완전히 새로운 통찰은 아니지만, 신랄한 비유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나의 경우는 리뷰가 책의 분위기를 닮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리뷰의 표현도 신랄해졌다.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장혜경 옮김/로도스/212쪽/1만4000원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당신이 듣기에 거북살스러운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일의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당신이 포르노 배우 같다고 말한다. 이 30대 후반의 여성 철학자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욕망, 탈진, 중독, 우울증 등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고 한다. 


왜 내가 포르노 배우인가.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만원 지하철에 우겨넣은 뒤 직장으로 달려간 내가, 담배 피고 화장실 갈 시간을 아껴 일한 내가, 10분만에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남는 시간에 운동을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한 내가, 퇴근 후에도 다음날 회의에 내놓을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휴일에도 e메일을 체크하면서 일을 손에 놓지 않은 내가! 물론 일중독자라고 불리는건 수긍한다. 하지만 포르노 배우 같다고 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포르노그래피의 특성을 떠올려보자. 포르노 배우들은 인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기예를 보인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서든 섹스를 할 준비가 돼 있다. 일단 시작하면 인간이 할 수 있을까 싶은 고난도의 자세로 절정을 향해 오른다. 그렇게 격렬한 행위의 끝에는 힘찬 사정이 이뤄진다. 이게 끝이 아니다. 포르노 배우는 곧 다음 상대를 만나 또다른 섹스에 도전한다. 발기가 되지 않아 비아그라를 먹거나, 사정을 못하는 포르노 배우를 본 적이 있는가. 길고 나른한 전희에 1시간을 쏟아붓는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이 있는가. 


반면 에로틱은 육체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휴식, 나른함, 수동성, 여유를 동반한다. 에로틱은 “할 수 없음”도 인정한다. 포르노 배우가 보여주는 체위를 시도했다가는 허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래서 포르노그래피는 현대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직장인에게는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는 사정하지 못하는 포르노 배우와 같다. 발기한 성기가 있다면 섹스가 이루어지듯,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야 한다. 이 모든 행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포르노 배우는 보이지 않는 관객을 위해 섹스하고, 일중독자는 자신을 관찰하는 조직 혹은 규율을 위해 일한다.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는 않는다. 


“나는 일하는게 즐겁다”는 반박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일하고 성과를 내는데서 쾌락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일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좋아, 일을 할 수 없다면 내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런 노동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종종 사용되는 ‘근로자’란 어휘에도 ‘부지런하게 일하지 않으면 노동자라 부를 수도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노동자들은 ‘향락 노동’을 하고 있다. 


정말 그렇냐고 플라스푈러는 되묻는다. 이를 위해 그는 ‘향락’의 의미를 고찰한다. 원래 ‘즐김’은 죄였다. <성서>의 ‘창세기’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계몽주의 철학자들 역시 인간이 쾌락의 노예로 전락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즐기기 위해서만 사는 이의 실존은 가치가 없다고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플라스푈러의 모습. 영어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거의 독일어 웹페이지다. 대학 1학년때까지만 해도 사전 찾으면서 더듬더듬 독어를 읽을 정도는 됐지만, 이제는 '디 데어 데어 디' 같이 의미없는 주문만 할 줄 안다. 


향락에 죄의 그림자를 드리우려했던 인류의 노력에는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동물처럼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하고, 그 욕구의 실현에 금기를 두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인류 문명은 없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옥죄고 통제함으로써 자연과 대비되는 의미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금욕과 충동유예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으로, 다시 말해 사유하는 존재, 창조하는 존재, 그리고 도덕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에서 ‘탐욕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동물은 금기를 모르지만, 인간은 율법을 안다. 율법이 있어서 욕망은 더욱 매력적이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의 성기를 가리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금기가 없으면 향락도 없다. . 


현대의 향락 노동자들은 이러한 향락의 특징을 잘 안다. 향락을 즐기려면 무언가를 위반해야 하는데, 현대의 노동자들이 위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의 능력이다. 노동자들은 “할 수 있어”라는 주문을 되뇐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이 주문에 따라 해낸다. 그래서 “북극에 가서 에어컨을 팔아라”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회사는 이를 ‘자기 극복’이라 하겠지만, 다른 말로는 ‘자기 착취’다. 플라스퓔러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인용하면서 이 논리를 전개한다. 


일에 대한 태도를 사랑의 여러가지 양태와 비교해보면 좋겠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랑과 강박적인 사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타인을 소유하거나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수시로 전화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온갖 기상천외하고 값비싼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런 연인은 서로를 믿기 때문이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은 연인에게 속을까봐 불안해하는 시기가 아니라, 재회를 기다리는 설렘의 시기다.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이는 자기가 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한다.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늘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고, 상대방이 흘리는 미약한 사랑의 증거를 찾으려고 안달한다. 일중독자는 바로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지 않고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잃지 않기 위해 일에게 봉사한다.”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는 현대인의 노동 양태에 대한 분석을 넘어 현대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신체를 향한 성형의 욕망은 어떻게 봐야할까. 얼굴을 넘어 가슴, 허벅지, 성기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물론 성형은 전적으로 현대적인 현상은 아니다. 미의 기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고, 많은 문화권이 나름의 성형수술을 했다. 로마 여성들은 크고 반짝거리는 동공을 위해 맹독성 식물인 벨라도나 열매의 즙을 눈에 털어뜨렸다. 중국 여성은 전족을 했고, 사모아 남자아이는 무릎에서 엉덩이까지 빽빽한 문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성형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 현대의 성형에는 한계가 없다. 코를 세우면 턱을 깎고 싶고, 이후엔 가슴을 크게 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피부에 기미가 많은 것 같고, 이빨이 누렇게 보인다.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자유가 생기자, 아름다움의 기준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의 외모가 어딘지 조금씩 부족하다.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예전에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약재로 달랠 수는 있었지만 없애지는 못했다. 출산의 고통은 구약성서의 신이 여자를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면서 안겨준 것일 정도로 유래가 깊다. 그러나 현대의 산모들은 척추에 무통주사를 맞음으로써 산통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몸살이 났다고, 생리통이 심하다고 결근을 하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출근길 약국에 들려 독한 약 한 봉지를 털어넣은 뒤 회사로 들어선다. 어딘지 몽롱하긴 하지만 통증이 사라져서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그래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통증은 몸이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다. 잠시 멈추어서서 어디가 말썽을 부리는지 알아보라는 뜻이다. “나는 통증을 통해서만 나와 세상의 경계를 느끼고, 통증을 통해서만 일이건 사랑이건 운동이건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통증이 사라지면 유기체는 세상 속으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과거엔 도보, 말, 배를 이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한 시간이면 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남은 시간으로 무얼 하는가. 다른 일을 찾는다. 시간이 남으면, 또 다른 일을 한다. 어차피 일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단축해도 끝없이 일을 해야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는 짐이자 재난이다. 


플라스푈러는 ‘놓아두기’ 혹은 무위를 제안한다. 흔히 능동성은 삶, 수동성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요즘 같은 사회에 ‘놓아두기’를 말하면 일손을 놓자는 뜻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니 니체는 이미 100년도 전에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무엇을 행동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즉,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다. 


퇴근후 혹은 주말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도, 가기 싫은 헬스 클럽에 나가지도, 영어 시험 공부를 하지도 말고 있어보라는 말이다. 그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감각에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런 ‘깊은 권태’의 시간에 접어들어서야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이 시간의 무료함, 불확실함을 견뎌내고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는 범위를 벗어난 일을 지시받을 때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인간, 시스템, 법률도 바틀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이 기묘한 줄거리의 단편은 미국 단편문학 사상 매우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이유를 알겠다. ‘안 하기’는 매우 적극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약스포)


<제로 다크 서티>의 티져 포스터 


거친 비유가 되겠지만, <허트 로커>가 <추격자>라면 <제로 다크 서티>는 <황해>다. 전작이 특정한 정서의 핵심을 단순한 줄거리 안에 밀도 있게 담아냈다면, 이어진 작품은 확장된 서사 구조 안에 그 정서를 고르게 녹였다. <추격자>가 서울 서북부 단독 주택가의 밤을 맴돈다면, <황해>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반도 남부를 종으로 가로지른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의 도심과 사막, 미군 기지를 오가는데, <제로 다크 서티>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거리, CIA 비밀기지, 병영, 미국의 워싱턴DC, 버지니아의 CIA 본부 등을 포괄한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돼 스케일을 턱없이 키웠다가 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정한 사이즈에 맞는 이야기, 정서가 있는데, 그 사이즈를 키워버리면 이야기는 흐물흐물, 정서는 묽어진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독인 나홍진과 캐서린 비글로우는 모두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의 뼈대를 강화하고, 정서의 밀도를 높였다. 그래서 나는 <허트 로커>와 <추격자>보다 <제로 다크 서티>와 <황해>가 좋다. 


미국에서 <제로 다크 서티>의 고문 장면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비글로우는 고문을 반대하지만 영화는 특정 입장에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CIA 요원들이 피의자에게 고문을 해서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내고 그래서 결국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 과정에 이른다는 줄거리를 관객에게 따르게 한다. 그런 면에서는 고문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난 이 영화의 이런저런 정치적 입장보다도 다른 부분이 더 눈에 띄었다. 바로 '일의 세계'다. '갑툭튀'해 명배우 반열에 들어선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한 CIA 요원 마야는 정말 일을 열심히 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CIA에 입사해 12년간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일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앉은 CIA 국장이 빈 라덴 잡는 거 말고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냐고 묻자, 마야는 "없다"고 답한다. 그녀의 커리어는 오직 빈 라덴 사살에 맞추어져 있었다. 



24시간 빈 라덴 생각


영화의 첫 장면은 고문이다. 마야는 현장 발령을 받자마자 고문 현장을 참관한다. 맞고 질식되고 모욕당하던 피의자의 모습을 마야는 좀처럼 직시하지 못한다. 고개를 돌리려는 마음, 봐야한다는 마음이 반반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마야는 고문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낸다. 오히려 미국의 표현대로라면 주요 피의자에 대해 이 '강화된 심문법'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즐기는 듯 보인다. 책상 건너편에 앉은 피의자에게 질문을 던지다가 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앞에 앉은 건장한 군인을 툭 쳐 피의자에게 주먹을 날리게 하는 장면은 차스테인의 기가 막힌 연기 때문에 더욱 섬찟하다. 고문이 옳지 않다는, 인권에 대한 천부적인 감성을 마야는 이겨낸다. 일을 잘하기 위해. 


왜 그렇게 일을 잘하려 하는가. 마야는 조국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미국을 공격한 녀석들을 잡아내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놈들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가. 물론 애국심도,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선 그 어느 것도 주요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마야에게 빈 라덴을 잡기 위한 그 모든 합법적, 탈법적 수단은 모두 일의 완성을 위해서다. 그래서 그 일의 완성을 가로막는 것에는 격렬히 저항한다. 그것이 직속상관이라 해도. 


난 마야를 보면서 뜬금없이 <베를린> 속 한석규가 떠올랐다. 극중 국정원 직원인 그는 "이 일을 왜 하냐"고 묻는 북한 요원 하정우에게 "일이니까 하지. 일에 이유가 있냐"고 답한다. 한석규에게 '빨갱이' 잡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야에게 빈 라덴을 추격하는 일에도 이유가 없다. 그저 일이니까 한다. 


아마 한석규나 마야가 한국이나 미국이 아닌 반대 진영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똑같은 수준에서 열심히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보 요원이 되지 않았을까. 한석규나 마야가 정보요원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였다면 아이히만을 관찰했을 때처럼, 이들에게서 '무사유성'을 읽어낼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인류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따지지 않은 채, 그저 유능하고 성실한 관료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아이히만. 그런 모습이 마야 혹은 <베를린> 속 한석규에게 엿보이는 거다. 



저 뒤의 국기가 인공기였다 해도 별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제로 다크 서티>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지독한 프로페셔널의 세계는 분명 매혹적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마야를 프로페셔널이라고 말하는 건 옳지 않을지 모른다. 그녀는 일의 완성을 위해 조직의 안정성을 해치길 주저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마야를 '일중독자' 정도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영화 종반부, 마야는 바디백에 담겨온 빈 라덴의 얼굴을 확인한 뒤, 드넓은 공군 수송기에 혼자 오른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혼자 차지한 것을 보니 중요한 사람인 것 같다고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갈거냐고 묻는다. 마야는 망설이다가 대답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그대로 끝난다. 알콜중독자에게 술이 떨어진 것처럼, 일중독자에게 일이 떨어졌으니 통곡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게 <제로 다크 서티>는 일의 기쁨과 허망함을 동시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