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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

 아즈마 히로키 지음·안천 옮김/현실문화/320쪽/1만5000원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는 틀렸을까. 아렌트는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대화함으로써 정치적인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 인간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있는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한다고 했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영국, 프랑스의 신문, 카페를 살폈다. 여기서 저널리즘이 생기고 토론하는 공중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두 사상가는 의사소통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당연하면서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국가의 거시적 정책부터 시민 사회의 미시적 실천까지, 전쟁을 방불케하는 피아의 구분이 이뤄지고, 논의는 끝없이 제자리를 맴돈다. 공청회는 요식 행위고, 토론은 파행이다. 누군가는 정치인의 역량 부족을 탓하겠지만, 4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대거 바뀌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투표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정치적 공론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제한돼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좌절,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이야기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과 공론장의 형성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민의 역량을 고양시키는 동시,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는 다르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요약하면 아즈마의 민주주의는 ‘소통 없는 민주주의’다. 그는 논의와 타협을 거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폐기처분해야 하는 헛된 이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즈마가 주목한 이는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야생인’의 행복을 노래한 개인주의자(에밀)인 동시, 각 구성원의 권리를 공동체에 양도할 것을 주장하는 전체주의자(사회계약론)이기도 한 모순에 찬 인물로 비친다. 아즈마는 바로 이 루소의 모순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돌파구를 찾아낸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은 자유롭고 고독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어느새 집단 생활을 하면서 사회계약을 맺는다. 사회계약이란 인민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자기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 완전히 양도하는 것인데, 그 결과 탄생하는 것이 개인 의지의 집합체인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를 따르지 않는 정부는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다. 정부 역시 일반의지의 손발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루소의 일반의지는 흔히 생각하는 ‘여론’과도 다르다. 루소는 “일반의지는 항상 옳고 항상 공공의 이익을 향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는 루소가 인민의 선의와 이성을 믿어서가 아니라 일반의지 자체가 공공성의 기준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의지는 ‘수학적인 존재’다. 


이러한 일반의지를 추출하는 과정은 급진적이다. 루소는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인민에게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숙고할 때, 시민들이 서로 어떠한 의사소통도 하지 않는다면, 작은 차이가 많이 모여 그 결과 항상 일반의지가 생성되어 숙고는 항상 바른 것이 될 것이다.…각 시민이 자기 자신에게만 따르며 의견을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회계약론>은 전한다. 즉 일반의지의 성립 과정에는 시민 간의 토의, 의견 조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아즈마는 이를 “일반의지는 집단 구성원이 하나의 의지에 동의해가는, 즉 의견 차이가 사라지고 합의가 형성되는 것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양한 의지가 서로 간의 차이를 내포한 채 공공의 장에 나타남으로써 순식간에 성립한다”고 해석했다. 그런 면에서 일반의지는 언어보다는 물질, 인간의 질서가 아닌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 


이것은 말이 되는 소리일까. 사실 루소 시대엔 말이 안됐다. 일단 이러한 일반의지를 추출할 방법이 없었다. 일반의지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선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즈마는 정보기술혁명이 진행중인 21세기엔 일반의지를 드러낼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검색엔진 구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위터, 포스퀘어, 페이스북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수천만, 수억명의 데이터에서 ‘개개인의 의도를 뛰어넘은 무의식적인 욕망 패턴’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현대사회를 ‘총기록사회’라고 정의한다. 검색 엔진,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정보가 낱낱이 기록된다. 총기록사회는 이전 세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있다.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데이터베이스는 알고 있다. 여기서 아즈마는 “일반의지란 데이터베이스를 의미한다”고 선언한다. 일반의지 1.0은 실재하지 않았지만, 일반의지 2.0은 실재한다. 일반의지 2.0은 “이념도 이야기도 아니며,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로 어딘가의 서버에 들어있다.” 일반의지 2.0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누군가가 우리의 의지를 대의할 필요가 없다. 


정부 2.0은 일반의지 2.0의 하인이다. 미래의 정부는 시민들의 명시적인 의견을 듣는 대신, 광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새겨진 욕망의 집적, 집합적 무의식에 충실하면 된다. 국민을 억압하거나 감시하지 않으며, 오직 시민 생활과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정부 2.0. 인터넷 서점이 개인의 구매 이력을 축적했다가 관련 서적을 자동으로 추천하는 것처럼, 정부 2.0은 개인 정보를 파악해 교육·의료·구직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마트폰의 위치 정보, 고속도로 이용료 징수 정보, 개인의 트위터 등이 모두 일반의지를 이룬다. 정부 2.0이 그리는 미래에서 공적인 토론은 무용하다.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응답은 사회사상의 개념 조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기술적인 도전을 통해 시도되어야 한다”고 아즈마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근대의 사고 방식이다.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인간 이성이 이성 외부의 그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대표적이다.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의식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에 주목한다. 데이터베이스는 거대한 무의식의 총합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비사교적인데다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지만, 수많은 개인이 참여해 만들어낸 구글의 검색어 자동 완성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아즈마는 일본의 검색 엔진에서 ‘남편’을 치면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 ‘남편 용돈’, ‘남편 싫다’ 등이 함께 검색된다고 전하는데, 한국에서는 ‘남편이 바람피는 꿈’,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 ‘남편의 외도’ 등이 나왔다. 아무튼 이것은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어떤 문자 배열에 이어서 수없이 입력해온 배열의 흔적”이다. 


‘큰 공공’ 혹은 ‘거대 담론’은 사라졌다.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내용이란 있을 수 없다.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하다. 대중은 선거 때마다 플라톤의 철인과 같은 위대한 정치인을 기다리지만, 그것이 헛된 기대임은 투표 용지에 기표하는 순간부터 명백하다. “인류 정치학자가 평범한 베스트셀러나 대중서에 눈물을 흘리고, 일류 경제학자가 인터넷 우익과 다름없는 편견을 갖고, 일류 수학자가 뻔한 국가관이나 가정관을 늘어놓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선량의 뛰어난 의지와 대중의 우매한 의지가 충돌한다는 생각은 낡았다. 인간은 때로는 선량으로, 때로는 대중으로 존재한다.  


미래의 국가는 국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한다. 아즈마는 정부 2.0이 수도 사업국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비유한다. 우리는 수도 없이 살 수 없지만, 수도의 체제나 운영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물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으면 시민이 먼저 나서 그 문제점을 따지고 관련자를 문책하라고 요구하겠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다. 


몇 가지 거센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혹시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대중의 무의식 혹은 동물적인 욕망만을 따르는 극단적인 포퓰리즘의 시대가 아닐까. 아즈마는 선량이 대중의 뜻에 그대로 따르거나 선량이 대중의 폭주를 억누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대중의 재잘거림으로 선량의 폭주를 억제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국회에서 법안을 논의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생중계되면, 그 중계를 보는 대중의 재잘거림이 국회에 떠오른다. 정치인은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혹시 ‘동물적인 삶의 안전은 국가가 보장하고, 인간적인 삶의 자유는 시장이 제공’하는 것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습 아닐까. 아울러 모든 생활정보를 기록하는 ‘총기록사회’는 감시국가의 또다른 면모 아닐까. 아즈마는 미래의지 2.0의 시대가 시장 원리주의와 연계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민주주의와도 연계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사회라고 말한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아즈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식의 뻔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 정치나 통치의 이미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의지 2.0이 만들어가는 ‘무의식 민주주의’ 시대에는 대중의 무의식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된 대중의 무의식에 숙의(熟議)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반의지 2.0의 시대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의 무의식이 국회의사당에 침투하는 시대,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쿨’한 나머지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가 제창 같은 것은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시대, 대중의 의지가 물질적으로 드러나는 시대다. 어쩐지 1990년대 일본의 SF애니메이션에서 본 듯한, 기발하면서도 위험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의 상상력은 우리의 미래를 덜컹거리며 선취해왔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어 2000년대 일본 사상계의 ‘스타’ 대접을 받는 아즈마 히로키는 대중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 하위문화 비평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래도 여전히 아즈마의 논의가 “말도 안된다”거나 “위험천만하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즈마는 <일반의지 2.0>의 1장을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제부터 필자는 꿈을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