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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층의 악당> 리뷰
영화가 흥행하든 안하든, 사실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층의 악당>은 좀 잘 됐으면 좋겠다. 비록 인터뷰하고 싶었던 한석규를 만나진 못했지만(몇 건의 인터뷰 후, 바람같이 강원도로 갔다고 한다....), 아무튼 난 이 영화가 무척 재밌었기 떄문이다. 난 한석규야말로 과소평가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손재곤 감독이 빨리 다음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은 현대 도시인들의 뒤틀린 심리를 빼어나게 포착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창조하는데 일가견이 있으며, 지적인 대사를 잘 쓰고,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능숙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웃음이라는 커다란 도가니에 넣어 녹여낸다. 그의 영화는 ‘코미디의 이상형’에 근접한다. 손재곤 감독은 두 번째 장편만으로 한국 영화계가 맛보기 힘들었던 코미디의 경지에 올랐다. 웃기면서도 씁쓸하고, 배우들에게서 최대치의 능력을 뽑아내고, 귀에 박히는 대사들이 속출하고, 현실을 환기시키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층의 악당>은 한국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코미디 영화에 가깝다.

남편을 여의고 모녀(김혜수·지우)가 단 둘이 사는 가정집 2층에 조용한 집필 장소를 찾는다는 작가(한석규)가 세를 든다. 말이 청산유수라 계약서도 쓰지 않고 단기 임대 계약을 맺은 이 작가의 정체는 사실 이 집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려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 연주(김혜수),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수시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딸 성아(지우) 때문에 작가의 계획은 차질을 빚는다. 작가는 1층을 자유자재로 드나들기 위해 연주에게 자신의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어달라면서 유혹한다.

상황은 명확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1층의 선인과 보물을 노리는 2층의 악당. 그러나 마냥 정을 주기에는 1층 모녀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영화의 힘이 나온다. 연주는 고교 졸업 후 “그 시아버지 개새×” 때문에 바로 결혼해 아이를 낳은 여자다. 덕분에 30대 중반이지만 중학생 딸이 있다. 남편이 빚만 남기고 죽은 뒤 혼자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다.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피폐하지만, 어디 가서 고민을 늘어놓을 상대도 없다. 의사나 2층 작가에게 하소연을 하는데 한국 남자들이란 저마다 “나이 처먹어 아저씨 되면 조언하고 충고하는 자격증 같은 걸 국가에서 발급” 받은 듯 헛소리만 늘어놓는다.

<닥터 봉> 이후 15년 만에 호흡을 맞춘 한석규와 김혜수의 연기는 이들이 얼마나 훌륭한 배우이며, 한국영화가 한동안 이들의 재능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바른생활 사나이’로 알려진 한석규가 입에 착 붙는 욕설을 달고사는 범죄자를 연기하고, ‘건강미인’의 대명사 김혜수가 신경쇠약 주부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스크린 세계에서만 가능한 재미다.

별것 아닌 대사가 영화 속의 기묘한 상황 속에 깨알같이 박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보가 자극받는다. “유럽연합 기준으로…” “이 사랑스러운 비관론자” “학교 다니지마. 돈이나 벌어!” 같은 대사는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다시 생각해도 웃을 수 있다. 웃음이라는 당의정으로 쌓여있지만, 대개의 좋은 코미디가 그렇듯 <이층의 악당>도 사회 현실과 맞닿아있다. 모기업의 비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만든 갤러리에서 미술품 구매비를 빼돌리는 재벌 2세, 인터넷 동영상을 통한 사생활 침해, 전염되는 현대인의 우울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영화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하다. 사랑과 사기 사이, 대박과 쪽박 사이,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간다. 누군가는 “인생이 거지같다”며 울지만, 누군가는 큰 돈을 만진다. 영화의 결말도 해피 엔딩인지 새드 엔딩인지 헷갈린다. 어느 쪽이든 결론을 지어주면 더 많은 관객이 좋아하겠지만, 삶이란 원래 이도저도 아니다. 24일 개봉했다.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