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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짓다만 성, '안시성'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시간에 가까운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몇 차례의 대규모 공성전 뿐 아니라, 프로도의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빛, 골룸의 사악한 개성 같은 것들이다. '타이타닉'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배가 절반으로 쪼개지는 장면 뿐 아니라 잭과 로즈의 갑판 위 데이트 같은 장면이다. 전쟁영화는 전투장면의 연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쟁영화는 고대 무기의 위력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역사 속 인물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사학도 아니다.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지 탐구해야 한다. 

'안시성'에는 40배 많은 20만 당 대군을 맞이하는 안시성 사람들의 '두려움'이 빠져있다. 고구려 본진으로부터의 지원도 요원한 가운데, 안시성주 양만춘과 군인들은 중과부적의 외적에 맞서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양만춘은 물론, 군인이나 백성 누구도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이란 갖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적을 맞이한다. 마치 '300'의 스파르탄 전사 같다. 하지만 '300'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300'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그래픽 노블 원작의 영화다. 나고 자라면서 약육강식의 혹독한 세계관을 습득하는 스파르타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한다. 무엇보다 '300'은 전쟁에 대한 현실적인 감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 군인들의 근육과 페르시아 군인들의 기괴함을 비교하는데서 쾌감을 주는 영화다. '안시성'은 '300'과 같은 방향의 영화가 아니다. 강대국에 맞선 약소민족의 용기를 기리고, 온정적이면서도 결단력있는 지휘자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전쟁과 무관한 민초의 소박한 감정을 담아내려 한 영화다. '안시성'이 '300'처럼 되려 했다면, 앞에 말한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내질렀어야 한다. 하지만 '안시성'은 어정쩡한 태도를 135분간 꾸역꾸역 밀고 간다. 



배역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 '안시성'에는 몇 가지 짝패가 있다. 성주 양만춘(조인성)과 그의 충실한 부관 추수지(배성우), 양만춘의 동생 백하(김설현)와 그의 연인 파소(엄태구), 용맹한 군인으로서 라이벌이자 친구인 풍(박병은)과 활보(오대환)다. 이 중 두번째 짝패는 거의 불필요하고, 세번째 짝패는 활용 방식이 어정쩡하다. 다수 관객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200억원대 대작 특성상, 젊은 남녀의 로맨스와 티격태격하는 두 남성의 코미디를 모두 담으려 한 것 같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신녀(정은채) 캐릭터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낭비되서 아쉽다. 짧고 어설픈 에피소드와 몇 차례 애절하지도 않은 눈빛 교환으로 끝난 로맨스 같은 것은 없애버리고, 불길한 예언자인 동시 현실적인 조언자인 신녀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확장시켰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제작진은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신녀의 목을 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해,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케미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영화에서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