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1. 비경제적, 비인간적인 월스트리트, <호모 인베스투스> (68)
  2. 혁명은 없다. 봉기 하라,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학술적인 책이다. 인류학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읽기가 좀 어렵지만, 현장의 상황이 잘 반영돼 있어 전체적으로 흥미롭다. 다만 오탈자가 너무 많다. 


호모 인베스투스

캐런 호 지음·유강은 옮김/이매진/520쪽/2만3000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브라질 내륙 소수 원주민의 삶을 관찰한 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했다. 브로니스라프 말리노프스키는 파푸아 뉴기니의 트리브리안드 군도 원주민들의 농경과 주술을 연구한 뒤 인간의 경제적 본성에 대한 통찰을 전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 말리노프스키같은 유명 인류학자들이 ‘원시 부족’을 연구한 것은 80~100년 전 일이다. 우리 시대의 인류학자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연구하는가. 젊은 인류학자 캐런 호는 세계 금융의 중심을 자처하는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주식회사 미국’을 개조하는 일에서 월스트리트가 어떤 구실을 하고 그 결과 시장 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월스트리트 주변을 서성대며 애널리스트들을 인터뷰한 수준이 아니다.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던 호는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의 성격을 모두 가진 뱅커스 트러스트 뉴욕 법인에 1996년 6월 취업했다. 그의 직책은 ‘내부 관리 컨설턴트’ 애널리스트였다. 이는 “은행 내부의 각기 다른 사업을 위해 ‘대리인이자 변화 조언자’로 활동하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호가 취직하는 과정에서부터 월스트리트의 독특한 문화가 나타난다. 우선 월스트리트로 향하는 인재는 최고의 금융 지식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최고의 학벌을 가진 이들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사들은 아이비리그 대학 중에서도 하버드와 프린스턴을 특히 선호한다. 금융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던 호가 뱅커스 트러스트에 취직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의 프린스턴 간판이 있었다. 전문적인 기술, 비즈니스 상식은 ‘현장’에서 배울 수 있지만, 하버드나 프린스턴 학생이 가진 ‘똑똑함’은 그의 대학 간판으로밖에는 증명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일대도 인기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좀 더 ‘리버럴’하며 ‘예술가 행세’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판단한다. MIT는 괴짜라서, 스탠퍼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등은 명성이 떨어져서 덜 선호된다. 월스트리트에서 하버드, 프린스턴 출신이라는 것은 같은 졸업장을 가진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자 ‘선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마치 암흑가에서 이탈리아 시칠리 출신의 콜레오네 성씨를 가진 것처럼 말이다. 


월스트리트 금융사들은 하버드, 프린스턴 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투자 은행과 컨설팅 기업들은 가을 새 학기 첫날부터 화려한 취업 박람회를 연다. 선물 주머니, 머그컵, 물병, 모자, 티셔츠 등을 살포한다. 며칠 만에 몇 천 명의 학생들이 특정 금융사 로고가 적힌 상품들을 입거나 들고 캠퍼스를 활보한다. 채용 행사는 고급 호텔에서 열린다. 고급 양복을 입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남자들이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회사 소개 영상에는 맨해튼 전경에 이어 멋진 고층 건물 내부를 활발히 걸어가는 양복 노동자들, 참석자들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진행하는 화상회의가 나온다. 은행 직원들은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 삶’을 사는지 자랑한다. ‘똑똑’하다면 월스트리트로 오라! 그것이 이 취업 설명회의 요지다. 철학자, 소설가를 꿈꾸던 학부생들은 졸업할 때가 되면 불현듯 예전부터 월스트리트에 가고 싶었다고 ‘깨닫게’ 되고, 그 결과 2005년 프린스턴대 졸업생의 40%가 금융 업계에 취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똑똑한’ 학생들이 월스트리트에 가면 어떤 일을 할까. 올리버 스톤의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처럼 멜빵을 맨 양복에 제트기를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며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멜빵은 관리 부장쯤이 돼야 할 수 있다. 게코를 따라하느라 멋모르고 멜빵을 맨 채 출근한 한 신입사원은 “외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열심히 일이나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월스트리트 초짜들의 이상, 고든 게코. 그러나 저렇게 입고 다니면 혼난다. 


월스트리트 신입들은 1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한다. 자정 전에 집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밤을 샐 때도 많다. 주말, 휴일 출근도 부지기수다. 식사는 인근 식당에서 종이 박스에 테이크아웃해 사무실로 가져와 얼른 먹고는 다시 일한다. 구내식당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다가는 한가한 시간이 많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도시락을 싸오는 것도 금기다. 도시락은 돈을 아낀다는 뜻이고, 그것은 아래 계급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서 필요한 품성은 ‘똑똑함’이 아니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루하고 고된 일을 견디는 인내력’일지도 모른다는 자조가 나온다. 


물론 이들은 돈을 많이 번다. 억대 연봉이 기본이고, 보너스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이 붙는다. 늦게 퇴근하면 검은 가죽 시트가 깔린 회사 소유의 고급 승용차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해외 출장을 갈 때는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는다. 이런 호사스러운 생활이 극한의 노동 착취에 지친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을 어루만진다. 


고액의 연봉은 고용 불안에 대한 면죄부도 된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대규모 감원과 그만큼의 신규 채용이 일상사다. 취직한 지 6개월 뒤인 1997년 1월, 호가 점심을 거른 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꺼번에 점심이라도 먹으러 간 것인가 하고 조금 기다렸더니, 한 무리의 부서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은 팀 전체가 “해산됐다”는 통보를 받고 나온 참이었다. 여기서 ‘해산’이란 ‘정리해고’를 뜻한다. 그래도 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관리부장이 상부와 협상을 해 향후 5개월 가량 진행될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보통은 해고 통보를 받은 지 15분 안에 경비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회사는 보안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개인 물품은 훗날 택배를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에 항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액의 연봉과 퇴직금에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화이트 칼라 노동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장의 그래프에 매달린 존재들이다. 시장이 하락하면 수 백 명이 해고된다. 판매하는 금융 상품이 사라지면 그 상품을 맡은 부서도 사라진다. 불경기일 때만 감원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불경기에는 남은 사람들의 보너스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호경기에는 더 좋은 인력을 뽑기 위해 감원이 이뤄진다. 많이 뽑아 혹독하게 부린 뒤에 해고한다. 그리고 다시 뽑는다. 고용의 ‘요요 현상’이다. 


물론 해고자들은 곧바로 다른 회사에 취직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월스트리트는 학벌로 연결된 대가족으로 구성된 곳이다. 해고자들은 이런저런 사교 모임을 통해 엮은 인맥으로 재취직의 길을 뚫는다. 그러나 이런 채용 문화가 회사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기업의 장기적인 조직적 지식은 파괴되고,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삶의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고, 깊은 인간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문제는 이런 월스트리트의 문화가 ‘글로벌 표준’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재취직의 기회가 많은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해고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월스트리트 투자 은행의 조언에 따라 인수·합병되는 과정에서 해고되는 여느 기업의 노동자들은 갈 곳이 없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월스트리트 투자 은행에는 ‘장기적 계획’이란 것이 없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지, 즉 ‘현재’만이 문제가 된다.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장기적 계획이 없는 이유를 ‘예측 불가능한 시장’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호가 보기에 이러한 ‘전략 없음의 전략’은 투자 은행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이다. 품질 관리, 장기 계획이 존재하지 않기에 은행들은 계속 손해를 보지만, 이들은 새 사업에 진출하는 것으로 손해를 만회하러 든다. 


월스트리트의 ‘주주 가치’에 대한 믿음에도 호는 의문을 제기한다. 피터 드러커(1909~2005)만 해도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한다는 주장을 ‘낡고 조잡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허구’로 치부했다. “기업은 영구적이며, 주주는 일시적이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드러커의 시대에 기업은 주주가 아니라 구성원을 위하고, 사회에 책임을 지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기업 인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회사=주주’의 등식이 널리 퍼졌다. 주가를 창출, 회복하는 일은 경제적·도덕적으로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주가 상승만을 노리는 기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의 생산 능력은 주주들에게 배분될 뿐,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 주가를 높이기 위해 인수·합병된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는 모순이 종종 목격됐다. 기업을 통째로 팔기보다는 쪼개서 파는 편이 이익이기에 멀쩡한 기업을 분해해 파는 일이 잦은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쫓겨난다. 물론 노동자의 불안은 주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인수·합병한 기업들이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관련된 투자 은행들은 거액의 수수료를 챙긴다.


호가 관찰한 월스트리트는 비인간적이다. 아니, 이런 도덕적 판단을 넘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기까지 하다. 호는 월스트리트에서의 짧은 근무와 추가 현지 조사를 진행한 후 학교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책이 <호모 인베스투스>(원제 Liquidated: An Ethnography of Wall Street)다. 호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월스트리트의 분위기는 바뀐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기업에 변화, 개혁을 그토록 강조하는 월스트리트야말로 가장 완고한 반개혁 세력인 셈이다.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예전 프론트 리뷰로 쓴 적이 있는 <사상으로서의 3.11>에 한 꼭지의 글을 실은 히로세 준의 저작을 골랐다. 그의 단행본이 완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인데, 일본의 젊은 사상가들의 글은 재미있지만 어딘지 허공으로 한 발짝 떠있다는 감이 든다. 그 한 발짝의 감각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히로세 준 지음·김경원 옮김/바다출판사/288쪽/1만3800원


당신의 삶은 안정적인가. 조금 더 은유적으로 말해, 당신의 인생에는 해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큰 행운아다. 나고 자라 낳고 죽을 때까지 삶의 범위와 행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년에 금융 위기가 닥쳐 다니던 회사가 도산할지, 내일 자연 재해에 고장난 원자력 발전소가 방사능을 유출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듯, 개인과 사회가 모두 불안하다. 


그래서 이 불안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견뎌나가야 하나. 일본의 젊은 사상가 히로세 준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그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이라 할만하다. 그는 세계가 ‘형편 없는 영화’ 같다거나, ‘더럽다’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히로세의 인식에 동의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그만 보고 극장을 나서라’라고 촉구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세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형편 없는 영화든, 더러운 세상이든, 인간은 그것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혼란한 세상의 삶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좋다. 히로세는 1970년대 이탈리아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를 다시 불러낸다. “불안정한 것은 아름답다”. 일본 잡지에 연재된 시평을 묶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프리케리아트의 철학’, 혹은 ‘프리타족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할만하다.  


히로세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과 같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글의 연재가 시작된 후에 일어났지만, 사고 여부와 무관하게 원전은 우리 삶의 속성을 이미 드러내주고 있었다. 수력발전소의 물, 화력발전소의 불은 일단 전기를 내면 낮은 곳으로 흘러가거나 타서 재가 됨으로써 소멸한다. 즉 해결된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낡은 원자로, 다 사용한 핵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인류가 지구상에 남아있는 동안 영원히 함께 한다. 원자력에 있어서 ‘최종처분’은 없다. 원자력 발전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방사성 폐기물은 늘 ‘준안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원자력 폐기물의 ‘처리’와 ‘사고’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진과 쓰나미는 ‘일어 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원전 사고는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답이 없다’는 점은 ‘테러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죽였지만 테러는 종식되지 않았다. 후세인이 죽었지만 이라크는 안정되지 않았다. 오직 혼란과 갈등과 불안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물론 에전에는 답을 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혁명’이다. 시민과 학생에 의한 것이든, 무장한 군인에 의한 것이든, 혁명은 사회와 개인이 당면한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는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한 표를 던진 유권자, 그 반대 지점에서 <레미제라블>의 좌절한 혁명을 보며 눈물 흘린 관객은 모두 ‘최종해결책’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품고 있고 있는 셈이다. 


히로세는 “아직 혁명을 꿈꾸는가”라고 되묻는다. 혁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짱 끼고 앉아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히로세는 혁명 대신 ‘봉기’를 이야기한다. 봉기는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끝없이 흐르는 운동이며,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제어를 위한 것이며, 지도자나 전위당을 알지 못한다. 


2011년 일본에선 변혁 운동의 불길이 사그러진 후 근 40년만에 대규모 군중이 반원전 시위를 위해 모였다. 이때 일부 시위대를 체포해 취조한 경찰관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이는 같은해 뉴욕의 ‘점령하라’ 시위대에 대한 일부 언론의 시각과도 상통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코티 공원에 죽치고 앉아 먹고 마시며 노래하는 시위대를 향해 주류 언론들은 ‘지도부도 없고 목적도 없다’는 식으로 냉소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사라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히로세는 바로 이같은 무규율, 무목적이야말로 봉기의 특성이라고 본다. 히로세가 주장하는 봉기는 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성이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봉기는 “답을 향해 가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나아가는 데모”다. 봉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불안정 상태를 긍정하는 것처럼, 이 책에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제시돼 있다. 먼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의 문제. 히로세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동한 고용의 비정규화가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역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을 촉진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활의 불안정화라는 ‘악’을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이라는 ‘선’으로 전화시키는 시도”다. 에전이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들어가 조금씩 오르는 월급에 만족하며 평생 같은 일상을 반복했을 사람들이, 이제는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프리타’족으로 살아간다. 평생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히로세는 이런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소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계와의 유기적 연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할까. 히로세는 프랑스 영화 <플레이타임>을 예로 든다. 영화 속 근미래의 파리는 온통 철과 유리로 만든 건물이 들어찬 도시다. 등장인물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만, 손을 맞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만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세계에서 소외되어 타향살이를 하게 된 ‘산책자’에게도 그만의 고유한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은 그 자체로 긍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불안정한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 일본의 원전 시위대에 원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를 법한 펑크 밴드가 등장해 시끄럽게 노래한 것처럼, ‘점령하라’ 시위대의 구성원이 다양했던 것처럼, 새 시대에는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조직은 이익 단체, 압력 단체와 다르다. 자크 랑시에르는 두 가지 ‘힘’을 이야기한다. “지위를 배분하고 그 위치를 고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힘”과 “각자의 정신과 신체가 지닌 가소성(可塑性)을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힘”이다. 전자가 ‘폴리스’라면 후자는 ‘정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일본의 영화팬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다. 요약하면 “모두가 이야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 ‘무자격의 자격’으로 모든 문제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고 정치다. 


물론 히로세는 희망찬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68혁명 이후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탈출했지만, 그들이 들어선 곳은 ‘공장이 된 세계’였다. 노동은 취직부터 퇴직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특정 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 전부가 노동의 시간이 됐다. 취업자와 실업자의 구분은 ‘일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임금을 받는가, 아닌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세계를 기업화했다. 푸코는 일찌감치 신자유주의는 “사회체 또는 사회 조직 안에서 ‘기업’의 형식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가 하나의 기업이 된다. 그래서 노동자는 스스로를 경영하라고 강요당한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개발하도록 유도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식인이 되도록 이끈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생산된 지식을 남김없이 빼먹는다. 


세계가 공장이고, 모든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에 이용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답이 너무 간단하다. 한국 번역본에 추가된 2011년 10월 런던대 버크백 대학 심포지엄 발표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반란의 역동성 자체까지 자기 것으로 훔치는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은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외부’가 된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선 ‘외부의 외부’를 발견해야 한다. 지적 능력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히로세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히로세조차 모를 수 있다.


그렇게 이 책은 혼란스럽다. 혼란의 시대에 혼란한 사유의 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일까. 히로세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가정한 뒤, 세계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긍정의 맹아를 찾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인가, 반대로 급진적인 태도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와 같은 책은 현재 한국의 지적 풍토에선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