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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무언가를 버려야 성장한다, <보이후드>





**스포일러 있긴 한데, 관람에 영향 미칠 정도는 아닐 듯. 사실 스포일러랄 게 없는 영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보이후드>를 봤다. 링클레이터가 요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 제목은 얼마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날 다시 익혔다. 그날 한국의 문화부 기자들은 외국의 한 도박 사이트를 종일 들락날락 해야 한다. 그곳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고 도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는 5위권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이트에서는 내년초 아카데미 수상자를 두고도 벌써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데, <보이후드>는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였다. 배당율은 2/1. (지금 확인해보니 마찬가지다. 참고로 2위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와 안젤리나 졸리 감독님의 <언브로큰>으로 둘 다 4/1). 


알려져 있다시피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다. 성장영화야 많았지만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실제 아역 배우의 성장을 12년 동안 찍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진은 매년 15분 분량 가량을 12년간 찍은 뒤 총 165분의 장편으로 완성했다. 소년의 부모 역할을 한 배우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퀘트도 같은 기간 출연했다. 아퀘트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전화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날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전화해 묻더군요. '앞으로 12년간 뭐할거예요?' 전 영화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배우들은 매년 특정한 시기에 모여 마치 동창회를 하듯 촬영했다고 한다. 


에단 호크는 많이 늙지 않는다. 패트리샤 아퀘트는 많이 늙는다. (특히 체중변화가 심해 보인다) 가장 많이 변한 건 물론 주인공 메이슨 역의 엘라 콜트레인이다. 처음엔 아역이었는데 영화 끝에는 성인 배우가 된다. 물론 21세기의 영화팬들은 '해리 포터'의 배우들이 조금씩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이 역시 굉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리 포터>가 10년간 시리즈로 나온 영화인 반면, <보이후드>는 그 성장기를 한 편의 영화에 담았다. (<보이후드>에는 아이들이 파티를 하면서 기다렸다가 <해피 포터와 혼혈왕자>를 사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해리 포터>의 관객들은 배우와 함께 나이든 반면, <보이후드>의 관객은 그렇지 않다. 이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다. 



12년 동안 성장하는 메이슨. 잠시 '역변'하는 듯 하더니 결국 원판불변의 법칙을 증명해낸다. 


물론 <보이후드>엔 단점이 있다. 12년 세월의 흐름을 담은 감독은 그 사이 일어난 일들에 대한 논평을 시도했다.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에서 보여준 링클레이터의 장기, 즉 둘의 대화가 그 수단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논평이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SNS 시대의 인간 관계에 대한 대화가 그렇다. "넌 이렇게 나와 얘기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잖아" 같은 대화는 별로 참신하지 않다. 


그러나 <보이후드>를 두고 이런 단점을 앞세워 지적하고 싶진 않다. 이 영화는 굉장한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고, 그것을 실제로 자연스럽게 추진했다. 이건 질 수 없는 도박이다. <보이후드>는 소년이 성장하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 즉 부모의 이혼, 재혼, 학교에서의 따돌림 혹은 텃세, 풋사랑의 감정, 성, 또래 끼리의 가벼운 일탈 경쟁, 심각하지 않은 반항, 재능에 대한 탐색, 진로 고민,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혼란 등을 두루 다루는데, 이건 미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소년이라도 겪는 보편적인 인생 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성장 영화는 이러한 소재들 중 한 부분을 강하게 극화시키지만, <보이후드>는 이 모든 주제를 이음새 없이 보여준다. 마치 햇살 가득한 언덕에 누워 느긋하고 아련하게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메이슨 가족은 몇 차례 이사를 다닌다. 이혼 혹은 재혼에 의해, 경제적 요구에 의해서다. 이사할 때마다 소년은 자동차 뒤쪽 창으로 직전까지 살던 집을 돌아본다. 난 그렇게 멀어져 가는 옛집의 모습이 그렇게 아련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가진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없다. 오직 한때 소중했던 추억을 별 것 아닌 듯 잊어버리고, 한때 소중했던 인연을 내팽겨치고, 한때 공들였던 작품을 버리고, 한때 친했던 사람과 소원해진 뒤에만 성장할 수 있다. <보이후드>는 그런 진실을 말한다. 메이슨은 사진에 관심과 재능이 있다. 엄마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싸준 메이슨의 짐에 굳이 그의 첫 작품을 넣어둔다. 메이슨은 그걸 자꾸 꺼내 집에 놓아두고 가려한다. 엄마와 메이슨은 이를 두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난 메이슨이 옳은 것 같다. 섭섭하지만, 첫 작품 따위 잊어버려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도, 첫사랑도, 끌어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장난감도.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지만, 내 입장이 있어서인지 부모의 대응에도 눈길이 갔다. 이 영화에서 부모는 때로 아이보다 유치하다. 엄마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처음에는 괜찮지만 알고보면 술주정뱅이 마초인 남자와 자꾸 연을 맺는다), 아빠는 인생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런 아빠도 조금씩 늙는다. 대입을 목전에 둔 아들을 축하하며 아빠는 말한다. "인생에는 타이밍이 중요해. 난 이제서야 네 엄마가 그렇게 바라던 쫌팽이가 되었단다" (별다른 직업도 없이 밴드를 전전하며 기타 치며 세월을 보내던 아빠는 그 사이 한 곳에 정착해 새 아내와 아기를 얻었다. 클래식 카를 팔고 유아용 카시트를 달 수 있는 밴도 새로 장만했다) 



주정뱅이 새 아빠에 의해 강제로 이발소에 끌려간 메이슨. 눈빛이 심상치 않다. 


메이슨은 착한 소년이었고 착한 사람이 됐다. 세상을 놀라게할 재능을 보이거나 위대한 인물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가족 혹은 주변 사람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 책임감을 갖고 크게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는 해낼 것 같다. 난 이런 사람이 좋다. 아니 훌륭하다고 여긴다. 우리가 이 정도의 삶을 살면 죽은 뒤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메이슨이 갓 만난 친구들과 함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빼먹고 하이킹을 간 대목에서 영화를 끝낸 건 대단히 센스 있는 선택이다. 난 황혼녘에 친구를 보며 슬쩍 웃는 메이슨을 보며 이 인물에 정이 들어버렸다. 


괴물과 싸우고 죽을 뻔하고 부모를 잃고 친구도 잃은 해리 포터에 비하면, 메이슨은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슨은 '성장'을 했다. 이것 역시 해리 포터만큼 엄청난 모험이다.  



영리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