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해당되는 글 3건

  1.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기, '특별시민'
  2. 선거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 <대통령을 위한 수학>
  3. 당신의 한 표가 사람을 죽인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아이디어라든가, 개봉시점이라든가, 괜찮았으나, 결과적으로 흥행은 미적지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하지만, 막상 선거를 치르는 후보와 참모들은 ‘꽃길’을 걷지 못한다. 선거전(選擧戰)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오늘날의 선거는 ‘전쟁’에 가깝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 개인의 목소리가 증폭되는 요즘 세상에선 선거 캠프 바깥의 유권자까지도 이 전쟁에 뛰어들곤 한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특별시민>에선 더 원색적이고 색다른 표현을 쓴다.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는 거야. 손에 똥 안 묻히고 진주 꺼낼 수 있겠어?”(변종구 캠프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

박인제 감독은 3년 전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촬영 기간은 지난해 4~8월이었다. 그땐 천하의 용한 점쟁이라도 19대 대선이 2017년 5월 치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자유당 소속 변종구(최민식)는 민선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이다. 3선에 성공하면 청와대까지 노릴 기세다. 변종구는 정치공작의 달인 심혁수(곽도원)를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해 우세를 이어나간다. 젊고 패기 있는 광고인 박경(심은경)도 기발한 캠페인으로 변종구 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판세는 혼란에 빠진다. 상대 후보인 인권변호사 출신의 다함께미래당 양진주(라미란)는 미국 유학파 ‘엄친아’인 아들 스티브 홍(이기홍)까지 불러들여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다.

이념, 돈, 복수심, 승부욕, 권력, 열정, 미신이 뒤섞인 선거전 자체가 상업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건 자연스럽다. <특별시민>을 보면, 선거 열기가 유독 뜨거운 한국에서 왜 지금까지 ‘선거영화’가 안 나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특별시민>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는 데서 시작해, 선거 결과가 나오는 데서 끝난다. 선거 이전과 이후를 거두절미한 선택은, 선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인다.




과연 <특별시민>은 선거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변수들을 재현한다. 지하철 공사장 인근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각 후보 진영은 그 책임 소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가족 문제도 불거진다. 변종구의 부인은 고가의 미술품을 샀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술품 구입 자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은 후보자는 물론 그 주변 인물에게도 고결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양진주 진영도 마찬가지다. 양진주의 아들은 미국 변호사이자 자전적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명인이지만, 그를 유세에 활용하면 후보자의 이혼 문제, 아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선거전에서 “어떤 서울을 만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진다. 변종구와 양진주는 모두 ‘승리를 위한 승리’를 추구하는 검투사들처럼 보인다. “일단 이기자”고 생각하는 이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은 공식적인 캠페인을 넘어, 도청하고 협박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검은돈을 쓴다.

다만, 선거의 다양한 변곡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절정에 오르기보다, 평평하게 나열된다는 점은 문제다.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가 해결되고, 다음 변수가 발생했다가 또 해결되는 식이다. 매회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였다면 이런 방식이 어울렸겠지만, 상영시간 130분짜리 상업영화의 호흡으로서는 능란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의 성긴 틈새를 잇는 것은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정치부 기자 정제이 역) 같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다. 정치인을 ‘악마화’하거나, 설익은 계몽주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도 <특별시민>의 장점이다.

최민식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엔딩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18일 서울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최민식은 “ ‘정치 현실도 징글징글한데 이런 시국에 또 정치영화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라며 “이 작품은 그 지겨운 데로 들어가서 끝을 보고 결론을 내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박인제 감독은 “권력욕의 상징인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의 꽃이 선거라고 생각했다”며 “영화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두렵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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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위한 수학

조지 슈피로 지음·차백만 옮김/살림/384쪽/1만5000원


이 글이 지면에 게재되고 4일 뒤면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4000여만명의 유권자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다음 5년간 한국의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갖는다. 


최고 지도자나 국회의원을 뽑는 방법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선 한 차례의 직접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수를 기록한 후보가 대통령아 된다. 국회의원은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으로 구분된다. 비례대표 의원은 정당 득표율에 비례대표 의석수(54석)를 곱해 나온 수에 따라 배정된다. 이때 소수점 이하는 일단 배제한 뒤, 잔여의석은 소수점 이하가 큰 정당 순으로 54석을 다 채울 때까지 한 석씩 나눠 갖는다. 지난 4월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새누리당이 152석(지역구 127석, 비례대표 25석), 민주통합당이 127석(지역구 106석, 비례대표 21석), 통합진보당이 13석(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을 가져갔다. 


이 방법은 옳은걸까. 다시 말해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걸까. 정당, 후보자, 유권자대로 조금씩 불만이 있다. 특히 올해는 기존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중도 성향의 안철수 후보가 유력하게 부상해 대선 판도를 흔드는 바람에 현재의 대통령 선거 방식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안 후보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함께 아슬아슬한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두 후보와 지지자들의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여권 혹은 야권 후보 단일화와 관련한 이슈는 매 대선 때마다 튀어나왔다. 이럴 바에는 별도의 단일화 협상 없이 모두가 출마한 뒤 1, 2위 후보들디 따로 결선 투표를 치르는 프랑스 방식을 도입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국회의원 선출 제도에 대해서도 개선 움직임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당 지지율과 실제 의석수가 일치하지 않는 현 제도의 문제점을 들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대통령을 위한 수학>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현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수학적 난제들을 다룬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부터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현대의 대통령 선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제시된 온갖 방안들을 살펴본다. 결론부터 살피면 조금 허무할지도 모른다. 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복잡한 수학적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안타까운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싫어했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아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권력이 간다면 나라가 잘못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도 이런 플라톤의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크레테 섬에 건설될 새로운 도시국가 마그네시아에 적용하기 위해 쓴 <법률론>에서 잘 교육받은 사람들, 즉 부유한 귀족이 국가 지도층에 뽑히는 교묘한 방안을 제시했다. 후보자들은 여러 차레의 투표에 걸쳐 걸러지는데, 최종투표를 앞둔 유권자들은 “신에게 바칠 동물을 이끌고 걸어가야 한다”고 적었다. 명목은 유권자들이 투표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옳은 결정을 내려달라고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제물로 바칠 동물을 살 돈이 있고 하루를 몽땅 선거에 소비할 수 있는 사람, 즉 부유한 귀족에게 유리한 선거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대선에서도 치러질뻔했던 삼자대결의 문제점을 생각한 이도 있었다. 2세기 로마 제국의 관리 플리니우스였다. 한 전직 집정관의 살해 사건에 대해 그의 노예들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원로회는 세 가지 형량 중에서 하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유죄일 경우엔 유배 혹은 사형이었고, 아니면 무죄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40%의 의원이 무죄를 지지했고, 유배와 사형은 각각 30%였다. 형량이 다수결로 결정된다면 용의자들이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기에, 유배와 사형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힘을 합치기로 했다. 사형 지지 의원들이 입장을 바꿔 유배 쪽에 선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이를 ‘투표 조작’이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3세기 스페인의 신학자 라몬 유이는 이 딜레마를 풀어보려했다. 유이는 2라는 숫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종교소설 <블랑케르나>에서 수녀원장 선출 방법을 제안한다. 9명의 후보가 있다고 할 경우, 모든 수녀는 다른 수녀와 빠짐없이 양자대결을 펼친다. 승리한 수녀는 1점을 얻는데,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수녀가 원장이 된다. 동점을 얻은 후보자가 있다면 재투표를 하고, 그래도 동점이라면 추첨을 한다. 유이는 신학자답게 절대진리, 즉 신이 제시하는 해답을 믿었고, 그래서 신이 추첨애 개입해 결국은 올바른 사람이 선출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유이는 다른 방식의 양자 대결도 구상했다. 후보자들이 한 줄로 선다. 첫번째 후보자는 두번째 후보자와 대결하고, 거기서 이긴 후보자가 세번째 후보자와 대결한다. 승자는 다시 네번째 후보자와 붙는다. 이런 방식은 투표 시간을 단축 시킬 수 있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후보의 자질에는 이행성(transitivity)이 없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말보다 크고, 말은 개보다 크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개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베어스 야구팀이 자이언츠를 이기고, 자이언츠가 라이온스를 이겼다고 해서 베어스가 라이온스를 이긴다고 할 수는 없다. 전자의 경우 이행성이 있고, 후자에는 없다. 


선거 제도에 대한 더욱 본격적인 논의는 프랑스 혁명 이후 폭발했다. 새로운 정치제도를 개발해야했던 혁명기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전래로 공정하다고 여겨진 다수결에 의문을 제기했다. 다수결은 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직 사회의 편의 때문에 채택됐을 뿐이기에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과학자 장 샤를 드 보르다도 그 중 하나다. 보르다는 다수결은 2명이 출마했을 때만 옳을 뿐, 3명 이상의 후보가 있으면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21명의 학생이 반장 선거를 한다고 하자. 8명은 다인, 7명은 지웅, 6명은 윤우에게 투표했다. 다수결이라면 다인이 반장이 된다. 그러나 21명 유권자의 선호도를 살피면 결과가 달라진다. 8명의 유권자는 다인>윤우>지웅 순으로, 7명의 유권자는 지웅>윤우>다인 순으로, 6명의 유권자는 윤우>지웅>다인 순으로 지지했다. 만약 다수결이 아니라 라몬 유이가 제안한 양자대결 방식이었다면 지웅 혹은 윤우가 다인을 이겼을 것이다. 3명의 후보 중 다인을 가장 싫어하는 유권자가 13명으로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 8명보다 많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후보와 싫어하는 사람이 적은 후보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 활약한 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는 전략적 투표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후보별 선호도를 조사할 경우, 특정 후보의 강력한 팬인 유권자는 그의 라이벌 후보를 최하위 순위에 배치해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호도 조사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어중간한 후보가 어부지리로 선출될 가능성을 남긴다. 라플라스는 다시 다수결로 돌아가면서 이에 과반수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런데 여러 명의 후보자를 둔 여러 차례의 투표에서도 과반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라플라스는 엄밀한 수학자답지 않게 어정쩡한 대안을 내놓았다. 유권자들은 선거를 빠른 시간에 끝내길 원하기 때문에, 투표를 거치면서 과반수 후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다.


최고 지도자 선출 뿐 아니라 국회의원 수 배정에 대해서도 복잡한 논의들이 오갔다. 미국 헌법은 의원 숫자가 국민 3만명 당 1명을 넘을 수 없으며, 각 주는 최소 한 명의 의원을 갖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각 주별 인구수에 따라 의원수를 배정할 때 소수를 내리느냐 올리느냐, 인구가 작은 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에 따라 각 주별 의원수와 전체 의원수가 오락가락했다. 각 주들은 의원수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 치열한 논리 대결을 펼쳤지만 그 누구도 모두를 설득시키는데는 실패했다. 200년이 지나도록 미국의 의원수는 미봉책에 미봉책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급기야 197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는 개인의 선호도를 종합해 사회의 선호도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즉 완벽한 민주적 선택절차는 없다는 이야기다. 애로에 따르면 유권자의 사표나 후보를 등록한 정당의 꼼수를 완전히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수학자들에게 부탁했더니, 한참을 연구한 수학자들은 그런 방법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사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만 민의를 대변하는 방식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수다>나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 선발, 네티즌이 참여하는 포털 사이트의 영화 평점 매기기, 회식 메뉴를 정하기 위한 직장인들의 논의도 민의 대변 방식과 관련 있다. 이런 일들에는 항상 공정성 시비가 따른다. 다수결인가, 과반수인가, 선호도 조사인가. 무엇이 개인의 마음 속 선호도를 집단의 선호도로 연결시키는 제도인가. 


수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정치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지루할 정도로 오랜 소통과 타협과 양보와 이해의 시간을 거쳐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정치 제도에 대해서는 플라톤주의자가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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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지음·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76쪽 | 1만3000원

1966년부터 현재까지 하버드대, 뉴욕대에서 정신의학 교수로 재직해온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그 예방책을 연구해왔다. 

20세기 미국의 살인율과 자살률 통계를 살피던 그는 이 두 가지 수치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길리건은 자살과 타살을 아울러 ‘폭력치사’라고 부르는데, 이 수치는 조사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갑작스럽고 큰 규모로 오르내렸다. 무엇이 폭력치사 수치를 오르내리게 했을까. 길리건이 얻은 결론은 상당히 놀랍고 꽤 선동적·선정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수가 집권하면 사람이 죽는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2011년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책의 원제도 번역 제목과 같다. 결론에 비하면 제목이 오히려 점잖은 편이다. 길리건의 이론은 미국 공화당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 과학자로서 부담이 따를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길리건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의학은 원래 가치 판단을 하는 일이 아니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의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인간 생명이라는 가치, 혹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때”라고 말한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은 죽음을 불러오므로 그들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공화당이 집권하면 죽음의 전염병이 퍼진다’는 걸까. 길리건은 1900년부터 통계가 나온 2007년까지 미국 정부가 작성한 살인율과 자살률의 증감을 조사했다. 1900년에는 자살과 살인을 합해 10만명당 15.6명이 죽었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더니 1908~11년에는 22.6명에 이른다. 폭력치사가 10만명당 1명 늘어난다는 것은 현재 3억명에 육박하는 미국 인구 중 3000명이 더 죽는다는 뜻이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200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폭력치사 발생률이 증가할 때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 줄어들 때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집권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민주당은 20년 장기 집권에 들어갔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1960년대까지로 시야를 넓히면 민주당은 1933~68년의 36년 중 28년간 집권했다. 이 기간은 폭력치사 발생률의 가장 깊은 ‘골짜기’였다. 1969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폭력치사 발생률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공화당의 장기 집권 시기 폭력치사 발생률은 ‘전염병 수준’이었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1997년 빌 클린턴 집권 이후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세기의 폭력치사 발생률의 평균값, 중간값은 각각 19.4명과 20명인데, 폭력치사 발생률이 이보다 높으면 길리건은 ‘전염병’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장 공화당스럽지 않았던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

두 번의 예외가 있다. 공화당 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폭력치사 발생률이 떨어졌고, 민주당 출신 카터 때는 올라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사회보장, 실업수당의 규모를 키우고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매기는 등 민주당에 가까운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카터의 경제 정책은 닉슨보다도 보수적이었다. 

“공화당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의 전반적인 폭력치사 발생률 차이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 연관성은 역사적 격변(대공황, 2차 세계대전)과 개인적 차이(아이젠하워, 카터)를 압도할 만큼 강하다.” 이 시기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를 통틀면 폭력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증가분은 19.9명, 민주당 집권기는 순누적 감소분이 18.3명이었다. 오늘날의 미국 인구 수준으로 따지면 민주당 정부 때는 공화당 정부 때보다 폭력치사로 죽는 사람이 11만4600명 적다. 

공화당의 문제는 경제였다.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하다’는 통념이 있다. 길리건은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 이 통념을 반박한다. 20세기 이후 공화당 정부 집권기 실업률의 누적 증가분은 27.3%, 민주당의 누적 감소분은 26.5%다. 불황기를 따져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정부의 누적 불황기는 246개월, 민주당 정부는 86개월이었다. “공화당은 지난 한 세기 내내 실업의 규모와 지속도, 경기 위축의 빈도와 깊이와 지속도,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하나같이 높였다.” 

 검색하니 대뜸 이런 이미지부터 뜨는 닉슨(1913~1994). 올리버 스톤의 <닉슨>을 보면 좀 불쌍해지기도 함. 

길리건은 수치심의 문화에 대해 설명한다. “수치심이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한 인류 최초의 살인은 수치심 때문에 일어났다. 신이 형 카인의 예물을 받지 않은 대신, 동생 아벨이 바친 예물을 기쁘게 받자 카인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동생을 죽였다. 사람들은 수치심에서 고통스러울 때 이를 남에게 전가하려고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이 타인에게 향하면 살인으로, 자신에게 향하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실업은 수치심을 증폭시킨다. “실직처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호되게 안겨주는 경험도 드물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캐서린 뉴먼은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줄 수는 있어도… 명예를 건네주지는 못한다”며 “일을 곧 도덕성으로 보는 전통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취업자와 무직자를 가르는 선이 문화의 가장 깊은 구분선이라는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덧붙인다. 무직자는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공화당 집권→실업률 증가→수치심 증폭→폭력치사 증가’라는 연쇄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미국 국민은 왜 자신을 불평등과 폭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공화당에 표를 던질까. 로마 황제들은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분할 정복’을 사용했다. 이는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 그들 모두의 진정한 적이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미국 남부에선 흑백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을 질투하는 대신 가난한 흑인에게 우월감을 느끼며 살도록 했다. 범죄를 적극적으로 줄이지 않음으로써 서민이 가난한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 공화당은 역설적으로 ‘범죄에 대한 불관용’을 내세워 인권을 내세우는 민주당을 공격했다.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젠크스는 “투표일에 내리는 비처럼 범죄는 공화당에 유리하다”고 말한다. 길리건은 “공화당이 한다고 말하는 일(폭력 예방)과 공화당이 실제로 하는 일(범죄 유발)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한다. 

기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은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의 대결이었다.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수치와 굴욕이 악덕이고 자부심과 명예가 미덕이다.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죄가 악덕이고 순결이 미덕이다. 가령 기독교라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자부심(교만)을 가장 몹쓸 죄악으로 친다. 그래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하고,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자부심과 명예를 만끽하도록 한다. 죄의식의 윤리를 지키는 사람은 약자에게, 수치심의 윤리를 지키는 이는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서유럽 현대사에서 가장 순수하고 극단적인 수치 문화는 나치 독일이 만들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수치심을 지우는 정당한 수단이었다. 

길리건은 1977~92년 매사추세츠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수감자들 사이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수치 문화를 평등주의 문화로 바꾸려 했다. 수감자들에게 학위를 따게 유도했고, 서로를 존중하도록 권했다. 그 결과 피살자와 자살자가 획기적으로 줄었다. 길리건은 “교도소라는 살인(과 자살)의 소우주에서 벌인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을 사회 전반이라는 대우주로 확대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는 개인적·문화적·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정은 어떨까.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2010년 자살률은 10만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 세계 2위다. 한국의 자살률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보수, 중도 정부를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승했는데, 10년간의 중도 정부 기간에는 그 상승폭이 비교적 작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자살률은 연평균 1.17명 증가, 이명박 정부 3년간의 자살률은 연평균 2.13명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1년 평균 482명이 더 많이 자살했다는 뜻이다. 

길리건은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고 말한다.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듯이, 보수 정책은 폭력치사율을 높인다고 지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나는 이렇게까지 정치적 결론이 명쾌한 비정치적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이렇게까지 사회적 함의가 분명한 정신의학서를 읽은 적이 없다”고 적었다. 2012년 한국에는 두 번의 큰 선거가 있다. ‘해로운 정치인’을 골라내는 것은 독자와 유권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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