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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이영기 옮김/책읽는수요일/304쪽/1만5000원


거리의 연인이 사랑하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 114 안내원이 고객을 사랑하고, 펄펄 나는 저 꾀꼬리도 사랑한다. 온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들은 대체 사랑을 어디서 배운 걸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사방에서 반박이 쏟아질 것 같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보듯이 사랑은 ‘타고나는 것’이며,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사랑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고, 사랑의 ‘멘토’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신과 신자 사이 관계에 관한 것이라 세속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뉴욕시립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는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저서인 <올 어바웃 러브>는 양극화, 물신주의, 인종·성 차별, 폭력 등 모든 사회 문제는 ‘사랑의 부재’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훅스가 말하는 사랑이란 타고나는 것도, 빠져드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통 속에 평생에 걸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스스로 사랑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렇다.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훅스가 “너희들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정신의학자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내린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펙과 훅스의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사랑은 “실제로 행할 때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은 사랑하려는 의도와 행동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정의에 따라 우리가 사랑으로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랑에서 배제된다. 부모가 내는 딸랑이 소리에 웃으며 기뻐하는 아기는 사랑하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affection)이다. 애정은 사랑의 한 요소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애정 외에도 상대에 대한 관심, 보살핌, 존경, 신뢰,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것처럼, 연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여성 혹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죽자사자 매달리는 남성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카섹시스(cathexis)다. 카섹시스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투사하는 현상을 뜻한다.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때리는 선생과 부모는 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혹스는 특히 아이에 대한 올바른 사랑을 강조한다. 성인은 자신을 올바르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조직이 있지만, 아이들에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사랑중'


사랑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폭력과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이 승리하기 어렵다. 사랑은 무엇보다 정직과 진실에서 싹튼다. 타인의 얼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까지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권력의 반댓말이다. 상대방을 이기거나 권력을 얻기 위한 거짓말, 사소하게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얀 거짓말’조차 사랑에는 극약이다. 훅스의 ‘사랑론’은 그의 오랜 연구주제인 가부장제 비판에 맥이 닿아 있다. 가부장제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에게 강인한 그러나 허황된 ‘남성성’을 갖도록 부추긴다. 남성성이 없다면 남성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라고 겁박한다. 가부장제에 물든 남성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직한 것은 곧 나약한 것”이라는 말을 되새긴 채, 가지지 않은 남성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야 한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서 고요하게 가라앉은 당신 마음의 호수를 보라. 당신은 정말 가부장제가 원하는 그런 남성인가. 


초창기의 페미니스트들은 “마초는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인지, 어떤 남성들은 다른 방식의 남성상을 구현했다. 이들이 택한 길은 “아예 남자가 되지 않는 것, 즉 소년으로 그대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왜곡된 길이었다. 소년은 남자가 되지 않음으로서 어머니와의 끈을 잘라낼 필요가 없었고, 어머니같이 자신을 돌봐줄 여자를 찾아다녔다. 한때 ‘젊고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였던 훅스 역시 “가장이 될 생각이 없는 남자”와 연애했다. 그리고 그의 소년티를 벗기고 어른으로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남자는 훅스의 동등한 파트너가 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대신, 마초로 변태해 버렸다. 그리고 훅스가 자신을 “달콤한 말로 속여 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들기라도 한 양” 비난했다.  


사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작가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개념은 ‘인간 사고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의지, 선택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화된다는 신화가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굉장히 끌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판단이며, 또한 하나의 약속이다”라고 말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언제든 왔다가 언제든 사라진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이 완전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행 과정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연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연인에 쏟아부었던 큰 에너지가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직시하고 대비하면 둘의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지만, 열정과 낭만을 잃어버린 연인이 마주치는 것은 대개 거대한 환멸이다. 


훅스가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수행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바깥에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유창한 언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의 꼭둑각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에 대한 말과 행동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훅스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랑은 멀고 욕망은 가깝다. 신용카드 한 장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오직 좀처럼 바뀌지 않을 법한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겹게 노력할 뿐이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책이 영향받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프롬이 속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훅스는 사랑 개념을 통한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다. 훅스가 특히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소비 문명, 물신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적었다. 훅스는 시민의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었고,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크지 않던 1950년대 미국과 그 이후를 비교한다. 옛날의 미국은 인간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베트남 전쟁 시기까지 미국을 뒤덮은 민권 운동,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이 그들의 국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렸다. 그러나 종전 이후 기대는 무너졌다. 급진적인 사회운동이 사그러들고 미국이 보수화되면서 돈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는 가치관이 전파됐다. 광고는 공공연히 거짓말을 했고, 텔레비전과 영화는 기형적인 사랑에 낭만이라는 당의정을 뿌렸다. 사람대신 사물을 중시하는 사회, 탐욕을 권하는 사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멍청하거나 약한 짓이었다. 그래서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며, 돈이 아니라 영혼을 말하는 훅스의 ‘사랑’은 곧 ‘혁명’이다. 


단, 훅스의 사랑에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은 쉽게 섭취하기 힘든 ‘무언가’가 들어 있다. 스스로 종교인임을 숨기지 않는 훅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성’을 강조한다. “신성한 정신과 교감하며 살아가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서 사랑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 빛은 잃었던 생명력을 소생시켜 준다”와 같은 문장,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내부에 ‘신성한 정신’이 있다는 증거다” 같은 문장에서다. 물론 훅스는 ‘신성한 정신’이 “일상 너머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제도권 종교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절, 교회, 이슬람 사원은 물론 대자연에서의 휴식, 봉사활동, 독서, 내밀한 장소에서의 고독을 통해서도 ‘신성한 정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랑에 대한 원초적 갈망, 사랑이 가진 치유력, 그리고 ‘순수한 정신’은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다. 물질에 완전히 포획됐거나, 헌금을 내면 자판기처럼 ‘영성’을 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훅스가 권하는 사랑은 어렵고, 그것이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깨친 사람의 끝없는 노력으로 사랑이 번져간다면, 그래서 언젠가 사랑이 임계점을 넘어 두려움을 압도한다면, 마치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사랑의 혁명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벨 훅스(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