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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유란 무엇인가- 두 편의 석유영화

<7광구>를 본 뒤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화석 연료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대안적 에너지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한 오늘날, 대체 하지원은 왜 석유를 찾고, 제작진은 왜 석유 찾는 영화를 만들었나. 박정희 정권 시절 온국민을 들뜨게한 산유국의 꿈? 석유를 파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  이도 저도 아니면 <7광구>의 배경은 그저 괴물과 만나면 도망칠 곳 없는 외딴 곳에 사람들을 몰아넣기 위한 장치일 뿐인가. 아직 한국영화에서 <에이리언>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어비스>처럼 심해를 배경으로 할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의문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석유 찾는 영화 2편이 생각나 지난 한 주간 밤에 그 영화들을 봤다. 한 편은 내가 (긍정적 측면, 부정적 측면 모두에서) 영화 영재라고 생각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비 블러드>(2007). 한동안 아래의 스틸 이미지는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려 있었다.


스크린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데어 윌비 블러드>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퍼포먼스에 50% 이상 의지하는 영화다. 첫 장면부터 길고 말랐지만 단단한 체구의 루이스가 대사 한 마디 없이 힘겹게 곡괭이로 광산을 파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 루이스. 루이스의 연기는 재미있고 대단하지만, 어떤 장면은 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루이스는 딱 '최민식형' 배우다. 아무튼 이런 영화에서 이런 연기를 하면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주지 않을 방법이 없다.

루이스가 연기한 석유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는 철저히 세속적인 인물이다. 그는 죽은 인부의 장례식에 목사를 불러 기도를 청할 정도의 성의는 보이지만, 그건 신을 믿는다기보다는 기도가 장례식이라는 문화의 한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석유를 파겠다는 그의 집념은 대단한데, 그래서 다친 (의붓)아들을 내팽겨치고 석유를 파러 가기도 한다.

플레인뷰는 석유를 이용해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걸까. 그러나 플레인뷰는 개발권을 넘기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라는 거대 석유회사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한다. 플레인뷰의 목표는 석유로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석유를 파겠다는데 고정돼 있다. 플레인뷰는 사업을 위한 위한 미팅에 (의붓)아들을 항상 데려다닐 정도로 가족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가족 역시 '가족중심경영'이라는 새 사업 트렌드를 만들기 위한 장식이거나 아니면 피 안섞인 타인보다는 조금 더 믿을만한 사업 파트너일 뿐이다. 종반부 플레인뷰의 대저택은 으리으리해 보이긴 하는데, 이때 플레인뷰의 몸과 마음은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로 보인다. 매일 장식품에 총을 쏘는 것으로 소일하는 플레인뷰는 더 이상 현장에 나가지 않는다. 석유를 파지 않는 석유업자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파이프라인을 뚫겠다는 집념 하나로 '굴욕'을 견디는 플레인뷰(오른쪽). 그를 모욕하는 목사 일라이.


<데어 윌비 블러드>에서 석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석유는 석유 자체다. 검게 일렁이는 그 액체 속에 어떤 것을 투영하든 보는 사람 마음이다. 앤더슨은 158분에 이르는 이 긴 영화에서 석유를 위한 집념 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플레인뷰의 욕망 역시 욕망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는데서 매우 순수하다.

폴 다노가 연기한 제3계시교 목사는 플레인뷰의 순수하고 세속적인 욕망에 대항한 성(聖)적 가치의 대응을 보여주는데, 성은 일시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플레인뷰의 세속성에 영원히 굴복하고 만다. 미국은 그렇게 완전한 세속 국가가 되었다. 


정주영이나 이병철의 삶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이들도 플레인뷰와 마찬가지로, 3대가 누릴만한 돈을 벌었다고 해서 프랑스 남부의 호화 별장으로 은퇴해 유유자적하는 여생을 누리는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 기업인들의 욕망 역시 플레인뷰처럼 순수했을까. 그 많은 자식들에게 고이고이 사업체와 돈을 물려준 것을 보면 '불순'한 목적도 개입된 것 같다. 

<데어 윌비 블러드>는 '딱 떨어지는' 영화인데 <바람에 쓴 편지>(Written in the wind)는 딱 안 떨어지고 뭔가 남는다. 히치콕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더글러스 서크의 대표작인 이 영화도 끝없는 영감을 부른다. 사실 <데어 윌비 블러드>에는 해석의 공간에 여유가 없다. 그러나 <바람에 쓴 편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내는 이 영화의 인물 구도를 듣자마자 <발리에서 생긴 일> 같다고 했다. 부유한 남녀가 영화에선 남매, 드라마에선 남남이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러나 부잣집 망나니 남녀와 가난하지만 올곧은 남녀의 얽키고 설킨 관계 이야기는 <바람에 쓴 편지>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석유재벌 집의 망나니 남매는 그 막대한 재산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갖고 있다. 오빠 카일은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비서 노릇을 하는 미치에 비해 외모나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뒤진다는데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다. 미치가 먼저 호감을 가졌던 여성을 가로채 결혼한 그는 심지어 그토록 갈망하던 아이마저 생산하기 쉽지 않은 처지임을 알아챈다. 그는 베개 아래 총을 감춰둔 뒤에야 잠이 드든데, 총은 거세된 남근에 대한 노골적인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 여동생 메릴리는 어린 시절부터 미치를 사랑했지만, 미치는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 사랑의 부족함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메릴리는 만나는 남자마다 유혹해 잠자리로 끌어들인다. 마음에 큰 요동이 치지 않는 미치가 메릴리를 사랑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는데, 그래서 스스로 미치를 놓아준 메릴리는 결국 아버지의 유산인 석유에 대해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집착을 표한다.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멜로드라마 가장 시니컬한 엔딩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결핍을 메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음을, 그 본능은 마치 볼드모트의 영혼이 주변의 살아있는 것 중 하나인 해리 포터에게 붙은 것처럼 석유, 총, 돈 등 물신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